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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오강남
함석헌 선생님과 간디 옹과 틱냩한 스님의 예수님
1. 류영모 선생님의 예수 이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함석헌 선생님이 이해하신 예수에 대해서도 간단하나마 한 마디 하니 않을 수 없다. 함 선생님의 기독론도 결국 류영모 선생님의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함 선생님도 처음에는 기독교 정통 교리대로 대속론(代贖論)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1952년 크리스마스에 발표한 「흰손」이라는 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사람의 죄를 대신 씻어 준다는 정통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나서 1957년에 발표한 「말씀모임」이라는 글에서 "20년에 내 마음속에서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고 했다. 그 후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다. 나는 대체로 이런 판단을 내려 버렸다.
함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도 했다.
참 의미에서는 나는 성경 안에 갇힌 예수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그는 성경에 갇힌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 비판하여서 예수의 사실을 다 밝힐 수도 없을 것이고, 또 밝힌다 해도 예수는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예수의 나타남으로 인하여 역사에는 일대 전환이 생기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자연인 예수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인 예수야 있었거나 없었거나, 역사 위에 환하게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격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자연인 없이 그리스도 예수는 있을 수 없겠지만 설혹 예수라는 자연인이 없었더라도 기독교의 장본인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는 어쩔 수 없이 세계사 위에 살아 있고, 그 중심이 되는 인격입니다.(김진, 145-6 재인용)
2. 이왕 말이 나왔기에 함석헌 선생님의 또 다른 정신적 스승이신 간디옹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던가도 잠깐 살펴보자.
잘 알려진 대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가서 변호사와 인권운동 지도자로 일하는 동안 그곳 그리스도인과 교류하면서 교회 예배나 특별 집회에도 자주 나갔다. 여러 사람이 그를 기독교를 개종시키려고 했지만 그 스스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스스로 힌두교인이면서도 얼마든지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간디는 한평생 힌두교를 떠나지 않았지만 예수님,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더할 수 없이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간디의 전기를 쓴 핏셔(Louis Fischer)가 1942년 인도에 있던 간디의 아슈람을 찾아가 그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집을 방문했다. 그는 그 오두막집 진흙으로 된 벽에 딱 한 장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진이었다고 한다. 그 밑에는 에베소서에 나오는 말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4)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핏셔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랬더니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동시에 힌두교인이요, 이슬람교인이요, 유대교인이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코 배타적으로 어느 한 종교만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는 간디에 대해 "그리스도인(a Christian)은 아니었지만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 같은(Christlike) 사람 중 한 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이 "마하트마 간디를 사용하셔서 비그리스도적인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화(Christianize unchristian Christianity)하도록 하였다."고도했다.(Fischer, 334)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 간디를 통해 예수의 정신과 한참이나 먼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답게' 하시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간디가 예수에 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욱 자세히 알려면 그의 책, The Message of Jesus Christ (Bombay: Bharatiya Bhavan, 1971)을 참조할 수 있음.)
3. 그 외에 또 한분, 월남 출신 틱냩한 스님을 소개하고 싶지만 이 분의 책,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1997)와 『귀향: 예수님과 부처님은 한 형제』(2001)를 내가 한국말로 번역을 했기에 그 스님의 글 몇 구절만 인용하고 지나간다.
명상이란 고요함입니다. 앉으나 서나 걷고 있으나 모두 고요히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깊이 들여다보는 것, 깊이 체험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이미 고향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명상을 실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인간 예수님에게 태어났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 나가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상을 실천하시고 성령을 튼튼하게 하셔서 완전히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자세로 명상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로 분명히 '앉아서 하는 명상(坐禪)과 '걸으면서 하는 명상(行禪)하셨을 것입니다. 부처님처럼 보리수 밑에 앉아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예수님의 형상은 주로 십자가에 달린 모습입니다. 이것은 저를 무척 괴롭게 합니다. 이것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형상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대접일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 길벗들이 예수님을 그릴 때,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계신 모습이나 명상에 잠긴 채 걷는 모습같이, 뭔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파고드는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현재 수많은 힌두교인이, 그리고 수많은 이슬람교도가 그들 나름대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거기서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찾고 있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기독교 정통 기독론에 입각해서 보아야만 된다고 하는 법이 없다. 예수님은 각자의 실존적 정황에 따라 그에게만 줄 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줄 수 있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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