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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1.12.05 20:55

http://www.hani.co.kr/arti/SERIES/338/508692.html

 

 

25살 농대생 김상진의 할복…전태일 분신 4년여만이었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1975년 4월11일 오전 서울 농대 안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서 열린 자유성토대회에서 김상진이 자결 직전 낭독했던 ‘양심선언문’을 옮겨 적은 유인물.

 

70년대 상징적 사건
사망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반강제 화장…장례식도 없이
한달 지나 긴급조치 9호 발동

 

민주진영에 새로운 각성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
추도미사·기도회 잇따라
추모집회로 유신반대 깃발

 

 

■ 전태일의 분신 이후 4년5개월

 

“더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둠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서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러운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될 것이다.”

 

1975년 4월11일 오전 11시, 수원의 서울농대 잔디밭에서는 농대생 300여명이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날의 성토대회는 일주일 전인 4일 시위 주동자로 경찰에 연행된 축산과 4학년 김명섭과 학생회장 황연수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그 봄, 전 대학가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던 학원민주화 및 반유신투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11시20분쯤 김상진이 세번째 연사로 등장했다. 신사복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그는 침착하면서도 정열적으로 노트에 쓴 자신의 양심선언을 읽어나갔다.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라는 대목을 읽을 때 그는 노트에서 눈을 떼고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명실상부하게…”라고 말했다. 그는 준비했던 칼을 품 안에서 꺼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을 때 맨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몸을 날려 김상진을 덮쳤지만, 이미 늦었다. 김상진의 왼손에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그는 20센티미터 길이의 과도로 왼쪽 하복부를 찌른 다음 온힘을 다해 위로 그어 올렸다. 집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몇몇 학생이 김상진의 손과 다리를 잡아들고 본관 쪽으로 뛰었다. 붉은 핏방울이 땅에 떨어졌다. “애…애국가를 불러줘” 그것이 김상진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라리 통곡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는 의식을 잃어갔다.

 

1975년 4월 경기도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에서 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 등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그해 3월28일 학생회 주도로 시작된 농대의 시위는 4월9일 인혁당 8명에 대한 전격 사형집행 소식으로 격화돼 4월11일 축산학과 복학생 김상진의 할복자결로 절정에 이르렀다.

 

도립병원으로 실려간 김상진은 두 차례에 걸친 수술에도 불구하고 12일 아침 8시55분쯤 서울대 의대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의 덜컹거리는 침대 위에서 영면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 군에서 제대해서 74년 2학기에 복학한 서울대 농대 축산과 4학년생이었다. 이는 전태일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분신한 지 4년5개월 만의 일이었다.

 

김상진의 양심선언과 할복자결은 70년대 민주화투쟁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민주화투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비장함이 그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앞으로 민주화의 길이 목숨을 건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을 예시한 사건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자들의 죽음의 항거가 뒤따랐고, 김상진의 죽음 뒤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신이 이어졌다. 이로부터 독재정권 치하에서 수많은 귀중한 생명이 쓰러져갔다.

 

‘거사’를 앞두고 김상진은 집에서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작성했다. 그는 “인간이 느껴야 할 기본적 양심이 무엇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의가 무엇이며, 민족이 획득해야 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우리 국민은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위대한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는 영광의 퇴진을 위한 숭고한 결단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각하의 숭고한 결단 하나로 사회의 안녕을 가져오고 학원의 평화가 유지되며, 진실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 민족에게 국민총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며, 단결된 힘으로 뭉친 안보태세의 만전이 기해지리라 믿는 바입니다”라고 썼다. 박정희의 퇴진을 정중하고도 간곡하게 호소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과 양심선언을 자신의 육성 녹음테이프로 만들어 <기독교방송> 등 방송국에 미리 보낼 만큼 치밀하게 준비했다.

 

김상진이 병원으로 실려간 다음 농대생들은 거리 진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강의실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농성은 곧 교직원들에 의해 강제해산당했고, 김상진이 숨을 거둔 직후인 12일 오전 10시에는 기숙사마저 폐쇄되었다. 김상진의 주검은 12일 밤 10시쯤 사망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박정희정권에 의해 벽제 화장터에서 반강제로 서둘러 화장됐다. 물론 장례식도 없었다. 다행히 유족들이 유골을 빼돌려 중앙청 옆 법륜사에 은밀히 보관해놓을 수 있었다.

 

‘서울의 봄’을 맞은 1980년 4월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김상진 열사 장례식’이 5주기 만에 공식적으로 열리고 있다.

 

■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기폭제

 

김상진의 자결과 그의 비장한 양심선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특히 민주진영에 새로운 각성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4월15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김상진군의 의혈에 부쳐’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하고자(김상진의 양심선언 중에서) 결행된 김군의 의거를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민주와 인권을 위한 그의 의혈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온 국민과 더불어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라고 밝혔다.

 

4월18일에는 가톨릭학생지도신부단 주관으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상진 추도미사가 열렸다. 여기서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학생들’ 이름으로 ‘조국의 앞날을 위한 제1 시국선언’이 발표되었다. “4월11일 스스로 불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같이 민주와 민족을 위해 홀연히 산화한 고 김상진 학우여! 이 자유는 진정 피 묻은 깃발로만 얻어지는 것인가? 누가 이 엄청난 아픔을 보상할 것인가? 우리는 안일과 패배의식 속에서 독재자의 환상적 자의를 위해 우리를 덧없이 바쳐야 하는가? 학우들이여! 그날 우리의 뜨거운 피로 민주와 민족의 꽃이 삼천리 강토에 가득할 그날을 위해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입각한 투쟁의 깃발을 드높이자!”

 

4월19일 윤보선 전 대통령은 4·19혁명 15돌 기념사에서 김상진 기념동상 건립을 제안하고, 신민당은 새로 제정한 4·19민주국민상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 4월22일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경찰의 삼엄한 통제 속에 명동성당 내 가톨릭문화관에서 김상진 추도식을 거행, 범국민적인 김상진 기념사업을 벌일 것을 제안하면서 “월남에서 티우의 결단이 자신과 그 국민들을 위하여 만시지탄과 실기한 그것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 땅의 안보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대통령의) 숭고한 결단이 있을 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4월24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 기도회를 열고 ‘김상진군의 죽음에 답하라’라는 성명과 ‘아아, 김상진!’이라는 조시를 발표했다. 사제단은 이 성명에서 “현 정권은 왜 그의 죽음에 답하지 못하는가? 현 정권은 왜 죽음마저 은폐하고 시신마저 도둑했는가? 현 정권은 왜 장례식과 추도식마저 폭력으로 방해했는가?” 물으면서 “만일 현 정권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한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김상진군이 죽음으로써 촉구한 숭고한 결단이 현 정권에 요구될 뿐이다. 현 정권은 고 김상진군의 죽음에 답하라. 현 정권은 고 김상진군의 피에 보답하라. 현 정권은 고 김상진군의 죽음을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아아! 김상진’이라는 조시는, 당시 ‘인혁당 조작 폭로’로 재투옥된 김지하가 김상진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옥중에서 써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75년 4월의 상황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학은 속속 문을 닫았다. 4월8일 긴급조치 7호로 정면 타격을 입은 고려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울대에서도 4월에만 43명이 제적되고 16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전국의 대학들이 거의 문을 닫는 상황에서 4월30일 남베트남 정권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를 계기로 유신정권은 전국에 걸쳐 관제 안보궐기대회를 여는 등의 굿판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런 가운데 5월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겠다’던 김상진의 뜻을 잊지 않았다. 5월22일 긴급조치 이후 최초로 유신반대투쟁의 기치를 높이 든 시위를 벌였다. 바로 서울대 학생들의 김상진 추모집회였다.

 

 

2002년 3월7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에서 열린 ‘고 김상진 열사 명예졸업증서 수여식’에서 아들을 대신해 증서를 받은 어머니 박재연(가운데)씨가 학사모를 쓴 채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함께했다.

 

■ 아직도 살아있는 양심선언

 

김상진은 49년 11월25일 서울에서 아홉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혜화초등학교와 보성중·고를 졸업하고 68년 서울대 농대 축산과에 입학한 그는 당시 농대 안에 있던 동아리 ‘한얼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철학·역사 등 다양한 독서로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안목을 키웠다. 그가 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이나 ‘양심선언’에는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은 명문이었다. 그는 부모에게는 어릴 적부터 한번도 애먹인 적 없는 착한 아들이었고 후배들에게는 부드럽고 포용력이 넓은 복학생 선배였다.

 

김상진은 4월8일 유신정부가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해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교정에 군대를 진주시킨 데 이어 9일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전격 처형한 사실을 알고 분노하고 고뇌했다. 그날 오후 단식투쟁에 관한 논의를 위해 열린 한얼회의 비상총회에서 누군가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을 때, 무겁고 긴 침묵이 이어지자 김상진이 “내가 하겠다. 내가 정면도전을 하겠다. 이제 더이상의 희생은 안 돼.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도 내가 현 정권에 정면도전을 하겠다”고 했다. 누군가가 “정면도전을 하겠다는 말, 그게 무슨 의미죠?”라고 묻자, 그는 “내가 죽겠다는 얘기야”라고 짧게 대답했다.

 

2002년 3월7일 오전 11시30분 수원에 있는, 이제는 이름도 바뀐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본관 교수회의실에서는 10여명이 모여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할머니가 가장 눈에 띄었다. 단정한 한복차림의 할머니는 바로 김상진의 어머니(박재연)였다. 그 옆에는 큰형과 작은형, 김상진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이윽고 류관희 학장의 간단한 인사말에 이어 김상진의 명예졸업장(총장 이기준)이 어머니에게 전달됐다. 어머니의 머리에 학사모가 씌워지고 그 눈가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28년 만의 일이었다. ‘자신을 희생한 공로’를 인정받기에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정에는 ‘사랑하는 조국의 민주를 위하여’라고 쓰인 김상진 추모비가 세워졌다.

 

앞서 2001년 5월21일 김상진이 의거한 장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념표석도 자리했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그의 양심선언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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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선언문>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힌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의 반응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 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 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될 것이다.

 

1975. 4. 11

서울농대 축산과 4년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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