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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손석춘칼럼] 진보세력에 대안이 없다?(한겨레090223)

by 마리산인1324 2009. 2. 24.

 

<한겨레신문> 2009-02-23 오후 06:51:1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40429.html

 

 

 

[손석춘칼럼] 진보세력에 대안이 없다?

 

»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이명박 정권, 누가 막을까? 갈수록 거침없다. 궁금하지 않은가? 대체 뭘 믿는 걸까? 언제나 자신을 두남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일까. 이미 장악했거나 길들이고 있는 방송일까. 똘똘 뭉친 부라퀴들일까.

 

그게 다는 아닐 터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명박 정권의 대안이 잘 보이지 않아서다. 수백만명이 촛불을 밝혀도 정치적 구심점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서다.

 

그렇다면 진보세력은 왜 구심점이 없을까. 동어반복이더라도 명토박아 둔다. 조각조각 갈라져서다. 한 줌이면서도 뺄셈을 즐겨서다.

 

비단 분열된 진보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들은 어떤가. 고백하거니와 진보의 위기를 말하기 민망스럽다. 언론노동운동에 몸담아 온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해서다. 그럼에도 누군가 꼭 짚을 문제이기에 쓴다.

 

진보의 위기로 흔히 대안이 없다고 개탄한다. 대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정책 대안과 정치세력 대안이다. 물론 두 대안은 별개가 아니다. 정책 대안이 없다는 게 언론이 진보세력을 홀대하며 내세우는 큰 이유다.

 

기실 진보에 대안이 없다는 말은 ‘개혁’을 자처한 세력이 집권했을 때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쇄국’으로 몰아세우던 논리였다. 그렇더라도 진보정치를 실현하려 애면글면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면 얼마든지 성찰해 볼 문제임에 틀림없다. 고통받는 민중이 진보세력에 던지는 추궁이라면 더 겸허할 일이다.

 

하지만 정교한 대안이 없다는 비판을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교수들이 일삼는 풍경은 생게망게하다. 공개적으로 진보세력을 겨냥할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더러는 그런 주장이 수구신문에 실리기도 하고 아예 그런 글을 기고도 한다.

 

그래서다. 묻고 싶다. 정책 대안을 만드는 일, 바로 진보 교수들이 할 본분 아닌가? 진보정당 활동가나 진보언론 기자보다 일차적으로 진보 교수가 할 일 아닌가? 왜 스스로 정책 대안을 연구해 제안할 생각은 않고 지청구를 되풀이하는가? 왜 교수가 자신의 현장인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기보다 대외활동에 더 분주한가? 그 결과 아닌가? 이 땅의 대학은 저 부자신문 못지않은 ‘신자유주의 본산’으로 전락하고 있다.

 

바로 그 문맥에서 진보언론도 진보정당의 한계를 지적하기 앞서 자신을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진보언론은 대안 취재와 의제 설정에 얼마나 최선을 다해 왔는가?

 

진보정당을 두둔하거나 누구를 탓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대학이나 언론사에 소속된 지식인들도 짚어보자는 뜻이다. 혹 자신이 할 일은 제대로 않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욜랑욜랑 ‘훈수’해 오진 않았던가. 더러는 되레 뺄셈과 나눗셈에 앞장서지 않았던가.

 

거듭 성찰을 제안한다. 진보정당, 진보언론, 진보학계, 모두 이 땅에선 한 줌이다. 그럼에도 뺄셈 즐기기까지 닮았다. 서로 힘 보태며 정계와 언론계, 학계의 주류를 만들어갈 섟에 흠잡거나 배제에 익숙하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자신은 물론, 진보세력 전체가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시나브로 가라앉거나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기실 구체적 정책 대안이 없다는 비판도 사실과 다르다. 게으름의 자기폭로다. 이미 여러 현장에서 대안이 곰비임비 나오고 있다. 대안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말은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남 이야기 하듯 던질 말은 아니다.

 

정책 대안을 더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가다듬고 소통하는 일, 힘을 모아야 가능하다. 덧셈으로 정책 대안을 만들고 널리 알려갈 때, 바로 그때 대안을 실현해 나갈 주체로서 정치세력의 대안도 벅벅이 형성할 수 있다. 또다른 ‘이명박’을 막을 수 있다.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