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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우리에겐 함석헌이 있잖아!(조광, 한겨레21 030508)

by 마리산인1324 2006. 12. 30.

 

 

<한겨레21>  제458호

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3/05/021015000200305080458057.html

2003년05월08일

 

 

 

우리에겐 함석헌이 있잖아!

<뜻으로 본 한국역사> 출간 70주년에 학계 안팎에서 재평가받는 함석헌의 민족주의 사학


사진/ 80년대의 함석헌. 그는 ‘고난’이 우리 역사를 이끈 힘의 원천이었음을 지적하는 독특한 역사해석을 했다.


20세기 한국의 언론인이요 역사학자였던 천관우는 함석헌(1901~89)을 “우리나라 당대의 첫째 가는 역사가의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그는 함석헌이 “역사를 사료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간행된 직후 밤을 지새워 그 책을 읽고 감격했음을 말했다. 오늘날의 주요 역사연구자 가운데 하나인 이기백도 함석헌과 신채호는 자신의 사상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음을 피력했다. 이들 외에도 그의 책을 읽고 감동했던 이들이 많을 법하다.

 

함석헌이 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70여년 전 식민지 압제 아래서 집필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이 편집하고 있던 <성서조선>에 2년간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함석헌의 이 글은 총독부 검열에 걸려 누더기가 되었고, 전문이 삭제된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식민지 당국은 함석헌의 글을 누더기로 만들며 우리 역사의 뜻을 속이고 가리려 했다.

 

총독부 검열에 누더기 되었던 ‘역사 해석’

 

민족이 해방되자 함석헌은 잘려나간 자신의 글을 다시 정리해 한권의 단행본으로 엮어냈다.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이 책은 간행 직후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962년에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으로 다듬어져 다시 세상에 나왔다. 우리나라 20세기의 고전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오늘까지 판을 거듭하면서 더욱 곱씹어 읽히고 있다.

 

식민지시대 청년 함석헌은 기독교 신자였고,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가정은 그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고, 그가 살던 시대는 그를 민족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3·1운동이 실패한 이후 평양고보를 자퇴하고 오산학교로 옮겨갔다. 그곳 오산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 함석헌이 본격적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그는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나 역사학을 공부하던 과정에서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 역사와 신앙에 대한 그의 사색은 더욱 깊어갔다.

 

함석헌은 30대 전반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우리 역사를 생각했고 그 의미를 밝혀보고자 했다. 그는 대학에서 실증사학적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실증주의 사학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역사의 주체인 민족을 생각했다. 민족이 걸어온 수난의 길에 함축되어 있는 메시지를 읽어나가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민족사의 고난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캐냈다. 여기에서 ‘고난사관’으로 불리는 그의 독특한 역사해석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런 생각을 뿌리로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과 씨알사상이 자라났다. 1960년대 이후 그의 사상은 기독교의 틀을 넘어 진리와 진실 그 자체를 폭넓게 추구한다. 뒷날 그는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저항하고, 박정희의 무단통치를 거스려 반독재투쟁을 전개했다. 참답게 살고자 했던 그는 이 투쟁을 통해 씨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표현했다. 이에 비례해 그에 대한 헐뜯음이 조직적으로 조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흰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발로 의연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때 그 자신은 고난받는 백의민족의 상징이었다.

 

민족의 미래 낙관… 실증사학 비판

 


사진/ 민족주의는 반역인가? 안중근 의사의 혈서를 새겨 넣은 엽서.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인식은 흔히 민족주의 사학, 실증주의 사학, 계급주의 사학이라는 세 가지 틀 안에서 파악된다. 민족주의 사학은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국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관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여느 민족주의 사학자들처럼 민족의 영광된 과거를 설명하는 데 열을 내지는 않았다.

 

반면 그는 기독교적 역사의식에 기초해 민족사의 발전에 대한 신념을 뚜렷이 가지고 민족의 미래를 낙관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고대사의 당당함보다는 조선왕조시대 전후 우리 역사가 체험한 고난이라는 사실이 우리 민족에게 더욱 중요함을 일깨웠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기독교도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처럼, 우리 민족은 고난의 민족사를 통해 인류의 주역이 될 수 있는 훈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의 고난을 말하면서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민족에 대한 희망찬 신뢰와 현재의 사랑을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공유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기독교 민족주의에 자신의 사상적 기초를 둔 까닭이었다.

 

함석헌은 실증주의 사학을 비판했다. 특히 그는 실증주의 사학에서 논하는 ‘역사적 사실’의 복원이라는 랑케와 같은 역사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기록의 한계를 지적하며, 사실로서의 역사를 거부하고, 역사에서 해석의 중요함을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과거의 다수 사가(史家)들이 공정한 역사를 쓰기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 수백권의 납골당 명록(名錄)만을 쓰고 말았다”고 실증주의 사학을 비판했다.

 

한편, 함석헌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제시하고 있던 유물사관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와 도쿄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이던 문석준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유물사관에 의한 한국사 개설서를 처음으로 간행했던 인물이다. 함석헌은 문석준과 학창에서 우정을 나누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정면으로 반대되는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함석헌은 유물론이 인간을 경제적 이해관계 안에 예속시키는 사상임을 말하면서 이를 단호히 배격했다. 그리고 관념론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도 역사의 발전에 대한 신뢰가 가능함을 역설했다.

 

실천성 중시한 역사관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 한길사가 기획한 ‘큰스승 함석헌 깊이 읽기’시리즈의 첫 번째 책. 70년 전에 출간된 것을 요즘 말투로 가다듬어 다시 내놨다.


이처럼 함석헌은 실증주의 사학과 유물론을 배격했고, 민족주의 사학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나가고자 했다. 이렇게 형성된 사상적 기조는 아마도 그의 말년까지 이어져간 듯하다. 그는 열린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우리 역사를 사색했다. 청년 함석헌의 시대, 식민지 백성들은 고난으로 인해 좌절과 열등감에 젖어 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 민족이 정련될 수 있고, 세계에 깨우침을 줄 수 있음을 과감히 밝혔다. 이제 그는 고난이란 허물을 자랑으로 삼았고, 거기에서 민족적 소명과 인류의 깨우침을 위한 희망의 빛을 발견해냈다. 일제 식민지 아래서 형성, 제시된 이와 같은 그의 사관도 크게 보아 민족주의 사학의 틀 안에 든다.

 

오늘날은 민족주의가 반역인가를 되묻는 사회가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적 유물론도 이제 그 명운을 다해가는 듯하다. 또한 역사를 수필화하려는 시도가 일어나 역사학의 위기를 조장하기도 한다. 세계화 내지는 지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우리의 사고를 새로운 틀로 바꿔보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시대에 따라 적절한 질문을 던졌던 함석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역사적 사실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단순한 서술로만 보지 않았다. 그에 있어서 진정한 역사는 실천적 관심에 충만한 오늘과 내일의 역사였다. 그는 역사가 가지고 있는 현재적 관심을 일깨워보고자 했다. 그는 역사의 실천성을 중시했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화가 강요되더라도 우리는 우리 역사의 주인임을 확실히 자각해야 한다. 오늘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 일깨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함석헌의 사상에 주목하게 된다.

 

조광/ 고려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