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스님의 일대기
무명은 본래 없는 것
무명(無明)이란 밝지 못한 마음, 가려진 마음이다.
밝지 못한 마음이 나면
본래 밝고 깨끗한 자기를 잊어버리고 바깥 경계에 동요하게 된다.
어떤 처녀가 한 농군을 보았다.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고 직분도 좋고 가문도 좋았다.
남이 알까 모르게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아, 저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남몰래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습니다.’
상대방도 그 편지를 받고 받아들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면 언제 한 번 만납시다.”
그렇게 해서 만나고 나니 마음이 더욱 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저를 어떻게 내 애인을 만들까 하는 생각에서
눈·귀·코·혀·몸 뜻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받아들이는 것이 따뜻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서는 좋지 않은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은 다 버리고 좋은 점만 사랑하였다.
사랑하다보니 통째로 갖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는 것을 하였다.
그랬더니 뜻밖에 거기서 아이를 배더니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좋아서 어찌나 기쁘던지
“어허둥둥 내 사랑아 - ” 하고 먼저
사랑하던 애인 이상으로
그것들을 사랑하고 기쁘게 길렀다.
그랬더니 나이가 드니 점점 노쇠해지더니
병이 들고 갖가지 고통거리가 생겨
슬픈 정경을 바라보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괜히 왔다 가는구먼 -.”
그때사 깨달았다.
“낳아도 안 낳아도 상관없는 것.
내 가슴만 이렇게 찢고 간다.”
고 후회하였다.
이것이 12인연이다. 최초의 일념 남자와 여자를
보는 최초의 일념, 그것이 무명이다.
남자라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그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보았기 때문에 그 최초의
한 생각에 의해서 편지를 쓰는 행(行)이 이루어지고,
피차가 서로 알게 되는 식(識)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좋아한다는 명색(名色)이 붙고,
눈·귀·코·혀·몸·뜻(六入)으로 접촉하여
그 좋은 것을 받아들여[受], 사랑하고[愛],
사랑하다보니 아주 자기 것을 만들어[取],
한 살림을 차리고[有], 한 살림을 차려
살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生].
난 것이 어느새 늙어[老], 병들고[病],
갖가지 고통사를 연출하다가
그만 죽어버리니[死] 그것이 인생이었다.
‘차라리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하고 후회를 하여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어떤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어디 인생뿐이던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생장노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바보처럼 살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무명에 의해서 일으키는 결과는
이렇지만 명(明)에 대한 일은 이런 결과가 없다.
밝고 밝은 마음에는 취하고 버리는 것도 없고,
예쁘고 미운 것도 없고 나고 죽는 것도 없으므로
그 속에서 일어나는 만 가지 행사는 생사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생활은 명(明)의 생활이요,
지혜의 생활이다. 명·지혜가 없는 생활은 고통의 생활이다.
명에 의한 삶은 설사 고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늙든지, 죽든지, 병들든지 상관이 없다.
늙으면 늙어서 좋고 병들면 병들어서 좋은데
공부하고 죽으면 죽어서 교훈을 남긴다.
제불보살들이 죽어서 ‘선명(善名)’을 남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그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갑자기 바람처럼 생기는 것이므로
‘홀연무명(忽然無明)·
무명풍(無明風)’이라 말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생긴다.
한 파도가 생기면 만 파도가 생긴다.
그래서 일파자동만파수(一波磁動萬波隨)라고 하지 않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그런데 꼭 시키는 것과 같거든,
그것은 신이 시키고 귀신이 장난한 것이
아니고 전생에 맺었던 인연력(因緣力)이 통한 것이고,
욕심이 동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을 보는데도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거든,
다 이것도 인연 때문이야.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이 12인연을 시간적으로
3세에 배대하여 무명, 행은 과거의 업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까지는
금생에 맺어 일어난 인연이며,
생, 노사우비고뇌는 미래의 결과다.
이렇게 하여 삼세양중인과
(三世兩重因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무명을 맹목적인 삶에 비유하여 목적 없이
눈에 띄이는 대로 집착된 생활을 한 결과를
이 12인연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고,
하나의 인생을 생리학적인 면에서
설명하여 놓은 사람도 있다.
예컨대, 부모님들의 맹목적인 사랑은 무명, 행이요,
어머니 태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식이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고,
눈·귀·코·혀·몸·뜻이 생겨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명색·6입·촉이며,
태어나서 온갖 것을 받아들이고·사랑하고
·취하여 자기의 소유를 만드는 것은 수·애·취·유며,
다시 제2의 생명을 낳아 늙고 병들어 죽게
한 것은 생노사우비고뇌다.
이렇게 설명한 이도 있다.
어쨌든 12인연은 이 세상 만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성·주·괴·공하고 생·주·이·멸. 생장노사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만드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다.
콩을 갖다가 두부를 만들 때 갈아서 간수를 치고
엉기게 하여 순두부를 만들어 놓고 가다를 들이대는데,
그 틀을 둥글게 할 것이냐 모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린 것 아니다.
만들어 놓고 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쁘다·
밉다·잘 생겼다·못 생겼다 하지만 결국 그 놈을
뚝배기 속에 들어가 보글보글 끓다가 입 속에
들어가면 진국만 다 빨리고 나머지는
똥이 되어 화장실에 배설된다.
허망한 일이지, 그러니 무상하다고 않겠는가?
그러나 그 무상 속에서 이 세상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것도 우습게 생각하니까
우습지 멋있게 생각하면 또 멋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생각이고 마음이다.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무명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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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 조실이신 숭산선사의 출가-수행-인가과정
1. 출가 숭산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총독의 압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은 극심하게 탄압 받고 있었습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2.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햇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셋째 날에 숭산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스님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결국 스님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선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3. 득도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였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무명은 본래 없는 것
무명(無明)이란 밝지 못한 마음, 가려진 마음이다.
밝지 못한 마음이 나면
본래 밝고 깨끗한 자기를 잊어버리고 바깥 경계에 동요하게 된다.
어떤 처녀가 한 농군을 보았다.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고 직분도 좋고 가문도 좋았다.
남이 알까 모르게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아, 저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남몰래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습니다.’
상대방도 그 편지를 받고 받아들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면 언제 한 번 만납시다.”
그렇게 해서 만나고 나니 마음이 더욱 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저를 어떻게 내 애인을 만들까 하는 생각에서
눈·귀·코·혀·몸 뜻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받아들이는 것이 따뜻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서는 좋지 않은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은 다 버리고 좋은 점만 사랑하였다.
사랑하다보니 통째로 갖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는 것을 하였다.
그랬더니 뜻밖에 거기서 아이를 배더니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좋아서 어찌나 기쁘던지
“어허둥둥 내 사랑아 - ” 하고 먼저
사랑하던 애인 이상으로
그것들을 사랑하고 기쁘게 길렀다.
그랬더니 나이가 드니 점점 노쇠해지더니
병이 들고 갖가지 고통거리가 생겨
슬픈 정경을 바라보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괜히 왔다 가는구먼 -.”
그때사 깨달았다.
“낳아도 안 낳아도 상관없는 것.
내 가슴만 이렇게 찢고 간다.”
고 후회하였다.
이것이 12인연이다. 최초의 일념 남자와 여자를
보는 최초의 일념, 그것이 무명이다.
남자라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그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보았기 때문에 그 최초의
한 생각에 의해서 편지를 쓰는 행(行)이 이루어지고,
피차가 서로 알게 되는 식(識)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좋아한다는 명색(名色)이 붙고,
눈·귀·코·혀·몸·뜻(六入)으로 접촉하여
그 좋은 것을 받아들여[受], 사랑하고[愛],
사랑하다보니 아주 자기 것을 만들어[取],
한 살림을 차리고[有], 한 살림을 차려
살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生].
난 것이 어느새 늙어[老], 병들고[病],
갖가지 고통사를 연출하다가
그만 죽어버리니[死] 그것이 인생이었다.
‘차라리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하고 후회를 하여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어떤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어디 인생뿐이던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생장노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바보처럼 살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무명에 의해서 일으키는 결과는
이렇지만 명(明)에 대한 일은 이런 결과가 없다.
밝고 밝은 마음에는 취하고 버리는 것도 없고,
예쁘고 미운 것도 없고 나고 죽는 것도 없으므로
그 속에서 일어나는 만 가지 행사는 생사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생활은 명(明)의 생활이요,
지혜의 생활이다. 명·지혜가 없는 생활은 고통의 생활이다.
명에 의한 삶은 설사 고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늙든지, 죽든지, 병들든지 상관이 없다.
늙으면 늙어서 좋고 병들면 병들어서 좋은데
공부하고 죽으면 죽어서 교훈을 남긴다.
제불보살들이 죽어서 ‘선명(善名)’을 남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그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갑자기 바람처럼 생기는 것이므로
‘홀연무명(忽然無明)·
무명풍(無明風)’이라 말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생긴다.
한 파도가 생기면 만 파도가 생긴다.
그래서 일파자동만파수(一波磁動萬波隨)라고 하지 않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그런데 꼭 시키는 것과 같거든,
그것은 신이 시키고 귀신이 장난한 것이
아니고 전생에 맺었던 인연력(因緣力)이 통한 것이고,
욕심이 동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을 보는데도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거든,
다 이것도 인연 때문이야.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이 12인연을 시간적으로
3세에 배대하여 무명, 행은 과거의 업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까지는
금생에 맺어 일어난 인연이며,
생, 노사우비고뇌는 미래의 결과다.
이렇게 하여 삼세양중인과
(三世兩重因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무명을 맹목적인 삶에 비유하여 목적 없이
눈에 띄이는 대로 집착된 생활을 한 결과를
이 12인연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고,
하나의 인생을 생리학적인 면에서
설명하여 놓은 사람도 있다.
예컨대, 부모님들의 맹목적인 사랑은 무명, 행이요,
어머니 태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식이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고,
눈·귀·코·혀·몸·뜻이 생겨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명색·6입·촉이며,
태어나서 온갖 것을 받아들이고·사랑하고
·취하여 자기의 소유를 만드는 것은 수·애·취·유며,
다시 제2의 생명을 낳아 늙고 병들어 죽게
한 것은 생노사우비고뇌다.
이렇게 설명한 이도 있다.
어쨌든 12인연은 이 세상 만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성·주·괴·공하고 생·주·이·멸. 생장노사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만드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다.
콩을 갖다가 두부를 만들 때 갈아서 간수를 치고
엉기게 하여 순두부를 만들어 놓고 가다를 들이대는데,
그 틀을 둥글게 할 것이냐 모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린 것 아니다.
만들어 놓고 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쁘다·
밉다·잘 생겼다·못 생겼다 하지만 결국 그 놈을
뚝배기 속에 들어가 보글보글 끓다가 입 속에
들어가면 진국만 다 빨리고 나머지는
똥이 되어 화장실에 배설된다.
허망한 일이지, 그러니 무상하다고 않겠는가?
그러나 그 무상 속에서 이 세상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것도 우습게 생각하니까
우습지 멋있게 생각하면 또 멋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생각이고 마음이다.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무명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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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 조실이신 숭산선사의 출가-수행-인가과정
1. 출가 숭산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총독의 압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은 극심하게 탄압 받고 있었습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2.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햇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셋째 날에 숭산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스님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결국 스님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선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3. 득도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였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출처 : 한손에 연꽃을 들어보이며
글쓴이 : [應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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