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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최후의 꿈 ‘진보의 재구성’ | ||||||||||||
유폐된 최후 5개월, 그는 ‘진보주의 연구’에 몰두했다. 산책할 자유도 빼앗긴 시간에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노무현이 꿈꾼 세상의 미완성 설계본은 어떤 것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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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차제에 번잡스러운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제대로 공부하자, 결심했다. 봉화를 자주 오간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단지 형님 때문에 대중과의 접촉을 끊은 게 아니다. 말의 밑천이 떨어져서다. 권력이 있을 때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말을 해도 되지만 자연인 노무현으로 돌아온 지금은 튼튼하고 정교한 담론이 있어야 대중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라고 말했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노무현의 실존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수난의 시기에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탄핵 사태 때도 그랬다. 두 달 동안 관저에 틀어박혀 독서로 울분을 달랬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단지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수준을 넘었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공동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노 전 대통령은 비공개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참모들과 함께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덧붙이고 자료를 올리고 책도 추천하면서 주제에 접근해갔다. 학자 출신 참모들이 전공별로 ‘독선생’ 노릇을 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을 지낸 성경륭(사회학),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정치학), 정책특보를 맡았던 이정우(경제학),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정치학),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김창호(철학) 등 전·현직 교수가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들에게 “같이 공부하자. 월급은 못 주고 차비는 드릴 테니 자주 오시라”고 열의를 보였다. 김창호 전 처장은 “처음에는 나와 소수의 사람이 책과 참고자료를 지원하는 수준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참여하는 분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소통 공간도 마련되고 시스템화되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학습량과 질문의 깊이는 전과 달랐다. “한 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그 주제 속으로 파고들어 애초의 줄거리에서 일탈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다지 흔치 않았던 일이었다.”(윤태영 전 대변인) 최종 수렴지는 ‘진보주의’였다. 5년 대통령 경험을 바탕으로 노무현은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기존 틀로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그리로 이끌었다. 의외였다. ‘진보주의 연구’에 매달린 까닭 임기 중 노무현은 ‘큰 그림’을 그리고 ‘가치’를 지향한 대통령이었지만 그가 지향하는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명료하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시민권력·복지국가·진보 등의 키워드로 기억될 뿐이다. 임기 말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그는 “진보를 지향한 정부”라고 규정했지만 수사처럼 들렸다. ‘유연한 진보’ ‘실용 진보’ ‘합리적 진보’라며 기존 진보와 차이를 드러내려 했지만 ‘노무현=진보주의자’라고 인정하는 좌파는 별로 없었다. 되레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 진영에서는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사이비 진보”라고 비판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참여정부의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노무현의 대표 어록이었다. 특히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그런 비아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세상과 함께한 최후의 시간까지 진보주의 연구에 천착했다니…, 왜? “책의 주제는 진보-보수 논쟁이다. 그 핵심은 국가에 관한 것이다.” 지난 2월 초 노 전 대통령은 김창호 전 처장을 만나 자신이 집필하고자 하는 책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20~23쪽 인터뷰 기사 참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노무현은 국가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난관에 처했다. 그 자신 탈권위주의와 시민권력을 주창해온 주인공. 사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도 있지만 동시에 경계하고 뛰어넘어야 할 위치에 국가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내 고민을 진보라는 틀에 담아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여기에서 노무현이 왜 기를 쓰고 조·중·동과 법정 소송을 불사하고 언론 개혁을 부르짖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시민에 의한 사회 재구조화의 전제는 합리적 토론과 논쟁이었다. 공론장이 살아야 시장의 지배, 독점 미디어의 지배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쥐어줘도 왜 휘두르지 못하냐는 비난, 또 무능한 정권, 아마추어 정권이라고 낙인찍히는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권력을 동원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수단으로 미래의 강을 넘을 수 없다”라는 것은 노무현의 확고부동한 원칙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임기 후반, 지방자치단체장이 대부분 야당으로 바뀌면서 중앙정부가 지자체를 효율적으로 관리·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행자부는 새로운 입법의 필요성을 수차례 건의했지만 그때마다 노 전 대통령은 “아니다. 시간이 걸려도 원칙대로 하자”라며 거부했다. 시민이 성장해서 감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 우선이지, 하루아침에 중앙정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니 퇴임하는 노무현의 표정이 밝았던 이유를 알겠다.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시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진정한 권력으로의 진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온 시민 노무현은 “책을 볼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라고 고통을 호소하며 지상을 떠났다. 5개월 동안 불태운 노무현의 진보주의 연구, 그 미완의 작업은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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