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스님은 6·25 피난길에 인연을 맺은 경남 통영의 도솔암에 머물고 계셨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동산 스님,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오월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에도 선봉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선객 가운데 박금봉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금봉 스님은 도(道)가 높고 선지가 깊어 모두들 알아 모셨지만, 담배를 어찌나 많이 피워대는지 어느 누구도 금봉 스님 곁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피우고 나면 또 피우고, 금방 피우고 나서도 또 담배를 피워대는 골초 스님이었으니, 금봉 스님이 선학원에 나타나기만 해도 온 도량에 담배 냄새가 진동하는지라 모두들 코를 싸쥐고 고개를 돌리기에 바빴다.
그러니 어느 누구인들 금봉 스님과 한 방을 쓰기를 원했겠는가?
어느 날, 금봉 스님이 선학원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모든 수좌들이 너나없이 금봉 스님과는 한방에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효봉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모여 들었다.
이때 효봉 스님께서 젊은 수좌들을 크게 꾸짖었다.
“너희들은 어찌 금봉의 도(道)는 못보고 금봉의 담배만 보느냐?”
효봉 스님은 그렇게 꾸짖고 나서 스스로 목침을 들고 금봉 스님이 있던 방으로 거처를 옮겨 금봉 스님과 함께 지냈다. 줄창 피워대는 그 지독한 담배연기 속에서 쿨룩쿨룩 기침을 해가면서도 효봉 스님은 금봉 스님과 한방을 쓰셨던 것.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시느라고 효봉 스님이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계시던 1955년 초. 몹시 추운 어느 날, 스님은 전라도에서 상경했다는 스물 네 살 청년의 인사를 받고 출가를 허락했다. 당초 이 청년은 서울을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가 삭발출가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설이 내려 강원도 오대산 가는 교통이 두절된 바람에 한 스님의 소개로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게 되었던 것.
이날 선학원에서 머리를 깎은 젊은이가 바로 법정(法頂) 스님.
1955년 음력 7월 보름. 여름 안거가 끝나는 날, 효봉 스님은 통영 미륵산 미래사에서 법정에게 사미계를 내리고, 뒤이어 법정 혼자만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들어가 다시 참선삼매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참 제자 법정은 반찬거리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는데, 저녁 공양 지을 시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길어야 십분 정도 늦은 시각이었다. 허겁지겁 탑전으로 돌아온 법정은 서둘러 저녁 공양 지을 채비를 했다.
“이 애 법정아.”
이때 효봉 스님이 제자를 불렀다.
“예 스님.”
“오늘은 저녁 공양을 짓지 말아라.”
“예에? 공양을 짓지 말라니요?”
“오늘은 단식이다!”
“예에? 아니 스님…?”
“오늘은 굶을 것인즉 그리 알아라.”
“수행자가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어서야 되겠느냐?”
효봉 스님은 역정을 내시거나 언성을 높이지도 않으신 채 그렇게 한 말씀 하시고는 돌아 앉으셨다. 스님도 제자도 그 날 저녁 공양은 고스란히 굶었다. 그리고 그 날 그 일은 제자 법정 스님에게 무서운 가르침으로 깊게 각인되었다.
말년에 효봉 스님은 청력이 떨어졌다. 누구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점점 귀먹는 증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니 아랫사람들이 무슨 말씀을 드리려면 스님의 귀에다 가까이 대고 버럭버럭 고함치듯 해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효봉 스님께 크게 여쭈었다.
“스님, 귀가 잘 안 들리시니 답답하시지요?”
그런데 효봉 스님은 그 말만은 금방 알아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답답하기는. 시시한 소리 안 들으니 오히려 좋다.”
도망자 제자의 생일까지 챙겨줘
효봉 스님께서 경남 통영의 미래사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일당의 <군사무장강도단>이 반란을 일으켜 국가를 통째로 삼킨 뒤의 일이었다.
한여름 어느 날 미래사에 정보계 형사가 나타났다.
효봉 스님의 제자였던 일관 수좌가 동국대학교에 다니다가 환속, 혁신계 운동에 참여했는데 5·16 이후 빨갱이로 몰려 체포령이 내렸고 문제의 일관 박완일(朴完一)은 도망자의 신세이니 만일 박완일이 이 절에 나타나면 즉각 고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문제의 도망자 박완일이 처량한 모습으로 미래사에 찾아와 옛 스승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내, 나한테 올 줄 알았다. 혁신계 운동을 하다가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구?”
“예 스님. 죄송하옵니다.”
“당분간은 어디 갈 생각말고 내 방에 숨어 지내도록 해라.”
“아니옵니다 스님. 곧바로 피신을 해야 합니다.”
“허허 쓸데없는 소리! 내가 숨겨줄 것이니 여기 있도록 해!”
제자 박완일은 스님의 사랑에 울음을 터트렸다. 효봉 스님은 그날 시자에게 칼국수 두 그릇을 특별히 만들어 오도록 분부했다.
“완일이 너, 칼국수 무척 좋아했었지? 자 어서 들자꾸나.”
“스님께서는 아직도 칼국수를 좋아하십니까?”
“너 이녀석, 도망자로 다니느라고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인석아, 오늘이 팔월 초하루. 바로 완일이 너 귀빠진날 아니더냐?”
“네에? 오늘이 제 생일이라구요?”
칼국수를 먹던 도망자 박완일은 또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위대한 스승 효봉 스님께서는 환속한 제자, 도망자의 생일까지도 잊지 않고 계셨으니….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에도 선봉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선객 가운데 박금봉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금봉 스님은 도(道)가 높고 선지가 깊어 모두들 알아 모셨지만, 담배를 어찌나 많이 피워대는지 어느 누구도 금봉 스님 곁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피우고 나면 또 피우고, 금방 피우고 나서도 또 담배를 피워대는 골초 스님이었으니, 금봉 스님이 선학원에 나타나기만 해도 온 도량에 담배 냄새가 진동하는지라 모두들 코를 싸쥐고 고개를 돌리기에 바빴다.
그러니 어느 누구인들 금봉 스님과 한 방을 쓰기를 원했겠는가?
어느 날, 금봉 스님이 선학원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모든 수좌들이 너나없이 금봉 스님과는 한방에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효봉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모여 들었다.
이때 효봉 스님께서 젊은 수좌들을 크게 꾸짖었다.
“너희들은 어찌 금봉의 도(道)는 못보고 금봉의 담배만 보느냐?”
효봉 스님은 그렇게 꾸짖고 나서 스스로 목침을 들고 금봉 스님이 있던 방으로 거처를 옮겨 금봉 스님과 함께 지냈다. 줄창 피워대는 그 지독한 담배연기 속에서 쿨룩쿨룩 기침을 해가면서도 효봉 스님은 금봉 스님과 한방을 쓰셨던 것.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시느라고 효봉 스님이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계시던 1955년 초. 몹시 추운 어느 날, 스님은 전라도에서 상경했다는 스물 네 살 청년의 인사를 받고 출가를 허락했다. 당초 이 청년은 서울을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가 삭발출가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설이 내려 강원도 오대산 가는 교통이 두절된 바람에 한 스님의 소개로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게 되었던 것.
이날 선학원에서 머리를 깎은 젊은이가 바로 법정(法頂) 스님.
1955년 음력 7월 보름. 여름 안거가 끝나는 날, 효봉 스님은 통영 미륵산 미래사에서 법정에게 사미계를 내리고, 뒤이어 법정 혼자만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들어가 다시 참선삼매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참 제자 법정은 반찬거리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는데, 저녁 공양 지을 시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길어야 십분 정도 늦은 시각이었다. 허겁지겁 탑전으로 돌아온 법정은 서둘러 저녁 공양 지을 채비를 했다.
“이 애 법정아.”
이때 효봉 스님이 제자를 불렀다.
“예 스님.”
“오늘은 저녁 공양을 짓지 말아라.”
“예에? 공양을 짓지 말라니요?”
“오늘은 단식이다!”
“예에? 아니 스님…?”
“오늘은 굶을 것인즉 그리 알아라.”
“수행자가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어서야 되겠느냐?”
효봉 스님은 역정을 내시거나 언성을 높이지도 않으신 채 그렇게 한 말씀 하시고는 돌아 앉으셨다. 스님도 제자도 그 날 저녁 공양은 고스란히 굶었다. 그리고 그 날 그 일은 제자 법정 스님에게 무서운 가르침으로 깊게 각인되었다.
말년에 효봉 스님은 청력이 떨어졌다. 누구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점점 귀먹는 증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니 아랫사람들이 무슨 말씀을 드리려면 스님의 귀에다 가까이 대고 버럭버럭 고함치듯 해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효봉 스님께 크게 여쭈었다.
“스님, 귀가 잘 안 들리시니 답답하시지요?”
그런데 효봉 스님은 그 말만은 금방 알아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답답하기는. 시시한 소리 안 들으니 오히려 좋다.”
도망자 제자의 생일까지 챙겨줘
효봉 스님께서 경남 통영의 미래사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일당의 <군사무장강도단>이 반란을 일으켜 국가를 통째로 삼킨 뒤의 일이었다.
한여름 어느 날 미래사에 정보계 형사가 나타났다.
효봉 스님의 제자였던 일관 수좌가 동국대학교에 다니다가 환속, 혁신계 운동에 참여했는데 5·16 이후 빨갱이로 몰려 체포령이 내렸고 문제의 일관 박완일(朴完一)은 도망자의 신세이니 만일 박완일이 이 절에 나타나면 즉각 고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문제의 도망자 박완일이 처량한 모습으로 미래사에 찾아와 옛 스승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내, 나한테 올 줄 알았다. 혁신계 운동을 하다가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구?”
“예 스님. 죄송하옵니다.”
“당분간은 어디 갈 생각말고 내 방에 숨어 지내도록 해라.”
“아니옵니다 스님. 곧바로 피신을 해야 합니다.”
“허허 쓸데없는 소리! 내가 숨겨줄 것이니 여기 있도록 해!”
제자 박완일은 스님의 사랑에 울음을 터트렸다. 효봉 스님은 그날 시자에게 칼국수 두 그릇을 특별히 만들어 오도록 분부했다.
“완일이 너, 칼국수 무척 좋아했었지? 자 어서 들자꾸나.”
“스님께서는 아직도 칼국수를 좋아하십니까?”
“너 이녀석, 도망자로 다니느라고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인석아, 오늘이 팔월 초하루. 바로 완일이 너 귀빠진날 아니더냐?”
“네에? 오늘이 제 생일이라구요?”
칼국수를 먹던 도망자 박완일은 또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위대한 스승 효봉 스님께서는 환속한 제자, 도망자의 생일까지도 잊지 않고 계셨으니….
출처 : 보석 디자이너 www.yerina.co.kr
글쓴이 : 예리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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