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8.04.25 22:2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25/2008042501312.html
[문화비전] 영미 대학생들이 왜 철학 강의실에 몰릴까
자잘한 껍데기 지식들은 인터넷에 다 있어
논리적 사고와 통찰력 키우는 건 결국 철학과 인문학
이영준 /하버드대 한국문학 강사 · 영문 문예지 AZALEA(진달래) 편집장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는 마이클 샌들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다. 다 합쳐야 7000명이 안 되는 하버드 대학 학부생 중에서 수강생이 800명에 이른다. 이 강의의 주제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 관점과 방법의 도덕적 토대다. 하지만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다룬다. 플라톤, 로크, 밀, 칸트 등의 고전을 읽고 그들의 철학이 지금 여기의 현실 세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강의하고 토론한다. 소득 불균형, 대리모, 동성애자 결혼 등 사회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놓고 학생들은 열띤 토론으로 강의실을 달군다. 강의실에서 미진했던 토론은 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연장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 대학에서 인문학은 고사 직전이다. 실용과 시장 경쟁력을 추구한답시고 많은 강의가 이미 폐지됐고, 일부 대학은 철학과를 아예 없애려고 한다. 미국에서 철학 전공이 인기라는 외신의 보도는 한국의 대학에 충격이었을 것이다. 철학의 인기는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영국에선 신입사원 선발에서 철학 전공자들이 우대받는다는 가디언 지의 보도가 있었다. 기업들이 현재 원하는 것은 단편적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선입견 없이 파악해서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는 인재라는 것이다.
과학 기술 발전과 급격한 정보화는 지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표피적인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다. 논리적 사고력과 치밀한 분석력, 그리고 총체적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인재다. 그래서 철학이 인기인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인 명료한 말하기와 글쓰기 능력을 훈련시킨다. 사업가나 변호사 지망생들까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철학 강의가 누리는 인기는 21 세기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다는 신호다. 기어를 한 단계 올린 정신문화가 과학 발전과 정보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미 만들어 내고 있다. 애플 컴퓨터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좋은 예다.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어 내 컴퓨터를 인간화시켰던 그가 최근에는 아이팟으로 세계를 석권하여 젊은이들이 그가 옷 입는 것까지 모방하는 우상이 되었다.
돈이 없어 리드 칼리지를 다니다 말았지만 그는 플라톤, 호머로부터 시작되어 카프카에 이르는 그 대학의 고전 독서 프로그램이 애플 컴퓨터의 오늘을 만든 힘이라고 말하면서 거액을 기부했다. 리드 칼리지는 공부가 엄하기로 유명하지만 점수로 평가하지 않아서 학점이 없다. 전공이 따로 없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주제를 정해 공부하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소지품 도난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육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스티브 잡스는 그 학교에서 동양철학을 깊이 공부했다. 매킨토시 컴퓨터와 아이팟의 디자인 감각은 대학 시절의 서예 강좌에서 배운 것이었다고 실토했다. 그는 최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깊이 빠져 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를 배출한 리드 칼리지 같은 소규모의, 그러나 진정한 탐구를 도와주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가 미국에는 100여 군데나 있다. 거기에는 남들에겐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자신만의 주제를 붙잡고 공부에 목마른 학생들이 그득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줄세우기와 점수 경쟁에 시달리는 한국의 학생들 중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바랄 수 있을까?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 연설한 스티브 잡스는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남의 인생을 살지 마라. 너의 목마름을 추구해라. 바보 같아도 좋다." 바로 이런 태도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만들고 인문학 강의를 듣게 만든다. 인문학은 주인의 학문인 것이다. 한국의 대학도 인생의 주인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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