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지옥은 이 세상에 있다”
효봉 스님께 한 신도가 여쭈었다.
“스님, 사람이 살아 생전에 좋은 일 많이 하면 극락에 가고, 나쁜 일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고들 하는데 정말인가요?”
“아무렴 그렇구 말구.”
“그럼 정말로 극락과 지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아무렴 있구 말구.”
“사람이 죽은 뒤에 저 세상에 가면 거기에 지옥도 있고 극락도 있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스님?”
“아니야. 지옥과 극락은 저 세상에 있는게 아니구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어.”
신도는 깜짝 놀랐다. 극락과 지옥이 저 세상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다니, 그런 말은 처음 들었던 것이었다.
“아니 스님, 이 세상 어디에 지옥과 극락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디긴 이 사람아. 도처에 지옥이 있고 도처에 극락이 있지.”
그러시면서 효봉스님은 당신이 엿장수를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효봉스님이 출가하기 전 엿장수를 하면서 어느 해 겨울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그 마을 부잣집에 초상이 났다고 하여 그 집에 머물며 품삯을 받고 허드렛 일을 해주기로 하였다. 그 초상집은 아들만 다섯을 둔 부잣집이었는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든 아들 다섯은 아버님 장례를 모시기도 전에 재산다툼을 벌여 형제간에 피가 낭자한 싸움판을 벌였다. 형제들은 서로 뒤엉켜 싸우고 여자들은 제각각 제 남편을 편들며 울고 불고 아우성이니, 초상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생각을 해보시게. 바로 이런 초상집이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겠나?”
그제서야 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봉스님의 말씀을 듣고보면 지옥도 극락도 먼데 있는 것이 아니요, 지금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 수없이 널려있다. 그리고 그 지옥과 극락은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스스로 만들고 있다.
어느 것이 제일인가?
아직도 불교집안에서는 ‘선승(禪僧)’이라면 좋아하고 ‘학승(學僧)’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느 유명했던 큰스님을 ‘동양최고의 학승이었던 00 큰스님’이라고 표현하면 그 큰스님의 교도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왜 ‘학승’이라고 지칭했느냐며 항의하고 ‘선승’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만큼 교학(敎學)을 가볍게 여기고 참선만을 귀히 여겨온 우리나라 불가(佛家)의 관습 때문이다.
효봉스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1950년대에도 참선우위, 교학경시의 풍조가 불교계를 휩쓸고 있었다.
어느날 한 제자가 효봉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흔히 삼학(三學)을 담아 불도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마는 삼학 중 어느 것이 으뜸입니까?”
삼학(三學)이란 계율(戒律), 선정(禪定), 지혜(知慧) 세 가지를 말함인데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하냐는 물음이었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놓은 적이 없는 효봉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승이었으므로 계·정·혜 삼학 가운데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정’이 으뜸이라고 말씀하실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효봉스님은 결코 어느 한편에 치우지지 아니한 채 다음과 같은 명담을 남겨 주셨다.
“계·정·혜 삼학을 집 짓는데 비유하자면, 계율은 집터요, 선정은 재목이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은 것.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으며 또 제 아무리 재목이 풍부하고 기술이 뛰어나도 집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삼학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계·정·혜를 함께 닦아야 불도를 이룰 것이야.”
효봉스님은 선승이었으면서도 결코 교학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참선과 교학이 어떻게 다른가 분명히 선을 그어준 일이 있었다.
교학 차이 분명히 드러내
효봉스님이 금강산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당시에도 불가에서는 참선하는 수좌들은 교학을 공부하는 승려들을 ‘학승’이라 부르며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교학을 공부하는 스님들은 참선하는 수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교학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부좌만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니 참선만 해가지고 어떻게 깨달을 것이냐’ 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던 때, 하루는 유명한 교학승이 효봉스님께 말을 걸었다. 다시 말하자면 ‘참선 만이 제일이다’하는 선승에게 교학승이 시비를 한 번 걸어본 셈이었다.
“스님, 소승이 알기로 부처님의 가름침인 교학을 익히는 것이나 참선수행을 해서 불도를 깨닫는 것은 큰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옵니다.”
“그, 그래서요?”
“저희가 교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물을 쓰는 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되옵니다마는 선가에서는 어찌하여 교학을 도외시한 채 그물쓰는 법을 배우지 아니하고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고집하시는지요?”
“스님께서 비유를 아주 잘 드셨소이다.”
효봉스님은 우선 교학승의 말을 듣고나서 칭찬부터 하셨다. 그리고 천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학만 고집하는 분들은 그물로 고기를 잡으려 들겠지요. 헌데, 선가에서는 바닷물을 통째로 한 입에 삼켜버리니 무슨 그물이 따로 필요하겠소이까?”
“예, 예? 바…바닷물을 통째로 한 입에 삼켜버린다구요?”
이 일화는 우리나라 불교계 최고의 학승이자 선객이었던 이운허 큰스님이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들려준 것인데,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선객은 무조건 존경부터 하게 되었다고 할만큼 효봉스님의 선지가 드높았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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