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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농업의 쇠퇴와 지식인 /김종철(시민의 신문 2003.11.3)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시민의 신문> 2003년 11월 03일
 
농업의 쇠퇴와 지식인

  김종철

 

 

지난 9월 멕시코 칸쿤에서 한국의 농민 이경해 씨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찔러 자결을 하였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을 때, 잠시 멍한 기분 속에서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게 내 느낌이었다. 하기는, 농민의 자살이라는 것은 그 자체 이미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게 그동안 우리의 현실이었다. 지난 수십년간 사회 전체가 작심이라도 한 듯이 일관되게 농사를 천대해온 당연한 귀결로서 이미 농민과 농촌공동체는 몰락의 길로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농민들 가운데 자살자가 속출하였음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려온 칸쿤에서의 자결소식은 이 나라 농민이 처한 곤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경해 씨의 돌연한 죽음에 크게 경악하고, 깊이 충격을 느낀 것은 대개 외국인들이었다. WTO의 전면적 농산물 개방화 정책에 항의하기 위하여 세계 전역에서 칸쿤으로 모여들었던 각국의 농민들과 농민단체들은 이경해 씨의 자결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곧 그의 장례를 세계의 농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WTO 각료회의 마지막 날까지 그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집회를 계속해서 열었다.

  또한, 이경해 씨의 죽음의 의미를 포착하는 데 한국의 언론이 미온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에 비해서 외국의 언론은 좀더 기민하고, 좀더 심층적인 보도태도를 보여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진보적' 언론 <가디언>지의 도쿄특파원은 급히 이경해 씨의 고향까지 찾아와, 왜 평생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한 농민이 WTO 체제에 항의하여 자결을 결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그리고 그 죽음의 진정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눈물의 들판>이라는 제목의 길다란 기사로써 해명하려는 성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농업이나 농민에 관련하여 뿌리깊은 미신이 존재하고 있다. 즉, 한국경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대외의존형 수출 중심 경제로 굳어졌고, 또 수출중심 전략을 통해서 '후진국'에서 탈출하여 이제 '선진국'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만큼 이제 수출산업에 걸림돌이 되는 농업은 더 이상 옹호할 필요가 없다는--적어도 비공식적으로--널리 퍼져 있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런 믿음에 빠져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견해로는 식품은 저렴한 해외농산물을 사먹으면 되고, 그 대신 국내의 농경지는 좀더 경제효율성이 높은 산업활동을 위해서 전용되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갈수록 농경지가 황폐하거나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 농민과 농촌공동체를 실질적으로 되살리려는 진심어린 정책적 시도가 전무한 것은 지금 이 사회의 대부분의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한 뿌리깊은 탈농(脫農) 내지는 농사경시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농사경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정치인, 정부관료, 경제전문가, 기업인, 혹은 언론계 인사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야를 막론하고, 혹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거의 대부분의 전문가, 지식인들에게서 공통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농업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 교육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농업관계 전문가와 농과대학 교수들마저도 오로지 경제효율성의 관점에서 농사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농민의 존재의의와 농촌공동체의 운명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다른 분야의 지식인들에 비해서 조금도 나을 게 없다.

  이렇듯 소위 근대적 교육을 받아온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농경의 근본의미에 대해서 철저히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상황에서 한국의 농민과 농촌공동체가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많은 지식인들은 내심 농업이란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발달된 기술문명 속에 살게 된다 하더라도 인간이 땅을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엇보다도 농사란 결코 자본주의 체제 속의 단순한 산업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이 지구상에서 사람답게 살면서 지속가능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농사야말로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립에 필수적인 자립적, 자주적 생활방식을 보장하는 핵심적인 기반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다. 이것은 편견없이 이 문제를 약간이라도 깊이 들여다본다면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온갖 종류의 그럴 듯한 학문적, 사회적 이슈에는 시시콜콜 관여하면서도, 정작 인간생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농사문제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지금 농민과 농촌공동체는 전세계적으로 쇠퇴일로에 있고, 따라서 이것이 꼭 한국 사회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지식인들이 유난히 이 문제에 둔감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의 수많은 나라의 농민들 속에서 왜 유독 한국의 농민 이경해 씨가 저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식민지의 수탈체제로부터 벗어나서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시된 비교적 성공적인 토지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농업이 절름발이가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6.25 사변 이후 미국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대규모의 식량원조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미국 공법(PL) 480조에 의해서 1955년부터 10여년간 계속된 식량원조는 따져보면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를 위한 효과적인 방식이었지만, 이로 인해서 한국의 자립적 농업기반이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히 훼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더욱 중대한 문제는 이러한 미국 잉여농산물의 처리방식 속에 사실상 한국과 같은 '종속국'에 대한 미국의 항구적인 지배를 위한 교묘한 정치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미 공법 480조는, 밀을 비롯한 미국 잉여농산물의 한국내에서의 판매 수입금 중 80 내지 90%를 한국정부가 이용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거의 전부 국방비, 다시 말해서 미국산 무기를 도입하는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정부는 가만히 앉아서 잉여농산물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군수산업을 보호, 확대하는 손쉬운 방식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잉여농산물의 판매 수입 중 미국정부가 가져간 10 내지 20%의 수입금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미국유학 출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유학으로 상징되는 서구 백인 중심의 근대적 교육, 학문, 문화의 세례를 받아온 한국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 속에서 깊게 세뇌되어왔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재앙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농업경시, 농민천시라는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정신적, 심리적 경향도 그러한 세뇌작용 가운데서 길러졌을 것이라는 것은 그다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3/11/03)



  김종철 ― 《녹색평론》발행인, 영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