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bi-pyung/jo-myeong-hee.htm
작자 : 김흥식(金興植) ???
1. 사상과 문학의 관련 방식
어떤 사상이든 그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에 속하지만, 그 통일성이란 어떤 경우에라도 형식논리적인 동일률에 의해 성립되지는 않는다. 즉 이론과 실천은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기 마련인데, 따라서 양자 사이에 개재하는 주관적·객관적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 사상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가 곤란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사상과 문학의 관련을 검토하는 작업에서는 훨씬 엄중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상이 문학에 내재화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방법적 자각의 문제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이거나 미미한 경우라면 사상과 문학의 관련성은 본질적인 수준에 닿을 수 없다. 말하자면 사상 쪽의 문학에 대한 일방적 구축이라는 양상으로 귀결되거나 양자의 관련성 자체가 피상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런 만큼 적어도 문학 또는 문학사 연구의 범위 안에서는 어느 경우든 그것에 대한 논의가 공소한 것에 머물러 버림으로써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한국 근대문학과 아나키즘의 관련을 살필 때는 특히 이러한 방법적 자각의 여부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사회의 분리, 모든 권위의 부정을 기본 전제이자 목표로 하는 아나키즘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이지만, 자립적이며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에 의한 평등사회의 실현이라는 근대적 발상으로서 18세기 계몽사상의 흐름 속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하며 그 실천적 추동력을 발휘한 사상이다. 원래 공동체적 집산주의로부터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스펙트럼을 지닌 이 사상은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북경의 단재 신채호 등 망명객들과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그 경로가 다른 만큼 민족해방운동에 역점을 두었던 전자와 계급해방운동을 지향한 후자는 그 사상적 기조에서 대조적이다.
이 두 갈래의 아나키즘 사상은 1920년대 중반경에 와서 각기 나름의 문맥에서 당시의 문단 상황 및 문학의 진로 내지 향방에 대해 비판적 쟁점을 제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단재의 신문학 비판과 소위 아나-보르 논쟁이 그것인데, 이 부근에서 비로소 아나키즘과 한국 근대문학의 관련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 두 경우 아나키즘이 단지 정치사상의 차원에 머물러 버린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상의 문학적 내재화 과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벗어난 경우를 상정한다면, 작가의 사상 체험을 묻는 방식이 유력한 선택일 것이다.
2. 근대문학과 아나키즘의 세 접점
신채호가 아나키즘과 처음으로 접촉한 시기는 1918년경 중국의 원로 아나키스트이자 북경대학 교수로 있던 李石曾 등과의 교유하면서부터로 알려지고 있는데, 1921년 무렵 상해임정 내부에 이른바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불거지면서 그것에 경사하여 [조선혁명선언](1923)의 집필 시기에는 명확한 이념적 신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선언] 혹은 그 사상적 중심축을 이루는 아나키즘에 연장된 것이 [浪客의 新年漫筆]({동아일보}, 1925. 1. 2)이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된 이 글은 마무리 부분인 7장과 8장에 신문학 비판과 결부하여 그 핵심 내용을 집약해 놓았다. 즉 [문예운동의 폐해]로 제목 붙인 7장은 3·1운동 이래 문예운동의 발달이 그것과 반비례로 다른 운동을 위축과 부진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8장에서는 [예술지상주의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에 엇던 것이 올흔가]라고 설문해 놓고서, {창조} {폐허} {백조} 동인 등의 예술주의 문학이나 이광수의 문학이 모두 '장음문자(奬淫文字)'이며, '일원이면 一家 人口의 몃칠 생활할 민중의 눈에 들어갈 수도 업는 이원 삼원의 高價되는 소설을 지어노코 민중문예라 呼號'하는 인도주의 문학―경향문학도 '민중에 관계가 업시 다만 간접의 해를 끼치는 사회의 모든 운동을 소멸하는 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문예운동의 편중에 대한 지적은 이 글과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에서 "先民·先烈들의 흘린 피로 買得한" 소위 문화정치의 조류 속에서 "문예파 청년들"만 배출되고 "애국자"와 "兵學"의 지망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버린 풍조를 성토한 것과 같은 주장이다. 그 저변에는 일제 지배 아래서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는 [조선혁명선언]의 상황판단"이 놓여 있으며, 그 논리적 귀결로서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는 필경 "강도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이기에 "우리의 敵임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는 이상 기실 신문학이 나아갈 정당한 방향의 모색이나 대안의 제시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 또한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낭객의 신년만필]은 정작 '예술주의 문예와 인도주의 문예' 양쪽을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요컨대 단재의 본의는 아나키즘의 정치적 실천 즉 민중직접혁명론에 있었을 따름이며, 아나키즘의 문학적 실천과는 아예 무연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단재의 신문학 비판은 사상과 문학의 경계선에 놓인 것이기에 사상사적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민족해방운동과 표리관계에 있는 그의 아나키즘 사상과 근대문학 사이의 접점은 다음에 살필 아나-보르 논쟁의 경우와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27, 8년경의 아나-보르 논쟁은 일단 상대가 뚜렷이 있고 또 문단 내부에서 벌어진 것이어서 단재의 경우와는 그 양상이 상당히 판이할 수밖에 없다. 즉 아나-보르 논쟁은 어디까지나 문학운동 내부에서 계급문학의 정치적 역할과 예술적 조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의견 대립이었고, 따라서 문학사 또는 비평사의 맥락에서 다루어질 과제인 것이다.
이 논쟁은 박영희의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 1927. 1)에 대해 김화산이 [계급예술의 신전개―共産派文藝理論家에 대한 一小檢討]({조선문단}, 1927. 3)로 포문을 열면서 발단되었다. 그 전말에 대해서는 여러 논자들의 검토가 있어 왔거니와, 김화산이 반론을 제기한 박영희의 평론은 1926년 후반에 있었던 김기진과의 내용·형식 논쟁에 이어진 것으로, 카프의 조직강화―소위 제1차 방향전환을 겨냥한 이론적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다다이스트를 자처하던 김화산이 돌연 아나키즘을 내걸고 덤벼들었는데, 그 동기는 일본문단의 동향과 추이에 편승한 혐의가 다분하거니와, 그 이후의 진행도 당시 일본 프로문학의 방향전환 과정과 약간의 시차를 두고 거의 유사한, 말하자면 추수적 양상을 보이고 있어 시사적이다. 일본의 아나-보르 논쟁은 대략 다음과 같은 수속을 밟은 것으로 기술된다.
일본의 아나 즉 일본 최초의 아나키즘 문학 잡지 {赤と黑}(1923. 1)의 [赤と黑運動第一宣言]({赤と黑} 제4집, 1923. 5)은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다다이즘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赤と黑}은 아나키즘이 다다이즘을 통과하고 있었음을 증명한 잡지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아나키즘의 표방과 더불어 볼세비즘에 대한 비판을 선언했다.
{赤と黑}이 볼세비즘에 대항함으로써 아나키즘을 주장한 것처럼, 사회주의운동으로서 공동전선을 펴고 있던 볼세비즘과 아나키즘은 靑野秀吉의 [自然生長と目的意識]({文藝戰線}, 1926. 9)을 계기로 하여 이론적으로 분열을 심화해 갔다. <사회주의적 의식은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은 문학의 분야에서의, 그 목적의식의 주입운동이다>([自然生長と目的意識再論]({文藝戰線}, 1927. 1)라는 靑野의 정치적 발언에 맞서서, 新居格·小野十三郞·望月百合子 등이 예술의 기능을 특정의 계급에 귀속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계급예술을 부정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靑野를 지지하는 藏原惟人과 藤森成吉 등은 아나키즘의 개인주의를 소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여 부정했다. 이 논쟁은 1926년 9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都新聞} {新潮} {文藝戰線} {文藝解放}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양자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선행하여 문예논쟁으로서는 성과없이 끝났다. 정치 우선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아나키스트 집단을 소외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나-보르 논쟁의 핵심 쟁점은 소위 목적의식을 앞세운 방향전환론에 대한 찬반문제에 결부된 것이며, 따라서 1927년 9월 1일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 공식선언을 전후로 하는 두 시기로 대별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논쟁의 단초를 열었던 아나측과 국면 전반에 걸쳐 조직적 대응력으로 공세적 우위를 보인 카프측의 충돌은 근원적으로는 자유연합주의를 지향하는 아나키즘과 중앙집권주의를 견지하는 마르크시즘 사이의 뿌리깊은 갈등에서 연출된 하나의 단면으로 볼 수도 있다. 1차 접전에서 아나측의 비판도 기실 카프측의 <프로문예=마르크스주의>라는 배타적 명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아나측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공동전선을 염두에 두었던 셈인데, 이에 대해 카프측은 '결합과 분리'라는 원칙을 앞세우는 福本主義로의 노선에 서서 방향전환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아나키즘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카프의 입장은 계급해방운동이 자연생장기에서 목적의식기로 전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는 정세 판단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었다. 아나측은 이 정세 판단에는 동조함을 밝히고도, 카프측에 의해 그것과 불가피한 표리관계로 설정된 예술의 선전도구론을 배격하고, '예술로서의 성립요건과 완성'을 끝까지 관철해야 하는 원칙으로 내세웠다. 말하자면 특수한 정세 판단에 입각한 전술적 개념인 예술의 선전도구론에 대해 아나측이 예술 일반론으로 응수한 것인데, 이는 아나측이 아나키즘의 문학적 실천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결여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방향전환을 공식화하고 조직개편을 마무리한 제2기 카프로부터 배제된 김화산, 강허봉, 이향 등은 1928년 1월 독자조직 <자유예술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文藝狂}을 발간했는데, 이를 기화로 재연된 양측의 2차 접전은 논쟁의 무게중심을 정치에서 예술로 옮겨갔다. 조직 대 조직의 대결 국면에 들어간 이상, 양측의 공동전선은 이미 물건너간 단계라고 판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나측은 카프측을 '선전비라식 사이비 예술'이라고, 그리고 카프측은 아나측을 '사이비 무산예술'이라고 서로 공박하는 형국이었다. 이를 뒤집으면 아나측은 예술지상주의자로, 카프측은 예술의 문외한인 일개 정략가로 되고 만다. 그러니까 예술의 독립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시종 왈가왈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측의 입론도 한계가 자명한 것이지만, 독자노선을 내건 아나측도 1차 접전에서와 같이 예술 일반론에서 맴도는 정도로 역시 방법적 무지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나측은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아나키즘과 근대문학의 접점을 나름대로 설정하고자 했으나, 아나키즘 특유의 문학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정치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과 예술 일반론을 막연히 병렬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논쟁의 당사자인 김화산, 이향, 그리고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권구현 등의 작품들도 꼭이 아나키즘 문학이라 하기에는 그 성격이 불투명하다.
그런데 사상과 문학의 결합이 반드시 체계적인 문학론 즉 이론의 매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특히 그 사상이 아나키즘인 경우에는 이론의 매개작용은 그다지 큰 비중이 아닐 것이다. 문학도 포함한 예술의 원동력이 창조적 개성의 자유로운 실현이라면, 아나키즘 또한 모든 강제와 권위를 부정하는 자주인(libertarian)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따라서 그 본질이 서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개인으로서의 예술가의 본질은 그의 심미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절대적 자유를 수반하며, 설사 그가 아나키즘의 이론적 기초에 대해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의 속성이 아나키즘 사상을 내포한다. 예술의 전통적인 미적 기준들이 폐기되지 않고 있는 오늘날, 이 자유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욱 명백한 것으로 된다. 아나키즘은 강압과 엄격한 외적 규제가 없어진다면 모든 사람이 그에게 잠재된 창조적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되리라는 것을 자명한 이치로 상정한다.
이론의 매개없이 사상과 문학의 결합이 가능하다면, 작가가 체험을 통해 사상을 자기화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작가의 사상 체험을 물어가는 작업, 다름아닌 작가론의 시각에서 아나키즘과 근대문학의 접점을 설정하고 그 문학적 면모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비평적 쟁점 이전에 사상 체험으로서 아나키즘과 조우한 작가들이 여럿 있는 까닭이다. 조명희도 바로 그러한 경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조명희와 흑도회·아나키즘의 관련성
근대사 분야에서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는 대단히 부진한 상태에 있다. 식민지 사회운동의 이념 가운데 하나로서 상당한 저변을 가졌던 이 사상에 대해서는 직접 당사자인 관계 인사들에 의해 {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가 편찬됨으로써 그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으나, 그 전모의 체계적·계통적 파악도 불충분하고 자료의 수집과 정리면에서도 많은 보완이 잇어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사정은 아나키즘 특유의 자유연합주의 원칙에 따른 조직활동의 분산성, 참가자들의 사상 전향 등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에서 문인들 가운데 아나키스트로는 아나-보르 논쟁의 김화산 등을 제외하고는 오직 이기영만을 거명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 아나-보르 논쟁은 카프의 목적의식론 내지 방향전환론에 대한 아나측의 이의 제기로부터 발단된 것이었고, 아나측의 논조는 대체로 양측의 공동전선을 주장하는 데에 그 역점이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가 미분화 상태였고, 그런 만큼 논쟁을 계기로 하여 양자택일이 불가피해진 시기를 전후해서는 아나키즘 계열 혹은 아나키즘 성향의 부류에 속하는 문인이 비단 이기영뿐만이 아니었을 것은 거의 틀림없다.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관동대진재(1923. 9. 1) 및 大杉榮의 학살사건(1923. 9. 16) 무렵까지는 大正期의 사상계와 문학계를 아나키즘 쪽이 크게 활기를 띠었고, 그 뒤 靑野秀吉의 목적의식론을 기치로 내걸고 아나계를 축출하여 마르크스주의가 프로문학의 주도권을 쥐는 <프로藝>의 성립(1926. 11)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文藝戰線}(1924. 6. 창간) 등을 중심으로 양측이 공동전선을 이룬 형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동대진재 무렵까지 유학 등을 통해서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를 풍미한 아나키즘과 접촉하고 그 세례를 받은 문인들 가운데 일부는 아나-보르 논쟁의 대치국면을 전후하여 그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사이한 지점에서 자기나름의 모색 속에 아나키즘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명희가 바로 그러한 사례에 해당된다는 것은 "이기영, 조명희(포석) 양군은 일찍이 흑도회의 회원으로 무정부주의에 한때 동감한 일이 있었으나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고 그 후에는 곧 우리들 진영으로 왔었다." 라는 박영희의 진술에서 확인된다.
1902년 처음 아나키즘 문헌이 소개된 이래, 노일전쟁 반대 및 조선침략 비난으로 인한 幸德秋水 등의 {평화신문} 폐간(1905), <赤旗事件>(1908), 천황 암살 기도와 관련한 <大逆事件>(1910~11) 등 혹독한 탄압기를 거치고, 소위 대정 데모크라시의 정세 속에서 大杉榮 등의 신디칼 아나키즘은 강렬한 체제부정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일본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함으로써 당시의 재일조선인사회 및 유학생들에게 깊이 파고 들어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었다. 1919년 겨울에서 1923년 3월경까지에 걸친 동경 유학생 조명희의 체재기간은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조명희의 유학시절은 [생활기록의 단편]({조선지광}, 1927. 3)을 통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동경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한동안 "학비문제, 나이 먹은 문제, 어학 문제 등으로 문학을 공부하기에는 절망이라는 생각"에 부대겼다는 것, 생활비 염출 대책을 겨우 마련하고는 하이네, 테, 타고어 등을 탐독하면서 아직 학적이 없는 채로 '보헤미앤' 생활을 했다는 것,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성립된 유학생 사회운동 단체―흑도회(黑濤會)―에 가담했다는 것, '동지에 대한 환멸'로 해서 "사회개조보다도 인심개조가 더 급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인간성의 구원을 찾는 고뇌에 파묻힌 채 귀국했다는 것 등. 이대로라면 흑도회에 참여하기 이전은 그저 문학 지망의 유민생활로 지낸 셈인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자기비하로 보인다. 이 글은 이를테면 '타고어류의 신낭만주의'에서 '?르키류의 사실주의'로 선회한 시점에서 그 경과를 소명한 변증적(Arguemental) 진술인 까닭에 과거사의 정확한 복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흑도회는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1920. 1. 15)를 모체로 하여 조직된 단체였다. 조명희는 그가 동경에 도착한 직후 발족한 이 <동우회>에 가입했을 것이다. 그가 당면했던 문제들이 고학생의 입학준비를 위한 강습회 개최, 고학생의 직업 소개와 취학 지도 등, 고학생 및 노동자의 구제기관을 표방한 <동우회>의 사업목적과 부합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는 유학생 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주최의 웅변대회(1920. 5. 4)에서 [세계의 역사를 논하야 우리의 두상에 빗친 서광을 깃버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사실도 있다. 중국의 5·4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역사 인식과 전망을 환기하는 연제를 들고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연설의 주제는 충분히 짐작된다. 잠시 뒤인 1920년 여름 그는 스스로 문학 공부의 '접장격 지도자'라고 부른 와세다 대학 영문과의 김우진과 조우했고, 이어서 <극예술협회>에 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동양대학(東洋大學) 인도철학윤리학과에 학적을 가지게 되었고(1921. 5. 12), 하기방학 기간에는 <동우회> 회관 건립 모금을 위한 귀국순회 연극공연(1921. 7. 9∼8. 18)에서 자신의 희곡 [김영일의 사]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행적들은 단순한 '보헤미앤'이라기보다 오히려 의욕적인 활동가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유학생들의 급진적 사상단체로는 최초인 흑도회의 결성일은 1921년 11월 29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동우회>의 순회공연(1921. 7. 9~8. 18) 상연작인 조명희의 희곡 [김영일의 사] 제1막 2장의 끝부분에 등장인물 '박대연'의 대사 가운데 "오늘 저녁 흑도회에 불가불 갈 일도 있네마는" 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흑도회는 정식으로 결성되기 이전에 <동우회> 내부 내지 유학생 사회에 이미 존재하던 비공식 단체였고, 그 성립 시점은 1921년 전반기 혹은 그보다 앞선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조명희는 그러한 흑도회의 존재를 어떻게 인지하고 또 거기에 가담했던 것인가. 일단 다음의 언질이 주목된다.
그러나 遊閑한 처지에 잇기는 하지만, 빈한의 고통이 업지 못한 터이오 한 이 사회 이제도에 대한 불만이 업지 못하얏다. 그러던 계제에 지금 옥에 가서 잇는 C군 P군이 그 동경유학생 틈에서는 처음으로 나아가는 사회운동 분자엿섯다. 그네들이 會를 맨드러 가지고 드는 판에 나도 그 속에 여 그 는 누구나 최초 자연발생기에 잇서서 필연인 기분시대에 지나지 못하얏스며 나도 한 막연한 기분에만 놀게 되얏섯다.
위의 인용에서 투옥중인 'C군' 'P군'은 각각 <조선공산당 준비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어(1924년 9월 중순) 3년 징역에 처해진 정재달(鄭在達), <불령사 사건>(1923년 10월)으로 무기형을 받고 복역중이던 박열(朴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명희와 흑도회 사이의 교량역을 맡았던 인물은 당시에 같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서 동경에 유학중이던 정재달을 유력하게 꼽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의 유학생들이 일반적으로 "동향관계, 또는 학교관계로 같이 자취하며 생활했다"는 점도 참고될 수 있겠는데, 나중에 조선공산당의 창설 준비를 위해 맹활약하게 되는 동향의 정재달은 원래 흑도회 회원이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양상은 이기영과 그의 소학교 동창이었던 불령사 사건(不逞社事件, 1923. 10) 및 흑기연맹 사건(1925. 5)의 당사자 홍진유(洪鎭裕)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1922년 봄 동경에 온 이기영의 흑도회 가입도 그보다 10년 먼저 도일했던 홍진유가 소개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한편 [김영일의 사]에 등장하는 주역 하나인 박대연의 성격도 음미해 볼 부분이다. 당시 유학생 사회의 계층적·분파적 대립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불우한 처지의 병약한 고학생 김영일, 그 동료인 박대연 등 정의와 진실의 인물군과 부유층 출신으로 매명주의자인 '신진회 총무' 전석원, 그에게 아부하는 추종자 장성희, 난봉꾼으로 타락한 '신진회 원로대신' 최수일 등의 위선적 인물군을 대비시킴으로써 정사의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전석원의 분실한 돈지갑을 찾아준 김영일이 위중한 노모의 소식을 연락받고 구국할 여비를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그것을 거절하는 야비하고 비정한 전석원의 응징에 앞장서는 의분의 열혈남아 박대연이 흑도회에 관계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 정황으로 미루어 조명희는 흑도회의 정식 출범시기(1921. 11. 29)의 단순 가담자라기보다 그 이전에 존재하던 비공식 단체 흑도회의 적극적인 성원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흑도회의 결성 및 분열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지고 있다. 즉 堺利彦의 코스모스 구락부 등에 출입하던 원종린은 1921년 10월경 '신인연맹'의 조직에 착수하여 동지를 규합하던 중 임용택과 제휴하여 '신인연맹(新人聯盟)'의 자매적 행동단체 '흑양회(黑洋會)'를 결성하려다가 마침 김약수, 박열, 조봉암 등이 비슷한 단체를 준비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정부주의자 岩佐作太郞의 주선으로 합동함으로써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체 속에는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각 사상조류가 합류하고 있었는데, 김약수, 박열, 원종린 등 大杉榮 등 일본 아나키스트들에 공명하는 인사들이 주축이었다. 이 흑도회는 <동우회>를 '고학생과 노동자 구호기관'에서 '계급투쟁기관'으로 전환한다는 소위 <동우회선언>({조선일보}, 1922. 2. 4)을 계기로 하여 민족주의 계열이 이탈하고, 이어서 1922년 12월 아나키즘 계열인 박열 일파의 흑로회(풍뢰회)와 마르크스주의 계열인 김약수 일파의 북성회로 분열했으며, 뒤에 흑로회는 흑우회(1923. 2)로서, 그리고 북성회는 북풍회(국내;1924. 12) 및 일월회(일본;1925. 1)로서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흑우회와 북성회의 분열은 그 이면에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공산당 창립(1922. 7. 9)을 전후하여 아나계와 보르계로 갈라서서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던 사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생활기록의 단편]에서 조명희가 말한 '동지에 대한 환멸'은 흑도회의 분열 사태가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분열 사태에 직면한 조명희의 입장과 거취는 어떤 것이었을까. 적어도 그가 북성회 쪽에 서지 않은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기영은 "1923년 2월 어느 날―조선 류학생들이 모인 집회에서 나는 포석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고 술회했는데, 이 때는 흑로회(풍뢰회)가 흑우회로 개칭한 것과 시기가 일치한다. 1922년 봄 동경에 온 이기영이 조명희와 이 때 첫 대면을 했다면, 그는 흑도회가 아닌 흑우회 당시의 회원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 조명희가 흑도회 잔류자 또는 흑우회 회원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1923년 3월경 귀국한 조명희는 {페허이후}(1924. 1)의 동인으로, {시대일보}(1924. 3. 31 창간)의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염상섭, 변영로, 오상순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한편 관동대진재(1923. 9. 1)를 겪고 귀국한 이기영은 [옵바의 비밀편지]({개벽}, 1924. 7)로 등단한 다음 1924년 8월경 비로소 조명희와 해후했는데, 그는 홍진유 등의 흑기연맹 사건(1925. 5)의 연루자로서 검거된 일이 있다. 그러니까 이 무렵에 아나계 조직과의 관련성은 이기영에 비해 조명희가 상대적으로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흑도회의 분열로 인한 조명희의 '동지에 대한 환멸'은 아나키즘 쪽과 마르크스주의 쪽 모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사회개조보다도 인심개조가 더 급하다"라는 명제는 확실히 그러한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사회개조'를 목표로 하는 이 두 사상의 각축에 대해 인간성의 문제를 결부시키는 발상법은 아나키즘 편향이 현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조명희는 귀국 이래로 상당 기간 아나키즘의 영향권 안에서 있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로의 이행 시점은 언제였던가.
조명희와 이기영에 대해 박영희는 '흑도회 회원'이었으나 '그 후에는 곧 우리 진영으로 왔었다'고 했는데, 이 진술은 이기영, 조명희가 KAPF 발족(1925. 8) 이후에 추가로 가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기진의 기억과 합치한다. 두 사람의 카프 가입을 곧 아나키즘의 청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카프는 처음 발족한 이래 1926년 말까지 '인텔리겐챠의 친목기관·사교기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확고한 지도이론도 없이 맹원 각자의 분산적 활동이 방임된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나 시도도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준기관지 {문예운동}(1926. 1, 2)의 발간을 계기로 하여 "문예운동에 글쓰는 동지로써 브르조아에 중독된 잡지에도 투고를 하게 되면 그 필자의 글은 본 잡지의 주의 상 棄稿하여 (중략) 중간파 회색파는 할 수 잇는 대로 업새기"로 한다는 방침도 나왔다. 이러한 방침과 아울러서 [계급문학시비론]({개벽}, 1925. 2) 이래로의 {조선문단} 관계자들을 일제히 공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취지는 어디까지나 아나계와 보르계를 막론하고 계급문학 진영의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러니까 조명희와 이기영이 {문예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역시 아나키즘에서 탈피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이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카프가 마침내 실질적 운동 조직체로서 이념적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앞 장에서 살핀 대로 1927년 전반기에 아나-보르 논쟁의 1차 접전을 통해 김화산 등의 아나계를 배제하게 되는 제1차 방향전환에서였다. 조명희와 이기영은 기실 아나-보르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그 이후 소위 제2기 카프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요컨대 두 사람이 아나키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명확하게 이행한 것은 제1차 방향전환 무렵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행과정에 대하여 박영희는 조명희의 경우를 지목하여 "그는 아주 천천히 맑스주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었다"고 술회하면서, [낙동강]({조선지광}, 1927. 7)이 그의 "사상적 발전을 잘 반영"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카프의 조직과 이론의 규정력보다는 작가 자신의 주체적 성찰을 통해 아나키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을 수행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상의 내재적 전환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던가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세계를 살핌으로써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4. 작품세계의 아나키즘적 양상
동경유학의 목적이 '문학공부'였음을 언급한 [생활기록의 단편]에는 도일 이전에 조명희의 독서 편력이 소일꺼리였던 신소설과 구소설, 민우보의 [哀史]'({매일신보}, 1918. 7. 28∼1919. 2. 8, 152회), 당시 신문·잡지의 창작물, 일본소설과 {文藝俱樂部} 등의 순서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애사] 즉 V.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감동에 끌려 문학에 입지하기 전에는 "문예라는 말의 의미도 글짜까지도 몰랐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우선 궁금한 점은 이광수의 [무정]({매일신보}, 1917)에 대한 고의적인 묵살 혐의. 이 글이 {문예운동}(1926. 2)의 이광수 등 {조선문단} 관계자들에 대한 공격, 김우진의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조선지광}, 1926. 5) 이후에 씌어졌다는 것에 유의할 만하다. 다음으로는 [애사]의 연재 이후에 신문·잡지라고 해야 {매일신보}, {학지광}, {기독청년}(동경;1917. 11∼19. 12) 정도가 고작인데다, 3·1운동에 연관되기도 했던 처지로 그 해 겨울 동경으로 떠나기까지는 문학에 깊이 경도하기에 기간이 너무 짧고 또 시국도 불안정했다는 점. 또 하나 수긍되지 않는 점은 {文藝俱樂部}(1895.1∼1933.1)가 그 무렵 통속화한 대중 오락지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몇가지 의문점은 앞장에서 지적한 대로 [생활기록의 단편]이 변증적 진술로서 과거 생활에 대한 자기비하을 다소 과장하고 있는 글임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같은 글의 "북경행에 실패한 뒤에 동경행을 뜻 둔지는 여러 해이다"라고 말한 부분 등도 [애사]를 읽은지 채 일년도 못되는 동안에 일본으로 '문학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것과 상충된다. 북경사관학교를 목표로 했던 1914년의 가출 즉 '북경행'과 동경유학 사이의 5년여 세월을 함께 지낸 장조카 조중흡에 의하면, 늘 독서에 파묻혔던 조명희의 책들 가운데 {早稻田文學} 강의록이 많았다고 한다. 坪內逍遙가 주간을 맡은 제1차(1891∼98) {早稻田文學}은 처음에 교외교육용 강의록 중심이었으나 차츰 문학적 색채를 보였고 <沒理想論爭>으로 유명한데, 제2차(1906∼27)에 들어서는 자연주의의 아성으로서 문단의 지도적 역할을 했던 문예지이다. {文藝俱樂部}를 서서 읽었다면, 수년간 유학을 계획하던 조명희가 강의록 중심의 초창기 {早稻田文學}만이 아니라 제2차분까지 읽었던 것으로 봄직하다. 요컨대 조명희의 문학입문은 대중없이 충동에 맡겨진 것이 아니었고, 적어도 동경에 도착한지 몇 개월 남짓해서 만난 김우진의 <극예술협회>에 들어갈 수준은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명희의 첫 발표작 [김영일의 사]는 <동우회> 순회공연을 준비하던 당시 무대감독 김우진의 요청에 의해 '단시일'에 급히 써낸 습작으로 김우진의 '칭찬'을 받고 바로 상연되었고, 귀국한 1923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1921년 중반경 조명희의 문학적 역량은 <극예술협회> 좌장 김우진의 인정을 받을 만한 수준이었던 모양으로, 일본에 건너온 초기부터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시작이었다. 그가 정작 시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귀국 후에 출판한 시집 {봄잔듸밧위에}(춘추각, 1924. 6. 15)를 통해서인데, 이 시집은 '[봄잔듸밧위에]의 部' 13편, '[蘆水哀音]의 部' 8편, '[어둠의 춤]의 部' 22편 등 총43편을 싣고 있으며, 그 창작 시기는 각각 귀국 후, 유학 초기, 그 다음부터 귀국 전까지로 밝혀져 있다. 이 3부 구성의 의의에 대한 작자 자신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주목을 요한다.
이 난호은 3부가 다 그 부부마다 사상과 시풍이 변천됨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선으로 표시한다면 초기작 [蘆水哀音]에는 투명치 못하고 거치로나마 흐르는 곡선이 일관하여 잇고, 그 다음 [어둠의 춤] 가운대에는 굴근 곡선이 긋셵다 이엿다 하며 점과 각이 거지반 일관함을 볼 수 잇스며(격한 調子로 쓴 시는 모다 엿슴), 근작시 [봄잔듸밧위에]는 긋첫던 곡선―초기와는 다른 곡선이 새로 물니여 나감을 볼 수 잇다. 시가 마음의 역사―읍시 구불거린 거문고 줄을 발바가는 영혼의 발자최인 ?닭이다.
초기작 [蘆水哀音]은 거의가 '고독'을 주제로 하여 자기연민의 감상적인 정서를 기조로 하고 있는 낭만적 시풍의 작품들이다. 앞에서 보았듯, 조명희는 유학 준비기간에 {早稻田文學} 중심의 일본 자연주의에 접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자연주의는 낭만주의와의 "내연관계 혹은 혼혈아"라는 평판도 있지만, 그가 {早稻田文學} 등을 통해 얻은 문학적 감각도 낭만주의에의 경사가 압도적이었음을 이 초기 시편들이 확인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물론 그의 심미적 성향 자체의 발로일 수도 있는데, 하이네, 괴테, 타골에 심취하여 배회하던 유학 초기의 '보헤미안' 생활과 맞물린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초기 시편들을 "흐르는 곡선"이라고 했다면, 그 다음부터 구국 전까지의 [어둠의 춤]에서 "굴근 곡선이 긋셵다 이엿다"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같은 대목에 "(격한 調子로 쓴 시는 모다 엿슴)"이라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고, '[어둠의 춤]의 부' 표지에서도 "이 부의 주류 작품이라 할 만한 힘쎈 에모쏜과 굴근 리됸으로 쓴 시편 전부를 다 엿슴을 유감으로 생각함"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둠의 춤] 부의 시편들은 [서문]에 비쳐 놓은 대로 검열을 의식하여 표현의 격렬성이 덜하거나 완화된 작품인 것이다. 시가 '마음의 역사'이며 '영혼의 발자최'라면, '흐르는 곡선'에서 '굴근 곡선'의 단속으로의 전환은 결국 '보헤미안' 생활로부터 급진적 사상단체 흑도회 회원으로의 변신에 상응하는 의식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문]에서 검열 때문에 제외한 작품이 수십편이라고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어둠의 춤] 부에 편성된 시편들과 동류로 볼 수 있다. 이 부류의 시편 분량이 유독 많은 것은 앞 장에서 조명희가 흑도회가 비공식단체이던 시기부터 그 적극적인 성원이었던 것이라는 점, 즉 동경 체재기간의 태반을 아나키즘의 자장 속에서 지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어둠의 춤] 부'에 모아 놓은 시 작품들은 아나키즘과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흑도회의 중심인물 박열은 그 결성에 관여한 일본 아나키즘의 지도자 大杉榮과 사제관계로 알려진다. 그런 만큼 大杉榮이 개인의 자유·자치에 대한 절대적 신념을 중핵으로 하는 아나르코·신디칼리즘의 혁명적 사상가로서 흑도회에 미친 영향은 충분히 짐작된다. '사회혁명과 문화혁명의 동시적 수행, 그 전일화(全一化)'를 목표로 했던 大杉榮은 전문문인은 아니었으나, {近代思想}(1912) 이래 일련의 평론을 통해 문단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로망 롤랑의 {民衆藝術論}(1917)을 번역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혁명사상에 기초한 특유의 아나키즘 문학론을 전개한 바 있다. 조명희가 말하는 '굴근 곡선'의 단속이나 '힘쎈 에모쏜과 굴근 리됸'은 바로 민중예술의 미적 자질과 속성을 규정한 大杉榮의 용어 '亂調'와 대응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의 확충 속에서 생의 지상의 미를 보는 나는 이 증오와 반항 속에서만 금일 생의 지상의 미를 본다. 征服의 사실이 그 절정에 달한 금일에 있어서는 諧調는 이제 미가 아니다. 미는 오로지 亂調에 있다. 諧調는 거짓이다. 참은 오로지 亂調에 있다.
{赤と黑} 중심의 아나키스트 시를 中野重治는 '叫喚詩派 혹은 騷音詩派'라고 비꼬았지만, 大杉榮의 '亂調'는 단순한 운율이나 성조의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복의 사실'에 대한 증오와 반항의 표현으로서 내용과의 통합관계 속에 놓이는 형식 개념인 것이다.
그러면 '정복의 사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大杉榮에 의하면, 고금을 통해서 일체의 사회에는 반드시 정복계급과 피정복계급의 양극 대립이 있어 왔다는 것, 사회의 진보에 따라 정복의 방법도 발달하고 폭력과 기만의 방법은 더더욱 교묘하게 조직되었다는 것, 정치 법률 종교 교육 도덕 군대 경찰 재판 의회 과학 철학 문예 기타 일체의 사회적 제 제도가 그러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양극 대립의 중간에 있는 제 계급 사람들은 혹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조직적 폭력과 기만의 협력자로 되고 보조자로 되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민중예술의 내용 규정은 자명해진다. 즉 그러한 '정복의 사실'에 대한 명료한 의식과 폭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증오와 반항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이를 大杉榮은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이 정복의 사실은 과거와 현재 및 장래의 수만 혹은 수천년간의 인간사회의 근본 사실이다. 이 정복의 사실이 명료하게 의식되지 않는 동안은 사회현상의 어느 것도 정상으로 이해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민감과 총명을 자랑함과 아울러 개인 권위의 지상을 부르짖는 문예의 추종자들이여. 제군의 민감과 총명이 이 정복의 사실 및 그것에 대한 반항에 대해 말하지 않는 한, 제군의 작품은 놀음이며 장난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압박해 오는 이 사실의 중대함을 잊게 만들려고 하는 체념이다. 조직적 기만의 유력한 한 분자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한통속으로 황홀하게 만드는 정적 미는 이제 우리들과는 몰교섭이다. 우리들은 엑스타시와 동시에 엔슈지에즘을 생기게 하는 동적 미를 동경하고프다. 우리들이 요구하는 문예는 그 사실에 대한 증오미와 반역미의 창조적 문예이다.
'정복의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근본 사실'이어서, 정복계급과 피정복계급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중립지대나 중간적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이 절대부정의 논리는 그 자체가 정신의 순결성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이러한 사고 유형에서는 모든 세계인식이 양극 대립의 구조로 환원된다. 삶과 현실 사이에는 불변의 모순이 가로놓여 지속된다. 그것에 대한 망각과 체념은 기만이며, 그것에 대한 증오와 반항에서 엑스타시와 엔슈지에즘―도취와 열광이 생겨나는 것이다.
조명희의 [어둠의 춤]에서 대다수 작품들이 드러내는 허무주의는 바로 그러한 증오심의 표백으로 볼 수 있다. 삶은 '연옥'([별 밑으로]), '苦役場'([혈면오음]), '영원의 모순'(영원의 애소), '鳥籠'([한숨]), '숙명의 흉한 탈'([생의 광무]), '굴종'([내 영혼의 반쪽 기행]), '凍殺地帶'([눈]), '중생의 지옥'({매육점에서]), '더러운 세상'([스찧스의 비애]) 등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러한 삶의 불모성에 맞서는 방랑([내 영혼의 반쪽 기행]), 죽음([별 밑으로], [혈면오음], [분열의 고]), 자학([스찧스의 비애]), 저주([어떤 동무], [영원의 애소]), 비애([원숭이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등은 반항심의 표백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증오나 비애와는 무관한, 오히려 그 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이들은 이른바 증오미와 반항미의 반어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아나키즘 자체의 속성과 결부된 것이도 하다. 즉 전원의 평화와 행복을 묘사한 [닭의 소리], [하야곡] 등은 아나키즘 자체가 농본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환희와 영원성을 구가한 [불사의 생명의 미소], [태양이여! 생명이여!], [생명의 수레], 그리고 동심의 예찬인 [어린 아기] 등은 일단 아나키즘에 내재한 유토피아 지향성에 닿아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생명과 동심을 노래한 작품에는 반드시 신, 우주, 모성 등 구원의 존재가 등장하며, 이 시기에 쓴 다른 작품도 포함하여 조명희의 시에는 기도체 발화법이 편재한다. 이 또한 아나키즘이 다분히 종교적 성향이라는 점과 일정한 연관을 가지지만, 조명희 자신의 종교 체험에 귀착되는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어둠의 춤] 부의 시편들과 같은 시기에 조명희는 두 편의 희곡 작품을 썼는데, [김영일의 사]와 [파사]({개벽}, 1923. 11, 12)이 그것이다. 희곡의 경우는 당연히 김우진의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김우진은 표현주의 연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고, 조명희도 회원인 <극예술연구회> 좌장으로서 무대감독을 맡았다. 이는 김우진이 표현주의 연극이 구성과 인물에 대한 의존이 크지 않은 연출자 연극(director's theatre)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모노로그]가 표현주의 희곡에서는 큰 자아·절규의 요소"라고 명언했는데, 조명희의 두 희곡은 모두 독백의 비중이 압도적이고, 그 독백의 기조도 감상성이 현저한 것이다. 이 표현주의적 독백 기법은 [김영일의 사]에서보다 [파사]에서 훨씬 세련되게 사용된다. 즉 전작에서 주인공의 김영일을 독백자로 설정한 것과 달리, [파사]에서는 방백의 도입과 아울러 "道化"('어릿광대'의 일본말)의 독백을 통해 주제를 환기하는 제시적 기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의 진전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용 수준면에서도 [파사]는 [김영일의 사]에 비해 월등하다. 앞에서 말한대로 [김영일의 사]는 김우진의 요청으로 '단시일'에 썼지만, [파사]는 "한 달 동안이라는 시간을 허비하야 가며 힘들여 쓴 것"이라 하여 작자 자신이 상당한 애착을 표시한 작품이다. 특이하게 <序篇>과 제1, 2, 3편으로 구성된 이 희곡은 폭군 주왕과 달기의 폭정과 타락으로 유명한 중국 상고시대의 설화를 소재로 활용했지만, 혁성혁명의 과정을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게 전개해 놓았다. 즉 <서편>은 삶과 현실의 영구적인 모순을 "道化"들의 대독백과 대화를 통해 암시하고, 제1편과 제2편은 이른바 '정복의 사실'을 구체적 사례로 제시한 다음, 제3편에서는 아나키즘의 민중직접행동론을 극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의 '[봄잔듸밧우에서]의 부'에 실린 귀국 후의 시편들은 [어둠의 춤]에서 지류를 형성했던 종교적 성향이 전면화된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 대표작 [봄잔듸밧위에서]는 동심과 모성·우주의 예정조화적 합일의 경지를 노래했고, 이를 그는 [생활기록의 단편]에서 '정신주의'라고 지칭했다. 이 정신주의는 그의 출신가계와 관계된 세계관의 기반에 뿌리내리져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나키즘의 자장권을 벗어났던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아나키즘의 이상 자체가, 그리고 大杉榮의 '정복의 사실'에 내재한 논리가 모든 억압과 굴레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것이며, 그러한 상태가 [봄자듸밧위에서]의 세계와 방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귀국 후의 정신주의를 불러온 이른바 '동지에 대한 환멸'이 흑도회의 분열 사태에서 비롯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내면 사정을 좀더 가량할 방도는 없을까. [R군에게]({개벽}, 1926. 2)는 그 당시의 경위를 [생활기록의 단편]과는 조금 다르게 서술하고 있어 흥미롭다.
말하자면, 이것이 동경시대의 풋정영이라고 할는지, 그러던 것이 이 기분운동에서 실제운동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같이 믿어오던 어떤 몇몇 동지들에게 환멸이 닥쳐오데. 사람들에게서 결점들이 드러나고 그들의 의지의 약함과 불순한 야심이 들여다보일 때에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네. (중략) 내 사상이 '니힐리스틱'한 경향을 띠게 된 것도 그 때부터일세. (중략) 그뿐 아니라 내 자신도 미운 생각이 나데. 나도 남과 같이 약한 데가 있고 불순한 곳이 있음을 이제서야 발견하고……(중략) 그러나 나는 속이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도 순실히 싸워 나가며 자신을 붙들어 나가려 들었네.
우선 주목할 부분은 '환멸'의 원인인 동지들의 이탈과 분열이 '기분운동에서 실제운동으로'의 전환을 계기로 일어났다는 대목이다. '실제운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大杉榮의 <민중예술론>은 "Art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즉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예술을 세 가지 조건으로 표방하면서, 그 종착지는 '실생활론'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실제생활'이며, '노동문학은 이 실제생활의 재현'임을 천명하고, 자신이 번역한 로망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빌어 "제군들은 민중예술을 의욕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 민중을 가지는 데서부터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이 자기와 민중의 일체화라는 명제의 실천이 바로 실제운동, 아나르코·신디칼리즘을 실제의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었지 않을까. 아나키즘은 본디 지식인의 지도적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며, 또한 그 자유분산적 연합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중앙집권주의와 정면으로 부딪쳐왔다. 그렇다면 이탈·분열한 세력, 이를테면 북성회의 노선을 사상적으로 용인할 수 없었기에 '의지의 약함과 불순한 야심'이라고 힐난한 것은 아니었을까.
[R군에게]와 함께 자선적 요소를 보여주는 [땅속으로](({개벽}, 1925. 1, 2)는 유학생 출신의 지식인이 극빈에 시달리는 자신의 생활고를 "온 세계 무산대중의 고통 속으로! 특히 백의인의 고통 속으로!"라고, 그리고 "시대 고통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자던 결심"이라고 의미부여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자기와 민중이 일체화'라는 명제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R군에게]에서는 이 실천과정의 제일의적 요소가 '의지'와 '순실'이라고 했다. 이 '의지'와 '순실'은 사상 이전의 인격적 가치이다. 아나키즘이 이 인격적 가치의 항성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는 반면, 마르크시즘은 그 물적 토대에 비중을 둔다. [생활기록의 단편](1927. 3)에서 이른바 '?르키류의 사실주의' 즉 "현실을 해부하고 비판하여 체험과 지식 위에 사상의 기초를 쌓자"라는 명제를 새로운 전환점으로 삼겠다는 선언은 따라서 사상의 전환점으로 가름된다.
그 뒤 조명희는 [낙동강]({조선지광}, 1927. 7)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 무대를 현지 취재해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고리키적 사실주의의 실천이었을까, 혹은 大杉榮의 이른바 민중과의 일체화 명제의 실천이었을까. 주인공 박성운은 스스로 다짐하기를 "혁명가는 생무쇠쪽 같은 시퍼런 의지의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의지'와 '순실'이라는 인격적 가치가 여전히 작가의 신념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의 합류, 혹은 아나키즘으로부터 마르크스시즘으로의 내재적 발전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현실 속에서 과학으로서의 사상과 영웅적인 심성을 한자리에 합치시키는 발상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기에 소설 [낙동강]은 서사시적 전망 속에 놓인다고 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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