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08.06.02 03:01
http://www.donga.com/fbin/output?f=i__&n=200806020147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고 대통령이 버럭 역정을 냈다고 하는데, 과연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답다. 그러니 국민을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종업원 부리듯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이렇게 키운 책임의 8할은 대통령과 그 집권세력이 져야 마땅하다.
야당 대표가 말했듯이, “이성적 판단 못지않게 국민 생각이 중요하다”. 국민의 다수가 광우병 걸린 미국 소가 들어온다고, 그래서 정부가 제 국민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쇠고기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 정부가 국민의 적(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손들어라, 국민 앞에 백기 투항하라! 이것이 국민의 명령이라면,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운명이다.
정부는 국민의 명령에 따라야
나는 밤샘 시위에 물대포도 아랑곳 않는 시위군중의 ‘참을 수 없는 순정’을 믿는다. 이런 전제에서 감히 한마디 하고자 한다. 무능하고 교만한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부를 무릎 꿇리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엄연한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은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을 채워야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유능하고 겸손한 민주정부를 세워야 우리의 뜻이 이루어진다.
사족이지만, 필자는 바로 이 ‘동아광장’을 통해 여러 차례 역설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시대의 개막에 가슴 부풀어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뀐다고 우리 팔자가 펴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굳이 문자를 쓰자면,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직면한 구조적 숙명인 것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일상화되다시피 하는 현실을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쇠고기 시위’에서 보듯이 우리 국민의 주권의식은 높기만 하다. 위에서 지시한다고 더는 따를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상충되는 5000만 국민을 민주적으로 화합시켜 나간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데 있다. 지난 10여 년 세월 동안 한국 정치가 악화일로를 걸어온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취임 100일 만에 휘청대는 이명박 정부를 남의 일 보듯이 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입장이나 파당적 걱정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 정부’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참고 기다리며, 더러는 눈도 감아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순정을 빙자해서 정치적 이득을 도모하려는 불순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내각 총사퇴 운운하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자들이 과연 ‘우리 편’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 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지향한다. 민주와 공화의 접합이 절묘하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 됨을 선언하는 한편, 그 주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적시하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이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 역시 지혜와 겸양을 갖추어야 한다. 괴담과 선동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 뜻과 다르더라도 장기적 국가 이익에 손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혜-겸양 갖춰야 진정한 주인
시대는 바뀌었다. 대통령을 무서워하던 때는 벌써 지났다. 국민이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이 권력자를 향해 ‘아니요’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일반 국민 중에서 이 최고 권력자를 향해 쓴소리를 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청와대를 향해 몰려드는 저 함성 앞에서 국민주권의 통쾌함을 느낀다. 그런 한편, 절제되지 않는 대중의 힘에 대한 공포와 전율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역설이다. 국민이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팔자가 달라진다. 촛불은 늘 켜놓고 있어야 한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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