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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노무현

노무현,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지도자의 표준(프레시안090601)

by 마리산인1324 2009. 6. 1.

 

<프레시안> 2009-06-01 오전 10:21:20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601093840§ion=01

 

 

노무현,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지도자의 표준

[이근 칼럼] 이 문화적 지각변동을 집권세력은 읽고 있나?

 

 

 

비극의 본질

빨갛게 색칠된 세상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노랗게 물든 세상에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찬물을 끼얹었다. 노랗게 변해 버린 사람들은 공산혁명을 위해 죽창을 휘두르는 과격세력이 아니라 남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예쁜 마음을 가진 청소년, 아줌마, 직장인, 일반인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가져온 세상은 빨간 세상이 아니라 노란 세상이었고, 잔인한 무한경쟁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너무나 친절한 따뜻한 세상이었다.

발인과 함께 쏟아진 노란색 종이비행기, 시청앞과 광화문을 질서정연하게 메운 시민들, 촛불로 헌정된 추모의 메시지, 가슴 깊은 곳에서 쓰인 헤아릴 수 없는 메모와 광고들, 시민들의 자발적인 추모의 모임, 그리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안타까운 눈물들, 이러한 모든 것은 친북 좌익 반미 과격 혁명세력의 모습이 아니었다.

노무현의 죽음(전달력의 극대화를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보다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음을 양해 바랍니다)이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귤을 '슬쩍' 하는 장면. 그가 세운 정치 문화적 기준은 '한국의 표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렇게 일회적인,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무현의 죽음은 대한민국에 확실한 하나의 시각, 관점을 세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와 지도자에 대한 기준을 세웠고, 그것은 놀랍게도 문화적 현상이 되어 버렸다.

이 점이 사실 이번 비극의 핵심이다. 일상생활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문화는 어제 생겼다 오늘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신화가 되었고, 상징이 되었고, 영웅이 되었고, 그리고 그리운 얼굴이 되었다.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다 노란색과 촛불과 "상록수"와 "사랑으로"와 함께 한 젊은이들, 그리고 예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문화 속에 꽃피고 있다.

보수적인 혹자들은 걱정한다. 이 사람들이 감성에 휩쓸려 무서운 폭도로 변하고 포퓰리즘의 광풍이 불지 모른다고.

그러나 노무현의 죽음이 만들어 낸 문화는 노란 종이비행기가 날라 다니는 예쁜, 친절한 감동의 문화다. 밤을 새서 길고 긴 조문을 기다릴 수 있는 그들을, 같이 눈물을 흘리고 공권력의 폭력에 망연자실하는 그들을 광분한 폭도로 보는 것이 과연 정확한 시각일까?

국민과 시민사회를 잠재적 폭도, 붉은 사상을 가진 잠재적 체제전복 세력으로만 본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국민은 통제의 대상이 될 뿐이고,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과 발언이 전부 빨갛게만 보일 것이다.

당장 집권세력의 머리속에는 "검거"라는 단어만 생각날 것이다. 집권세력이 그러한 사고를 하고 있다면 이들은 민주주의 시대의 집권세력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이면 폭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폭군으로 변하는 것이다. 촛불은 모여서 호소하고 표현하는 힘밖에 없지만 정치인과 집권세력은 법을 바꾸고, 사람을 잡아넣고, 많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항상 통제의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국민과 촛불이 된다.

노무현으로 흥한 자 노무현으로 망하리라

이번 집권세력(한나라당, 보수언론, 보수재벌, 권위주의 세력 등)이 가진 예리한 칼은 노무현을 잘게 잘게 베었던 바로 그 칼이었다.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시작해 노무현의 죽음 직전까지 그 칼은 위력을 꽤나 발휘했다.

노무현이 세상을 빨갛게 만들었고, 엄청난 부패의 세상을 가져왔고,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렸고, 북한은 바로 내일 모레쯤 우리에게 미사일과 핵을 쏠 것으로 이야기 했다. 노무현은 이렇게 세상이 빨갛게 색칠되는 표현의 자유조차 용인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켰지만 결국 그러한 관용으로 인해 정권을 잃고 스스로가 난도질당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그런데 그들은 칼을 써도 너무 잔혹하게 써 버렸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잃어버리게 되는 법이다. 산 권력은 죽은 권력에 대해 계속 칼을 휘두르기만 하고, 산 권력이 그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보여주지를 못 했다. 계속 노무현을 욕보이면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는 전략 이외에는 전략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집권세력은 대한민국에서 주류와 강자에 도전한 자가 어떻게 칼을 맞는지를 보여 주었다. 역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주주의에 충실했던 대통령을 권위주의 독재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했다. 그런데 국민들이 서서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이제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돌연 그 칼이 날을 바꾸어 이제 자신을 베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노무현의 죽음이 집권세력 혹은 주류세력의 잔인함, 허구, 공포, 권위주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이 노란색 자유의 문화 속으로 스며들어가 꺼지지 않을 생명력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그리고 여론이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깨달음, 즉 관점과 시각의 형성은 천지를 흔드는 지각의 변동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정치표준

집권세력에게 노무현의 죽음은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우선 이제 노무현을 난도질해 지지율을 끌어 올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무현을 한국 정치에서 지워야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노무현보다 훨씬 파괴력 있는 새로운 비전과 장점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가능성은 요원하다.

앞으로 집권여당이 선거에서 계속 지게 되면(이길 수 있는 이유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선거의 패배는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정권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될 것이고 정부여당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반민주 정권으로 각인될 것이다. 결국 비주류와 약자를 억압하고 죽인 반민주 정권이라는 오명과 책임이 현 정부와 여당에 유령처럼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 노무현이 한국 정치에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무현이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문화로 착근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색깔이 노란색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친근한 사진은 계속 발굴되고 계속 떠다닐 것이다. 미국에 케네디가 있다면 한국에는 케네디와 제임스 딘을 합친 상징력을 가진 노무현이 새로 태어났다. 젊은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앞으로 계속 노무현에 열광할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한국 정치지도자의 표준(Korean Political Standard)을 만들어 냈고, 이제 그러한 표준에 대한 국민적 합의(Korean Consensus)가 생겨나는 과정이다.

노무현이라는 상징은 머지않아 아시아 민주주의의 표준이 될 것이며, 그러한 'Korean Consensus'는 이제 대중문화를 넘어 정치문화에 새로운 한류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흐름을 집권세력은 읽고 있을까?

민주주의의 후퇴를 슬퍼하는 사람들은 이제 새롭게 형성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표준과 합의를 한국의 진정한 문화 속에 어떻게 녹여 넣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거기에 맞는 비전과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특권을 포기하고, 국민과 함께하며, 국민과 아픔을 나누는 지도자의 모습에 이제 정책과 비전이라는 콘텐츠를 채워 나가야 한다.

다음 지도자는 노무현의 이미지만으로 비주류와 약자를 구원해 내질 못한다. 문제는 비전과 정책이며 그러한 비전의 세력을 결집해 내는 데 있다. 그리고 지도자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논쟁과 비판 속에서 함께 해야 한다. 그러한 논쟁과 비판 때문에 노무현이 자신을 부엉이바위에 던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다 안다.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촛불의 모임은 적자생존의 모임이 아니라 "따뜻한 자 생존"의 모임이라는 희망을.

삼가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