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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책]'씨알,생명,평화'

by 마리산인1324 2007. 5. 15.

 

<한겨레신문> 2007-03-29 오후 09:41:39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99701.html

 

‘고난의 역사’에 핀 ‘대자유’의 꽃
“인간의 본질은 자유, 자유 향한 길은 고난의 길
생명의 역사·우주의 역사는 고난의 극복사
자유를 본질로 하는 생명은 사랑을 본질로 한다”
신학·철학자들이 사유한 함석헌 사상의 ‘넓은 지도’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씨알 생명 평화-함석헌의 철학과 사상>씨알사상연구회 엮음. 한길사 펴냄·2만원
한반도의 지난 100년은 세계사의 온갖 모순이 집약되고 중첩된 시대였다. 부패한 왕조의 패망, 가혹한 식민주의 경험, 동족상잔의 분단과 전쟁, 기나긴 독재와 비인간적 산업화,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 피로 쓴 역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토록 혹독한 역사라면, 그 역사를 자양분 삼아 큰 사상이 나왔을 법도 한데, 그 역사의 무게에 걸맞은 사상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역사에 하나의 예외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함석헌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그야말로 피만 남고 꽃은 없는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씨알 생명 평화>는 이 예외적 인물의 철학과 사상을 살필 기회를 주는 글 모음이다. 함석헌의 사상을 연구하는 씨알사상연구회(회장 박재순)가 지난 4년 동안 매달 열었던 연구모임에 발제된 글 가운데 19편을 모았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국내 학자들이 각각 그린 함석헌 사상의 지도라 할 글들인데, 글쓴이들마다 관점과 견해가 조금씩 달라 지도의 모양에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함석헌의 사유가 그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할 터다. 글을 엮은 박재순 회장은 “함석헌 사상에 대한 본격적이고 진지한 연구성과를 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함석헌은 종교인이었고 신학자였고, 동·서양 철학의 회통을 꾀한 철학자였고, 인간과 우주와 역사를 한눈으로 통찰한 사상가였고, 그 모든 것 위에서 현실의 불의와 맞붙어 싸운 실천가였다. 그의 사유는 20권에 이르는 ‘함석헌 전집’에 담겨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핵심이 되는 한 권을 꼽으라면 아마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초판 제목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일 것이다. 이 책을 놓고 철학자 김상봉 교수(전남대)는 “이 한 권이 있어 20세기에 한국철학이 있었다고 나는 단언한다”라고 힘주어 말한 바 있다.

 

함석헌 사상의 출발점은 기독교 신학이다. 도쿄 유학 시절(1924~1928) 일본 기독교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깊이 받아들였고, 오산학교 시절 스승으로 모신 다석 유영모의 유·불·도 통합사상을 전수받았다. 이어 테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론적 기독교 신학이 그의 사상 속으로 들어왔고, 퀘이커교단의 평화주의도 그의 사상의 한 젖줄이 됐다. 이 지류들이 모두 모이고 섞여 함석헌 사상의 넓은 바다를 이루었다.

 

사랑이 없다면 진화도 진보도 없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는 말을 찾는다면, ‘자유’와 ‘사랑’이 맨 앞자리에 놓일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고난의 역사는 우선은 식민주의에 신음하고 전쟁과 폭압에 짓눌린 이 땅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인류사, 나아가 우주사 자체가 그에게는 고난이다. 그러나 고난은 다만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난에는 ‘뜻’이 깃들어 있다. 생명활동 자체가 고난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생명의 역사, 우주의 역사가 고난의 극복사이며, 그 고난 속에서 자유가 핀다. 글쓴이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규성 교수(이화여대·철학)는 자유야말로 함석헌 사상의 한 핵심 축이라고 말한다. “함석헌의 우주관은 자유의 완성을 의미로 가지고 있는 일종의 목적론”이다. 우주의 진화, 생명의 진화 속에 인간이 있다. 인간의 본질은 자유다. 그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언제나 고난의 길이다.

 

»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은 기독교에서 사유의 첫걸음을 시작했으나 종국에는 기독교마저 넘어서는 대자유의 사상으로 나아갔다. “그는 어떤 것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가 염려한 것은 오직 정신의 진보였다.” 한길사 제공
자유를 본질로 하는 생명은 또한 사랑을 본질로 한다. 사랑이 없다면 진화도 없고 진보도 없을 것이다. 함석헌에게 사랑은 ‘십자가 구조’로 이해된다고 이규성 교수는 말한다. 수직으로는 영원한 존재인 신과 관계하고, 수평으로는 평등한 존재인 다른 인간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수직적 사랑이 종교의 형식을 띤다면, 수평적 사랑은 정치의 형식을 띤다. “수평적 사랑은 사랑의 본성에 어긋나는 정치적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하고, 그것과 충돌하게 한다.” 자유의 실현을 가로막고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정치 현실에 대한 저항은 그러므로 함석헌 사상 안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 된다.

 

함석헌은 <대학>의 구절을 들어 종교와 정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설명한 바 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있는 것으로 하면 명명덕(明明德·밝은 덕을 밝혀 보여줌)이요, 이웃에 있는 것으로 하면 친민(親民·백성을 아끼고 섬김)이요, 통틀어 말하면 지어지선(止於至善·최고의 선에 이르러 머무름)이다.” 함석헌은 “인간이 그 모든 타락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지어지선에 이를 것으로 믿었던 사람”이라고 김상봉 교수는 말한다.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

 

함석헌은 기독교를 사상의 뿌리로 간직한 사람이었지만, 후년에 이르러 그 기독교마저 대자유의 정신에 자리를 내주었다. 1965년에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 제4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 기독교가 유일의 참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이 되는 참(진리)에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함석헌의 ‘큰 정신’을 거듭 강조한다. “함석헌은 그렇게 큰 정신이었다. 그는 편견 없이 생각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것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가 염려한 것은 오직 정신의 진보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