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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노평구 선생을 기리며(박상익, 한겨레050908)

by 마리산인1324 2006. 12. 30.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62970.html

기사등록 : 2005-09-08 오후 06:22:19 기사수정 : 2005-09-08 오후 06:22:19

 

 

노평구 선생을 기리며

한겨레
»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8일은 노평구 선생이 별세한 지 만 2년이 된 날이다. 선생은 김교신의 뒤를 이은 한국 무교회 기독교신앙의 2세대 지도자였다. 1912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1930년 2월 배재중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200여명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이 일로 1995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 생애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무교회 기독교신앙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스무살 남짓 되던 무렵에 스승 김교신을 만나, 진리에 의한 인간내면의 변화 없이는 모든 정치활동과 교육활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고, 1936년 김교신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인 쓰카모토 토라지와 야나이하라 다다오로부터 10년간 기독교신앙을 배웠다.

 

1945년에 귀국한 선생은 1946년 무교회 신앙잡지 <성서연구>를 창간하여 1999년 12월까지 모두 500호를 간행했다. 잡지에 수록된 글은 <노평구전집>(전16권)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선생은 일생 서울 종로와이엠시에이에서 성서집회를 개최하면서, 김교신의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 한국 무교회 기독교신앙을 지켜냈다.

 

선생은 잡지 <권두문>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매섭게 질타했다. 역대 독재정권을 비판하면서도 권력이 무서워 교묘하게 돌려쓰는 법 없이 격렬한 직설적 어조를 유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베트남 파병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돈과 바꾸려는 처참한 생각”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우리는 영원히 남의 눈치나 쳐다보는 사대적인 노예들일 뿐인가”라고 개탄하고 있다(1965년 1월호). 정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20세기 후반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은 철두철미 민족의 도덕적 각성, 인격의 자각, 영혼의 신생을 부르짖은 예언자이고자 했다. 선생의 2주기 기념 예배가 11일 오후 2시 대방동에 있는 서울여성플라자 4층 시청각실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박상익/우석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