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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스크랩] [박상익]노평구 선생님과의 만남(2004년 9월 12일 1주기 강연내용)

by 마리산인1324 2006. 12. 30.

[박상익]노평구 선생님과의 만남


아모스와 호세아

헤아려보니 제가 선생님을 만난지 금년 들어 햇수로 벌써 30년이 됩니다. 제가 노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것은 선생님 연세가 회갑을 넘긴 후였습니다. 제가 선생님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따금 무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선생님은 여태껏 제가 만난 누구보다도 사랑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여담 한마디 하겠습니다. 70년대 후반 YMCA 2층에서 있었던 성서집회에 류영모 선생께서 참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류영모 선생을 뵐 수 있었습니다. 노선생님은 강의가 끝난 후 맨 뒷자리에 앉아계신 류영모 선생께 앞으로 나오셔서 한 말씀 해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류 선생님은 앞에 나오셔서 칠판에 영어 단어를 세 개 적으셨습니다. man, human, humane 이란 단어였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되었다가 ‘자비로운 인간’이 된다는 인간 성장의 단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저는 노선생님이 ‘humane’ 하신 단계에서 가르침을 받은 게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 글을 통해 추측해보면 50, 60년대의 선생님의 풍모는 예언자적인 준열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아모스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반면 제가 가르침을 받았던 만년의 선생님은, 물론 때로 추상같은 질타와 분노를 폭발시킨 예언자의 모습도 간직하셨지만, 그래도 제 기억에 선생님은 대체로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호세아와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무교회 대학

저에게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은 사실상의 ‘대학’이었습니다. 다니던 대학은 형식적인 절차였고, 알맹이는 선생님을 통해 습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문의 형식과 방법은 대학에서 배웠지만 학문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부분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장문강, 임세영 두 분은 저의 클래스메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로와 광화문 일대는 선생님과 함께 거닐던 캠퍼스였습니다.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분에 넘치는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주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종종 해주셨습니다. 특히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의 전공을 철저히 공부할 것을 누누이 당부하셨습니다. 70년대 후반 강원도 설악산 하기집회 때라고 기억합니다. 집회 마지막 날 감화회에서 선생님은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려거든 일단 박사학위를 딴 다음에 하라.” 그 자리에 있었던 대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학문적 수련을 쌓은 다음 성경 공부에 들어갈 것을 강조한 말씀은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차례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이런 말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반발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집회에 함께 참석했던 한 선배가 “또 박사 타령이시군.”하고 빈정대는 것을 제 귀로 직접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박사학위라는 것은 학문적 완성의 증표가 아닙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선생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사실 선생님은 젊은 날 쓰카모토 선생 문하에서 10년간 성서연구를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수준 높은 독서를 하셨고, 형식적 학위만 없었다 뿐이지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일생 독자적으로 정신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노평구전집>이 16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만, 순전히 양적인 면으로만 봐도 우리나라 대학교수 가운데 이만한 업적을 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인문학 교수들 가운데 변변한 저서 한 권 못 내고 정년을 마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선생님이 박사 운운 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젊은이들에게 장래를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해둘 것을 당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신적인 일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격려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사실 한국기독교가 전반적으로 그러하지만 무교회에도 반(反)지성적인 성향이 암암리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70년대 강원도에서 있었던 하기집회에서 쉬는 시간에 여럿이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군대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선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군대에서 내무반에 앉아 <Time>지 읽는 녀석들 보면 참 아니꼽더라.” 그러나 당시 대학생이던 임세영 교수가 이렇게 쏘아 붙였습니다. “그럼 <선데이서울>은 읽어도 되고 <Time>지는 읽으면 안 됩니까?” 통쾌한 일격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년층과 비기독교인에게 초점 맞춰야

언어학자 중에 유진 나이다(Eugene Nida)라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분을 유희세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 이론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학자입니다. 특히 성서 번역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를 한 것으로 유명한 분인데, 이 분은 성경 번역의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번역의 언어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에 우선한다. 성경은 반드시 비기독교인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면 기독교인에게도 저절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중장년층이나 어린아이의 언어가 아닌 2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우선권을 갖는다.”


성경 번역이 비기독교인과 청년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선생님이 청년들에게 공부를 권면하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자주 하신 것도 나이다가 말한 두 가지 번역 원칙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청년층과 비기독교인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선생님은 노년, 장년층보다는 각별히 청년층에 초점을 맞추고 학문적 수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연구 결과를 대외적으로 발표할 때 비기독교인에게도 설득력을 가지려면 학문적 역량의 축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도 여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무교회에서 축적된 신앙 내용이 밖으로 공표될 경우 무엇보다도 청년층과 비기독교인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비기독교인에 대한 설득을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히려 몰상식한 행태 때문에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공백을 무교회가 메워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신동아> 같은 세상 잡지에도 글을 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곤 하셨는데, 저는 이를 비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학문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에 ‘무교회학파’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임세영 교수와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입니다만, 마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저변에 깔고 있었듯이, 무교회 기독교신앙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전공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그룹이 등장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드리는 이 말도 20대 후반의 청년층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언필칭 진리의 종교라면 비기독교인에게도 학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전독서회와 진로 결정

노 선생님은 70년대에 저희들을 위해 고전독서회를 열어주시기도 했습니다. 50년대에 의대생들을 중심으로 하다가 중단된 독서회를 대학생 몇 명을 위해 다시 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YMCA에서 성경강의가 끝나면 청계천 5가 쪽에 있던 석진우 사장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서 독서회를 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을 읽었고, 호메로스의 <일리어드>는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이 무렵 우치무라전집에서 <종교와 문학>, <시인 휘트먼> 등에 심취해 있어서 한창 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재주도 신통찮은 주제에 뒤늦게 문학에 대한 열정이 생겼나 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면 어떨는지 여쭤본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역사학이 얼마나 좋은 학문인데 그걸 바꾸려 하느냐?” 선생님은 일본에서 공부하실 때 대학에서 역사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할 생각도 가지셨던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그런 배경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여하튼 저는 그 후 선생님 말씀대로 역사 쪽으로 전공을 굳혔지만, 그래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결국 밀턴을 주전공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도 듣고 제 고집도 관철시킨 셈입니다. 제가 밀턴을 주전공으로 삼은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의 고전독서회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선생님의 말씀에 늘 순종만 하는 제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 학비 마련을 겸해서 직장을 몇 군데 옮겨 다니곤 했는데, 매번 선생님께는 아무런 상의 없이 제멋대로 사표를 쓰고 뛰쳐나오곤 해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군은 왜 선배를 무시하는가?” 지금도 걱정스런 얼굴로 꾸짖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교정 작업

70년대 말에는 장문강, 임세영 군과 함께 선생님의 저서 교정 작업을 도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종교와 인생>, <로마서강의>, <마태복음강연>(여러 해 전 <노평구전집>으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등의 책을 만들고 계셨는데, 젊은이들을 불러내어 문장을 교열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서울역 후문 쪽으로 기억합니다만, 뒷골목 허름한 다방에 온종일 앉아 꽤 오랜 기간 선생님과 함께 교정을 보았습니다.

 

유신 말기에 다방에 설치된 텔레비전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천절 기념사를 하던 장면을 선생님과 함께 시청하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그 때의 암울하고 짓눌린 듯한 기분도 기억납니다. 오래 앉아 있자니 다방 주인에게 눈치가 보여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것저것 마실 것을 주문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오래 시간을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루터의 탁상담화,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동경에서의 생활을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대국민 홍보용으로 뉴스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미군들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휴식을 취하는 광경을 보여주면서, 해설자가 미군은 저렇게 군인정신이 해이해져 있으니 일본군이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해설을 듣고 오히려 일본군의 패망할 것을 직감하셨다고 했습니다. 유신 말기의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저희 젊은이들이 교정하느라 수고한다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셨습니다. 서소문 중앙일보 뒤의 냉면집, 무교동의 돈가스 집, 플라자호텔 뒤 물만두 집, 광화문 교보 앞의 일식집, 종로 1가의 떡집 등을 종종 갔습니다. 교정보는 젊은 친구들이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면 선생님은 거의 전적으로 젊은이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마음대로 고치라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한글세대가 아닌 당신의 한계를 잘 아셨기 때문에 글쓰기에 관한 한 저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습니다. 때로는 어떤 문장이 옳은가를 놓고 문법지식을 총동원 하면서 격론이 벌어진 적도 많았습니다. 특히 어학에 소질이 많았던 장문강 군이 문법적인 문제를 앞장서서 제기했습니다.

 

저는 이 시기에 선생님 책을 교정보면서 가외의 소득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편집과 인쇄, 교정 부호 등 출판 전반에 관련된 각종 기법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쇄공들이 납으로 된 활자를 나무판 위에 놓고 고무줄로 묶어 조판하는 광경도 그 때 처음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모든 인쇄가 컴퓨터 조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인쇄공 중에 사회주의자가 많다는 이야기도 그 때 선생님에게 처음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번역, 저술 등 출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노선생님을 도와드리면서 얻은 출판 지식은 그 후 저의 저술 활동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경 공부 권면

80년대에 들어서 선생님은 후학들의 성경 공부를 장려하려는 취지에서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공부하여 결과를 발표하도록 종용하셨습니다. 각 사람의 성향과 소질에 맞게 공부 과제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제게는 역사를 전공한다는 이유로 구약 소예언서를 공부해 볼 것을 권하셨고,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구약 주해서를 수십 권 제게 주셨습니다. 이 책은 원래 이기백 선생께서 해방 전 일본에서 공부하실 때 구입해 오신 것인데, 이찬갑 선생께서 책 주인은 성경 공부에 뜻이 없으니 필요 없다고 하시며 노선생님께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12소예언서와 구약의 몇몇 책을 공부해서 주일 성서집회에서 발표했고 그 결과물을 매번 <성서연구>지에 실었습니다. 그 원고를 한데 모아 나중에 부키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무 난관 없이 순탄하게 출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원고가 천덕꾸러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는데, 마침 그 출판사에 놀러갔던 부키출판사 사장의 눈에 띄어 다행히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책 출간이 인연이 되어 <김교신전집>이 복간되고 본격 상업 출판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김교신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그 해에 말입니다. (100주년 되던 해에 출간하려는 계획도 전혀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김교신전집>이 새 옷을 입고 출간된 것도 연원을 소급해보면 선생님이 저에게 성경공부를 독려하신 덕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차후 노선생님의 글도 편집을 해서 단행본으로 낼 생각으로 있습니다.


나도 남잔데

선생님은 교제의 폭이나 관심 범위에서 전방위적, 전천후적 신앙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우 관계를 보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아래로는 빌딩 청소부 아줌마에서 시작해서 위로는 총리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간관계를 아우르고 계셨습니다. 흔히 정치인들 중 교제의 폭이 넓은 사람을 일컬어 ‘마당발’이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마당발이셨습니다. 정치인들이 일정한 목적을 갖고 인맥관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선생님은 아무런 의도 없이 그야말로 진실과 선의로써 모든 사람을 대하셨습니다. 19세기 미국 맨해튼 부두에서 나룻배 사공들과 흉허물 없이 교제하던 시인 휘트먼의 풍모가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예술 방면에도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대학시절 선생님과 함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갔던 기억도 있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대만출신 화가 장대천 화백의 그림을 함께 구경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긴 선생님의 어린 시절 꿈이 화가였다고 했습니다.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볼쇼이 발레단 등 각종 무대 공연을 관람하신 후 대단하다고 감탄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공자 말씀에 군자불기(君子不器)란 말이 있지만 선생님은 틀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신 거인이었습니다. 신앙의 자이언트였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에 비하면 저를 비롯한 무교회 3세대는 다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하나의 ‘기’(器)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소해진 모습입니다.

 

선생님은 가끔 “나도 남잔데 말이야……” 하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남자로서, 장부(丈夫)로서 민족과 사회를 위해 사심 없이 온 몸을 던지겠다는 결의를 내비치신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사석에서 선생님께 “선생님, 저는 사람이 부족해서 소기만성(小器晩成)이나 하겠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허허 웃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만성이라도 좋으니 소기라도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Death is real

선생님을 30년 동안 따라다니며 배웠다고 하면서도 정작 신앙적인 면에서는 별 진보가 없습니다. 기독교 인문학 한다면서 세상 학문을 겨우겨우 따라잡기에 급급했습니다. 현대 학문이 다 그렇지만 제가 공부하는 역사학은 지극히 ‘인간적’인 학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극히 ‘현세적’인 학문입니다. 더구나 저는 어린 시절 기독교적인 배경이 전혀 없이 자랐던지라, 노선생님을 만난 후에도 신앙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 같이 겉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신앙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은 것은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제가 만난 분 중 가장 진실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시인 롱펠로(Longfellow)가 쓴 ‘인생 찬가’(A Psalm of Life)란 시가 있습니다. 꽤 긴 시인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Life is but an empty dream!”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For the soul is dead that slumbers,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And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만물은 겉모습 그대로가 아니니라.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인생은 현실이다! 인생은 사실이다!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그리고 무덤이 그 종착점은 아니다.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Was not spoken of the soul.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이 아니다.


이 시에 보면 ‘인생은 현실이다’(Life is real)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끔 이 구절을 바꿔서 ‘Death is real’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죽음이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나이 50을 넘기면서 가끔씩, 아주 가끔씩 이긴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먼발치에서나마 느끼곤 합니다. 특히 어쩌다 몸에 고장이 생기기라도 하면 죽음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고통의 그 순간 그리스도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하나님 앞에 혼자 납작 엎드리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모두 용서가 됩니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멀쩡해지면 그것을 까맣게 다시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 세상 모든 학문은 그것이 아무리 고매한 것일지라도 ‘죽음’을 전제로 하지는 않습니다.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세속주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모든 학문은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 즉 삶만을 탐구의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학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세상일이라는 게 대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여기면서 전개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더욱 중요한 현실을 도외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문을 포함해서 모든 세상일이란, ‘삶’이라고 하는 반쪽짜리 현실을 현실의 전부라고 보고, 그 기반 위에서 모든 논의를 전개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말씀은, 삶과 죽음 양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고 말해주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Death is real’, 즉 죽음이야말로 인생의 사실이란 점을 느끼는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란 말이 있지만 저는 이 나이에 흐릿하게나마 이를 느낀 것을 저의 ‘지천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판단할 때 노선생님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죽음을 느끼고 기독교 신앙에 입신한 것입니다. 예민한 도덕적 양심을 통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원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점은 김교신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 개인의 신앙의 성장은 그의 도덕적 진실성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선생님은 가끔 맥아더 장군 이야기를 하시면서 맥아더가 일본에서 점령군 사령관으로 재임할 때 일본인의 정신 연령이 12살에 불과하다고 말 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괴테 이야기를 하시면서 괴테와 보통 사람과의 정신적 수준의 차이는 보통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와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같은 인간이라도 정신적 수준에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신앙적 수준의 차이란 결국 진실성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사이에 김교신 선생이나 노평구 선생 같은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 분들만한 도덕적 진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섬광을 응시하지 말아야

한국 무교회신앙의 역사를 20세기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볼 때 전반기를 이끈 인물이 김교신 선생이라면 후반기를 이끈 분은 바로 노평구 선생님입니다. 1세대를 김교신 선생이 대표하셨다면 2세대를 대표한 것은 노평구 선생님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미 새 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3세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노평구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남잔데” 하시며 일생을 바쳐 사랑했던 조국의 현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노선생님을 추모하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저 추모만 하는 자리여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목적만으로 이 자리를 만들었다면 생전의 성품으로 미루어 아마 선생님은 우리를 마땅치 않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시인 밀턴은 종교개혁자인 츠빙글리와 칼뱅을 ‘섬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밀턴은 이 섬광을 너무 오래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빛은 응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부신 섬광을 오래 쳐다보면 앞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빛을 등불 삼아 우리의 앞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불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선생님이 하나님 앞에 선생님의 길을 걸었듯이 우리도 우리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해마다 선생님을 추모하는 자리가 열리겠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듯이 ‘아무개 기념사업회’ 식으로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추모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은 곤란합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신앙과 이상을 박제하여 박물관에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빛으로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앞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있는지를 보고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선생님에게 배운 신앙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광야에서 외치는소리
글쓴이 : 박상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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