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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바우만-‘잉여’를 위한 자리는 없다 /고봉준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1.

<수유너머weekly> 2010-07-27

http://suyunomo.net/?p=4936

 

 

 

‘잉여’를 위한 자리는 없다

- 고봉준

1.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불확실한 것들을 제거하려는 기획 전체를 근대성으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근대는 진보와 생산의 시대로 이해되지만, 바우만이 보기에 그런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은 필연적으로 부정적 결과로서의 유동적 근대성을 생산한다. 그는 근대의 기획에 따른 엔트로피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유동적 근대성의 형상을 ‘쓰레기’라는 것으로 설명하거니와, 이것은 비단 매일처럼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투기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레오니아라는 도시가 등장하는데, 그 도시의 주민들은 “새롭고 다양한 물건들을 즐기는 것”에 열정을 쏟고 살아간다.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새 가운을 입고 최신형 냉장고에서 아직 뚜껑을 따지 않은 캔을 꺼내며 최신 모델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근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매일 아침 어제의 쓰레기들이 집 앞에 쌓이게 되며, 레오니아인들은 잔해물 자체보다는 그것을 없애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한층 끔찍해한다. 그들은 애초에 만들지 않았더라면 저 불결한 쓰레기 더미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문제는, 고정적 근대성의 세계에서는 물건들이 추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인지, 쓰레기장으로 향하기 때문에 추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새 것이 내일의 쓰레기로 변하는 곳, 그것이 근대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2.

근대는 설계와 기획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 기획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설계가 있는 곳에선 반드시 쓰레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이 쓰레기를 잉여 혹은 실업이라고 말해두자. 근대의 노동 패러다임 속에서 실업은 일시적인 비정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소비의 패러다임 속에서 실업이나 잉여는 소비능력이 부재를 가리킨다. 우리의 현실이 증명하듯이 현대의 실업은 일시적인 예외상태가 아니라 일반화되고 정상화된 예외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의 패러다임 속에서 산업예비군의 목적지는 노동현장이지만, 소비의 패러다임 속에서 실업과 잉여의 목적지는 쓰레기장이 된다. 이것이 ‘쓰레기’라는 개념을 통해 바우만이 현대의 빈곤과 추방을 설명하는 근거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행복을”, 한때 이것은 진보의 구호였다. 그러나 고용의 필요성이 줄어든 오늘날은 ‘더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동적 근대성 속에서 이 사회는 쓰레기를 방치하거나, 심지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추방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사회는 쓰레기에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 대상은 생산품이지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보지 않음으로써 보이지 않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일상의 기본적인 방어막이 무너지고 예방책이 실패했을 때만, 이러한 방어막이 보호해야 할 생활세계의 안락하고 몽환적인 폐쇄성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만 쓰레기에 대해 걱정한다.” 이제 사회에는 출입국 심사관과 품질 관리사가 필수적이고, 그들은 질서와 혼란을 나누는 선을 방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모호성에 맞서 싸우는 현대전의 정예 요원들처럼 인식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쓰레기들이 그 본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우연히 그어진 경계선에 의해 양산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푸코의 ‘타자’ 또한 주권의 영역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쓰레기들이다. 아감벤은 과거에는 이런 쓰레기들을 국가의 경계선 밖에다 투기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지구 전체가 국가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오늘날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어쩔 수 없이 포함적 배제라는 예외를 통해 국가의 ‘내부’에 버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감옥이 교정 기능보다 감금 기능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감옥의 목적은 교정이 아니기에 죄수들은 감옥을 벗어나지 않는 한 최소한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고, 국가는 잉여인간들이 감옥의 담장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제 감옥이라는 제도의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요소로 간주되는 것은 담장이지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보호관찰관의 임우 역시 형기를 마친 죄수들이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풀어놓은 영구적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다.

3.

오늘날 새로운 빅 브라더의 관심은 ‘배제’이다. 배제는 현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고전적인 빅 브라더는 출국자의 서류를 형식적으로 검사했지만, 현대의 빅 브라더는 입국자들의 여행 서류를 꼼꼼하게 검사한다. 물론, 옛날의 빅 브라더 역시 출입제한구역, 난민 캠프, 감옥 같은 주변화된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두 형제가 지금 ‘내부’와 ‘외부’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순찰하고 관리한다.

 

 

여기까지가 근대성에 대한 바우만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소비의 능력만을 과시하며 살아가는 개인과 이웃 공동체를 향해 담장만 쌓아올리고 있는 공동체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살고 있는 근대세계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바우만의 대답은 상식적이고 소박하다. 그는 우리들에게 근대적 가치가 낳은 부정적 현상들을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하여, 그는 ‘진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걸어온 자들이 ‘진보’ 안에서 또 다른 배제의 칼날을 휘두르지는 않았는가를 반성해야 하고, 동질성에 기반한 민족주의가 타민족․타문화를 적대적으로 배제하는 폭력적인 차단의 논리로 흐르지 않았는가를 반성해야 하며, 그리하여 시민사회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혼재되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개인적인 삶과 공적 과업을 일상성 속에 결합함으로써 실현된다고 주장하며, 시민적 공공영역의 확장과 순기능을 강조한다. 이러한 출구는 유동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식인과 민중이 재결합해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상식적이지만, 그렇다고 근대에 대한 바우만의 분석이 갖는 영향력이 반감되지는 않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