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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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11월03일 제633호
‘사문난적’ 이 될지라도…
▣ 이덕일 역사평론가
양란(兩亂·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 계급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 1653년 윤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서인 학자들이 모였던 죽림서원.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
서인 영수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을 걸었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이들에 의해 예학(禮學)으로 바뀌게 된다. 예란 본질적으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의무에 지나지 않는데 행동 규범에 불과한 예(禮)가 성리학의 주류가 된 것이다. 성리학은 이제 노골적으로 지배층의 계급이익에 복무하는 학문이 되었다.
정통 성리학과 거리가 먼 가계
백호(白湖) 윤휴(尹?)로 대표되는 일단의 사대부들은 이런 경향에 반대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효종실록> 사관(史官)의 윤휴에 대한 평은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윤휴는 소싯적부터 글을 읽어 이름이 있었는데, 논변(論辨)이 있을 때면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대부분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으나 재주가 조금 있어 늘 경륜(經綸)의 소유자로 자임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우려하였다.”(<효종실록> 9년 12월13일)
윤휴에 대해 우려하는 ‘식자’란 정통 성리학자들을 뜻하는 것이다. 윤휴의 학문 대부분이 주자학의 주창자인 남송(南宋)의 정이(程이?) 형제·주희(朱熹)의 견해와 배치됨에도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다’는 것은 주자학에서 탈피하려는 사대부들이 있었음을 뜻한다. 백호 윤휴는 왜 주희와 배치되는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의 가계와 학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휴는 광해군 10년(1617) 윤효전(尹孝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해군 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북인으로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 윤휴의 외조부 김덕민(金德敏)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친구 성운(成運)의 제자였다. 성운은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보았던 노장(老莊)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윤휴는 양명학을 소개한 이수광(李?光)의 차자(次子·둘째아들) 이민구(李敏求)에게도 사사했다. 부친과 외조부, 이민구는 모두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학문을 배운 윤휴는 주희를 금과옥조로 떠받들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했기 때문에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윤선거(尹宣擧)는 윤휴를 이렇게 평했다.
“윤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데 고인(古人)에 집착하지 않고, 독서(讀書)·강의에서 주설(註說)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실로 사람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는 데는 속유(俗儒)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여 깊이 사귀었다.”(‘윤선거 연보’)
윤휴와 숙명적 라이벌이 되는 송시열도 한때는, “백호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前人)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낸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윤휴가 <중용>(中庸)·<대학>(大學) 등의 경전(經傳)을 주희와는 달리 해석하면서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된다.
여러 차례 벼슬을 거부하다
윤휴의 일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20살(1636) 때 겪었던 병자호란이었다. <백호전서> 부록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고 북벌을 단행하자는 다짐이었다.
△ 백호 윤휴(왼쪽)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강화하려는 송시열(오른쪽)과 맞섰다. 그에게 주자학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었다. |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문명이 높아가자 효종 6년(1655)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 자의(咨議)에 제수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스스로 포의(布衣)라 일컫고는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의 명성이 더욱 크게 떨치어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모두 윤포의(尹布衣)로 일컬으면서 그 얼굴을 서로 알기를 원하였다”(<숙종실록> 3권 1년 4월25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체계가 주희와 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인 내부에서 그를 둘러싼 사문난적 논쟁이 벌어진다.
그 계기는 윤휴가 <중용주>(中庸註)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자 송시열이 비난하며 고치기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
“윤휴가 중용주를 고치자 송시열이 가서 엄히 책망하니, 윤휴가 ‘경전(經傳)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라고 말하므로 송시열은 노하여 돌아왔다. 또 편지로 그를 책망하여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윤휴가 끝내 승복하지 않으므로 송시열은 드디어 그를 끊어버렸다.”(<송자대전>(宋子大全) ‘연보’)
집권 서인에게 주희는 일개 학자가 아니라 성인이었는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 체계를 수립하자 격하게 반발했다. <숙종실록>의 사관이 “(윤휴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자사(子思)의 뜻을 주자가 혼자 알았는데, 내가 혼자 모르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반적(叛賊)이다”(<숙종실록> 3년 10월17일)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서인이 윤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효종 4년(1653) 윤 7월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黃山書院·현 죽림서원)에 서인 학자들이 모인 것은 윤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송자대전> 부록의 ‘송시열 연보’에는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의 논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마음대로 억설(臆說)한다”고 비판하자 윤선거는 “의리는 천하의 공적인 것인데, 지금 희중(希仲·윤휴의 자)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답했다. ‘천하의 공적인 의리를 어찌 주희 혼자 독점할 수 있느냐’는 말로, 주희 혼자 경전 해석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반발이다. 이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윤선거가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경전에 주석을 달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송시열은 “윤휴처럼 주자의 장구(章句)를 치워버리고 스스로 새로 주석을 내어, 마치 서로 승부를 겨루어 앞서려고 한 것 같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중국의 다른 학자들은 주희의 주를 보충하는 수준이었지만 윤휴는 주희의 주를 대치했다는 것이다. 윤선거가 “이는 희중이 너무 고명한 탓이다”라고 말하자 송시열은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나왔다.
윤선거 대 송시열, 학문 대 종교
“공은 주자는 고명하지 못하고 윤휴가 도리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인가? 또한 윤휴 같은 참람한 사문난적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王莽)·동탁(董卓)·조조(曹操)·유유(劉裕) 같은 역적들도 모두 고명한 탓이겠는가?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으로서 모든 혈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한다. 춘추(春秋)의 법이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편당을 다스리게 되어 있으니 왕자(王者)가 나타나게 된다면 공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법을 받게 될 것이다.”(<송자대전> ‘송시열 연보’ 숭정 26년조)
△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윤휴의 문집 <백호집>. (사진/권태균) |
윤휴의 사상을 지지하는 자는 왕자가 나타날 때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협박이니 이미 학문 논쟁이 아니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 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휴는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그는 율곡의 ‘이선기후’(理先氣後)나 퇴계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 등을 모두 비판하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다. 송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는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 자체보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 송시열에게는 <논어> <중용>보다 주희가 주(注)를 달아놓은 <논어집주>(論語集注)·<중용집주>(中庸集注)가 더 중요한 경전(經典)이었다. 이런 경전을 윤휴가 개작한 것을 송시열은 좌시할 수 없었다. 윤휴는 <중용해설>(中庸解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氣)가 처음 생기는 것을 태극이라 하고 음양이 나뉘는 것을 양의(兩儀)라 하며 기가 합해서 형태를 이룬 것을 사상(四象·태양, 태음, 소양, 소음)이라 한다. 태극이 생기면 음양과 양의를 주관하고, 나뉘면 태양(太陽), 소음(小陰), 소양(小陽), 태음(太陰)이 된다. 사상(四象)은 합해지면 음양과 체용(體用)을 겸하니 태극은 기(氣)이다.”
‘태극은 기(氣)이다’라는 한마디는 교조화된 조선의 주자학을 전면에서 부인하는 것이었다.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太極)에 대해 주희는 이(理)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송시열에게 주자학은 종교 교리였으나 윤휴에게는 일개 학문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양자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선거는 시종일관 윤휴의 사상을 지지했다. 그래서 송시열과 윤선거는 현종 6년(1665) 계룡산 자락의 동학사(東鶴寺)에서 다시 만나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한 이유태, 송주석(宋疇錫) 등 서인 중진들이 모였는데, <송자대전> ‘혹인(或人)에게 답함’에는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다음에 또 윤휴의 사정(邪正)을 정변하였는데 어조가 양쪽이 다 거세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내(송시열)가, ‘이렇게 한가하게 다툴 필요 없으니 시험 삼아 한마디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네. 공(윤선거)이 시험 삼아 말해보게.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또 주자가 그른가 윤휴가 그른가’라고 말하자 그가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흑백(黑白)으로 논하면 희중(希仲·윤휴)은 흑(黑)이고 음양(陰陽)으로 논하면 희중은 음(陰)이네’라고 말하므로, 내가 ‘공이 이제야 비로소 크게 깨달았네. 이는 사문(斯文·성리학)의 다행이자 친구 간의 다행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윤선거는 일이 있다고 먼저 돌아갔습니다.”(<송자대전> ‘혹인(或人)에게 답함’)
노론과 소론의 분당을 예고해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라고 묻는데, ‘윤휴가 옳다’고 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윤선거 자신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선거가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간 것은 마음속으로는 송시열의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송시열과 윤선거의 논쟁이지만 그 배경에는 조선의 정치체제, 사상체제에 대한 체제갈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윤휴와 윤선거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폐기하고 다원 사상체제로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인 반면 송시열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더욱 강화해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조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 내재한 갈등의 싹은 숙종 때 서인이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선거의 아들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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