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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2 정기 콜로키움 발제문]
함석헌과 주체성의 문제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나는 하나의 우는 씨입니다.
한 마리가 울어서 백백천천 마리와
같이 우는 민초 속의 풀벌레입니다.
-함석헌
1. 함석헌의 철학과 자기에 대한 물음
함석헌이 철학자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이제 우문이다. 만약 철학이 하나의 직업이라면 함석헌은 철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철학이 전체에 통하는 생각의 활동이라면 함석헌이야말로 20세기 한국 최대의 철학자가 아닐 수 없다. 함석헌은 “철학자는 지혜를 찾는 사람이니, 다만 누가 정말 철학자냐, 어디 정말 철학이 있느냐, 어떤 것이 참말 지혜냐만이 문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참된 지혜, 참된 철학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굳이 함석헌의 저 물음이 아니라도 철학이 추구하는 지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철학이 지혜의 사랑이었다는 것은 그 이름 자체에서 알려져 있으나, 그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름이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자기가 추구하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때마다 다시 묻고 스스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함석헌에게서 지혜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기반성과 자기인식이었다.
반성은 모든 지식 행동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그 시작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뒤집어 놓으면 자기를 아는 것이 지식·지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아의 속의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석헌이 쓰고 있는 반성, 지식, 자아 또는 하나님 같은 개념이나 표현들은 서양 근대철학의 근본개념에 속하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이 개념들의 상호 얽힘 역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데카르트 이후의 의식철학에서 저 개념들이 얽히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지식(Wissen)의 근본을 반성(Reflexion)에서 찾는 것이나, 그 반성의 중심을 자아(Ich)에 두고 다시 자아 속에서 절대자인 신을 만나려는 것은―각 철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기는 하지만―데카르트 이후 칸트와 헤겔을 거쳐 후설에게까지 이어지는 근·현대 의식 철학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철학방법론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추구했던 철학적 지혜가 “자기를 아는 것”이었다면, 이는 우리가 근 현대 의식철학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지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친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의 인용문이 데카르트나 독일관념론 철학의 복제나 반복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똑같이 자아나 반성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의 울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저 인용문은 개념 하나 하나는 철학적이지만, 문장 전체로서 보자면 종교적인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함석헌이 저 글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은 잘 알려진 대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인데,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저 인용문이 놓여 있는 사유의 위상은 단순히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서양철학을 준거로 삼는다면, 함석헌이 자아에 대한 지혜를 말할 때, 그것은 데카르트적이기도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점이 함석헌의 자아론의 한 고유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함석헌의 자아론에서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특징이 아직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개별적 사유의 주체로서 자아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언제나 민족적 자아와의 연관성 속에서 말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인용문이 놓여 있는 문헌상의 장소부터가 그러한데 그것에 이어지는 단락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를 아는 사람, 우주 만물의 중심으로서의 자아, 그 자아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나를 깨쳐 아는 사람이 어진 것 같이, 한민족도 제 역사, 그 중에서도 현대사를 바로 알아야 어진 민족 어진 국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보듯이 함석헌은 개인의 주체성을 민족의 주체성과 같이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유비가 아니라, 개인적 자아의 주체성에 대한 본질적 통찰에 따른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개인은 저만이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개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개인의 뒤에는 언제나 전체가 서 있다.”
그 전체는 종교적으로 하면 하나님이요, 세속적으로 하면 운명공동체인 전체 사회다. 종교적인 전체는 하늘 위에 있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처음부터 환한 것이다. 영원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세속적인 전체는 땅 위의 것이므로 시대를 따라 늘 자라왔다. 씨족에서 봉건국가로, 봉건국가에서 민족으로 넓어져 왔다. 지금까지 개인의 뒤에 서서 버텨주고 명령한 것은 민족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개인의 주체성의 요람으로서 두 가지 다른 전체를 제시하는데 그 하나가 초월적이고 무제약적인 전체로서 하나님이요, 다른 하나가 세속적, 사회적 전체로서의 민족이다. 모든 인간은 절대자인 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것만큼, 또한 민족이라는 지평에서만 자기를 정립한다. 이런 입장에 따라 함석헌은 “모든 개인은 다 민족의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이 개인적 자아가 민족적 자아의 한갓 표현이나 구성요소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뒤에는 민족이라는 전체가 있지만, “민족적인 본성은 개인의 자아 속에서만 볼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와 나라는 그 주체성에 관해서 공속하는 관계 속에 있다. “내가 곧 나라요”, 거꾸로 “나라는 … 내게 있다.”
이런 공속성 때문에 함석헌에게서 자아의 주체성을 묻는 것은 언제나 민족의 주체성을 묻는 것과 같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개인의 주체성의 정립이라는 과제는 언제나 개인이 속한 민족이 더불어 형성하는 나라의 주체적 정립이라는 과제로 전환되며,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기의식은 언제나 민족의 공동적 자기의식으로서 역사의식과 뗄 수 없이 결합하게 된다.『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함석헌에게는 처음부터 이 두 가지 문제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개인의 주체성의 문제가 동시에 민족과 역사의 주체성의 문제인 까닭에 그에게서 주체성의 문제는 단순히 의식철학적 자아분석에 머물지 않고 가장 첨예한 정치의 문제가 된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지혜와 자기인식이 고립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시민적 주체의 일이었듯이 함석헌의 경우에도 자기인식은 언제나 나의 일이면서 동시에 나라의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대로 함석헌의 자아 및 주체성 이론에서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정치가 처음부터 공속한다. 비슷한 점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들 각각은 모두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실천적 사상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함석헌의 자아 및 주체 이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철학자의 어떤 이론과 유사성을 지니고 실제로 어떤 영향관계 속에 있든지 간에, 그의 철학이 남의 생각을 빌려다가 부분부분 이어붙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선 그의 자아론이 보여주는 다양한 스펙트럼은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그 자체로서 그에 비슷하게 대응하는 서양철학의 특정학파 및 이론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의 자아분석은 데카르트와 비슷하지만 같지 않고, 그의 믿음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르며, 그의 정치의식은 소크라테스와 닮은 데가 있지만 이 역시 닮은 것일 뿐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함석헌의 자아론은 서양철학의 모방이 아니요 자기 고유의 자기인식의 표현이었다. 하물며 그의 자아론을 전체로서 고찰할 때에는 이런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받아들였던 만큼 또한 동양의 종교와 철학 역시 자기 나름대로 천착하고 소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던 바, 단순히 서양철학이나 종교의 아류라고 하기에는 그의 사상은 너무도 동양적이었다. 그는 무슨 주제에 대해서든 동 서양 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기의 생각을 펼쳐나갔는데, 자아에 대해 말할 때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그는 자아의식을 말하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하고, 격물치지를 말하면서 격인치인(格人致仁)을 말했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동서양을 넘나드는 전체 사유의 폭은 다시 그 사유의 부분적 전개에도 영향을 미쳐 함석헌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말하든 언제나 자기 고유의 사유지평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까닭에 비슷한 주제에 대해 말하면서도 남과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체 및 자아이론 역시 전체로 보든 부분으로 보든 남의 모방이 아니라, 동서양의 사상적 전통을 소재로 삼아 자기 스스로 터득해 낸 지혜였던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동서양의 온갖 철학과 종교에 닿아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서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함석헌의 자아이론의 전체상을, 단순히 외부적 영향이나 유사성에 일방적으로 기대지 않고 그 자체의 내적 원리에 따라 그려 보이는 것이다. 이 과제는 일차적으로는 함석헌 철학의 고유성과 근본성격을 해명하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20세기 한국철학 전반의 고유성과 근본성격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아와 주체성의 문제는 유영모로부터 시작해 함석헌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단철학과 거리의 철학을 가릴 것 없이 우리 시대 한국 철학의 저변에 놓인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철학은 그 사유의 산맥에서도 가장 높이 치솟은 봉우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자아 및 주체성의 이론의 고유성을 생각하는 것은 20세기 한국 철학의 고유성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일인 것이다.
그런데 고유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차이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함석헌에게서 자아와 주체성의 이론의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같은 문제에 대해 서양철학의 입장과 함석헌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2. 순수 자아의 발견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자아와 주체성에 대한 사유는 데카르트와 칸트를 비롯한 근 현대 의식철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함석헌은 자기인식을 자기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설정했으면서도, 마치 서양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데카르트나 칸트의 이름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지금까지 많은 함석헌 연구자들로 하여금 함석헌이 말하는 자아론을 근대적 의미의 주체성 이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고 해명하지 못하도록 만든 까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함석헌이 데카르트나 칸트를 어느 정도 읽고 이해했는지는 하나의 문헌학적 탐구의 과제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어떠하든 적어도 글로 표현된 그의 생각만을 두고 판단하자면 함석헌에게서 데카르트-칸트적 주체성의 개념은 거의 육화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견고하고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다.
사람이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할 뿐만 아니라 하는 줄을 아는 것이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줄을 알고 할 때 그 하는 일은 굉장한 힘이 있는 것이 되고, 아는 줄을 알 때 그 지식은 질적으로 일단 높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석헌은 “자기를 가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된 점”은 결과적으로 볼 때 자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란 것은 “생각하는 데” 있다. 나는 오직 생각하는 한에서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대상의식이 아니라 자아의식이며 직접적인 앎이 아니라 반성이다. 이를 가리켜 그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이라 표현한다. 바로 이 앎의 앎이 반성이요 자기의식인 바, 본질적으로 보자면 모든 생각 모든 “의식은 결국 자아의식”인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함석헌이 말하는 자기 또는 자아는 칸트에게서 그랬듯이 사물적인 실체가 아니라 활동(Tätigkeit)으로서 존립하는 자아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와 칸트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의 경우에도 이 자아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다른 모든 인식에 앞서는 어떤 절대적 명증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의 참이라거나 꿈이라거나, 하나님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 무슨 이론을 하거나 이 ‘나’라는 나를 부인할 수는 없고 나는 나만의 나인 것을,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아니라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함석헌은 단순히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나’, 즉 ‘나는 나’라고 하는 나에 대해서 말한다. 즉 그것은 즉자적인 자기가 아니라 나를 나로서 긍정하는 나 자신이다. 이 반성적, 자기관계적 자아는 다른 모든 대상인식이 흔들려도 (인생이 참이든 꿈이든 신이 있든 없든) 부인할 수 없는 명증성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확실한 것은 바로 이런 나 자신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무엇에 대해서든 결국 나 속에서 나를 통해 인식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함석헌이 자기를 아는 것이 다른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된다고 말했던 것도 생각하는 나의 이런 명증성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다른 모든 진리가 개방되는 첫째가는 지평인 것이다.
정신이 어디 있느냐? 사람에 있지. 사람이 누구냐? 나지. 나 밖에 사람은 없다. 막막한 우주에 사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이 나다. ‘다른 사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임의로 부릴 수도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나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나요, 내가 죽여도 좋은 건 나다. 나뿐이다.
여기서 보듯 함석헌은 사람을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생각의 주체로서 이해한다. 그런 한에서 막막한 우주에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생각하는 이 나를 넘어가면 다른 사람은 주체가 아니다. 단순히 생각의 주체성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성은 자기관계에 존립한다. 하지만 내가 이론적 인식에서나 실천적 행위에서 반성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자기는 나 자신밖에 없다. 내가 알고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이 이 우주 내에 주체로서 존재하는 나인 것이다. 이처럼 방법론적 나홀로주의(solipsism)를 고수했다는 점에서 함석헌은 데카르트와 칸트가 걸었던 길을 따른다.
내가 아담이다. 민족이 나다. 인류가 나다. 역사도 나요, 인생도 나다. 내 속에 다 있다.
‘내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누구보다 독일 관념론자들에게서 익히 들어온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 속에 있다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닌바, 실제로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이 개방한 이른바 순수 자아가 도대체 누구이며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근 현대 의식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심각한 내적 동요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철학자들이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 대답했든지 간에 그들의 견해는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는데, 그것은 저 ‘나’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인식론적 주체이면서 보편적 주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자아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실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철학자들은 그것을 칸트처럼 형식적 자아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헤겔처럼 신적 자아로 간주하는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 중 어떤 길을 택하든지 간에 순수 자아가 개별적 자아의 개성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자아의 개별성은 언제나 인식의 오류와 실천의 과오를 낳을 뿐이다. 개별적 자아는 이론에서든 실천에서든 자기의 개별성을 부정하고 보편적 자아에 참여할 때, 비로소 자기의 주체성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이런 식으로 순수 자아를 추상적이고 획일적인 보편적 자아로 간주하면서 개별적 자아에게 다만 보편적 자아와 합일할 것을 요구할 때, 그 보편적 자아는 ‘참된 나’를 자처하면서 현실적 자아를 ‘거짓된 나’로 억압하는 초자아(Über-Ich)로 군림하게 된다. 그 결과 개별적 자아의 개성적 인격성은 소외된 순수 자아의 이름으로 부정되고 억압되는데, 오늘날 서양의 현대 철학이 한편에서는 개별적 주체의 자유와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근대적 주체성의 개념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음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서양의 근대 철학이 추구했던 순수 자아란 한갓 인식론적 주체로서 아무런 실체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 공허한 형식적 주체로 머물거나 아니면 실체화 되는 순간 개별적인 자아를 억압하는 초자아로 군림한다. 앞의 경우는 아도르노(T. Adorno)가 칸트의 도덕적 주체에 사드(M. de Sade)의 욕망하는 주체를 맞세워 비판했듯이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고, 뒤의 경우는 신이나 국가, 당 또는 자본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자아의 이름으로 자아를 억압하는 폭력적 주체가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 근대적 자아와 주체성의 개념이 보편성과 개별성을 매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서양 철학자들은 순수한 자아를 현실에 오염된 개별적 자아로부터 분리해낼 줄은 알았으나 자아의 그 두 차원을 다시 결합시키는 일에서는 때마다 실패했다. 철학의 실패는 단순히 이론의 실패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현실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는데, 개인의 해방과 참된 자아실현이라는 근대적 이상은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무한경쟁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그 이면에서 홀로 모든 개별자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거대주체(자본이나 국가 또는 기술)의 독점적 지배로 귀착하는 것이다.
3. 추상적 자아와 구체적 자아
그러나 똑같이 자아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서양의 근대철학이 빠졌던 딜레마에 빠져들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 함석헌이 찾으려 했던 ‘참 나’가 서양 근대 철학이 추구했던 순수 자아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해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단 함석헌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철학에서 자아와 주체가 문제되었던 까닭이 단순히 인식론적 동요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데카르트에게서 보듯이 서양의 근대적 정신이 자아에게 복귀했던 까닭은 대상 세계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근대적 정신에게 순수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 명증적 확실성의 장소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확실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기 보다는 대상 인식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한 토대로서 더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적인 주체는 살아 있는 인격의 주체가 아니다. 그 주체는 모두이기는 하지만 아무도 아닌 주체, 그런 한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주체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인식활동의 근저에 있는 어떤 기능적인 주체요, 그런 한에서 그것은 (인식을 위한) 도구적 주체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체가 문제가 되었던 까닭은 오직 거기서만 절대적 진리가 표현되고 실현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이 찾아야 했던 자아와 주체는 그런 추상화된 인식론적 주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상인식의 동요와 불확실성이 아니라 어떤 총체적인 자기상실이 그를 자아를 찾는 길로 떠밀었기 때문이다. 비단 함석헌의 경우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철학에서 자아가 문제가 된 까닭은 이 시대 조선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겪어야 했던 식민지배 아래서의 노예적 자기상실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이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렇게 자라나던 국민의 의기에 하루아침에 서리가 내렸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병이 됐다. 나라는 망했다. 산도 그 산이요, 바다도 그 바다요, 하늘도 그 하늘, 사람도 다름없는 흰 옷 입은 그 사람이건만 이제부터 자유는 없단다. 자유가 무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유 속에 자유가 무언지 모르고 살았던 나는 이제부터 자유가 무언지를 배워야 했다.
여기서 함석헌은 어떻게 자유의 상실로부터 자유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는지를 회고한다. 자유의 의미를 배워 나가는 도야의 길은 즉자적 (무반성적) 자유의 상실과 결핍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용문에서 자유를 자기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함석헌에게서―아니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자아는 본질적으로 자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완전이 어디까지인지 말로 할 수 없지만,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하늘나라라 하지만, 그 뜻을 말하면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다. 영원 무한을 지향하고 자유 발전하여 나가는 것이 인격이다.
인격이란 자아의식과 자주적 의지 위에서 자기를 완전에 이르도록 실현해 나아가는 활동의 주체이다. 자유란 바로 그런 활동 전체를 일컫는 말로서 자유를 잃는다는 것은 곧 인격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지 상태에서 자유를 잃은 모든 조선 사람들은 만해가 노래했듯이 인격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자유의 상실이 반드시 외부적 강제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도리어 우리가 자유를 빼앗긴 것은 스스로 버리고 찾지 않은 것의 결과라고 보았다. 생각하면 주체의 자유는 남이 선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이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를 버리는 것도 자기이고 얻는 것도 자기인 바, 이것이야말로 주체의 근원적 자발성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버린 것이 먼저든 빼앗긴 것이 먼저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그 부재와 결핍의 상황 자체이다. 함석헌의 철학은 그런 자기상실 속에서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자기를 찾아나가는 정신의 노동이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가 찾으려 했던 자아가 인식론적 자아도, 추상적인 순수 자아도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다. 한 번도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 본 적이 없는 정신에게는 자아와 자유 그 자체가 통째로 문제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 자아도 자유도 늘 거기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만 현존하는 자아의 불완전성을 지양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추구되는 자아란 그렇게 불완전성을 지양하여 완전성에 도달한 순수 자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아는 하나의 이념이다. 그리고 이념은 그것이 이념인 한에서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이다. 물론 이념이 비현실적이라 해서 그것이 언제나 현실을 형성하는 힘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념과 현실 사이의 본질적 거리는 이념이 현실적 형성력을 잃어버린 공허한 이념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수반한다. 그런 한에서 순수 자아의 이념이란 그 이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를 고양하는 현실적 형성원리가 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관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고찰할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든 그것이 나의 현존을 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순수 자아의 이념을 어떻게 상정하든 그리고 내가 그 이념을 받아들이든 말든, 나는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한, 내가 아무리 잘못 생각한다 하더라도 나의 현존이 폐지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생각과 나의 현존의 유일한 근거라는 점에서 데카르트적 자아는 인식론적 자아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근대적 자아가 철학자들의 손에서 어떤 변모를 겪든지 간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자아의 이 명증성이 위협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런 한에서 나는 있다. 다른 모든 일은 그 다음의 일인 것이다.
생각하면 이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자아의 자명성이야말로 서양의 근대적 자아이론을 왜곡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개별자로서의 나의 존재가 다만 생각하는 것을 통해 (의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확보된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이처럼 생각만으로 내가 존재하는 까닭에 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나를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이것은 구체적인 자기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 이것을 생각하면 근대 철학자들 누구도 자아를 논하면서 참된 의미에서 1인칭의 자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데카르트에게서 후설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의식철학은 자기를 언제나 추상적 보편성 속에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어떤 철학자도 자기에 대해 말하면서 참된 의미에서 1인칭의 관점을 유지한 사람은 없었다. 데카르트는 짐짓 자서전적인 고백의 형식으로 자기반성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데카르트라는 개인의 자아가 문제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칸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피히테나 셸링이 자아를 3인칭으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칸트는 적어도 문법적으로 보자면 1인칭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1인칭 개별자로서의 나 역시 개성적 인격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자아는 어디까지나 구체적 개성이 사상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순수 자아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서술방식이 1인칭이냐 3인칭이냐 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서술방식이 어떠하든, 개별적 자기가 명증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기를 찾기 위해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근대적 자아가 그렇게 개별적 자기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완전하고도 순수한 보편적 자아에 진지하게 몰입했더라면, 그 또한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의 진지함이란 자기의 전 존재를 거는 치열함에 존립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명증적으로 현전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위해 확실한 자기를 걸고 불확실한 순수 자아를 얻기 위해 도박을 해야 하겠는가? 나는 참된 나를 찾기 위해 나의 전 존재를 걸 필요는 없으니, 그 결과 최악의 경우 순수 자아란 한갓 관념적 장식으로 전락하고, 마지막에는 다만 개별적 자아의 욕망의 자기주장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경우에는 이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에게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를 정립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절박한 과제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와 주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생각하는 한에서 자기가 남이 아닌 자기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 자유를 빼앗긴 사람에게 그런 인식론적 자아란 언제나 절반의 자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인용했듯이 인격은 자유하는 것인 까닭에 자유를 잃어버리고 나면, 개별적 자아의 인격성 역시 온전하게 확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자유와 자발성을 빼앗기고 난 뒤에 남는 한갓 생각의 주체로서의 자기를 두고 참 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를 얻느냐 잃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자아는 보편적인 순수자아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자로서의 자아, 말하자면 다른 누구보다도 함석헌 자신이요, 그 철학에 참여하는 우리들 각자의 개별적인 자아이다. 그리하여 이런 경우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한갓 관념의 일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구체적 현실의 일이 되며, 찾고 실현해야 할 ‘참 나’는 한갓 관념적 보편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자로서의 나 자신인 것이다.
4. 구체적 보편성
그런데 이처럼 함석헌에게서 문제되었던 참된 자아가 추상적인 순수 자아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적 인격이었다는 것은 자아의 개념뿐만 아니라 보편성의 개념도 변화시키게 된다. 참 나라는 것이 구체적 자아라고 해서 한갓 사사로운 개별자인 것도 아니고, 나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나의 즉자적 욕망을 그대로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함석헌 역시 참된 자아가 그런 의미의 즉자적 개별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관의 주(主)는 누구의 나에도 통할 수 있는 참 나지, 서로 충돌하는 작은 나, 거짓 나, 사(私)가 아니다.
여기서 ‘참 나’라는 것이 누구의 나에도 통할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이 보편적 나라는 말일 것이요, ‘작은 나’가 서로 충돌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개별적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용문만 두고 보자면 함석헌은 자아의 저 두 차원이 대립할 때, 보편적 자아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사유를 전체로서 보면 우리는 함석헌이 나의 두 차원을 그렇게 단순히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함석헌이 자아의 두 차원을 어떻게 근원적으로 구별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함석헌에 따르면 자아 속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또는 ‘참 나’와 ‘거짓 나’가 내적으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까닭은 자아가 반성적 자기의식 속에서 정립되기 때문이다. 그는 반성적 자기의식이 자기 긍정인 동시에 자기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식은 자기긍정이면서 부정이 되어버리는 자기부정에 의하여 또 자기긍정을 하게 된다.” “제가 저를 아는 것이 긍정이면서도 자기부정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반성 속에서 자기긍정과 부정이 공속하는 까닭은 “의식은 결국 자아의식인데 자아를 한 번 의식하면 자아도 그냥 있을 수 없고 의식도 그냥 의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있다 하면 벌써 나도 참 나 곧 한 나가 아니요, 있음도 참 있음이 아니다.” 이 아님 속에 자아의 자기 분열이 있고 동시에 자기 초월이 있다.
있다 함은 벌써 생각이 끊어진 것이요, 생각하면 벌써 있음은 깨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모순과 통일이 딴 것 아니다. 모순은 의식된 통일이요, 통일은 의식된 모순이다. 생명은 이것으로써 자기초월을 해나간다. 인격의 본질은 자기초월이다.
여기서 모순이 의식된 통일이요, 통일이 의식된 모순이라는 것은 내가 있다는 자기의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이로부터 자기초월의 활동을 인격의 본질로서 끌어내고 있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자기에 대하여 있음’(an und für sich sein)을 의미한다. 즉 반성은 언제나 자기를 넘어감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이것을 단순한 이행이 아니라 초월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자아가 반성적 자기의식에서 통일 속에서 분열을 보고 그 분열 속에서 다시 통일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바로 완전성을 향한 초월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다 해서만 나일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식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저항하고 반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뜻 없는 자기이탈이 아니라 유한성으로부터 완전한 존재를 지향하고 분열된 존재를 가장 높은 곳에서 통일하려는 욕구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 속에 본질적으로 완전성에 대한 지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식은 단순한 자기동일성의 의식이 아니라 유한한 자아가 자기 속에서 무한하고 완전한 나, 곧 ‘참 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 참 나가 바로 하나님이다. 함석헌은 하나님을 한 나, 곧 큰 나로 이해한다. 내가 반성 속에서 나를 의식하면서 넘어갈 때, 나는 바로 그 큰 나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함석헌은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본 것”이라 표현한다.
하나님을 보편이라 한다면, 내가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것은 내가 절대적 보편자 속에서 여기 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그 길을 걷지 않는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서는 가장 보편적일 수가 없다.
여기서 함석헌은 정신의 세계에서는 보편성이 오직 구체성 속에서 온전히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개별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개성적이라는 말이다. 자아는 어떤 의미로든 보편성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참되게 실현한다. 하지만 그 보편성이란 개별적 인격과 분리된 추상성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개별자 속에서 표현되고 실현되는 보편성인바, 그것이 바로 개성이다. 이런 사정을 표현하기 위해 함석헌은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개성적인 인격”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편적 자아라면 그것은 오직 우리들 각자의 개성적 인격 속에서만 계시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오직 개성적 인격 속에서만 표현되고 실현되는 보편자를 구체적 보편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보편성과 개별성을 매개하려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철학사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사유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볼 때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한 데가 있다.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중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
하나님은 보편자이다. 나는 오직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참 나가 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처럼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의 개별성을 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경우는 정 반대이다. 나와 하나님의 합일이 종교인데, 참된 종교는 언제나 나의 종교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가장 구체적인 1인칭의 인격인 나, 결코 남일 수 없는 자기이다. 나와 하나님이 합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즉 종교란 모든 사람이 획일적으로 보편자에게 종속하는 사건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편자를 드러낼 때 비로소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이를 가리켜 그는 참 종교는 오직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함석헌에게서 보편자는 언제나 차이 속에 있는 보편인바, 바로 이 통찰이야말로 함석헌이 보여주는 독보적 깨달음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석헌이 단순히 차이를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를 철저히 개성적 차이 속에서 말한다는 데 있다. 니체 이후 현대 철학자들에게 차이를 말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자들은 차이를 통해 보편자를 해체할 줄은 알았어도 보편자가 차이 속에서 생성되는 줄은 몰랐으니 근대적 동일성의 철학을 현대적 차이의 철학으로 대치하는 것은 모순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옮아온 것일 뿐 문제의 해결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보편을 말하되 그것을 차이 속에서 말함으로써 차이와 동일성, 또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5. 씨과의 만남
자기의식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만남이다. 그런 한에서 자기의식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그것은 작은 내가 큰 나를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믿음을 정통 기독교에서 생각하듯이 소외된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다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한 가지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아직 있으니 그것은 함석헌이 신에 대한 믿음을 자기에 대한 믿음으로 본 것만큼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우리 끼리를 믿어야 믿음입니다. 하나님 믿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은혜주고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데, 아니 믿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진리 믿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참이라는데, 영원불변이라는데,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데 어느 마음이 아니 믿겠습니까? 우리 끼리 서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끼리 서로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 진리 믿는다는 것이 모두 빈 말이 돼버립니다. 하나의 관념이요, 빈 생각이요, 공중누각입니다. … 우리는 이 세계,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통해서만 하나님, 진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요, 믿음으로 계시는 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허허막막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문제 아니라 우리 끼리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 나는 한 나 곧 하나님이다. 하지만 모든 내가 또한 하나님이기도 하다. “내가 곧 나라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인간 속에서 그를 찾아야 하며,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써만 찾아질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나를 믿고 이웃을 믿음으로써만 신에게 다가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 된 만남의 지평을 가리켜 함석헌은 더러는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민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또는 씨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말 있는 것은, 은, 한 뿐이다. 그것이 혹은 얼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민(民)이란 곧 그러한 모든 우연적·일시적인 제한, 꾸밈을 벗고 바탈 대로 있는 인격이다.
바로 이 민, 함석헌의 표현으로 씨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구체적인 보편자의 현실태이다. 그것은 구체성에서는 나요, 보편성에서는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함석헌에게 “모든 정신적 물질적 활동의 목표는 … 하나님과 씨”이었다. “씨로 감은 결국 하나님으로 감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씨들 속에서 그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전체와 하나 되며 그렇게 전체와 하나 됨을 통해서만 참된 나를 실현할 수 있다. 함석헌은 이런 자기의식을 한 마리 풀벌레에 빗대어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하나의 우는 씨입니다. 한 마리가 울어서 백백천천 마리와 같이 우는 민초 속의 풀벌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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