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7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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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인 1999년 7월 <한겨레21> 제264호의 표지는 ‘대중이 선호하는 차세대 리더십 1위 노무현’이 장식했다. 최초로 시도된 ‘정치인 이미지 조사’ 결과를 소개한 이 기사는 정치인 노무현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주목한 기사로 회자됐다. 그리고 10년 뒤 <한겨레21>은 ‘굿바이 노무현’을 표지에 올린다.
한때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이라면 분노 없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까. 2002년 대선 전날 정몽준의 지지 철회 소식을 전하는 문자메시지와 전자우편에 가득했던 분노. 한나라당과 옛 민주당이 주도한 탄핵에 서울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로 저항했던 분노. 그것은 변화·개혁·비주류·아웃사이더의 아이콘이었던 노무현을 향한 보수·기득권·주류·인사이더들의 공격에 대한 분노였다. 노무현 집권 후반기에는 분노가 정반대를 향했다. 대연정 제안(2005년 7월)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선언(2006년 2월)으로 상당수는 분노의 방향을 노무현에게 돌렸다. 얇아진 지갑과 불안해진 일자리에 떨어야 했던 이들도 분노했다. 2009년 4월, 이제 노무현은 또 한 번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덕성을 가장 앞세웠던 그가 ‘검은돈’ 때문에 검찰 수사를 받게 된 상황이다. 이 인지부조화의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개혁·진보 진영은 어디로 갈 것인가? 노무현과 깊은 애증 관계를 맺어온 이들과 정치전문가들의 글과 생각을 정리해봤다. 편집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4월7일 자신의 누리집인 ‘사람 사는 세상’에 사과문을 올렸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검은돈을 받은 것을 인정한 것이다. ‘설마…’ 했던 이들은 ‘띵’한 충격을 받았다.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보수 언론들은 검찰을 인용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박연차 회장에게 요구해 돈을 받은 것처럼 보도했다. 액수는 10억원(100만달러)+α.
검찰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의 말이다. “검찰은 돈의 상당수가 아들 노건호씨 부부와 딸 노정연씨 부부의 유학 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노건호씨 부부와 노정연씨 부부는 2004년 이후 자비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상태라 학비와 생활비로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고 한다. 검찰은 또 노건호씨의 장인 배병렬씨가 농협의 자회사인 ‘농협CA투신운용’의 감사로 임명된 배경과 정대근 전 농협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내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수의 입은 노 전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선다면…
대통령 부부는 물론 자녀들과 조카, 사돈까지 조사를 받게 되는 상황으로 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를 증명하듯, 검찰은 4월10일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연철호(36)씨를 체포했다. 박연차 회장에게서 500만달러를 받은 혐의였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선 직후 자신들의 처지를 빗대 “친노는 ‘폐족’(廢族)”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을 못하게 된 자손이란 뜻이다. 검찰의 수사 방향과 결과에 따라 노 전 대통령 일가는 ‘멸문’(滅門)에 가까운 치욕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검은돈에 전 가족이 동원된 ‘노무현 게이트’로 발전되고 있다”고 비꼬았다.
노 전 대통령도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노 전 대통령이 지난 3월 초에 ‘정치하지 말라’고 인터넷에 올렸던 글의 의미가 지금의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읽힌다. 정치라는 현실에 들어가면 누구도 권력과 돈의 유혹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설명. (검은돈을) 노무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로 치환하려 한 의도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논리로는 합리화될 수 없는 상황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듯한 충격’(박주선 최고위원)이 왔고, 그 후폭풍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이종걸 의원)는 것이 민주당 구성원들의 반응이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지금 드러난 혐의 내용만 봐도 노 전 대통령이 구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만약 검찰부터 법정까지, 그리고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노 전 대통령이 반복적으로 수의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년 지방선거도 이미 끝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 말만으로도 한나라당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홀로 헤쳐가야 하게 됐다”
급한 건 개혁·진보 진영이다. 이종걸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늘 안에 있었던 이들이 당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당 밖으로 떠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고백으로 당에 쓰나미가 밀어닥치고 있는데, 당을 그 위기에서 구할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취해달라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원장은 “노무현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 원장은 “대선 때 노무현에게 표를 줬던 모든 이들이 참여정부 시절에 입은 상처를 잊고 새 출발을 하자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한국 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절망하고 냉소하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검은돈으로 더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아예 극복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정치학)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은 이미 대선으로 끝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인 문제로 보면 정치적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기도교육감 선거 결과를 예로 들면서 “중산층이 대부분인 경기도의 중심·신도시 주민들이 ‘반이명박’ 노선을 분명하게 내세운 교육감 후보를 지지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곤(59·한신대 교수) 후보는 지난 4·10 보궐선거에서 성남·수원·일산 등 서울 주변 위성도시에서 압승을 거뒀다. 박상훈 대표도 “노무현이라는 변수의 정치적 효과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을 수 있다”며 “지금 민주당에는 친노 세력이라고 해도 현직은 몇 명 되지 않고, 노무현과의 차별성을 내세워봤자 정치적 메시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진보 세력의 내부 개혁과 지형 재구축을 촉발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김능구 이윈컴 대표(<폴리뉴스> 발행인)는 “친노 세력뿐만 아니라 이른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으로 불렸던 그룹부터 김근태 전 당의장 쪽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국민들 앞에서 석고대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참여정부를 주도한 것은 친노 세력이었지만, 개혁·진보 세력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요구에 따라 노 전 대통령과 적당히 야합했다. 개혁에 실패하고 대통령 일가의 부패도 견제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 함께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전 교수도 “국민들은 경제가 제일 중요하다며 이번 정부를 선택했지만, 많은 이들이 당연한 것으로 알아왔던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든지 후퇴 가능한 것임을 배우고 있다. 또한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보면서 경제만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자각을 하고 있다”며 “이런 부분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개혁적 세력들이 반성을 통해 변화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진보신당 당원인 진중권 교수는 당 게시판에 “과거에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의 개혁 바람에 힘입어 진보가 강화되는 효과를 볼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 없이 홀로 헤쳐가야 하게 됐다”며 “과거에 개혁 세력이 했던 몫까지 진보신당 당원들이 해내야 한다”고 적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무소속 출마 선언은 대격변을 일으키는 직접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정 전 장관은 4월10일 탈당 기자회견에서 조기에 복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내년도 지방선거를 대비해 조기에 복귀해 당권을 노리겠다는 포석이다. 이를 당내 다수파들이 쉽게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 전 장관의 탈당부터 복당까지 계속 내홍이 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 전 장관은 복당이 여의치 않으면 신당을 추구할 수도 있다. 윤석규 안산열린사회정책연구소장은 “현재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지지 기반은 친노와 386 그룹인데, 이들 가운데 친노 그룹이 무너졌다. 정세균 대표가 무리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면 당이 깨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야권에서 노무현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개편을 시도하지 않을까 싶다”며 “정동영의 탈당을 계기로 새로운 정당 창당 시도가 이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반이명박 선거 연합·창당 필요성 제기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는 <한겨레21> 기고를 통해 신당 건설을 제안했다(상자기사 참조). 민주당의 개혁적인 분파부터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그리고 재야와 시민사회단체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등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지난 대선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등장을 준비하던 그룹이기도 하다. 김능구 대표도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반이명박 전선을 중심으로 일종의 선거 연합을 꾸릴 필요가 있고, 이후 2011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정당을 세워보는 문제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개혁·진보 진영은 새롭게 틀을 만들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늘 ‘창조적 파괴’를 이야기했다. 지역구도를 깨고, 구태정치를 깬다고 했다. 정작 자신이 창조할 수 있을 때는 만들지 못했다. 이제 ‘창조적 파괴’는 노무현을 지운 새로운 세력의 몫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굿바이 노무현.’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세 가지 시선 ① 최재천
노무현은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좌파 신자유주의자’였다. “대학은 산업”이고, 공기업인 “주택공사도 사업자 원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해왔던 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모순에 가득 찬 노무현 정책의 상징이다. 그에게 가장 비판적이던 한나라당과 이른바 조·중·동으로 표현되는 보수 언론이 가장 앞장서 찬성했다. 종합부동산세제를 도입했지만 법인세는 내렸다. 서울 서초·강남·송파 등 이른바 ‘강남 3구’의 자산가치는 상승했다. 외교에서도 그렇다. “반미면 어떠냐”고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 재배치, 전략적 유연성 인정 등 한-미 간의 오랜 현안을 앞장서 해결해줬다. 한-미 동맹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국내 따로, 미국 따로’였다. 상징은 ‘자주’였으되, 내실은 ‘친미’였다.
정치에서도 그렇다. “내가 정권을 재창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기간당원제를 통해 정당을 개혁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지역정치 구도를 타파하고,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를 통해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이상이었다. 그런데 정당의 근본 목적인 정권 재창출의 필요성은 부정했다. 정책적 실패는 정치적 실패로 이어졌다. 정권 재창출은 실패했다. 정권 재창출 실패의 결과는 너무도 크다.
지금 정치권력과 검찰·언론은 노무현과 박연차의 검은돈 거래를 부각시켜, 노무현이 모든 면에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제 와서 노무현의 아들이 유학 시절에 살던 집의 화장실이 몇 개였으며, 어떤 전공의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지를 생중계한다.
그런데 지금의 과거 청산은 분명히 과잉이요, 모순으로 보인다. 근대정치의 출발인 ‘법과 도덕의 분리’는 최소한 2009년 현재 한국 사회에는 없다. 노무현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이 ‘노무현 시대’ 전체를 부정하는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 지금 와서 노무현과 선 긋기에 나서는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더 그러하다.
한 가지 더. 우리 사회의 주류들이 나서는 ‘노무현 다시 죽이기’의 배후에는 음험한 생각이 숨어 있다. 이회창의 말을 빌리면 “‘메인 스트림’(main stream)이 아니고서는 대통령 꿈도 꾸지 말라”는 식이다. 그런데 따져보자. 현대사의 많은 대통령들 중 윤보선 대통령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를 두고 ‘메인 스트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주주총회에서 5천원(주식 1주)이 1표의 권리를 갖는 자본주의와 보통선거에서 어느 누구건 1표의 권리를 갖는 민주주의를 혼동한다. 재벌의 힘, 학벌의 힘을 절대시해 우리 사회를 근대 이전의 신분제 사회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그들이 꿈꾸는 사회는 ‘봉건제 사회’의 부활이다.
“시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마련”이라는 고전적 명제가 있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도덕적 비판과 법적 처벌을 구분해야 한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과 정치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근본 가치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돼야만 한다. ‘노무현 지우기’가 아닌, ‘노무현 바로 보기’가 돼야 한다.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전 국회의원
세 가지 시선 ② 이준한
‘한국에는 이제 그런 일이 없겠지.’ 지난해 대만의 천수이볜 전 총통이 불법 정치자금으로 보이는 돈을 외국으로 빼돌린 혐의 등으로 구속될 때 나는 혼자 생각했다. 이데올로기적 분단, 경제적 발전, 민주화의 진전, 정권교체 등에서 한국과 흡사한 경로를 밟아온 대만이 아니던가. 그래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인정받는 수준이라고 봤다. 얼마 전 대만의 입법원 회의장에서 의원들끼리 신발짝을 던지고 소림사 무술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또 생각했다. ‘한국에는 이제 그런 일이 없겠지.’ 하지만 2009년 벽두 한국의 국회에서 이보다 더 흉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2009년 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 얼마나 참담하고 실망스러운 일인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전했다. 미국 프리덤하우스의 평가에 따르면, 2004년부터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 최고가 되었다. 2007년 정권교체는 얼마 전 작고한 헌팅턴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되돌이키기 불가능할 정도로 공고해진 지표로 꼽힌다. 그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 내리려면 시민적 정치문화가 정착돼야 하고, 법치주의라는 내용적 발전도 필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조사는 바로 이 부분을 검증할 리트머스시험지가 되리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가족이 박연차씨로부터 거액을 수수한 것을 인정했다. 어찌 일이 여기에서 끝나겠는가. 만약 스스로 밝힌 액수와 사용처, 그리고 돈을 받은 경로가 검찰 수사 결과 거짓으로 드러나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장기판으로 치면, 전직 대통령은 ‘차’와 ‘포’를 뗀 ‘왕’과 같다. 앞길은 불 보듯 뻔하다. 이미 한국에서 전직 대통령이 퇴임 뒤 감옥에 간 사례가 적지 않다. 임기 중에 아들이 감옥에 간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퇴행적 역사는 시민적 정치문화의 정착에 필수적인 사회적 신뢰와 존경을 한없이 무너뜨린다. 한국적 정치문화의 위기다.
이런 위기에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유일한 방법은 철저한 수사다. 검찰을 비롯한 사법부의 행보는 한국의 법치주의 수준을 밝혀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자면 싹수가 노랗다. 애초부터 검찰이 수사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오랫동안 박연차씨와 골프를 치러 다녔고, 전별금도 챙겼으며, 폭탄주도 나눴던 검찰이다. ‘88만원 세대’들이 연봉까지 낮춰가며 직장을 공유하느라 쩔쩔매는데 박연차씨에게 1억원 이상을 받은 정치인들은 구속 수사하고, 1억원 미만이면 불구속 수사하겠다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검찰이다. 한쪽 정치인들은 줄줄이 구속인데, 다른 쪽 정치인들은 1억원 미만이라고 오히려 면죄부를 얻고 있다.
날로 발전하고 있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정치인들과 사법부에 의해 오염되고 있는 형국이다. 아시아의 최고, 나아가 세계적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려면 증거에 기초한 철저한 수사가 공평하게 펼쳐져야 한다. 법치주의가 지켜져야 대통령과 사법부를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신뢰와 권위가 회복된다. 그래야 정치도 산다. 현 정부도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퇴임 뒤에 검찰의 조사를 받는 일이 없도록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박연차씨가 로비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그 시작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세 가지 시선 ③ 유종일
노무현의 몰락을 보는 내 심정은 덤덤하다. 화는 예전에 다 내버렸기 때문에 나지도 않는다. ‘대북 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SK 글로벌 분식회계 문제와 카드채 사태를 친재벌 관치 방식으로 처리할 땐 정말 난감했다. 독선과 오만, 측근 중심의 정권 운영, 연줄과 아부에 의한 인사를 보고는 기대를 접었다.
국민들은 너그러웠다. 집권 1년도 안 돼 국민 지지를 다 까먹고 재신임 도박을 벌였지만, 탄핵 바람으로 총선 승리까지 안겨주었다. 그런데 ‘김혁규 총리’ 운운하면서 ‘영남 맹주’의 미망에 집착했다. 영남 개혁 세력이 아니라 영남 ‘해바라기 세력’을 불러모았다.
이런 정권을 껴안고 가면 개혁진보 세력이 망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대충 자기 편이 권력을 가진 덕분에 오는 직·간접적인 혜택에 도취해 안일했다. 그러다가 보기 좋게 당했다. 한나라당과 정책에 별 차이도 없으니 대연정을 하자고 했다. 급기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전격적으로 추진했다.
많이들 돌아섰지만, 그래도 변호 논리들은 있었다. 검찰이나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통치 수단화하지 않음으로써 민주화에는 기여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문제는 권력기관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민주적인 기관으로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 아닌가.
도덕성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동정론도 많았다. 하지만 “검은돈 안 받았다”는 말을 국정에 실패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댄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다수의 국민들은 BBK가 어찌됐든 경제를 살린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았던가(‘삼성공화국’에서 과연 정경유착이 없었을까 하는 의심은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말한다. ‘1% 특권층’ ‘강남 부자’들을 위한 한나라당에 표를 준 국민들은 참 우매하다고. 개혁진보 세력이 이런 생각을 하는 한, 정권은 영원히 한나라당 차지다. 노무현 정부는 서민을 우선하지 않았다. 수출은 잘됐지만, 내수는 죽었다. 주가와 집값은 뛰었지만, 서민 소득과 고용은 바닥을 기었다. 양극화는 더 심화됐다. 이런 엉터리 좌파보다는 차라리 한나라당이 경제성장을 시켜주면 그 고물이라도 받아먹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국민들의 판단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국민들 처지에선 ‘파출소 피하려다 경찰서 만난 꼴’이다. 경제, 민주주의, 남북관계가 다 최악으로 가고 있다. 그래도 국민들은 민주당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반성은커녕 작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모습에 기대를 접었다. 개혁진보 세력 전체를 보더라도 아직 희망이 안 보인다. 그러나 ‘노무현의 몰락’이 희망의 싹을 틔워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환부 하나를 도려내는 셈이니까 말이다.
개혁진보 세력은 철저한 자기반성부터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권력 쟁취에 심취해서 경제 민주화를 소홀히했던 과거, 정파적 분열을 일삼고 작은 기득권에 집착했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이념과 구호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실천을 앞세우고, 순수한 마음으로 폭넓은 연대를 향해 나가야 한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당,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섬길 줄 아는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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