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LUMN/71/21338.html
낙랑군은 침략자였는가 [2007.12.14 제689호]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고 한민족을 수탈했다?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어느 나라를 봐도, 전통시대에 ‘남’에 의한 장기적 정복은 민족주의자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정복자들이 나중에 ‘우리’의 일부가 된 경우에는, 일단 정복에 대한 ‘우리의 영웅적 항쟁’과 함께 정복 이후 혼합 사회의 긍정적 이미지를 제시하면 된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교과서들이 몽골 침략에 대한 중국인의 항쟁에 대한 칭송과 함께 ‘다민족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예시한 듯한 세계제국 원나라의 ‘위대한 번영’을 찬양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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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를 깎아내리는 러시아
그런데 침략자들이 나중에도 계속 ‘남’으로 남았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민족주의자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적 대응을 한다. 첫째, ‘우리의 자존과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이 ‘우리 영토’에 언젠가 들어와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무조건 부인한다. 예컨대 12세기 러시아의 최초 사서(史書)인 <연대기>에서 9세기 중반 노브고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나중에 러시아 공국(公國)으로 발전될 부족국가를 세운 군주가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류리크 공(公)으로 서술됐다. 실제 이 이름은 고대 스칸디나비아 언어로 ‘명군’(名君)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노브고로드 부근의 9세기 유적에서 수많은 스칸디나비아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상당수 러시아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류리크에 대해 슬라브계 인물이었다고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하거나 아예 “후대에 조작됐다”며 러시아 초기 국가 형성에서의 스칸디나비아인의 역할을 전면 부정하기도 했다.
둘째, 사료상 전면 부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외국인 지배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도로 강조한다. 예컨대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칸(1205∼55)의 1236~39년 러시아 정벌의 결과로 러시아 공국(公國)들이 1480년까지 바투칸 후손의 킵차크한국(金帳汗國)이라는 몽골계 국가의 제후국을 칭해 공물을 바쳐야 했다. 13세기 후반 이후로 주로 러시아 영주들이 행했던 공물 징수는 부담이 됐지만 원나라의 유라시아 통일로 중동,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이 성행했고, 역참 제도나 호구세 징수법 등 동아시아의 선진적 통치 제도들이 바로 그때 러시아에 도입되기도 했다. 즉, 동시대의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도 그랬듯이, 러시아와 몽골의 상호 작용도 긍정 일색으로도 부정 일색으로도 이야기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국정 국사 교과서나 오늘날 러시아의 검인정 국사 교과서들은 늘 ‘몽골 침략자의 만행’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규탄과 ‘몽골 침략자에 대한 러시아인의 영웅적 투쟁’에 대한 찬사로만 일관해왔다. 러시아인이라는 개념이 그때에 없었고 러시아의 여러 공국 지배자들이 몽골인 이상으로 서로를 경쟁자로 여겨 증오했음에도 근대 민족주의가 중세사에 여과 없이 투영된다.
북유럽과 러시아, 비잔틴 그리고 중동 지역을 하나의 무역 네트워크로 묶어서 장거리 무역 중개자로서 초기 러시아의 발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바이킹의 류리크와 그 후손을 ‘토착인’으로 둔갑시키거나 무시하는, 그리고 당대 유럽에 비해 훨씬 앞섰던 원나라를 ‘후진적이며 침략적 유목민’으로 깎아내리는 러시아의 ‘애국 사학’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고조선의 멸망(기원전 108년) 이후에 한반도 북부에서 한나라에 의해 세워진 한사군(漢四郡), 특히 그중에서 313년까지 거의 400년 이상 존속해온 낙랑(樂浪)에 대해 한국 민족주의적 사학이 취해온 태도는 과연 유형적으로 러시아의 ‘애국 사학’과 많이 다른가? 낙랑에 대한 뚜렷한 역사적 기억은, 낙랑의 중심이 평양이었다고 못박은 <삼국유사>와 낙랑 주민들의 초기 신라 귀화 사실과 낙랑 출신으로 추측되는 치희(雉姬)가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재위 기원전 19년∼기원후 18년)의 후처가 됐다는 사실을 전하는 <삼국사기> 등 가장 오래된 사서에서부터 풍부하게 발견된다. 치희가 유리왕의 다른 부인과 다투었다가 달아난 뒤에 슬픔에 빠진 유리왕이 썼다는, 실제로 아마도 고구려 초기 청춘남녀들의 애정가요를 한역(漢譯)한 작품인 듯한 ‘황조가’(黃鳥歌)가 국문학 개설서에서 빠짐없이 나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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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문화의 영향권 일본까지
후대의 기억도 그렇지만 당대 한반도 전역의 주민들이 낙랑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은 1~3세기의 유적을 통해 쉽게 추적할 수 있다. 예컨대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낙랑과 거리상 가장 먼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지만 김해 가야 초기 세력의 중심지로 추측되는 김해 양동리 162호분에서 출토된 철복(鐵腹·쇠항아리) 등 철기와 청동기 등이 평양 정백동의 53호 목곽묘에서 나온 낙랑의 유물들과 모양이나 제작법, 분포상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 가야와 낙랑이 활발한 무역을 해왔다는 문헌 기록들을 고고학적으로 증빙한다. 가야 초기의 또 하나의 유명한 유적인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칠기 화장품통과 같은 매우 세련된 유물들을 봐도 평양 정백동 유물들과의 흡사성은 눈에 띈다. 규슈 등 당대 일본 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고도 볼 수 있는 낙랑문화의 영향권이 대단히 넓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근대에 접어들어 낙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돼왔는가?
한백겸(韓百謙·1552∼1615)과 안정복(安鼎福·1712∼91) 등 한반도 역사지리의 기초를 놓은 실학자 이후로는 낙랑 등 한사군이 주로 한반도 북부(한강 이북)에 위치했다는 것은 거의 통설이 됐다. 이 통설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창시자라 할 신채호(申菜浩·1880∼1936)였다. 낙랑을 “조선 역사의 일부가 아닌 일개 외래 침략 세력”으로 규정한 그는, 한사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한 한편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 계통의 유물들이 “조선인 최씨가 세운 남(南)낙랑국”이 만들었거나 고구려가 노획해 가져온 것이라고 서술했다. 정인보(鄭寅普·1893∼1950) 등 대종교와 관련성이 있었던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 이외에 동조자를 별로 얻지 못한 이 학설을 단재 선생이 초지일관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낙랑의 중심지가 평양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조선이 애당초부터 중국에 정치, 문화적으로 예속돼 있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정했던 일제 관학자들에게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보이고, 또 이와 같은 취지에서 낙랑을 고대 한반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존재를 부인했던 신채호의 의도는 단순히 일제 식민사관에의 반론 제기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토지의 역사가 아닌 혈통적 민족의 계보”라고 규정한 그로서는 “미국인이 인디언들을 자신의 선조로 인정해 제사 지낼 수 없듯이, 우리도 중국인이나 한반도 토민 등 단군 후손인 신성한 부여족이 아닌 잡다한 외인들을 우리 조상으로 인정해 우리 역사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혈통적으로 다른 한사군이 우리 땅 안에 있었을 리 없었다는 그의 논리는, “류리크 공과 그의 바이킹 가신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 해도 슬라브인이었을 것이다”라는 러시아 ‘애국 사학’의 논리와 질적으로 얼마나 달랐을까?
낙랑문화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교묘히 이용해 한반도 역사의 전체적 상을 왜곡하는 식민지 당국과의 투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신채호나 정인보 선생이 “낙랑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비역사적 주장을 제기한 것은, 그나마 시대적 상황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기는 한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가 끝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북한 학계가 낙랑군이 요동반도에 있었으며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대동강 유역의 유적이 “조선인 유민이 세운 낙랑국의 유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이를 뒷받침해야 할 최근의 평양 일대 낙랑 유적 발굴에 대한 보고서를 제대로 내지 않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한사군의 존재를 이용해 이북 영토에 대해 “역사적으로 중화 영향권에 속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를 중국에 대한 대비책이었다고 변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북한의 국수주의적 주장들이 중국 동북공정을 유발한 요인 중 하나라고 반대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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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90년대에 대폭 강경화된 북한의 “평양 일대 조선인 유민의 낙랑국” 주장은 고립된 스탈린주의 국가가 내부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정치적 조치로도 볼 수 있지만, 남한에서도 윤내현, 이덕일 등 소수 사학자의 한사군 요동반도 위치설, 평양 일대 조선인 낙랑국설이 대중매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전체 결혼의 14%가 국제결혼에 해당하는 시대에 접어들어도 한반도 땅에 수세기에 걸쳐 중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꼭 부정할 필요가 있는가?
토작민에게 압박 가할 수 없는 처지
북한과 달리 최남선(崔南善·1890~1957)과 이병도(李丙燾·1896~1989)의 계통을 이은 남한의 주류 사학계는 한사군이 주로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러시아 교과서가 몽골과의 관계를 부정적 측면 위주로 파악하듯이 남한의 국사 개설서들도 낙랑을 ‘중국인의 식민지’라는 부정적 관점에서 서술해왔다. 가장 객관적인 축에 속해 국수주의자들과 각을 세웠던 이기백(李基白·1924~2004) 선생마저도 한사군이 토착민들에게 “심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라든가 “한인(漢人)들의 주요 관심사가 경제적 이득이었다”는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오늘날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의 중심지를 “호화로운 식민도시”로 서술하고 중국 상인의 유입이 “순박했던 조선 사회에 분해 작용을 일으켜 도둑질이 생기는 등 풍속을 각박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한국사신론>, 1967). 이에 더해 더 보수적이었던 한우근(1915∼99)은 “한족(漢族)의 억압과 수탈” “낙랑의 수탈 경제”를 규탄하면서 가야 지역과의 철 무역까지도 ‘수탈 무역’으로 파악했다(<한국통사>, 1970).
낙랑 등 한사군이 한나라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다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과연 한나라의 머나먼 동북쪽 변방에 가서 정착한 소수의 한인(漢人) 관료, 상인, 장인 집단이 고구려 등 토착세력의 습격을 받으면서 주변 예맥, 옥저, 한인(韓人)들을 “억압·수탈”할 능력이라도 있었겠는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사학자들에게 낙랑의 중심지가 경성이나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와 같은 것으로 상상되기 쉬워겠지만, 근대 제국주의 국가 일본과 달리 전근대의 제국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와 같은 변방들을 체계적으로 통제·수탈할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한사군이 한 제국에서 외군(外郡)으로 분류돼 토착민들의 거수(巨帥)와 그들의 ‘공물’을 받고 비슷한 가치의 사치품 등으로 갚아주는 관(官) 무역을 해도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착민들에게 인두세를 징수하거나 노역에 징발할 수 없었다.
낙랑이 4세기 넘게 존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인수(印綏·도장), 동경(銅鏡·구리 거울) 등 정교하게 만든 위신재로 토착 지배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고급 수공업과 무역 중심으로서의 필요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니었을까? 중국 상인의 출입 때문에 조선인 사이에서 도둑질이 생겼다는 기록은 중국 사료에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인들을 통해 첨단 철기, 보습 제작법 등이 보급됐다는 점도 무시하면 안 된다.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킨 313년부터 낙랑의 중심이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427년까지 평양 지역의 중국인들을 추방하기는커녕 오히려 반(半)자치의 상태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낙랑에 대한 토착민들의 의식이 별로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낙랑은 고구려 문화 발전에도 기여
외부 세력의 정복이란 늘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비극적 과정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 교류와 인구의 혼합화가 이루어져 더 복합적인 문화로의 길이 열린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침략을 긍정할 일도 없지만 전근대에 ‘우리’ 영토 안에서 많은 ‘외부인’들이 살았다는 것을 전면 부정하거나 ‘수탈적 식민지’라고 규탄할 필요는 없다. 결국 온갖 사람들이 장기간 섞여야 위대한 문화가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낙랑의 남은 인구가 고구려에 흡수돼 고구려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도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참고 문헌
1. <요동사> 김한규, 문학과 지성사, 2004, 183∼238쪽
2. <한국 고고학 개설> 김원룡, 일지사, 1992, 119∼127쪽, 152∼167쪽
3.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푸른역사, 2002, 제3권, 24, 210∼211쪽
4. <신채호> 안병직, 한길사, 1979,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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