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그러니까 2001년 이맘때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으로 떠들썩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무교회가 본래 떠들썩한 행사와는 거리가 있어서 다들 그 해가 100주년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때맞춰 『김교신전집』이 복간 되었고, 또 ‘100’이란 숫자가 갖는 상징성 덕분에 언론에서도 김교신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2001년이야말로 김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주목을 받았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김교신과 윤치호
김교신은 살아생전 단 한번도 남들 앞에 내세울만한 지위나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45년 생애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27살부터 45살까지, 19년이었는데, 그 중 27살에서
42살까지의 16년간을 중등학교 평교사로 근무했습니다. 19년 공생애의 대부분을 평교사로 있었던 셈입니다. 교장은커녕 교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한 생애를 살았고, 죽는 날까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렇다할 관심을 모은 적도 없었습니다. 월간잡지
『성서조선』을 간행했지만 독자는 300을 채 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윤치호(1865-1945)와 아주
대조적입니다. 윤치호는 김교신보다 나이가 36살이나 연상입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김교신과 같은 해인 1945년 12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근대사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윤치호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는 이미 19세기말에 일본,
중국,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온,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습니다.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지냈고, 한국 YMCA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제시대 조선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 중 하나였습니다.
윤치호는 1930년에는 기독교 조선 감리회의 탄생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조선
기독교계의 거물이었습니다. 평신도였지만 교계에서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습니다. 1940년대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장까지 지냈습니다. 연희전문은 당시
기독교 교육기관 중 최고 권위를 자랑했던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1945년 김교신이 흥남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린 조선인 노동자들을
간호하다 감염되어 사망한 4월, 바로 그 달에 윤치호는 일본 귀족원의 칙선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 친일파의 대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해 12월에 뇌일혈로 사망합니다.)
요컨대 윤치호는 좋은 집안 배경과 뛰어난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평생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영향력을 한껏 누리며, 1930년에서 1945년까지 조선 최고의 원로로서 행세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교육계, 정계,
종교계에서 명실 공히 거물급 인사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워 당시 조선 땅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1883년부터 해방
직전인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날마다 영어로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윤치호일기』라는 제목으로 11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1973-1989년). 얼마 전에는 그 일부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습니다(역사비평사).
윤치호에
비하면 김교신의 생애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교신은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의 양정고보, 제일고보(현 경기고), 개성의
송도고보 등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성서조선』을 158호까지 간행했습니다. 그는 한 집안이 가장이자 교직에 종사하는 평신도로서, 19년
공생애(27-45세)의 대부분을 적자투성이 월간 잡지 발행에 바쳤던 것입니다.
잡지를 자전거에 싣고 시내 서점에 배달할 때면 등
너머로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서점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것도 잡지라고’, ‘팔리지도 않는 잡지’ 등등의 비웃음을 사야만
했습니다.
교계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은 경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김교신전집』을 보면 김교신이 YMCA에서 집회를 가지려다가
무교회주의자란 이유로 거절당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윤치호는 바로 그 무렵 서울 YMCA 회장과 YMCA 연합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아마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 윤치호는 김교신 같은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의
심판
흔히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을 박은 다음에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학자들은 평가 시점을 그보다는 조금 늦춰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대략 한 세대, 그러니까 30년 정도
흘러야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비밀 외교문서를 30년 정도가 지나면 일반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김교신은
윤치호와 같은 해인 1945년에 작고했습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60년이 다 되어갑니다. 두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충분히
가능해진 시점입니다. 역사적 평가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에 대한 평가의 윤곽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당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은 학식과 지위와 명성을 누렸던 한 사람은 오늘날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개 평교사에 지나지 않았던 또 한 사람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김교신전집』 뒤표지에는
‘백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 김교신’이라고 큼직한 활자로 씌어 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분의
신앙과 애국을 기리는 모임까지 마련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김교신과 관련된 한 가지 소식을
알려드려야겠습니다. 전국 초중등학교에 재직하는 크리스천 교사들이 만든 ‘기독교사연합’이란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좋은 교사』라는
월간잡지도 펴내고 있습니다. 이 잡지 2001년 10월호에는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좇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김교신의 신앙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김교신전집』이 막 복간되기 시작한 무렵이라서, 이 기사를 통해
많은 교사들에게 김교신과 『김교신전집』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사연합이 금년부터 해마다
모범이 되는 교사들을 뽑아서 상을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의 이름을 ‘김교신 상’으로 정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당장 금년에 그 첫
번째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상의 제정은 무교회 측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일입니다. 기독교사연합으로부터
이런 행사를 하겠노라는 사실을 통보 받았을 뿐입니다. 전적으로 그분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입니다.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윤치호를 추모하는 모임이 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해평(海平, 지금의 경북 선산) 윤씨 가문이 해방 후 윤보선 대통령 같은 인물도
배출한, 이른바 명문 집안이니까, 가족 차원에서는 추모 행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적인 추모 행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윤치호와 김교신, 이 두 사람의 경우처럼 생전의 평가와 사후의 평가가 이렇듯 극적으로 엇갈리는 사례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전통시대의 유교적 역사관은 춘추필법에 의한 시시비비 정신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역사는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그르다고 분명하게 가려주는 윤리서의 역할까지 했고, 그리하여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 시대 선비들은
‘역사의 신’ 또는 ‘역사의 심판’을 믿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듯이, 유교에서는 역사의
평가,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저는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했던 유교의 이런 측면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흡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아직 모르던 시절에도 우리 선조들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성삼문, 박팽년 같은 사육신이 나오고, 이순신 같은 충신이 끊임없이 나온 것은 다 이런 데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비록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게 받은
‘자연법’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시적 안목
김교신의 제자인
노평구 선생은 연세가 높아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만, 선생께서는 평소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하나님 안에서 민족과 사회와 역사를 거시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김교신이야말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을 잃지 않았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근시안적으로만 본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극복이
불가능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미당 서정주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식민지배가
영원하리라고 판단하고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지식인 사회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윤치호 역시 그런 경우였다고 생각합니다.
윤치호의 세계관은 ‘약육강식’의 세계관이었습니다. ‘힘이 정의’라는 강자 중심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의 사고는 제국주의를 정당화
하는 논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대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목표였지, 그 현실을 이상적인 현실로
바꾸려는 보다 차원 높은 목표와 의지는 없었습니다. 민족의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윤치호의 좌우명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였다고 합니다. 약소민족이면 약소민족답게 강대국 앞에 고분고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입장입니다. 그의 좌우명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처세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강자에게 붙어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
월간지인 『성서조선』을 거의 혼자 힘으로 158호까지 간행했습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민족애를 쏟아 부었습니다. 극심한 일제의 검열 가운데 폐간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수십 차례였으나 그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앙 동지들의 격려에 힘입어 대략 15년이란 기간에 걸쳐 잡지를 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인 억압
하에 1942년 3월호(158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조와’(弔蛙)가 발단이 되어 세칭 ‘성서조선사건’으로 잡지는 폐간되고 전국적으로
몰수되었고, 주필인 김교신을 비롯한 국내외의 독자들이 검거되었습니다. 당시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의 이들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 파뜩 뛰어 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100년 후에라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그런데 당시 같이 감옥에 갇혔던 제자 류달영(柳達永)에게 김교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김교신이 공생애를 일관하여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김교신전집』 전편을 통해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김교신은 일생, 교사시절은 물론, 후일 흥남 공장에 근무할 때까지도 늘 서재에는 대형 한국지도를 걸어놓고
생활했다 합니다. 김교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김교신이 늘 지도를 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김교신은 일제의 침략에 유린당한 조국의 비참한 처지 가운데서 자칫 맹목적인 자학에 빠지기 쉬운 다감한 청년들이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통해 민족적 긍지와 포부를 가져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성서조선』 제62호(1934년 3월)에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란 논문을 쓴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습니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조선 지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고찰합니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 영일(寧日)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거한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엑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식민지 조선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비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이상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윤치호를 비롯한 그 시대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념을 뛰어넘는
우정
1933년 9월 초순 『일기』에는 김교신이 감옥에서 석방되는 친구 한림(韓林)을 형무소로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교신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한림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한림이 김교신의 신앙동지라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림은 무슨 기독교 관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른바 ML당(마르크스-레닌 당) 사건의 주모자로서 6년여의 복역을 마친 후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일기』에 보면, 김교신은 감옥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자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김교신의 눈에는 공산주의자 한림의 당당한 태도와 그 당시 조선 기독교인들의 초라한 모습이 크게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30년대는 흔히 한국기독교사의 암흑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입니다. 일제의 압박에 신앙적 지조를 꺾고 힘없이
굴복했습니다.
필경 김교신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날 『일기』에 ‘한림 군을 백두산록의 거수(巨樹)에 비한다면 오늘 기독신자의 거개는 고층건축의 옥상 분재’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교신은 그 후로도 한림과 여러 차례 만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8년 9월 15일자 『일기』에도 ‘한림 군과
정담(情談)의 기회를 얻은 것이 기쁨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가 폐간의 위기에 몰려 근심에 빠져있던
1940년 6월 19일에는 한림의 집에 초청을 받아, 용기를 내라고 격려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1940년 6월 19일(수)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쾌담수각(快談數刻). 형은 본래 ML당 사건의 거두요
지금도 물론 유물론자이지마는, 여(余)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준순(浚巡)할 때가 아니라고 역설하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그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신도가 안 한다면 자기가
후사(後事)를 돌보아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한림은 후일 김교신이 흥남에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병사했을 때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을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보통이 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과 ‘골수 공산주의자’ 사이의 우정, 이것은 냉전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담장 안과 밖을 철저히 분리하여 생각하는 한국 기독교인들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김교신은 『일기』에서 ‘사상으로나 행동으로나 중성적(中性的) 인물에게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유물주의자라도 반드시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선 범사에 철저하고야 볼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1935. 1. 18). 이런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를 믿는다 하여도
다수의 기독교도와는 도무지 언어와 사상이 상통할 수 없는데 반하여, 소위 반(反)종교인들과는 비록 근본적인 상위로 인하여 쌍방의 완전한 일치에
이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서로 일맥이 통한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1934. 12 16).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기독교를 믿는다 하여도 다수의 기독교도와는 도무지 언어와 사상이 상통할 수 없는데 반하여’란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기독교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분들은
결국엔 ‘교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신앙 이야기를 하다 보면 궁극에는 ‘교리’ 이야기로 귀착합니다. 마치 형상기억합금과도 같다고 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이 ‘교회’와 ‘교리’로 화제를 돌리고 마는 그분들의 귀소 본능은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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