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94호 2007년 5-6월호
한미 FTA, '국익'이라는 환상
김종철
격렬한 반대운동의 와중에서 결국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다. 협상 타결에 임박하여 몇몇 정치인들이 황급히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급기야 한 노동자가 분신을 결행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4월 2일, 당초 예정된 시한에서 이틀을 더 넘긴 끝에 협상 타결이 공표되었다. 이 발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재계, 보수 정치인, 주류 언론은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협상을 밀어붙여온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계속해서 국민의 신임을 잃어왔던 노무현 정부는, 일시적으로나마, 한미 FTA 타결 이후 여론의 지지를 상당한 정도 회복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생각해보면, 대기업과 자본가, 그리고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보수파 정치인, 주류 언론, 학자, 전문가들이 한미 FTA의 ‘성공적인’ 타결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이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그들은 미국과의 통상협정이 그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큰 이익이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맺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그들의 뿌리깊은 친미적 성향에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는 것이겠지만, 나아가 당장의 손익계산을 떠나서, 이 협정이 발효된다면 온갖 법률적 사회적 도덕적 규제나 의무에서 그들은 해방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기막힌 선물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노무현 정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에, 그들의 기쁨은 배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보수적 헤게모니를 고려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이 협상 타결 후 몇주일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즉,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부가 일반 시민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원들에게까지도 아직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협상의 세부가 밝혀지면 커다란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사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민주주의를 비웃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몇몇 예외적인 의원들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국회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실로 기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이 나라의 특권계급으로서 한미 FTA로 인해 이익을 보는 부류에 스스로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현상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이 나라의 정치가들이 아무리 무지하거나 무책임하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이토록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을 왜 멀거니 보고 있는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협상 내용이 소상하게 공개되어 심각한 문제점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더라도, 그것이 국회의원들의 판단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극히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부 내용은 차치하고,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내용, 예를 들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와 같은 명백히 국가의 주권행사와 공공정책을 무력화시키고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가능성이 높은 치명적인 조항에 관해서도 국회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의 의원들이 설혹 협상 내용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불만을 한미 FTA에 대한 비준 거부로 연결시킬 신념이나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근거 없이 하는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나는 한나라당 소속 경제전문가로 통하는 이(李)아무개 의원이 한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 속에서 이번 협상을 전체적으로 따져볼 때 얻은 것은 없고 대부분 잃기만 했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대담의 말미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이 협정을 국회가 거부하기는 어렵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는 것을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정말로 걱정한다면, 마땅히 비준거부를 해야 하는 것이 주권국가 국회의원으로서의 당연한 임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상전의 눈치를 보는 게 무엇보다 우선적인 고려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이 나라의 독립성을 이 나라의 정치가들 자신이 진심으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가 국민경제에 끼칠 득실을 논하고, 손익을 꼼꼼히 계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설령 손익계산상 누가 보아도 명백히 불리한 협상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토대로 설득을 하고, 그들의 ‘애국심’에 간절히 호소해본다 한들 이 나라의 기득권자들이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권력 엘리트들은 한미 FTA에 관련하여 끊임없이 ‘국익’을 말해왔지만,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 국민경제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하기는 한미 FTA가 아무리 엉터리 협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양국 사이에 교역량이 크게 증가하고, 그 결과로 나라 전체의 물질적인 ‘부’의 총량이 커질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부’가 과연 미국이든 한국이든 사회 속에서 고르게 균점될 수 있는 것인가―필요한 것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이다.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한미 FTA가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오히려 양극화의 해소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주장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전혀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양극화 해소’ 운운하는 것은 한미 FTA에 의해 경제규모가 확대되면 이른바 적하효과(滴下效果)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떻든 증가된 ‘부’가 상층부에 집중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넘쳐서 하층부로 흘러내려옴으로써 민초들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상투적인 논리이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모든 기획에서 우선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득권자들의 이익이지 민중의 이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에서 이른바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것이 풀뿌리 민중의 삶에 얼마나 폭력적인 위해(危害)를 끼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인한 멕시코 농민과 서민사회의 궤멸적인 몰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4년 ‘나프타’가 발효된 이후 지금까지 멕시코의 농산물 시장에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값싼 미국 농산물로 인하여 수백만의 멕시코 토착 농민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왔다. 방대한 토지와 정부로부터의 막대한 보조금에 의존하는 미국의 거대 농기업이나 식품회사에 맞서서 ‘작은 땅뙈기와 노새 한 마리와 곡괭이 한 자루’가 전부인 멕시코의 토착 농민이 ‘경쟁’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멕시코 농민 공동체의 전통적인 소득의 주된 원천이자 멕시코 민중문화의 핵(核)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옥수수 농사가 절멸의 위기에 처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달리 소득원이 없는 농민들이 옥수수 농사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많은 농민들은 쇠퇴일로에 있는 농촌을 떠나 공업지대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며 저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대도시의 빈민, 부랑자로 전락하거나, 혹은 많은 경우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불법이민자가 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자신의 삶터를 떠날 수 없는 잔류자들, 특히 여성들은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많은 옥수수를 재배하기 위하여 엄청난 중노동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산 농산물로 인해 옥수수 값이 급락하는 만큼 그것을 벌충하여 최소한의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많은 농사를 지어 헐값으로라도 내다팔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멕시코 농민사회에는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농산물이 많아지고, 옥수수 값이 떨어질수록 옥수수 생산이 더욱 증대된다는 일견 모순적인 악순환이 계속되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의 소비자들이 값싼 옥수수로 인한 이익을 보게 된 것도 아니었다. 옥수수 값이 내려가면 식품비도 내려가는 게 정상일 듯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멕시코의 유명한 전통 식품 ‘토틸라’의 값은 ‘나프타’ 이전에 비해 300 내지 500% 이상 인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프타’ 이후 국민의 절반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멕시코에서 이제 영양부조(營養不調)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옥수수 가격은 급락했는데, 그것을 원료로 한 ‘토틸라’ 가격은 왜 오르는가? 그것은 ‘나프타’ 협정에 의해 ‘토틸라’에 대한 멕시코 정부로부터의 보조금이 중단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소수의 거대 식품회사가 거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토틸라’ 값을 올려왔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정부와 기업과 어용학자들은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이 이익을 볼 것이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만, 멕시코의 경우는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 논리인가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또,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94년 1월 나프타 협정이 발효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멕시코 쪽의 미국 국경의 검문, 경비 체제가 강화되고, 국경 전체에 걸친 무장화(武裝化)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클린턴 정부가 나프타 협정이 발효되면 멕시코의 민중이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월경(越境)을 시도할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나프타 협정체결 이후 14년이 된 오늘날 멕시코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거대도시 멕시코씨티 곳곳에서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시간에 수많은 아이들이 껌팔이나 구걸을 하면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와 심히 대조적으로 도시의 외곽이나 교외지대에는 ‘나프타’로 인해 더욱 부유해진 멕시코의 특권층들의 초호화 주택과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다.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심각한 사회적 격차는 오늘날 소위 글로벌 시장경제체제 하에서는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포함한 하층민의 국경간 이동은 철저히 제한하면서 오로지 자본과 상품과 엘리트들의 이동은 자유롭게 보장하고 있는 체제가 과연 진정한 개방체제인가 하는 물음이 여기서 당연히 제기될 수 있겠지만, 실은 이러한 선택적인 개방을 통해 자본이 세계의 불균등한 발전을 이용하여, 초저임금 노동력을 착취하는 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 안될 것은, 어떤 식으로 미화되든지 간에 오늘날 세계화 경제체제 하에서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가차없는 팽창과 확대를 위해서 고안된 최신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 혹은 자본주의 문명이란 구조적으로 사회적 약자와 자연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 지배, 착취를 그 내재적인 원리로 하고 있는 체제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자본주의 ‘개방’ 경제가 확대되면 될수록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생태적 위기는 필연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흔히 미 제국주의를 언급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의 심화, 확대라는 각도에서 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정확한 상황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특정 국가라기보다 자본이며, 그 자본은 이미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귀속되는 자본이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초국적 글로벌 자본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라틴아메리카 연구 전문가인 윌리엄 로빈슨 교수는 1980년~90년대를 통해서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자본이 민족 내지 국가적 자본에서 초국적 자본으로 이행해온 것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국경을 가로지르는 초국적 자본가 계급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지구사회에는 새로운 권력관계와 불평등 구조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종래의 국가가 더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나 국가간의 관계가 더이상 자본주의의 발전을 조직하는 일차적인 틀로서 사회적, 정치적 역학관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로빈슨 교수는 국민국가 중심의 사고방식에 의해서는 오늘날 세계의 흐름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2000년 9·11 사태 이후 부시 정권이 테러 대책이라는 명분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일련의 군사적 행동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 안팎에서 시민적 자유를 억압하는 조치들을 발동해온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시 정부의 행동을 미국의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지배욕망의 발로(發露)로서만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로빈슨 교수는 생각한다. 오히려 이 경우 미국정부는 미국을 중심적 기지로 삼고 있는 전세계의 실질적 지배계급, 즉 글로벌 자본의 요구에 응했다고 보는 게 좀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즉, 미국정부의 군사행동과 파시스트적 행동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과잉축적에 의한 경제 정체(停滯), 갈수록 의심받는 자본주의의 윤리적 정당성, 반세계화 시민세력의 성장 등―에 대한 정치적인 응답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세력은 단순히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이라고 하는 로빈슨 교수의 논리는 우리가 한미 FTA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요긴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한미 FTA 협상이 진행중일 때에도, 협상이 타결된 지금도, 한국의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국가적 경쟁 혹은 대립 관계라는 틀 속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 대한 종속을 염려하고, 심지어 우리들 모두가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해왔던 것이다. 아마 이러한 우려에는 부분적이나마 타당한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또한 어떤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로빈슨 교수가 말하는 초국적 자본가라는 세계적인 통치계급의 존재가 이런 사고방식에 의해서는 포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미 FTA가 성사되었을 때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단순히 한국인이나 미국인이 아니라, 한미 양국 어디든지 거점을 두고 있는 글로벌 자본가와 그들의 연합세력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미 어디든 농민과 노동자를 비롯한 풀뿌리 민중은 필연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동안 한미 FTA 협상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비판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는 이것이 준비되지 않은 졸속협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 영악하고 집요하기 그지없는 미국의 협상력을 감안할 때 이런 준비부족 상태로 시작한 한국의 협상팀이 어떻게 ‘국익’을 제대로 챙길 수 있겠는가 하는 염려의 목소리가 많았던 것이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2006년 1월에 한미 FTA 협상개시에 대한 대통령의 돌발적인 선언이 있기까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뒤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실은 이 협정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 원래 ‘한미재계회의’라는 이름의 한미 양쪽 자본가들의 회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최근에 한덕수 국무총리가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는 한미 FTA 협상이 졸속으로 진행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에 항변하여 벌써 오래전부터 기획, 준비되어 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2004년 초에 이미 ‘한미재계회의’가 이 협상의 시작을 정부에 요구해 왔다고 말하였다. 한덕수 씨는 자기도 모르게 한미 FTA의 배후에 있는 핵심세력을 언급한 셈이다.
오늘날 그 어떤 국민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도, 임명된 바도 없는 글로벌 자본가 계급은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전 지구사회와 자연세계를 자신들의 탐욕을 위한 제물로 삼고 있다. 그들 자신은 그 어떤 국가의 규제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국가라는 장치를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고, 농민 공동체를 파괴하며, 지구 환경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갈수록 시민 혹은 공민(公民)으로서의 삶은 거부당하고, 오로지 글로벌 자본주의의 존속과 확대를 위해 봉사하는 ‘소비자’로서의 삶만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한미 FTA를 둘러싼 공방에서 ‘국익’이 운위되는 것은 현실상황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국익’이란 기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정치 선동적 용어에 불과한데도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도 결국 ‘국익’이라는 말이 부리는 요술 때문에 빚어진 희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에 관련하여 행해진 한 텔레비전 토론에서 어느 일간지 의학전문기자가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황우석의 연구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대 토론자를 반박하면서 “진실보다는 국익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명언 아닌 명언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무분별한 개인적·집단적 자기확대의 욕망에 빠져 있는가를 알려주는 단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다. 한미 FTA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타결 전에는 오히려 반대여론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협상 타결이 선언된 이후 다수 여론은 이 협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실제로 어떻게 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황우석의 줄기세포에 환호했던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한미 FTA가 ‘국익’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혼란은 결국 ‘국익’이라는 환상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그리고 그 집착에 근거한 자기기만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미 FTA를 줄곧 반대하거나 비판해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국익’ 관념이 전혀 작용하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후 양쪽의 구체적인 득실이나 손익을 따지는 일은 물론 필요하고,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수행되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에만 골몰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도 틀림없다. 설령 한미 FTA 협상 결과가 ‘우리’ 쪽에 유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협정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삶을 피폐시키고, 자연세계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보와 번영’을 약속하는 허황한 수사(修辭)가 도처에서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 협정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아직도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다운 삶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허망한 ‘국익’론의 환상에서 깨어난다면 우리에게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은 기술도, 잔꾀도, 전략적 선택도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다운 대안은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되풀이하여 입증되어온 삶의 근원적 진실을 떠나서 발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참된 행복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사람끼리 어울리며, 같이 일하고, 서로 보살피는 삶 가운데서만 자랄 수 있다는 진실 말이다.
정의롭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직도 세계 도처의 풀뿌리 민중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상부상조와 연대와 협력에 기반한 호혜적 경제를 배우고 실천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글로벌 시민사회의 형성, 확대에 기여하려는 자세가 지금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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