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사회

노무현을 위한 짧고도 긴 변명(최재천 090410)

by 마리산인1324 2009. 4. 11.

 

<최재천의 시사큐비즘> 2009/04/10 19:25

http://blog.ohmynews.com/cjc4u/268173

 

 

노무현을 위한 짧고도 긴 변명

 최재천

 

‘노사모’에서 ‘반노’로

저는 '노사모'입니다.
정확히 하자면, '노변모'입니다. ‘노무현을 위한 변호사 모임’에 이름을 올렸고, 노무현이 아니면 세상이 결단날 것처럼 뛰어다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지 얼마 뒤입니다. 시골 친구가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를 얘기해주었습니다. 97년 대선이 끝나고 한 달 뒤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자그마한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다음 대통령은 노무현이다”, “나는 노무현을 지지할 것이다”라며 열변을 토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탄돌이(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바람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을 빗댄 여의도판 정치용어)’가 되어 17대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몸은 법사위와 정보위에 있었지만, 외교안보와 남북문제가 제 주된 전공이었습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과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원가공개를 거부했던 노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 교육도 산업이라는 노 대통령의 교육 정책,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한반도 운명을 좌우할 문제를 조약개정이 아닌 외교부장관 간의 공동성명의 형식으로 텁석 받아버린 외교안보 정책,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당시 소극적 태도, 신자유주의 결정판 ‘한미 FTA’ 등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대연정 제안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저는 ‘반노’가 됐고, 어느 순간 ‘노까’로 평가받게 됐습니다. 열린우리당을 임종인, 이계안 의원에 이어 세 번째로 탈당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개인적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지금, 어느 정치인에 대한 서글픔

저도 설마 설마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에 대한 법률적 비난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잠시 옆으로 미뤄두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정책의 차이가 개인적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점 부정하지 못합니다. 여의도 정치 시절, 여당의원의 본분을 져버리고 정부와 청와대를 지나치게 비판한다는 이유로 당내에서 비난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라디오나 토론프로그램 출연도 자제를 부탁받곤 했습니다. 한미 FTA 때는 외교통상부로부터 직접 고발을 당해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의원회관 전화와 휴대전화 통화내역도 몇 차례 합법적으로 스크린 당하곤 했습니다. 불법적 요소가 있었는지에 대한 합법적 심사였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만, 긴 시간 동안 저 또한 정신적 외상과 공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건강이 많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만, 범민주개혁진영의 근본적 정책노선이라는 시각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민주주의, 의회주의, 견제와 균형, 공정한 시장경제, 남북화해협력, 인권신장, 동북아시아에서의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의 한국의 위상확보 등이 제 의정활동의 기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체적 입장에서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과는 많이 달랐겠지요. 따지고 보면 참 많이도 노 대통령의 정책과 충돌하곤 했습니다.

대선 패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대선당시 핵심참모들끼리의 분석회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력 내부의 견제와 균형이 없었다. 국민이 투표라는 주권으로 외적 통제를 가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내적 통제를 가하고 고쳐나갔어야만 했다.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대표하는 나라와 시민과, 좁게는 범민주개혁진영에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지금도 이 생각은 유효합니다. 신출내기 정치인을 비판하기 보다는 노 대통령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어야 했습니다. 신자유주의 보다는 공공성을 강조하는, 시장절대주의 보다는 공정한 시장경제를 강조해야 했습니다. 재벌 보다는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자들의 정책을 이끌고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행정부와 청와대의 주도에 몸을 내 맡긴 채, 그냥 ‘어~어~’하면서 따라갔던 게 현실입니다.

그랬던 분들이 이제 와서 노 대통령의 잘못을 극단적으로 비판합니다. 형사적 불법차원을 넘어, 무죄추정의 원칙도 깡그리 무시한 채, 언론의 장단에 막춤을 추며 노 대통령을 비판하고 차별합니다. 문제는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노 대통령과 구별 짓는 데만 급급 하는 ‘막가파’식 비난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었습니다. “그때 과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저도 근신하고 있습니다. 믿고 맡겨준 시민들게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총선의 낙선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느새 낙선 1주년에서 하루 지났습니다.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노 대통령을 강변하던 주변 분들이 저보다 더 강한 목소리로 봉하마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더 이상 메인스트림이 아니면 대통령을 해선 안 된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칼럼니스트 한 분이 고종석 선생님입니다. 2005년 8월 고 선생님의 글입니다.

“노대통령이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남은 임기를 채울 때, 그가 남길 유산은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파멸적일 것이다. 그의 실패는 사회,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편견을 정당화하고 강화함으로써, 앞으로는 결코 그와 같은 배경의 인물이 정치의 중심에 서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놀랍게도 그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노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단순한 개인과 가족에 대한 비난을 넘어섰습니다. 이른바 비주류, 야당, 진보개혁진영에 대한 정치적 사형선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은 씨가 다르다는 식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꿈도 꾸지 말라 입니다. 학벌, 지벌, 재벌이라는 기준으로 폐쇄적 그룹에 낄 수 없으면 아예 꿈도 꾸지 말라 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요, 공화주의에 대한 근본적 쿠데타입니다. 처음부터 씨가 다르다는 식입니다. 중세의 신분제 질서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중세 봉건사회를 시장의 간판을 달고 21세기에 재구축하자는 꼴입니다.

특히 언론과 중간권력의 반응은 두렵습니다.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요. 그야말로 막무가내입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대한 전면적 부정입니다. 잃어버린 10년을 대한민국 역사에서 완전히 도려내고, 역사의 흔적을 삭제할 듯 달려듭니다.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특정정치세력의 뭇매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미이라를 끄집어내 부관참시 하는 수준입니다. 노 대통령 개인의 인격은 물론 가족의 모든 행적과 언행, 주거형태, 차량소유현황, 교우관계, 동선, 사돈네 8촌까지도 심사 대상입니다. 인격적 비난의 대상입니다.

두렵습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제가 갖는, 5년 단임제가 갖는 생래적이고 치명적 약점은 애써 무시됩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제도화된 대통령 권력이라기보다는 제왕적 대통령제, 사적 대통령제, 일극체제형 대통령제를 가진 대한민국 현실에서 이런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관심 밖입니다. 모든 게 개인 탓입니다. 제도 탓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탓은 결코 아닙니다. 온전히 개인 탓이고, 특히 비주류 출신의 노무현 개인이라는 인격체 탓이요, 인격 탓이요, 언행 탓입니다. 질주하는 급행열차는 우리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비난을 위한 비난, 마치 마녀사냥식 비난이 횡행하는 건 아닌지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최소한의 관용조차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 말이 합법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잘못된 건 분명 잘못된 겁니다. 죄에 상응하는 책임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국민을 실망시킨 죄라는 ‘신뢰배반의 책임’은 더욱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책임을 묻는 방식은 분명 과잉이라는 안타까움이 앞을 가립니다. 마라톤 중계방송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우리사회가 조금만 차분해졌으면 싶습니다만, 쉽진 않겠지요.

두서 없는 변명입니다만, 대한민국 헌정사 중 윤보선 대통령을 제외하곤 이른바 메인스트림 출신이 있었던가요. 이승만 대통령이 그랬던가요. 박정희 대통령의 출신배경이나 가족관계는 어떠했었지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왜 육사를 갔었지요.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누구나 아는 얘기 아닌가요. 김영삼 대통령은 물론 어장을 가진 부유한 아버지를 두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메인스트림이라고 칭할 수 있었나요. 김대중 대통령은 신안의 섬소년으로 자라나 불굴의 의지로 대통령이 되신 분 아닙니까. 이명박 대통령도 그런 점에서는 이른바 같은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다고 견주어도 되겠지요.

그렇게 보면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법적 징치를 넘어, 인격에 대한 비난으로 몰아가고, 이를 눈덩이처럼 불려 마치 우리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문제로 환치시키고, 또 한편 비주류의 근본 문제이자 태생적 한계로 매도해버리는 방식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상되는 반론도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특정지역 출신에, 특정지역 대학 출신에, 특정정치인을 지지해온 정치인에 불과하고 역시나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사회의 비주류이자 소수파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논쟁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고, 공화주의 이념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논쟁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한없이 안타깝고 우울하고, 괴롭습니다. 부끄러움의 연대의식을 공유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바로 이 점입니다.

2004년 5월 노 대통령의 연세대 특강입니다.
“끊임없이 도전했고, 매 시기 승부의 연속이었습니다. … 항상 약간의 열등감을 갖고 살았던 시골아이여서 아마 성공에 대한 집착이 좀더 강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성공하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대통령이 아니라도 만족합니다. 제 성공의 비결은 인생을 걸고 확실하게 전부를 투자하라는 겁니다”

기업과 공직의 차이에 대한 구분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느냐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된 이후에 대한 준비가 약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이 정책적 실패에서 정치적 실패로 이어졌고, 현재의 위기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범민주개혁진영의 재편과 리셋도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비전과 가치입니다. 정책입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런 다음 사람을 키우고, 정치적 제도로서의 정당을 재정비하고, 다시금 시민의 지지와 염원을 담보할 수 있도록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