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제276호(1977년 11월)에 실렸던 글입니다. 대학
4학년 때 쓴 졸업논문이기도 합니다.
1. 머리말: 김교신에 대한
평가
김교신(金敎臣)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45년에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1921년부터 무교회주의 기독교(Non-Church Christianity)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에서 약 7년간
기독교 신앙을 가르침 받고, 돌아와서는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의 지리(地理)·박물(博物) 교사로 10여 년간 재직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 월간지인 <성서조선>을 거의 혼자의 힘으로 158호까지 간행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민족애를 쏟아 부었다. 극심한 일제의 검열 가운데 폐간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수십 차례였으나 그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앙 동지들의 격려에 힘입어 대략 15년이란 기간에 걸쳐 잡지를 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인 억압 하에 1942년 3월호(158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조와(弔蛙)”가 발단이 되어 세칭
“성서조선사건”으로 잡지는 폐간되고 전국적으로 몰수되었으며, 주필인 김교신을 비롯한 국내외의 독자들은 검거되었다. 당시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의 이들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가장 파뜩 파뜩 뛰어 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100년 후에라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김교신은 같이 투옥되었던 그의 제자 류달영(柳達永)에게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말했다 한다. 일본 경찰의 지적대로 김교신이 과연 “가장 악질적인 부류”에 속했는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민족 운동은 다른 민족 운동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김교신은 사망한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그 존재마저도 잊혀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1970년대 중반 소수의 제자들의 노력으로
<성서조선> 158권이 모두 수집되고 여기 실린 그의 글들이 <김교신 전집>(전6권)으로 출판되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들어 신학 및 교육학 부문에서, 아직 입문 단계이기는 하지만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교회사 연구자인 연세대
신학과의 민경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민족교회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 주류와 명맥은 김교신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깊어가고, 그의 인품과 신앙의 유형 전체가
결국 한국 기독교의 모습, 나라 사랑의 길이라는 생각이 더해간다.”
한편 교육학자인 고려대의 김정환 교수는, 그 자신
페스탈로치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 한국에 김교신과 같은 인물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으며, “만남에 의한 진리의 공동
생산이 곧 교육”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실천자가 바로 김교신이라고 지적했다. 김교신이야말로 참된 근세의 민족의 교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교회사의 주류요, 민족의 참된 교사라는 평가를 받고는 있으나, 아직 역사학적인 검토는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본고는 하나의 시론으로서 그의 생애와 사상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2. 김교신의
생애
김교신은 1901年 4月 18日 함경남도 함흥 사포리(沙浦里)에서 부친 김염희(金念熙)와 모친
양신(楊愼)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참수된 함흥차사 박순(朴淳)과 함께 함흥에 갔다가 요행히 죽음을 면하고 정평(定平)에 정착하게
되었던 김재덕(金載德)의 후예로서, 엄격한 유교적 가풍 가운데서 자라났다.
그는 1916년 3월에 함흥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1919년 3월에는 함흥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3·1운동 때에는 집안 소년들을 시켜 소학교와 예배당에 태극기를 보냈다고 하며, 이 소동
때문에 이웃에 살던 그의 숙부 김충희(金忠熙)의 집이 가택수색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구한말의 불온서적과 권총 등이 나와 크게 문제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3월에 일본으로 향했는데, 그의 일본행이 이러한 사건과 관계된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그는 자신이
일본에 떠나면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철심(鐵心)을 품고 동해를 건넌 자”라고 일본행 당시의 심경을 술회하고 있다.
일본으로
가서는 곧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영어를 공부했는데,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0년 4월 16일 저녁 도쿄 시내를
지나다가 당시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재학생 마쓰다(松田)의 노방 설교에 깊이 감동함이 있어, 4월 18일(일요일)부터 홀리네스 교회에 출석하고
처음으로 <신약성서>를 구입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들어갔다. 다음 글은 그의 신앙 입문 전후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십유오이지우학(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란 일절을 <논어(論語)>에서 학습할
때에 이야말로 나의 일생의 과정표요, 공자보다는 십 년을 단축하여 ‘육심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불러보리라고 내심에 기약하고
일야초심(日夜焦心)했었다. 그러나 초심하면 초심할수록 덕불수학불강(德不修學不講)이 나의 근심임을 탄(嘆)하게 되어 육십은 고사하고 팔십에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역(域)을 밟을 희망이 보이지 않아 자못 낙망의 심연에 빠지려는 순간 나에게 다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어
일어서게 한 것은 실로 청년 전도사를 통하여 온 기독교 복음의 소리였다.”
그는 평생의 소원인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역(域)”에 달하는 유일한
방도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는 신앙 입문 초기에는 적어도 도덕률이란 점에서만 보아도 기독교의 교훈에 유교의 그것보다 훨씬
심원하고 고매한 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경로를 밟아 1920년 6월 27일 홀리네스 교회에서 시미즈(淸水俊藏)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같은 해 말 온건한 시미즈 목사가 반대파의 음모와 술책으로 교회에서 축출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김교신은 이러한 교회
내분에 접해 큰 충격을 받고 기독교 신앙의 근저까지 동요 당하게 되었으니, 그의 신앙생활에 일대위기가 닥친 셈이었다.
마침
1921년 1월 16일부터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일생의 대사업인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어 그는 “초회(初回)부터
나중까지 비상한 열심으로써” 이에 참석했다.
그가 우치무라를 알게 된 것은 진작부터였다. 즉, 교회 내분이 있기 전인 1920年
10月에 우치무라의 저서인 <구안록(求安錄)>, <종교와 문학> 및 <성서지연구(聖書之硏究)>를 비롯하여
<기독교 신도의 위로>, <지인론(地人論)>, <흥국사담(興國史談)> 등을 읽은 것이 우치무라의 저서를 읽은
시초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 초순에는 직접 우치무라의 댁을 찾아 첫 대면의 기회를 가졌으나 커다란 실망과 불만을 품고 돌아
왔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충실한 교회의 회원으로서 기독교회를 유일한 이상사회로 동경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회 내분으로
인해 이상사회로 동경해 온 기독교회에 환멸을 느낀 후, 우치무라 문하에 들어가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 중에 매장된
지 반생여일(半生餘日)에 오히려 그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무엇보다도 힘있게 나를 끌었었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더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전혀 저에게
봉정(奉呈)했다.”
우치무라는 불온사건 혹은 무교회주의 창도(唱導) 등으로 죽은 후로 15年 이상 국가적으로는 천황과 국시(國是)를 모독한 국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교계로부터는 이단자로 매도되었던 인물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끝끝내 정의와 진리의 높은 이상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저의 위대한 애국심에 경모의 염을 금치 못한 것이 사사(師事)하게 된 처음 동기였다.
그는 우치무라를 가리켜 발톱 끝에서
머리털 끝까지 애국의 화신이었다고 했다. 그러면 이 같은 절대적 경모의 염이 생기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그가 의식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심중을 우치무라에게서 읽은 때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교신은 우치무라 문하에서 향후 7년 간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입신(入信) 동기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위해 기독교에 입신했다.
그러나 내면의 죄를 자각하고 고민
끝에 종국에는 “자기수양으로써 완전의 역(域)에 달하여 보리라던 야심을 아주 포기하게 되는” 심각한 도덕적 좌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우치무라의
성서강연을 통해 신앙만의 무교회주의 기독교에 의해 차츰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마치고 그가 도쿄
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 입학한 것은 1922년 4월이었다. 그는 처음 영어과에 적(籍)을 두었으나 1년 만에 지리박물과(地理博物科)로
전과(轉科)했다. 그는 전과의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문필을 수련하기보다는 농축에 뜻을 두었던 자이요. 신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천연계를 상대하는 박물학에 기울어졌던
자이다.”
서안(書案)만을 대하는 생활보다 자연을 상대로 살고 싶어한 그의 기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927년 3월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理科 第3部 甲組)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우치무라에게서 성서를 배워왔음은 물론이다.
한편, 당시 우치무라의 성서집회에 출석했던 조선인 유학생이 몇 명 있었는데, 서로를 모르고 지내오다가 김교신이 졸업하기 얼마 전
처음으로 서로 만나 알게 되었다.
모두 6 명으로 김교신 외에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이었다.
이들 여섯 사람은 每 主日 “조선성서연구회”란 이름으로 우치무라의 성서집회에 나가기 전에, 대체로 정상훈이 다니던 신학교의 교실이나 기숙사에
모여서 우리말 성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어,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여러 가지의 성서를 참고하면서 서로 힘을
모아 1년 남짓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개하려 하여 <성서조선>지의 발간을 계획하게 되었다.
김교신은 졸업한 그 해 4월에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어 같은 해 7월에는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동지 6인이 마침내 <성서조선>지를 창간했다.
<성서조선>은 처음엔 서울에 거주한 신학교 출신의 정상훈이
주간이 되어 공동집필로 간행되었는데, 창간 이듬해인 1928년 3월에 김교신이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하면서부터 정상훈을 도와 이의 간행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제15호(1930년 3월호)가 간행되고 나서 정상훈이 고향인 부산으로 떠난 후, 일단 동인제를 해체하고
폐간하기로 결의했으나, 김교신이 1개월이라도 더 해보려고 단독책임으로 제16호(1930년 5월호)를 맡아 하게 된 것이 세칭 “성서조선사건”으로
제158호(1942년 3월호)를 종간호로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하기까지, 통산 15년 간 그의 후반 생애의 거의 전부를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교우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당시 조선 기독교계의 원로라 할
김정식의 남다른 촉망을 받았으며, 오산학교 교사로 있었던 함석헌의 소개로 남강 이승훈과도 교유했다. 1930년 5월 남강이 서거하자
<성서조선> 제17호(1930년 6월호)를 남강 기념호로 간행하기도 했다.
또 남강의 동지로 일시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바 있는 동양학자 유영모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우치무라의 수제자로서, 동경제국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전론자(非戰論者)로 대학에서 추방당한 야나이하라(矢內原忠雄)와도 각별한 신앙적 교우관계를 지속했다. 야나이하라는 동경제대에서 추방당한 후
내한하여, 1940년 9월에 김교신 주관 하에 서울에서 성서집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신앙문제로 그의
가르침을 청한 때도 있었으며, 김교신은 톨스토이주의자였던 그에게 수양의 술(術)과 신앙의 도(道)가 다름을 말했다고 한다.
김교신은 교사직에 머물면서 생애의 사업인 <성서조선> 간행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1930년 6월부터 투옥당하던
1942년 3월까지 매 주일마다 서울에서 성서연구회를 개최했다. 또 매년 겨울에는 1주간의 동기성서집회를 자택에서 열었다.
그는
양정고보에 재직한지 만 12년 되던 1940년 3월에 복음전도에만 전념하기 위해 이를 사임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9월에 다시
제일고등보통학교(오늘날의 경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선배인 당시 교장 이와무라(岩村俊雄)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불온인물로 낙인 찍혀 6개월만에 추방되었고, 다시 1941년 10월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다.
그러던 중 <성서조선> 제158호(1942년 3월)에 실린 권두언 “조와(弔蛙, 개구리를 죽음을 슬퍼함)”가
발단이 되어, 동년 3월 30일 투옥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다.
김교신은 개성에 살면서 겨울에도 매일
새벽이면 송악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기도를 했다. 그 골짜기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 밑에는 못이 하나 있었다. 그가 몸을 씻고 찬송을
부르면 개구리 떼들이 반기기라도 하는 듯이 몰려들곤 하여서 이들을 귀여워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이 되자, 못이 얼어붙고 개구리들도
자취를 쓸쓸해졌다. 이윽고 봄이 다시 돌아와 얼음이 녹고 못이 풀렸는데 못에는 죽은 개구리들이 둥둥 떠다녀 처연함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못 밑에는 아직도 몇 마리의 개구리들이 살아남아 움직이지 않는가.
그리하여 “조와”는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라는 탄성으로
글의 끝을 맺는다. 이것은 물론 단순한 개구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제 하에서 혹독한 수난을 받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글이며, 그는 이 못에서
무서운 시련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시 퍼져나갈 이 민족의 앞날을 본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 등지에서도 숱한
독자들이 검거되었으며, 특히 주필 김교신 및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 13인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 1년 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김교신은 출옥 후에는 지방독자들을 순방하여 전도에 진력하기도 했으며, 동년 7, 8월에는 만주
도문(圖門) 시외에서 목장을 경영하며 동지들과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4년 7월 흥남 일본질소비료공업주식회사
용흥(龍興) 공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김교신이 동경 유학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당시 흥남 공장의 총수인 노구치(野口) 사장의 직접 초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직책은 근로과 주택계장이었으며, 교직에서의 추방, <성서조선>의 폐간 등으로 분출구가
봉쇄되었던 그의 정열은 바야흐로 이 직책을 통해 그 발현의 기회를 포착했다. 전인격, 전존재를 몰입하여 그의 신앙과 애국과 교육을 실천할 터전을
찾게 된 것이다.
그가 입사한 지 5개월 가량 되던 1944년 12월 28일부로 그의 제자 류달영에게 쓴 서신에서 이러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이곳 공장에서 들어와서
신세계를 발견한 것일세. 교육계에서 밀려나온 것이 웅덩이에서 태평양으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일세.”
그는
일본질소회사에서 5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사는 사택촌(私宅村)의 책임자로서, 아무런 위생시설도 문화시설도 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던 노동자들의
친구로서 그들의 복지를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입사 이듬해인 1945년 4월에 공장 내의 발진티푸스 환자들을 간호하던
중 감염됨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염원하던 해방을 눈앞에 두고 4월 25일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3. 김교신의
사상
김교신의 사상을 구분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직업인
교사직마저 부업으로 여기고 오히려 <성서조선>의 간행을 본업으로 여겼다고 할 때, 그의 사상의 초점 또한 <성서조선>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조선>이라면 문자 그대로 “성서”와 “조선”이다. 이와 같이 그의 생애를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시키고 보면, 이를 통해 응당 그의 종교사상과 민족사상이 각각 구현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신앙과 애국은 물론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편의상 그의 사상을 종교사상과 민족사상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로 한다.
(1)
종교사상
먼저 그가 생각한 종교의 가치를 보기로 하자.
“신라는 가고 경주는 황야가 될지라도 그 예술만이 영구히 남았도다. 경주의 예술품 중에서 불상과
사찰을 제하고 보면 또한 잔여가 영(零)뿐이다. 곧 불교의 신앙이 없는 곳에는 김대성도 없었고 신라의 자랑인 예술도 없었던 것이다. 신라인이 큰
것이 아니었고 저들이 가졌던 신앙에 위력이 있었다. 신앙으로 설 때에만 영구하고 위대한 것이 산출되었다.”
이
말은 그의 신앙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김교신에게 종교란 예술, 아니 더 나아가서 사회, 민족, 국가의 근원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바 종교란 과연 무엇을 핵심으로 한 것이었는가.
“1935년 5월 22일(수) <와세다학보(早稻田學報)>에서 ‘도덕가로서의 츠보치(坪內) 박사(博士)’라는
일문(一文)을 읽고, 동 박사의 다른 일면을 안 동시에 더욱 경의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백사(凡百事)의 초석(礎石)은 도덕이다.
문사(文士)도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앞서 그는 종교를 사회, 민족, 국가의 근원으로 추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도덕이 범백사의 초석이라 한다. 당연한 논리로써 그가 말한바 종교란 곧 도덕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 신앙과
도덕은 동일한 사물의 양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은 그의 기독교 입신전후의 진지한 도덕적 노력을 생각할 때 이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진실한 기독자임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타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아보자.
“1936년 10월30일(금) 구름 ··· 사토 도쿠지(佐藤得二) 교수로부터 ‘불교의 일본적
전개’라는 신저(新著)를 받고 씨의 생산 불식하는 학구적 정력에 경탄함을 마지 못하는 동시에, 기독교도로서도 불교의 연구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을 절감하다. 시기를 기다려 우리 동기집회에서 불교 강좌를 열어볼까 하다.”
기독교도로서도 불교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한 것은, 흔히 기독교가 고등종교 중에서도 가장 배타적이란 평을 받는 점을 고려할 때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저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그에 대한 용인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 발전을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다.
“1937년 2월 27일(토) 맑음 ··· 등교 도차(途次)에 출판권 문제로 총독부에 들르니
장삼 입은 불교 승려들이 반열 지어 내왕하는 것이 보이다. 지상에 보도된 3대 본산의 대표자 회의가 열린 듯. 불원에 반도의 불교가 크게 부흥될
것이 기다려지다.”
이런 언급은 그가 종교의 핵심을 도덕으로 파악했던 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교가 인간의 도덕관념을 일깨우지 못하고 위선에 빠져들 때에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술을 반야탕(般若湯)이라 개칭하지 않고는 법의(法衣)의 사(師)가 마시지
못하리만큼 비성비선(非聖非善)한 것이라 할지라도 별명(別名)으로 대칭(代稱)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피한다함은 오인(吾人) 기독신자의 도저히
용허치 못할 일이다. 반야탕을 마시는 교양 있는 부디스트보다도 술을 술대로 마시는 무교육, 무종교자에게 오히려 취할 바 있음에 어찌 우리네만이
군말하랴. ··· 오, 사실을 사실대로 하라. 이를 음위(陰僞)하는 종교나, 학자나, 사회나, 국가가 모두 멸망하리라. 또 멸망하라.”
이러한 도덕적 태도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취해졌다.
“유교의 건실한 도덕관념으로 기독교의 천박한 전도자를 공격하는 점이
쾌(快)했다.”
그는 일찍이 기독교의 도덕률이 유교의 그것보다 심원고대(深遠高大)한 바가 있다고 간파한 바
있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가진 바 도덕적 사명을 저버렸을 경우에는 도리어 유교의 도덕률로 역습을 감행하는 양식이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종교적 관용은 그 바탕이 도덕적 진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떠한 종교와 이념을 지향하는
인물이건 그의 추구자세가 순수, 진실하기만 하면 그를 존경하고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에 그 적절한 예로 들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유물론자 한림(韓林)의 경우이다.
“1940년 6월
19일(수) ···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쾌담수각(快談數刻). 형은 본래 ML당 사건의 거두요 지금도 물론 유물론자이지마는,
여(余)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준순(浚巡)할 때가 아니라고 역설하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그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신도가 안 한다면 자기가 후사(後事)를 돌보아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한림은 김교신보다는
동경유학 시절부터 막역한 친우였으며, 후일 김교신이 흥남에서 병사했을 때는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을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편, 그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학문과 이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이는 한국 기독교계가 감정적
신앙수용으로 치우치는 데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
“1935년 12월 4일(수) ··· 과거 50년 간 조선 기독교계의 인물은 대소고하의 차는 있어도 총괄하여 말하면,
대다수인 우익은 길(吉)목사 타입의 성신파(聖神派)요, 소수인 좌익은 소화 불량한 비판학자 몇 사람이었다. 금후에는 학문과 신앙을 완전히
합금(合金)한 건실한 학자 출현의 시대호(時代乎).”
이를테면 그는 “불 같은 심장과 얼음 같은 두뇌를
겸유(兼有)”하고자 한 것이다. “독특한 신비경을 배회함이 없고라도, 공전절후한 새 진리를 자랑함이 없더라도, 평평대로를 행하는 것처럼, 현대의
당연한 과학적 교양을 받은 청년으로서, 보통 인간의 도덕적 양심을 소유한 자이면 능히 기독교의 오의(奧義)에 통달할 수 있는 줄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비록 기독교의 오전(奧殿)에 입참하지 못한대도 가하고, 차라리 지옥에 떨어진대도 가하니, 천품의 이성과
인간공유의 도덕적 양심을 포기하고는 살 수 없는 자”라고 했으며, “종교적으로 성화(聖化)되어 버린 이들의 언사보다도 유물론을 공구(功究)하는
학도들의 감정에 심금이 함께 울린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성서연구 자세는 “인공적으로 부흥의 열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냉수를 쳐가며 냉정한 중에서” 배우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종교와 교육의 관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종교는 교육적으로 수련할 것이니 기적으로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속성(速成)’한다기 보다는 보물을 바치고 시일을 거쳐서 점진적으로
‘만성(晩成)’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통상 위인이 기독신자 됨에는 적어도 10년은 공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학구적 신앙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학문과 이성을 강조했다고 해서, 기독교를 학자들의 머리놀음이나 관념론으로 매몰시킨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체계 정연한 유심론을 주장하며 신학적
소양이 많은 인물이라도 유심유물(唯心唯物)의 쌍륜(雙輪)이 좌우에서 삐죽거릴 동안은 저가 달할 바의 절반에도 도달치 못한 자이다. …··· 될
수 있으면 유심유물을 합하여 단륜(單輪)으로 만들어 굴리는 날에라야 비로소 저는 달할 데 달할 것이다. 사람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면서 자기는
행치 않는 종교가배(宗敎家輩)―일종의 유심론자―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격렬한 반격을 금치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과 행위의 문제는 자칫 오해를 초래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단 도덕적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한 견해를 표명했다.
“우리는 율법보다 복음을
창도하기에 급했던 것처럼, 영적 양식을 구함이 산업문제를 논평하기보다 급했었다. …··· 우리가 산업문제를 세인과 함께 떠들고 야단치지 않는
것은 이것을 등한시하여서가 아니라, 논의할 여지없이 당연한 의무인 줄로 아는 까닭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그는
타인의 눈에 신앙적인 면보다 오히려 도덕적인 면에 치중했던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강직하고 불의를 허용치 않는 성품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대도시를
배경한 집약적 농업과 북만주 황야에서의 대규모의 개척적 농축업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제 그의 무교회주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사실 “조선에 있어서의 무교회전도의 창시자,
지도자이고, 제1인자로서 주석(柱石)”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굉장한 건축의 교회당이 없고, 명장(明匠)의 벽화가 없고, 미인(美人)의 찬양대를 불요(不要)하며
억양자재(抑揚自在)한 청산유수 같은 교직자의 기도가 없이라도, 성서를 배우며 그리스도를 믿어 사는 데에 우리의 태도가 있으니, 세상에 유행하는
기독교와 구별하기 위하여 무교회 신앙이라도 하거니와 실상은 예수의 종교가 이밖에 무엇인가?”
그가 이해한바
무교회주의는 “예수의 종교” 그것이었으며, 그가 무교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이었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라는 범주 안에
우리를 구류(拘留)하려는 모든 세력과 유혹에서 자신을 해방하고자” 했으며(1937년 2월), 한때는 “무교회 간판 철거의 제의”까지 하여
무교회주의에 대한 집요한 오해를 막으려 한 적도 있었다(1937년 5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무교회주의였으니, 그
후 다시 “나는 무교회주의자이다”라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1941년 8월). 1940년 5월에도 “건드리지 말라”라는 제하(題下)에 자신이
무교회주의자임을 선언한 것이 보인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모순된 듯이 보이지만, 실상 그가 무교회주의를 한낱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교회주의적
정신으로 이해한 기독교 진리는 나에게 일편 지식이나 사상으로 소유된 것이 아니요, 나의 신앙생활의 전 생명 근원으로 파지(把持)된
것이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취소, 혹은 선언한 것은 추의 움직임과도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무교회주의가 그 본령을 이탈하여 경직될 때에는 거침없이 이의 취소를 선언하는가 하면, 반면에 교회주의자들이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느니,
일요일보다 토요일을 지켜야 되느니 운운의 모든 거짓말과 허튼 수작으로써 승인을 강요할 때”는 무교회주의자임을 선언,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양자는 다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 천명이 그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그의 “전 생명
근원으로 파지된”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어느 연구자는 1937년 2월에 김교신이 무교회주의자의 범주 밖에
있겠다고 한 것을, “그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실질상의 해소(解消)요, 그 ‘밖’이란 곧 민족 기독교의 광활한 영토였다”고 하며, “그가
무교회주의에서 떠나 민족 신앙인이 되려한 180도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하나, 이는 앞에서 열거한 여러 사실들을 고려할 때
그릇된 판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교신에게는 무교회주의를 떠난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으며, 기독교 신앙을 떠난 무교회주의도 있을
수 없었다. 무교회주의는 그에게 곧 “전적 기독교”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점은 그의 기독교 토착화에 대한 진지한 노력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공산당이 다른 나라 공산당보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기독교도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가 나지 말란 법이 있으랴.”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화하여 조선인의 것으로 하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으며, “영계의 일은 세상 백화점 경영과 달라서 연년(年年)이 다달이 수입하지 않고는
절품(切品)될 바엔 애초에 개점하지 말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박은 기독교이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의 무교회주의 기독교는 그 자체로서 곧바로 민족 기독교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무교회주의를 떠난 민족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2) 민족사상
김교신의 민족 사상을 집약해주는 구절을 하나
인용하겠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
이 한마디야말로 그의 민족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 판단된다. 그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아갈 것을 항상 당부했다.
이는 개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은 물론이려니와,
더 나아가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민족에 대한 주체적 인식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아래 글은 그의 제자의 말로 이러한 그의 태도를 잘
말해준다.
“당시 우리가 배우는 지리과목의 대부분은 일본 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겨우
두서너 시간뿐으로 마치도록 교과서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일년을 통해서 우리나라 지리만을 배웠습니다. 자기를 분명히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스스로를 멸시하기 쉬웠던 우리들은 조국에 대한 재인식을 근본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침략에 유린당한 조국의 비참한 처지 가운데서 자칫 맹목적인 자학에 빠지기 쉬운 다감한 청년들이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통해 민족적 긍지와 포부를 가져줄 것을 소망했다.
<성서조선>제62호(1934년 3월)에 자신의
논문인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를 쓴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조선 지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고찰,
“조선 역사에 영일(寧日)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거한다”고 투시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엑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그리고 <성서조선> 제61호로부터 제83호에 걸쳐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 바도 있다(19회로 완료되었으며, 해방 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한국사학자 이기백 교수에 의하면, 이 글은 한국 초유의 종교 사관적 역사서술이며, 한국사학사에서는 “정신 사관적 특징을 지닌
점에서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사학에 포함”되는 것이다.
한편, 그는 양정고보 재직시절 ‘무레사네’(물에 산에)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매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인솔, 서울 근교의 모든 고적과 능묘, 명소를 탐방하고 참배했다.
“선생 자신 교실에서 ‘무레사네’ 참가를 권하는 말씀이 꼭 한번 있었다.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다. 그리고 조선인의 정신이 이 땅에 깃들여 있다. 조선인의 마음, 조선인의 생활의 자취가 고스란히 이 국토 위에 박혀있다.
자기를 분명히 알아 가는 일이 인생의 근본인즉, 상급생을 따라 무레사네에 참가하여 하루 휴일을 값있게 보냄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한번은 그가 지리 수업 시간에 노량진 사육신묘에 참배한 적이 있는 학생이 몇이나 되는가를 알아본 일이
있다. 그런데 제4학년 갑을조(甲乙組) 생도 120명 중 단 7명뿐인 줄을 알고는 한심한 일이라고 개탄해 마지않은 때도 있었다.
그는 후일 흥남 공장 시절에도 아침마다 성천강(城川江) 둑을 따라 노동자들과 함께 뜀박질을 하면서 성천강에 얽힌 태조 이성계
창업의 현장을 실감 있게 증거하고, 이들이 민족의 고난 가운데서 역사의 유산을 책임 맡은 창업주로서의 야망을 가져줄 것을 눈물로써 당부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전통 풍습에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입춘(立春)날 냉수 세수하는 일을 궁행(躬行)하여 농민 선조의
유풍(遺風)을 수직(守直)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200부밖에 발간되지 않았던 정약용의
<여유당전집(與猶堂全集)>을 구입하고는,“대금 140원은 가벼운 짐이 아니나 수만금(數萬金)을 들여 출판된 것임을 알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우리의 학술에 대해서도 격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그의 평생토록 민족애를 간직했으며,
교사시절은 물론, 후일 흥남 공장에 근무할 때까지도 늘 서재에는 대형 한국지도를 걸어놓고 생활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유산
될 만한 모든 사사건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니, 1939년 12월에는 제자 류달영으로 하여금 집필케 한 <최용신양 소전(崔容信孃
小傳)>을 직접 맡아 출판했다.
최용신은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으로, 젊은 나이에 농촌 계몽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이 전기는 짧은 기간 내에 4판을 거듭했으며, “성서조선사건”이 발생했을 때 모두 압수되고 출판도 금지 처분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김교신의 민족사상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여기서 그의
민족사상의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을 보기로 한다.
앞서 그의 생애를 말하면서, 그가 심각한 도덕적 좌절 가운데 고심했으나 결국
기독교 신앙에 의해 해결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의 고심은 실로 처절한 것이었으며, 자신 이 때의 상황을 가리켜 “자아를 포기, 자살할 지경”에
이르렀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따라서 이후 그의 민족사상의 방향은 역시 그의 내적인 도덕 문제의 해결과 함께 철저히 정치적 범주를
벗어나 기독교 신앙을 통한 민족의 구원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의 사회주의, 유물주의 학자들이 의식주 생활 문제의
해결을 우선시하여 기독교의 신앙운동을 가리켜 “상층구조”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때에도 “다만 논자는 사회개조로써 선결문제라고 하는 대신에 우리는
신앙으로써 기초공사라고 믿는다. 어느 편이 진리인 것은 실험이 증명한다”고 확신을 품고 말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가 생각한
민족의 살길은 “일본인이 거꾸러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잘 살수 있는 참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1937년 2월 16일(화) 맑음. 조선 청년으로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이 가장 동포를 위함이 되겠느냐고 질문함에 대하여, 건방진 질문이라고 질책하다. ‘무슨 사업’을 할 것이 문제가 아니요.
“어떻게” 할 것이 문제의 중심이라고 답하다. 무릇 진실한 것이 대사업이요. 조선의 희망이 거기 있는
까닭.”
이러한 점에서 그는 여타의 민족운동가와는 본질적으로 방향을 달리했으며, 또한 그가 세속 기독교의
형식적인 혹은 사업적인 면을 지양하고 이렇게 순수 신앙적인 민족 구원 확신에까지 나아가게 된 데는 전기 무교회주의 창시자인 우치무라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근저로 한 그의 민족사상은 이러한 확신과 결부되어 우리 민족의 타고난
도덕적인 좋은 면에 기독교 신앙을 접목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역사를 보는 관심에 있어서도 선조의 고결한 전통을 십분
존중, 이를 계승하여 기독교 신앙에의 접합 단면으로 삼으려 했던 것을 읽을 수 있다.
“1935년 8월 30일 저녁에 심청전의 라디오 드라마 감명. 역시 우리의 심장은
군담(軍談)이나 탐정소설보다는 춘향전이나 심청전에 몹시 울리는 듯하다. 정열(貞烈)의 후예에 신앙의 성도가 불출(不出)할
것인가?”
이러한 그의 사상은 <성서조선>지 간행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성서조선>지 창간사에서 “다만 우리의 염두(念頭)의 전폭(全幅)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진(最珍)의
선물은 성서 1권뿐이니, 양자의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고 그 명명(命名)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실로
<성서조선>을 통해 구현된 그의 사상은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骨筋)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김교신은 타고난 도덕적 천품(天稟)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성품은 결국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그를 몰고 갔으며, 급기야 그 안에서 자신의 문제에 해결을 보게 되었다.
종교의 기반을
도덕으로 파악했던 이 점은 감정적 신비주의로 치닫던 한국인의 기독교 수용자세와 대조적이다.
그는 학문과 신앙을 합금한 가운데
기독교를 이 땅에 토착화할 것을 주장했으며, 또 그 자신이 산 표본이 되었다.
또한 그가 우치무라에게 사사(師事)한 것은 그의
민족사상이 정치적 범주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사상과 민족사상의 두 지류(支流)는 <성서조선>에서 합일점(合一點)을 얻어 서로 떼기 힘든 본류(本流)로 합쳐져 15년 간 흐름을
이어갔다.
그는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 증거로 이 잡지는 전호(全號)에 걸쳐 적자로 출판되었으며, 그 자신
“의식의 여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출판한 여잔(餘殘)으로써 생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조선>지는 나의 최대의 것이요,
전부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도 제158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아갈 바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후
결국 흥남 공장에서 5천여 한국인 노동자를 위하여 막혔던 봇물의 격류를 쏟아낼 수 있었다.
한국 근대사의 입국방략(立國方略)을
유형별로 나누어, 서재필로 대표되는 외교입국방식, 남강으로 대표되는 교육입국방식, 김성수로 대표되는 민족자본육성을 통한 산업입국방식, 김구로
대표되는 무력항쟁입국방식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김교신의 입국방략은 종교입국, 도덕입국이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근대사, 특히 식민지 통치시대의 제반 민족운동의 성격이 광범하게 연구되면서, 김교신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폭넓은 역사학적 연구도 이루어져 그가 점하는 역사적 위치가 분명히 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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