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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란가쿠 [蘭學, rangaku]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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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가쿠 [蘭學, rangaku]

 

일본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부터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초기에 네덜란드어를 통해 서구의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서구 사정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학풍을 일컫는 말.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에 당시 히라도[平戶]와 나가사키[長岐]의 상관(商館)을 무대로 유일하게 교섭하고 있었던 네덜란드를 통해서 서구의 학문·사상을 접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 용어는 서구 전반에 관한 연구와 지식을 총칭하는 양학(洋學)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데시마). 본래 란가쿠라는 명칭은 〈가이타이신쇼 解體新書〉(1774)를 번역한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 등이 자신들의 역술(譯述)사업을 가리켜 사용했던 것인데 나중에 이것이 서구에 대한 연구와 지식의 총칭으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란가쿠는 17세기초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섭이 개시된 이래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오란다 통사'[阿蘭陀通詞]라는 직업적인 통역관 겸 상무관(商務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상관을 출입하는 가운데 네덜란드 의사를 통해 서구의학을 접하면서 그 기술과 지식을 익히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아직 네덜란드 의사의 시술을 모방하거나 설명을 듣고 지식을 축적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해서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서구의 학문과 기술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이 〈화이통상고 夷通商考〉를 저술하여 세계지리를 소개하는 한편, 저명한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서구의 풍속·역사·지리 등을 기록한 〈채람이언 采覽異言〉·〈서양기문 西洋紀聞〉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제8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정책적인 뒷받침을 해줌으로써 더욱 진전되었다. 그 배경에는 상품경제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실용적 과학기술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는 사정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누마 시기[田沼時期 : 1768경~86경]에 한층 활발해졌는데, 그 기념비적인 성과가 〈가이타이신쇼〉의 간행이었다. 이 책은 독일인이 저술한 해부학 책의 네덜란드 번역본을 4년에 걸쳐 재번역한 것으로, 서양 의학에 대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소개이자 연구로 란가쿠 발전에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가이타이신쇼〉의 간행 이후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든 란가쿠는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의학, 또는 이와 밀접한 본초학(本草學)이며, 둘째는 천문역학, 세째가 세계지리학이다. 이들은 더욱 세분화되어 의학의 경우 식물학·약학·화학으로, 천문역학의 경우 물리학 계통으로, 지리학은 서구 역사 연구와 전반적인 인문·사회과학 연구로 발전되었다. 이들 연구의 기반이 된 네덜란드어 연구로는 이나무라 산파쿠[稻村三伯]가 편찬한 최초의 난일(蘭日)사전 〈하루마와게 波留麻和解〉가 있다. 란가쿠가 발전하는 데에는 란가쿠주쿠[蘭學塾]의 역할도 컸다. 1823년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로 부임한 독일인 시볼트는 바쿠후의 허가를 얻어 나가사키 교외의 나루타키[牧瀧]에 진료소를 겸한 나루타키주쿠를 열어, 의학을 비롯해 천문학·역학·지리학·식물학 등을 가르치면서 이토 겐보쿠[伊東玄朴] 등을 배출했다. 또 1838년 오카타 고안[緖方洪庵]이 오사카[大阪]에 설립한 데키주쿠[適塾]에서는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 후쿠자와 유키치[澤諭吉] 등이 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란가쿠의 발달에 있어서 공통적인 특징은 실용주의적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19세기초 러시아·영국 등 서구 열강이 접근해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란가쿠에서 기대하게 되었다. 즉 란가쿠에 의해 서구의 군사학·항해술·축성술 등 군사적 과학기술과 외국 지리학을 좀더 깊이 배울 필요성이 생겨났던 것이다. 특히 아편전쟁과 페리 내항(來港) 이후 란가쿠는 '기술의 학문'이라는 성격을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개국 이후 서구 열강과 외교·무역관계가 형성되자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졌고, 특히 에도·요코하마[橫浜] 등지에서는 영어의 습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네덜란드어 대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것은 이러한 시대상을 대변해 주는 일례일 것이다. 이때부터 '양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바쿠후는 1811년 양학 연구기관으로서 반쇼와게고요[蕃書和解御用]를 설치하고 일류 학자를 모아 백과사전 등 서구 저작의 번역물을 간행해내고 1855년에는 이를 독립시켜 요가쿠쇼[洋學所]로, 이듬해에는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로 개칭해서 란가쿠뿐 아니라 영어·프랑스어·지리학·화학·군사학 등 서양 과학을 가르쳤다. 또한 다카시마 슈칸[高島秋帆]을 초빙해 양식포술(洋式砲術)을 가르치고 반사로(反射爐)를 설치해 총포를 주조하기도 했다.

 

바쿠후는 란가쿠·양학을 장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시볼트 사건(1828)이나 반샤[蠻社]의 옥(獄)(1839) 등 탄압정책을 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외압에 대응하고자 장려정책을 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란가쿠·양학의 발달은 근본적인 한계점을 안고 있었다. 즉 서양과학의 발달에 기초가 되었던 이론·사상 면에서 근대적 합리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어 단지 자연과학·기술의 성과를 흡수하는 데 그쳤다는 점이다. 이른바 '화혼양재'(和魂洋才)식의 대응방식이 당시 학자에게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에 란가쿠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발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쿠후와 한[藩]의 부국강병책에만 기여하는 실학(實學)으로 그치게 되었다.

 

BIE| 沼田次郞 글 | 任城模 참조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