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2000년 봄호
또 다른 선, 위파사나의 이해
- 목 차 -
들어가는 말
부처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발견했는가
남방·북방의 위파사나
중국에서의 위파사나
한국에서의 위파사나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유한한 시간 속에 살면서 무한한 행복을 추구하는 고유의 본성이 있다. 많은 철학자, 사상가, 종교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고 갔다.
유한한 시간은 생로병사를 뛰어넘지 못한다. 생로병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어떠한 부귀영화, 행복, 학문의 세계도 시간이 지나간 후에 되돌아보면 한갓 꿈과 다름없다.
부처님 역시 왕궁의 부귀를 누리지만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이상 그 부귀영화도 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직감하고 생사를 뛰어넘는 무한한 세계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부처님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부처님을 능가하는 사상가, 철학자, 종교가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생사윤회에 있어 부처님만큼 명쾌하고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 수행자는 역사상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이 발견한 깨달음의 세계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법은 시대와 문화, 환경을 달리하면서 그 원리는 같지만 방법이나 표현 면에서 다르게 변천되어 왔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깨달은 핵심 내용과 구체적인 실천법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자칫 본래의 불법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 부처님 수행법의 핵심, 그 이후 부파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현재 우리 나라 수행자가 직면한 문제와 향후 방향에 대해서 위파사나(vipa na?)를 중심으로 필자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2. 부처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발견했는가
인간의 의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대상을 갖는 의식으로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이라 불린다.
오온의 흐름이 12연기이다. 다른 하나는 오온을 꿰뚫어보는 반야관(般若觀)이다. 전자의 수행은 오온 내에서 대상에 정신을 통일하는 사마타(s tha : 선정) 수행법이고 후자는 모든 대상을 가진 오온의 현상 이전을 반야관으로 꿰뚫어 본질에 계합하는 위파사나 수행이다.
사마타 수행은 불법 이외에 요가, 선도(仙道), 타종교 등에도 발견되지만 위파사나 수행은 불교 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사마타 수행은 시간의 흐름의 반복인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위파사나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원한 평화를 실현한다.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이해하면 불법과 타종교 수행과의 차이, 정(正)과 사(邪)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다음에서 부처님 이전의 수행과 그 이후를 살펴봄으로써 불법의 정수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하여 우리 자신이 영원한 해탈로 가는 불법을 지금, 여기에서 구현할 수 있다.
1)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
부처님 이전의 수행은 흔히 요가로 불린다. 기원전 2500년경 모헨조다로의 출토 등에도 요가의 좌선 자세가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2세기에서 9세기 무렵 사이에 편찬된 《리그베다》의 문헌 중에도 요가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구체적인 수행법의 설명은 없다.
그후 요가가 수행법으로 사용된 것은 《카타카 우파니샤드》 이후라는 것이 통설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위파사나 이외는 모두 사마타 수행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수행은 대상을 갖는 오온에 의지하여 오온의 흐름인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그 당시 내려오는 모든 수행법을 통달했지만 생사해탈은 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자신이 발견한 위파사나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즉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에서는 불법의 핵심인 중도(中道)·연기(緣起)가 발견되지 않는다.
중도·연기를 현상과 본질에서 반야관으로 볼 때 탐·진·치를 완전히 제거하고 생사 없는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사마타 수행은 불교의 무의식 세계인 8식 아뢰야식(오온의 識에 해당)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1) 고대 베다의 수행과 우파니샤드
고대인들의 종교 발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현상 즉 천둥 같은 천재지변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신(神)을 설정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근원적인 실상을 찾는 것인데, 그것을 신에서 찾는 경우와 인간 내부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인도의 종교 발달 역시 처음에는 신에서 궁극적인 실상을 찾다가 차츰 인간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① 《리그베다》의 수행
《우파니샤드》 이전의 수행이다. 《리그베다》는 전편에 걸쳐 신에 대한 찬미와 기도, 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심 내용은 명상적 측면, 관조적 측면, 정화의 측면으로 볼 수 있다.
② 《우파니샤드》의 수행
《베다》의 경전 최후기(B.C.600∼A.D.300)에 형성된 《우파니샤드》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넘어가는 종교철학으로서, 그 핵심 내용은 범아일여(梵我一如)로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생명은 업(業, karma)에 따라 윤회의 길을 반복하는데 인간은 선정(禪定), 고행에 의해 범아일여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상주불멸의 범계(梵界, Brahmaloka)를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현상계를 허망한 것으로 보고 브라만을 유일의 실재로 보는 관념론, 범아에 의하여 물심 양면을 대표시켜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려는 발생론적 실재론, 또 최고 브라만에 의한 유신론적 체계 등으로 형성되었고, 그후 후기 《우파니샤드》를 거쳐 여러 갈래의 인도철학을 낳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간단하게 브라만, 아트만의 개념을 파악하고 그 수행상을 살펴보겠다.
고대 인도의 명상가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고 영력(靈力)에 가득찬 《베다》의 언어로 이해했다. 그후로는 ⓐ 《베다》의 언어 속에 가득한 힘 ⓑ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신성한 원리, 즉 이 현상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진리 ⓒ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을 상주론인 전변설(轉變說)로 본다. 즉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부분과 감각으로 감지되는 내재적인 부분의 두 가지 면이 있다 아트만은 호흡을 뜻하는 말로 자아(自我), 영혼(靈魂), ‘내면 의식’, ‘자각력’을 뜻하는 말이다.
아트만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다. ⓐ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크다. “심장 속에 있는 나 자신이니 쌀알보다도 작고 우주 허공보다도 크니 바로 나 자신이다.”(찬도갸 우파니샤드) 이것은 화엄경의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 아트만은 이 육체와 우주에 두루 편재해 있다. “아트만은 모든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 아트만 속에 포함된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 아트만은 불생불멸적인 존재이다. ⓓ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내적인 통제자이다.
아트만은 자각력의 깊이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 짓는다. 첫번째 단계는 잠 깬 상태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객관적 사물을 지각하는 차원이다. 두번째 단계는 잠 깬 상태에서 사물들을 지각했던 기억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관을 섞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차원이다. 세번째 단계는 깊은 잠의 무의식 세계로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 깊이 휴식하는 차원이다. 네번째 단계는 순수의식 상태로 깊은 잠의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 휴식에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자각력이 깨어 있는 아트만의 절정의 상태이다. 이 순수의식 상태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근원자의 브라만을 보게 된다. 이때가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만두카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 이후 인도철학의 중심 과제는 아트만을 탐구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불교에서는 이 아트만의 실체성(불멸성)을 부정해 버렸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아트만을 오온의 미세한 현상으로 보고 무아(無我)로 관찰했다. 여기서 비파사나의 반야관을 중심으로 한 불법 고유의 수행이 탄생하였다. 그것이 12연기에 대한 관찰이다. 위파사나 논고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고대인도의 철학을 설명하는 것은 위파사나의 12연기관을 알지 못하면 중국 선종과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은 《화엄경》이나 중국 선종의 자성(自性)의 개념과 유사하다. “브라흐만은 공(空)이다.”(찬도갸 우파니샤드) “지혜가 브라만이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아트만으로부터 모든 세계·호흡·신(神)들·존재들이 나온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당신의 아트만이다.”(아란야카 우파니샤드) 이런 것들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법계연기와 착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는 오온의 길인 무의식 단계로 제8식 아뢰야식의 영역 중 우주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이 출가한 후에 찾아간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의 경지에서도 이러한 단계는 가능하다. 《우파니샤드》의 구체적인 수행은 소리 중심인 만트라, 빛의 응시, 호흡집중, 아트만의 자각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대상에만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이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③ 사마타 팔선정 수행
부처님 이전에 벌써 사마타 팔선정의 수행이 정립되어 있었다. 초선정에서 4선정까지는 호흡, 소리, 빛 등의 물질적 요소에 집중하는 것이다.(상세한 것은 필자의 졸저, 《위파사나 I》 참조) 5선정에서 8선정까지는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면서 무의식 세계로 나아가는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다. 간략하게 무색계 4선정만 《청정도론》에 입각하여 살펴보겠다.
ⓐ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색계 4선정에서 벗어나 집중한 대상을 향하여 ‘끝없는 허공, 끝없는 허공’ 하면서 물질을 대상으로 한 수행에서 벗어난다.
ⓑ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색계 초선정의 고요하지 못함의 허물을 보아 무색계 2선정에 마음을 기울인다. 끝없는 허공에 따른 의식에 마음을 집중한다. 끝없는 허공이라는 선정의 대상을 벗어나서 끝과 한계의 구분이 없는 의식작용이라고 생각하여 ‘끝없는 의식작용’의 선정에서 지낸다.
ⓒ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식무변처정보다 더 고요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공무변처정의 끝없는 허공을 관하는 인식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없음, 없음’이라고 하거나 ‘조용함, 조용함’이라고 거듭거듭 생각한다.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무소유처정에서 더욱더 정묘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생각은 병이다. 생각은 종기와 같다. 생각은 박혀 있는 가시와 같다. 거친 생각은 없으며, 섬세하고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아니한 무색계 4선정은 조용하고 높다.’ 이렇게 무소유처정에 탐착하던 것을 다하게 하여 ‘조용하구나, 조용하구나’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며 마음집중을 한다. 무소유처정의 대상과 영상을 거듭거듭 의지하여 반복하면 사라짐이라는 명칭, 없다는 명칭에 비상비비상처정이 생긴다.
《능엄경》에 의하면 공무변처정은 몸이 장애됨을 깨달아 장애를 소멸하고 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장애가 소멸하고 장애가 없어졌다는 것까지 멸하면 그 가운데는 오직 아뢰야식과 말라식의 미세한 반분만 남게 되는데 이를 식무변처정이라 한다. 공과 색(色)이 모두 없어지고 식심(識心)까지 멸하여 시방(十方)이 적연하여 훤칠하게 갈 데가 없으면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이는 말라식과 아뢰야식이 잠복된 상태이다. 아뢰야식의 종자인 식성(識性)이 동(動)하지 않는 가운데 다함이 없는 데서 다한다는 성품을 발명하여 있는 듯하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다한 것 같으면서 다한 것이 아닌 상태가 비상비비상처정의 상태이다.
이 역시 제8식 아뢰야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이 처음 만났던 알라라 칼라마는 무소유처정에 있었고 웃타카 라마풋타는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에 있었다. 부처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참으로 부처님은 진솔하게 “내가 정말 생사를 해탈하였는가. 위없는 깨달음은 얻었는가.”라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보리수 아래로 가서 12연기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던 것이다.
2) 부처님의 수행법:위파사나
부처님은 그 당시 모든 수행의 정상인 8선정까지 통달하고서도 생사해탈이나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홀로 보리수 밑에서 12연기로 깨치셨다. 이것을 4성제로 정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주로 오온 관찰로 지도하셨다. 부처님 수행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대념처경》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몸의 관찰(身念處)
“몸을 정복하지 못하면,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다.”고 부처님은 《중부 경전》 36에서 설하셨다. 몸의 관찰은 호흡과 행·주·좌·와에서 몸의 움직임이 중심이다. 몸은 무명·욕망·업·음식·마음으로 생긴 것이다. 몸을 통해서 본래의 마음 자리를 찾는 것이다.
(2) 감각의 관찰(受念處)
감각의 변화를 통하여 몸과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감각에는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중간의 느낌이 있다. 감각을 조건짓는 것은 무명·욕망·업·접촉이다.
(3) 마음의 관찰(心念處)
탐·진·치가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 무기력한 마음, 산란한 마음, 선정이 있는 마음, 해탈한 마음 등을 알아차린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무명·욕망·업·몸과 마음이다.
(4) 법의 관찰(法念處)
법에 대한 관찰은 현상이 일어나기 전과 이후의 상태를 직관적인 의심을 수반하여 회광반조로 의관(疑觀)한다.
① 다섯 가지 장애인 욕망·성냄·혼침·불안정한 마음·회의 등이 일어나기 이전, 진행, 사라진 상태를 입체적으로 알아차린다.
② 오온에 대한 관찰 :부처님 제자들은 대부분 오온에서 무상·고·무아를 보아 깨친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한다.
③ 여섯 감각 기관(六根六境)의 관찰:《능엄경》의 25원통 중 7개를 제외한 18가지 관찰이 여기에 속한다. 육근·육경·육식에서 탐·진·치를 제거한다.
④ 칠각지(七覺支)의 관찰:마음 챙김, 주시인 염각지(念覺支), 법의 선택(擇法覺支),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 등을 관찰한다.
⑤ 사성제에 대한 관찰:고(苦)와 집(集)은 현상이고, 멸(滅)은 열반이며, 팔정도는 고와 집에서 열반으로 가는 길로 불교의 모든 수행은 여기에 포함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첫째, 신·수·심·법 4가지를 관찰할 때 팔리어로 보면 처음부터 반야(pan???)에 의지한다. 처음 몸을 관찰할 때나, 해탈된 마음이나 멸의 마음 상태에서도 반야는 있다. 반야로 시작에서 반야의 완성으로 끝난다. 둘째, 사념처는 현상적인 오온과 반야로 바로 들어가는 칠각지로 크게 구분된다. 남방은 현상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아 탐·진·치를 제거하고 북방은 칠각지에서 바로 현상 이전의 반야 흐름으로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 셋째, 사념처는 모두 12연기와 관련되어 있다. 불교의 핵심은 12연기에서 중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요가 수행과 다른 점이며 중국에서의 도가 수행과도 상이한 유일한 불법의 정수이다.
3) 사마타와 위파사나의 차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리그베다》의 신을 대상으로 한 수행,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무색계 팔선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8 아뢰야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한계이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사마타 수행의 정의는 심(心)과 심소(心所)가 통일된 것으로, 즉 주관과 객관으로 이루어진 오온(五蘊)이 일시적으로 통일된 상태이다.
위파사나는 오온의 흐름인 12연기를 반야로 관찰하여, 오온에서 탐진치의 흐름을 저장하는 아뢰야식까지 소멸함으로써 생사해탈과 위없는 깨달음이 가능하다. 불성(佛性)은 불성에 의해 발견된다. 그 불성의 빛인 반야에 의지할 때 불성이 스스로 발견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자성인 아트만은 위파사나로 관찰할 때는 오온의 미세한 흐름이다. 이는 《숫타니파타》나 《테라가타(長老偈)》의 목련 존자의 체험담 등에서 밝혀졌다. 부처님 이전의 모든 유파의 궁극적인 경지인 범아일여 역시 제8 아뢰야식의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8 아뢰야식의 3가지 기능, 즉 종자의 기억, 몸의 유지, 우주의 창조 중에서 우주의 창조 부분이 범아일여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최고 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의 한계점이다.
사마타는 식의 흐름인 오온에 의지하고 위파사나는 오온을 꿰뚫어보는 반야관에 의지한다. 팔리어로 반야(pan???)에서 파(pa)는 ‘여러 가지(무상·고·무아 즉 연기)를 보다’ ‘이전을 보다(直觀, 內觀)’의 뜻이 있다. 사마타에서는 정신통일의 상태까지밖에 이르지 못한다.
여기서 오온의 흐름을 덩어리로 집중하기 때문에 미세한 8식의 흐름을 뚫지 못하고 그 자체를 브라만이나 상주론으로 보든가 아니면 무기공(無記空)에서는 단멸론(특히 行의 흐름에서)으로 떨어진다. 반면 위파사나는 8식의 미세한 오온의 흐름을 무상·고·무아로 보아 현상 이전까지 꿰뚫어보아 열반인 불성의 세계에 계합하므로 깨달음을 얻어 생사해탈이 가능하다.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위파사나이다.
오온의 현상을 무상·고·무아로 보지 못하면 불성을 보지 못한다. 특히 8식의 미세한 오온의 흐름을 ‘나’로 착각하는 것이 무명(無明)이고, 이로 인하여 삼세에 걸쳐 업이 형성된 것이 12연기에서의 행(行)이다. 이 행이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식(識)이다.
여기까지가 12연기에서 8식의 영역인데 여기에는 미세한 오온의 흐름이 있다. 이 이후의 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로병사가 현상적인 12연기의 흐름이다. 결국 오온을 나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오온을 사마타식으로 보면 무명을 뚫지 못하고 오온이 ‘나’로 착각된다.
위파사나에서는 오온을 무상·고·무아로 보아 열반을 실현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대념처경》에서 말한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위파사나이다. 부처님의 모든 제자들은 오온을 관찰함으로써 열반을 실현했던 것이다.
3. 남방·북방의 위파사나
앞에서는 부처님 이전의 사상이나 수행체계를 부처님 수행법인 위파사나와 비교해 봄으로써 불교의 독특한 핵심과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그 핵심인 연기·중도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변환되어 갔다. 이것을 정확히 이해해야 현대 한국 불교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불교의 역사는 오온과 12연기를 어떻게 보는가, 그 해석의 발달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입멸 후 100∼200년 사이에 부처님 경전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각 부파가 발생한다.
이것이 남방과 북방이 갈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데 그 핵심은 오온과 12연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사실 지금도 부파불교 시대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수행 위주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연기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을 보면 중생이 하는 매 행동에 12연기가 동시에 찰나적으로 생멸한다는 찰나연기설(刹那緣起說), 12연기 각 고리가 인과적으로 구속하며 계기(繼起)한다는 연박연기설(連縛緣起說), 12지가 각각 오온을 갖추고 있으면서 삼세에 나누어져 있다는 분위연기설(分位緣起說), 먼 과거의 무명이나 행에 의해 금생의 의식 등이 초래되고 금생의 존재를 조건으로 먼 미래가 결정된다는 연속연기(連續緣起) 등이 있다.
연기의 특성들을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기를 부파불교 당시와 그 후 북방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달라진 각도에서 본 내용을 고찰해 보면 현재 남방의 위파사나와 북방의 위파사나의 구체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연기관으로 일체 현상이 변화해 가는 모습은 중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생기(生起)한다는 세계관, 인생관이다. 혹(惑)·업(業)·고(苦)가 전전하며 인과가 상속된다는 것이다. 혹은 마음의 병이고, 업은 몸의 악이며, 고는 생사의 과보다. 예를 들면 사람의 경우 몸·가정·국가·사회·세계가 모두 혹·업·고의 삼도가 전개된 것이며, 이 모두가 업인에 의해 이루어져 나타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을 내면 혹이 되는데 그것이 심하여 칼을 들고 상대를 살해하게 되면 업이 되고, 이 업은 미래의 고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삼세에 걸쳐 설명한 것이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이다. 이것을 현대 남방에서는 연기의 핵심 내용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삼세에 걸쳐 12연기나 오온의 형성 모양이나 현상은 변하지만 그 요소는 변하지 않는다는 법체항유(法體恒有)를 고수하고 있다. 즉 아공법유(我空法有)로 현상은 변하여 아(我)의 실체가 없지만 그 법의 요소는 삼세에 걸쳐 항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
이 연기설은 북방의 불교로 변천하게 된 계기가 되는 연기설이다. 업감연기에서 우리의 신(身)·구(口)·의(意) 삼업에 의하여 조작된 업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현재 남방불교는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하여 경량부 이론이 다소 가미된 남방불교의 아비달마에 근거하고 있다. 남방불교에서도 무의식의 세계인 바방가(bhavanga) 의식을 설명하고 있지만 업의 보존에 대해서는 아뢰야식연기만큼 명확하지 않다. 아뢰야식은 정신의 주체인 6식 이외에 발견된 제8식으로 우리가 행한 모든 업력의 종자는 여기에 보존되며, 몸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까지도 아뢰야식의 현현으로 보고 있다.
업감연기에서 말하는 법의 실체나 삼세의 업도 모두가 아뢰야식의 현현이며, 아뢰야식에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공법유(我空法有)가 아공법공(我空法空), 만법유식(萬法唯識), 심외무경(心外無境)으로 발전된 것이다.
3) 진여연기(眞如緣起)
여래장연기라고도 하며 아뢰야식연기 다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뢰야식연기설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일체가 모두 아뢰야식의 변화로 나타났다는 유심론(唯心論)이다. 이는 자기의 8식의 전변(轉變)은 유심(唯心)이 성립되지만 타인의 8식 변화, 제법(諸法)은 성립되지 않으므로 보편적인 유심체를 설정하여 주객의 모든 제법을 전개하는 것이 진여연기설이다.
이 연기설은 《대승기신론》에서 구체적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즉 진여가 움직여 진(眞)과 망(妄)이 화합한 아뢰야식 중에는 각(覺), 불각(不覺)의 2의(義)가 있으며 일체법을 능생(能生)할 불각(無明)으로부터 우주와 인생이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진여의 체(體), 생멸의 상(相), 인연의 용(用)이다. 진여의 체는 인(因)이 되고 인연의 연은 용(用)이 되며 생멸의 상(相)을 인하여 생멸의 과(果)를 낳는 것이 현행의 아뢰야식이다.
4) 법계연기(法界緣起)
화엄철학의 중심이 되는 이 연기설은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 의존하는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말한다.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 등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한 것이며, 한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 전우주(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연화장(蓮華藏)세계라고도 한다. 이것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라 하겠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업감연기에서는 세계와 인생이 모두 업의 결과이다. 이 업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아뢰야식연기이다. 아뢰야식은 개인의 본성에 의해 결정되며 이 본성은 진여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연기의 설명이 요청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상세계와 진리의 세계와의 조화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법계연기가 설해진 것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깨친 12연기를 개인의 중심에서 본 것이 업감연기·아뢰야식연기이며, 이를 그 본성인 여래장(如來藏)의 법신과 결부시켜 진여·우주까지 확대시켜 본 것이 진여연기·법계연기이다. 이것은 12연기를 천안(天眼), 불안(佛眼)으로 볼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체는 공(空)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남방불교의 현상 중심인 업감연기에서 공(空)을 중심으로 한 아뢰야식·진여·법계연기 중심의 수행으로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잘 이해해야 현재 남방불교의 위파사나와 북방불교의 위파사나의 특징을 알 수 있다.
4. 중국에서의 위파사나
1) 초기의 선수행
중국에 선경(禪經)이 처음 전래된 것은 후한의 항제(146∼167년) 때 안세고가 호흡관찰법인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 등을, 대월지국에서 온 지루가참이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과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번역한 것이 시초다. 선정 실수(實修)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이러한 선경이 번역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양고승전》에 의하면 5세기경 아라갈(阿羅竭)이 두타행을 수행했으며 주술로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외 많은 선승들이 석실에서 두타행을 닦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7일간씩 있었다는 기록과 신통을 나타낸 기록 등으로 보아 초기에는 부처님의 원형 수행인 안반수의 등에 나타나는 사선정(四禪定) 등을 수행했던 것 같다. 특히 승조(僧稠, 480∼560)는 사념처(四念處:身受心法) 위파사나를 수행하여 많은 제자를 거느렸으며 《지관법》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2) 달마선(達磨禪)과 육조선(六祖禪)
달마 이전의 선수행자들은 사념처 위파사나를 업감연기가 아닌 대승관법(진여연기 등)에 의거하여 수행했는 데 반해 달마 이후로는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능가종이라는 말까지 붙게 되었다. 달마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을 실천했다. 실천 수행법은 《달마혈맥론》 등을 보면 현상적인 마음 이전의 불성 자리를 바로 관해 들어가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혜가(慧可)가 찾아 왔을 때도 ‘불편한 마음을 바로 보라.’고 했다. 일어나고 있는 마음을 관(觀)하면 관의 특성상 현상 이전의 마음 자리로 바로 계합해 들어간다. 승찬(僧璨)의 《신심명》에서도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추임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歸根得旨 隨照失宗), 잠깐 사이에 돌이켜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나다(須臾返照 勝脚前空).”고 했다.
이 역시 현상적인 마음 이전을 꿰뚫어보는 사념처 가운데 심관(心觀)에 해당한다. 《능가사자기》에 보면 도신(道信)은 의식의 흐름을 끝까지 관찰한다. 도신은 염불도 수행하고 호흡관찰도 수행하면서 5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 가지의 수행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방편법과 마음을 항상 관하는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심관을 같이 수행한 것 같다.
홍인(弘忍)의 선수행은 《수심요론》에서 불성(佛性)을 확인하고 잘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도신의 ‘수일불이’의 행법을 더욱 진전시킨 것이다. 도신은 마음을 집중하여 한 물건을 간(看)하게 하고 있지만 홍인은 한 물건에 집중하는 바로 그 마음을 내부의 자심(自心)으로 되돌려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도신과 홍인 모두 《유교경(遺敎經)》에 근거하고 있다.
수행이 깊어지면 저절로 자심을 지키면서 현상의 마음도 동시에 관(觀)하게 된다. 홍인의 제자 육조 혜능(慧能)으로 넘어오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자성(自性)을 관하는 돈오적인 수행으로 체계가 잡혀간다. 《육조단경》 〈좌선품〉에서도 “생각생각 중에 청정한 자성을 보라(念念中 自見淸淨心).”고 하여 의식의 흐름을 관하는 도신의 수행을 계승하는 한편 “반야로 마음을 관조하면 찰나간에 내외명철(內外明徹)한다.”는 돈오적인 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달마 이후 육조까지 중국의 독특한 심관(心觀) 위주의 선종가풍이다. 초기에는 《안반수의경》이나 사념처 위파사나 위주였다가 달마에서 육조까지 오면서 대승경전인 《열반경》 《화엄경》 《능엄경》 《기신론》 등에 의거하여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중국선의 가풍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3) 天台止觀(천태지관)
중국선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천태의 지관을 이해해야 한다. 천태는 스승 혜사(慧思)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용수의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태는 대승경전을 두루 섭렵했지만 소의경전은 《영락본업경》 《법화경》 《화엄경》이 중심이다. 수행의 방법은 삼지·삼관을 원리로 사종삼매(四種三昧)로 정리할 수 있다.
(1) 삼지(三止)
① 계연수경지(繫緣守境止):마음을 코와 배꼽 사이의 중간쯤 되는 곳에 집중하여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는 집중법이다.
② 제심지(制心止):마음이 일어나는 바에 따라서 이것을 제어하여 달아나지 않게 하는 집중법이다.
③ 체진지(體眞止):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모든 제법(諸法)이 있고, 모두가 다 인연으로 공(空)한 것이며 주체자가 없는 것을 알아 허망한 생각을 그친다.
(2) 삼관(三觀)
① 공관(空觀):모든 현상 이전의 비어 있는 본체를 관하는 것이다.
② 가관(假觀):모든 현상은 일시적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실상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③ 중관(中觀):공관과 가관이 하나로 작용하여 본체와 현상이 걸림이 없는, 즉 공관과 가관이 융합된 관이다. 이 삼관은 간화선의 대가인 임제(臨濟)의 본체관인 체중현(體中玄), 현상관인 구중현(句中玄), 현상과 본체가 하나인 현중현(玄中玄)과 통한다.
(3) 사종삼매(四種三昧)
천태의 말년 저술인 《마하지관》에 있는 삼매수행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체계적인 수행법이다.
① 상좌삼매(常坐三昧):《문수설반야경》에 의거하게 90일 간 앉은 채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직 하나의 부처님 이름만 부르는 일행삼매다.
② 상행삼매(常行三昧):《반주삼매경》에 의거하여 90일 간 불상 주위를 돌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念)하는 것이다.
②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대방등경(大方等經)》 《법화경》 등에 의한 삼매로 방등삼매는 7일 간, 법화삼매는 21일 간 불상 주위를 돌고 동시에 좌선도 한다.
④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수자의(隨自意)삼매라고도 하며 행주좌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항상 닦는 삼매다. 대승경전에 의거하여 용수의 삼제(三諦)를 바탕으로 하는 삼매로 중국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교선일치(敎禪一致)라 할 수 있다.
다만 5시교판으로 《화엄경》이나 다른 대승경전을 《아함경》보다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정밀한 12연기관을 소홀히 한 것이 최대의 실수이다. 그러나 달마 계통의 선종은 경전을 무시한 채 교외별전을 주장하여 자칫하면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와 혼돈할 수도 있는 반면 천태지관은 경전을 바탕으로 하므로 중국에서 대승 위파사나를 가장 잘 체계화했다고 볼 수 있다.
(4) 간화선(看話禪)
육조 혜능 이후 선종이 5종가풍으로 나누어지면서 중국에서는 선의 황금시기를 구가한다. 그때의 수행법은 《금강경》 《화엄경》 《열반경》 《원각경》 《능엄경》 《기신론》 등을 바탕으로 한, 마음의 본성(心卽是佛)을 바로 찾는 심관(心觀) 위주의 수행법(본성을 비추어 보는 묵조선도 여기에 포함된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후 송나라에 들어와서는 오조법연·원오극근·대혜종고에 의하여 간화선이 체계화되어 새로운 수행법으로 등장한다. 간화선을 체계화한 대혜의 《서장(書狀)》을 보면 《화엄경》과 《능엄경》의 예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 수행방법으로 조주의 ‘무(無)’자 화두(話頭)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한다는 방법이 많이 나온다. 화두의 화는 말씀 ‘화’로 생각을 나타내고 ‘두’는 말 이전의 본성을 뜻한다. 즉 현상에서 본체를 바로 뚫고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육조 혜능의 “반야로 마음을 관조하면 바로 내외명철한다.”와 통하고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소리 이전의 본성에 계합하는 수행법과 통하고 《아함경》의 12연기 이전을 꿰뚫는 반야관과 통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정견(正見)인 연기관·오온·사성제·중도 등의 올바른 입지가 섰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수행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5. 한국에서의 위파사나
우리 나라에 중국선이 전래된 것은 신라 41대 헌덕왕 때(809∼826)로 마조도일(馬祖道一) 계통의 선이 주류가 되는데, 법랑(法朗)이 선덕왕 때에 당나라에 가서 도신의 법을 전해왔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이전에 원효에 의하여 《기신론》의 진여연기를 바탕으로 계발된 지관법과 《금강삼매경론》의 무생관(無生觀, 12연기관)과 무상관(無常觀, 대승유식관)이 부처님의 12연기관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때는 밀교(密敎)나, 지관 수행의 흔적도 있으나 고려 말 보조(普照), 보우(普愚) 이후로는 간화선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간화선이 주류를 이루고 염불선을 보조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지만 간화선 이외의 수행자는 극소수다. 현재 남방의 위파사나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987년 거해 스님의 안내로 미얀마의 우판디타 스님이 그의 스승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위파사나 수행법을 한국에 소개하면서부터다.
미얀마에는 많은 방법의 위파사나 수행법이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위파사나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부처님의 수행법인 위파사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끝으로 위파사나를 수용하는 데 유의해야 할 점과 현대 한국불교 수행법의 문제점을 간단하게 짚어보면서 졸고를 마칠까 한다.
첫째, 현재 한국에서 수행하고 있는 위파사나는 1986년에 입적한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방법이다. 위파사나는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그 방법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위파사나는 반야와 동의어로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반야의 ‘혜’(慧)가 중심이므로 위파사나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와 태국에는 많은 방법의 위파사나 수행체계가 있다. 특히 태국에는 염불식 위파사나가 있는데 이것이 향후 우리 나라에 수용되면 일반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남방의 위파사나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업감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한계점과 장점을 잘 헤아려서 수용해야 한다. 단 남방은 업감연기 중심이라 보살정신이 없으나 현재 실천면에서는 남방사원에서는 계율·수행·보살도를 실천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중국에 위파사나가 수용될 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천태지자의 5시교판이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반야경》을 우위에 두고 《아함경》을 소승경전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수행의 정밀성이 희박해져 형이상학적인 공(空) 도리 위주의 수행으로 전개되었다. 5시교판은 원효의 《열반경종요》에서 부처님의 모든 경전은 심오하고 무량한 뜻이 있는데 이것을 5시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원효 대사 정도의 안목이 아니면 지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중국과 한국의 스님들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성철 스님이 원효 이후 최초로 《백일법문》에서 5시교판을 지적했다. 둘째, 대승경전에서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을 보살 밑에 두어 미세 망념이 제거되지 않은 소승 아라한으로 보아 사성제와 12연기를 경시해왔다. 대승경전의 결집시에 업감연기설에 집착한 일부 소승 아라한을 비판한 것인데 이것을 잘못 오해하여 아라한 자체를 경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승에서는 12연기나 유식관을 무시하고 공을 바탕으로 한 여래장·법신·보신·화신의 관점에서 바로 자성(自性)만 찾게 되는 수행법이 되었다. 화두선이나 묵조선의 경우 12연기나 유식의 철저한 이해가 없으면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와 구분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간화선의 ‘이것은 무엇인가(是甚 'a1 화두와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와 구분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부처님 당시로 되돌아가 《아함경》부터 다시 연구하여 수행의 체계를 복구해야 한다.
특히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기신론》을 바탕으로 육바라밀의 실천이 복구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위파사나는 계정혜가 핵심이다. 철저한 계율 준수와 확고한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부처님 경전과 분리되지 않은 교선일치로 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한 까닭은 중국 당나라 때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종의 영향 때문이다. 교학이 타락한 그 시대적 상황에서 그렇게 형성되었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체험담인 경전과 수행을 일치하여 수행해야 한다.
현재의 간화선 수행법 일변도를 지양하고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 계발을 위해 남방·티베트·중국·일본 등에 많은 유학생을 보내야 한다. 중국에도 현재 방장제도 등 전성기의 선의 가풍이 복구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내 것이 최고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전통선을 살피면서 부처님의 경전 안에서 다른 수행법을 과감히 받아들여 새로운 천년에 대비해야 한다.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십이연기를 깨치시고 중도를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사성제로 체계화하여 위파사나로써 수행을 실천하게 했다.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도 팔정도를 강조했고 유언으로도 “모든 조건 지워진 것은 무상하다. 방일하지 말고 해탈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고 하셨다. 이때 조건 지워진 것은 오온·십이연기이고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은 위파사나이다. 생활 속의 위파사나 실천은 팔정도, 육바라밀로 체계화되었다. 팔정도나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한 우리는 불법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김 열 권
고려대 경영대학원 졸업. 경영학 석사.고승들의 지도하에 10년간 화두선 수행. 1989년 미얀마 마하시 선원으로 출가.1년간 위파사나 수행. 그후 일본,인도,태국,말레이지아의 위파사나 선원에서 수행. 저역서로 <위파사나 1,2> <깨달음으로 가는 오직 한 길><위파사나 12선사><고요한 숲속의 연꽃>
'종교사상 이야기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올-기독교 신학자들 공개토론회 ‘후끈’(한겨레신문 070512) (0) | 2007.05.12 |
---|---|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불교평론 19호) (0) | 2007.05.10 |
봉암사 결사를 다시 생각한다(조성택, 불교평론 30호) (0) | 2007.05.10 |
조계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수경, 불교평론 30호) (0) | 2007.05.10 |
현경교수의 이슬람 순례②(한겨레신문 061221) (0) | 2007.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