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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신영복

신영복의 문명론(김창진081228)

by 마리산인1324 2009. 1. 9.

 

 

 

<인드라망> 2008-12-28

http://www.indramang.org/bbs/board.php?bo_table=indramang_board&wr_id=2766

 

제국의 논리를 넘어, 새로운 문명을 향하여

 

신영복의 문명론

 
김창진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성찰적 관점으로 새로운 사회와 문명의 구성원리를 생각할 때 신영복이 말하는 세계관의전환이 바로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이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개별적 존재-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그 정치적 현실태가 '국민국가'이며, 그것의 극단적 확장 형태가 제국주의 - 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존재론'이라면,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관계론'은 무엇을 말함인가?
 
인식론으로서 신영복의 '관계론'은 사람과 사람, 사물과 자연, 문명과 문명의 관계를 고려할 때 개개 존재의 '차이'를 드러내 그 특성과 우열을 '비교'하는 방법, 그럼으로써 종국에는 그 존재들에 대한 사상적, 사회적 '차별'을 초래하는 관점을 비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그가 대신 신뢰하는 것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수많은 관계,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 강의, 28~29쪽)
 
여기에서 우리는 신영복의 '관계론'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과 맞닿아 있다는 연상을 하게 되면서, 그 유명한 제석천의 인드라망을 떠올리게 된다. 제석천 궁전의 그물코마다 박혀 있는 무수한 보석들이 서로를 되비추고 있는, '중중무진의 영상이 다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그 놀라운 세계 말이다. 실제로 그는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라고 하면서 [강의]의 말미에서 연기론을 핵심으로 하는 [화엄경]의 내용에 관해 논하고 있다. 서구 존재론의 관점이 아니라 동양의 관계론으로 세상을 볼 때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따라서 칸트의 '물 자체' 따위의 개념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연기란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으로서,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 두개를 마찰하면 연기가 일어납니다. 이 경우 연기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연기도 사라집니다. 연기는 나무와 상의상존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강의, 477~478쪽)
 
세상을 이렇게 보면 큰 것과 작은 것, 위대한 것과 소소한 것, 선진과 후진, 유명과 무명, 강자와 약자 따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너무나 도식적인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만다. 삼라만상에 홀로 잘난 것은 없으며, 모두는 서로의 씨앗이며 열매이며 거름이며, 그래서 거울인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 이다.(강의, 474쪽)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볼 때, 수많은 민족들이 엮어내는 개별 문화들의 다양성과 대등한 교류를 부정하고 하나의 '표준'만을 강요하는 세상의 흐름으로 볼 때, '관계론'이니 '연기론'이니 하는 것은 나이브(naive)하기 그지없는 한낱 감상에 불과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제국의 논리는 길섶에 핀 '한 포기 작은 민들레'를 그 자체로서 결코 존중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과 바람과 햇빛'을 낱낱이 쪼개서 더 많이 가진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만들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제국도 종말을 피하지 못했으며, 그 어떤 황제도 불로초를 찾지못했음을.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세워 올림으로써 그 위용을 과시하고, 세상의 온갖 부를 끌어모음으로써 생산자와 피압박자 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사치와 향락을 독점한다. 그러나 제국은 타자의 존재를 '정복'함으로써 종국에는 그 피정복민들의 '반란'을 예비하고, '신민들'을 지배함으로써, '공존'을 거부하고, 노예들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빼앗음으로써 스스로의 영혼이 타락하며,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공모'를 통해 시민권 밖에 사는 하인들의 '음모'를 도와준다. 역사상 화려한 왕관을 쓰고 '세계평화'- 팍스로마나 팍스브리태니카 - 를 장담했던 제국들은 그 왕관 밑에서 자신들의 무덤이 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사불란하고 영원할 것 같은 제국은 기실 모순의 집합체요, 균열의 봉합자일 뿐이다. 제국이 강요하는 '평화'는 결국 그 내부로부터 무너져갔다. 지배자들의 타락과 자신들의 궁핍이 전혀 다른 일이 아니라 밀접히 관련된 현상임을 눈치 챈 수많은 풀벌레와 민들레, 조약돌이 서로를 위협하지 않는 '자유의 최고치'로서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 '신영복 함께 읽기' 중에서(여럿이 함께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