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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불멸의 드라마’로 남을 수 있을까 /경향20140809

by 마리산인1324 2014. 8. 10.

<경향신문> 2014-08-09 15:35:4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8091535461&code=960100

 

 

‘불멸의 드라마’로 남을 수 있을까

 

류숭렬  드라마작가

 

1939년에 개봉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당대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놀랄 만한 블록버스터였다. 1959년에 개봉된 <벤허> 역시 시대를 흔든 대작이었다. 이후 1962년도에 개봉된 <007 살인면허>는 블록버스터 첩보영화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하며 뒤이은 오랜 전설의 시발점이 되었고, 1975년에 개봉된 <죠스>는 사상 최초로 1억2900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거둬들이며 드디어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앞서의 블록버스터는 말하자면 소급된 표현일 뿐이다) 단지 규모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이 영화들은 당대 영상기술, 촬영기법의 최첨단을 보여주며 영화사의 새 장을 열어주었다.

새로운 역사가 기대되는 흥행의 기세

한 시절 빛나도록 찬란했던 영상들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촌스럽고 왜소할 뿐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한계를 뛰어넘어 숨 막히도록 광대한 우주의 모습을 실사처럼 구현해낸 <그래비티>가 만들어지고, 2차원의 종이 위에서 뛰놀던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이 3D의 영상으로 활개 치는 지금, 20세기의 고전들이 초라해 보이는 건 이상할 일도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쉬리>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대규모 자본의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 왔다. 그 끝에 선 것이 올 여름 개봉한 블록버스터 전쟁사극 <명량>이다. ‘이순신’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한국인들에게 주는 거대한 무게도 무게거니와 세계 해전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 중 하나인 명량해전을 다룬다는 사실 때문인지 <명량>은 개봉되기 훨씬 전부터 영화팬들을 설레게 했다. 영화는 기대만큼 큰 화제를 일으키며 거칠 것 없는 흥행질주를 하고 있다. 1000만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고 그 이상의 새로운 흥행역사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막상 모습을 드러낸 영화는 흥행의 기세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인 이순신(역사적 인물이 아닌 캐릭터로서의)은 우리가 익히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성웅’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의 비장함과 외로움은 여전히 관객을 먹먹하게 만들지만 영화는 안일하게도 딱 그 지점에서 멈추고 만다.

영화가 가진 ‘상상할 수 있는 자유’는 박제된 문자기록 속의 영웅을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되살릴 수 있다. 비록 위험은 따를지라도…. 하지만 <명량>은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배신자 배설은 또 어떤가? 그리 길지 않은 물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배설은 꽤나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캐릭터였다. 허나 그는 영화 내내 쓰레기로 일관하다 쓰레기처럼 최후를 맞고 만다.

구루지마로 대표된 적들은 좀 더 심각하다. 그들은 강력하다 못해 잔뜩 치장한 무도회의 숙녀들처럼 화려하게 메이크업되었다. ‘안티고니스트는 강력해야 한다’는 영화작법의 오래된 경구를 극히 1차원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리라.

영화 <명량>의 한 장면.

 

가족들이 함께 보기에 무난하고 친절

애당초 이 영화가 표방하던 캐치프레이즈는 ‘숨 막히는 61분의 해상전투’였다. 하지만 영화가 자랑한 해상전투 시퀀스는 둔탁했고, 심하게 말하자면 퇴행적이었다. <브레이브 하트>와 <라이언일병 구하기> 이후 영화의 전투신에는 ‘다찌마리’나 ‘짠짠바라’의 낭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졌다. 사조는 더럽고 잔인하며 끔찍해졌는데, 이런 경향은 명백히 영화적 진보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극사실주의 경향은 <명량>을 비켜간 듯 보인다. 그것이 폭넓은 관객층을 고려한 감독의 치밀한 계산인지, 개인적 취향인지는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61분의 숨막히는 해상전투’는 관객을 압도하지 못한 채, 그저 무난하게 끝나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바위에 위태롭게 서서 구상하던 작전은 영상에 효과적으로 구현되지 못했고, 그나마 관객은 시퀀스 중간 중간에 삽입된 ‘김노인’과 ‘이회’의 친절한 해설 덕분에 전투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친절한 해설>은 매우 효율적인 기법일 수 있다. 허나 해설이 해설로 느껴지는 순간, 극적 우아함은 치명적으로 훼손되고 만다.

이러저러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명량>은 흥행의 신기록을 쓰게 될 것이다. 콘텐츠계의 창조경제 선봉장인 CJ가 무섭게 몰아붙이는 데야 그러지 않기도 힘든 형국이다. 하지만 CJ의 배급력만이 이 영화의 성공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이유는 분명 아닐 것이다.

<명량>은 가족들이 함께 보기에 무난하고 친절하다. 게다가 무심한 듯 영화 안팎에 드리운 기획의 힘은 막강하다. 그러나 그것은 프로듀서에 대한 찬사가 될 순 있어도 감독에 대한 찬사가 될 수는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벤허> <죠스> 같은 영화들은 비록 블록버스터로서의 광휘(光輝)를 잃었을지 모르나 여전히 위대하다. 그 영화들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빛바랠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만들어낸 불멸의 ‘드라마’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저 촬영기법이 아닌 감독의 천재(天才)가 창출해낸 서스펜스와 압도적인 콘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먼 훗날, 영화 <명량>의 규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드라마로 이 영화를 기억하게 될까. 어떤 장면으로 이 영화를 회자하게 될까.

‘먼 훗날’까지 갈 것도 없겠다. 영화를 본 지 불과 이틀이 지난 필자의 머릿속엔 떠오르는 대사도, 드라마도, 장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