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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0621 20:32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483838.html

 

 

“백선엽 지리산 토벌작전때 양민 집단 동사”

 

 

6·25 61주년 앞두고‘반공 영웅화’ 논란 증폭
작전참모 지낸 고 공국진 전 준장 ‘한국전쟁사’서 증언
“아이들·부녀자들 포로수용소 갔다가 반수 이상 죽어”
“송요찬도 토끼몰이 토벌 반대”…백장군쪽 “답변 곤란

 

» 친일 행적 논란을 빚고 있는 백선엽 백야전전투사령관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30일 전북 남원시의 정보(G-2)상황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한국전쟁의 영웅인가? 독립군을 토벌하던 친일부역 군인인가?

 

6·25 발발 61돌을 앞두고 백선엽(92) 장군을 둘러싼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군 첫 4성 장군이자 참모총장을 두 번 역임한 군 원로인 백 장군을 두고 <한국방송>(KBS)이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일부에선 동상 건립에 나서지만, 이에 대해선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일방적 미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한겨레>는 백 장군이 주도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이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불러왔다는 당시 군 관계자의 증언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군사편찬위원회)가 1960년대 참전자들의 구술 증언을 채록한 자료인데, 여기서 백 장군의 작전참모 출신인 예비역 장성은 당시 작전과 관련해 회한 서린 이야기를 털어놨다.

 

■ “이 양반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며” 1964년 발족한 전사편찬위는 <한국전쟁사> 편찬을 위해 참전자 3000여명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 채록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의 일환으로 1965년 6월15일 한국지업㈜ 사장이었던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을 상대로 증언 청취가 이뤄졌다.

 

“(1군단) 작전참모로 갔습니다. 백(선엽) 장군 모시고 춘계, 1차, 2차, 3차, 4차 공세까지 겪고, 지리산으로 갔다가…. 백 대장하고 싸우고 헤어졌습니다.” 전장에서 지휘관과 작전참모는 가장 긴밀한 사이인데, 왜 헤어졌다는 것일까?

 

“지리산이 4개 도, 9개 군입니다. 9개 군 주민이 20만입니다. 이 양반(백 장군)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서 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로 오는데, 트럭에 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국내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느냐 했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싸운 것입니다.”

 

한국전쟁중이던 1951년 말 미군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사령부를 꾸리고 백선엽 당시 1군단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백장군의 이름을 따 ‘백(白)야전전투사령부’로 불린 부대다. 예하에는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과 8사단(사단장 최영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등이 배치됐다. 백 장군과 의견 대립 끝에 백야사 작전참모를 그만뒀다는 공 전 장군의 증언이 이어졌다.

 

■ “사고 많았다…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 “헤어져 가지고 (나는) 21연대로 갔어요. 결과가 무엇입니까? 엄동설한에 우리는 바-카 입고 히-타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민은 광주(포로수용소)에 갔다가 반수 이상 죽었어요. 백 장군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성과가 늦더라도 그렇게 해야지, 이 추운 때에 광주에 갖다 놓으면 그 양반들이 두고두고 한평생 원망할 것입니다. 그 후에 내 진의를 알았어요.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당시 백 장군이 채택한 작전 이름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 지리산을 포위해 토끼몰이를 하는 식으로 주민을 소개하고 먹을 것을 없애 고사시키는 방식이었다. 작전 성과는 좋았다. 51년 11월 시작된 토벌작전은 이듬해 초 사실상 완료됐다. 포로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수용된 광주포로수용소는 열악한 환경과 양민 수용으로 사회문제가 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3년 해체됐다.

 

이어지는 공 전 장군의 증언. “나도 참모로서 잘못이 있지. 참모로서 최선을 다해서 건의하면 되고, 실패를 최소한으로 국한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인데, 그 작전의 작전참모로서 못하겠다,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중략) 송요찬도 반대했습니다. 최영희도 다 반대했습니다.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텐데….”

 

■ “일방적 비난 부당하지만, 본인 침묵도 문제” 공 전 장군의 이런 증언과 관련해 백 장군의 견해를 듣고자 했으나, 백 장군을 수행하는 관계자는 “장군님이 연로해서 그런 인터뷰가 어렵다. 답변이 곤란하다”고 답했다. 증언자인 공 전 장군은 몇 해 전 작고했다.

 

증언록의 성격상 한쪽의 주장인 만큼 모든 증언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백 장군이 책임자로서 실행했던 작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백 장군은 과거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휘부의 지침과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중략) 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토벌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도 혹시라도 부하 장병의 비행으로 희생된 넋들이 있다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다.”(<실록 지리산>)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한 역사학자는 “양민학살 문제는 전쟁이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함께 봐야 하고, 백 장군보다 더 심하게 한 지휘관도 있어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본인으로서는 (양민학살 문제나) 간도특설대 등 자신의 과거와 관련해 민감한 문제에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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