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신문> 2003/02/0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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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咸錫憲.1901∼1989)씨는 당시 민주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의례 흰머리, 흰 수염에 흰 고무신을 신고서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표표히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함석헌'하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죽어가는 시대의 양심' '씨의 소리'등을 떠 올린다. 간디와 톨스토이를 좋아하며 비폭력주의를 말하고 평화를 사랑했던 함석헌의 삶 속에는 성경을 제외하면 노장철학 등 동양적 사유가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러한 그가 가톨릭의 '이론'을 대변해 온 윤형중(尹亨重.1903-1979)신부의 공개 도전으로 논쟁에 휘말렸다. 당시 정치 사회적 격변이나 국가적 쟁점이 제기될 때마다 서슴없이 발언을 해온 함씨와 가톨릭 서울지구 출판부장이던 윤신부의 격렬했던 이 논전은 함씨의 독특한 사관 및 종교철학에 바탕한 '고발'성 글에 대해 윤신부가 가톨릭의 입장에서 신랄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전= 문제의 '할 말이 있다'(<사상계> 57년 3월호)는 필화사건으로 구속사태까지 빚었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와 함께 함씨의 대사회적 발언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던 시절의 대표적 논설이었다. '생각하는 백성…'이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정치적 입장을 보여준 글이라면 '할 말이 있다'는 그의 사상 종교관 사회관을 뭉뚱그려 보여준 글이다. 누구도 말하기를 주저하던 당시 정치상황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에 호소한 함씨의 글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윤 신부는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사상계> 57년 5월호)란 주제로 함씨의 글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함씨의 글에 대한 윤신부의 반론을 중심으로 우선 두 사람의 글을 소개한다. 함씨는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을 통해 기독교를 비판했고, 윤 신부는 <신세계(新世界)> 잡지에 '일부 기독교도들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 씌우고 일반화시킴은 옳지 못하다'는 요지의 반박의 글을 실었다. 윤 신부는 그 때의 심경이나 태도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면서 하나하나 반박했다. 윤신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미친 년놈들의 자동차에 뿌려 줍시사!' '재미난 구경한다 하고 극장앞에 입을 헤 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해 제발 그 구정물이라도 끼어 줍시사!'등에서 보듯이 '년' '놈'등 쌍스러운 말로 쓴 함씨의 글이 최소한의 교양마저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나무라고, 특히 함씨의 '비뚤어진 가톨릭관'을 통박했다. 또 '감옥보다 더 높은 돌담을 쌓아놓고 고운 말로 꾀여온 가엾은 심령들을 가두어 밤낮 쪽쪽 울리며 겉옷 속옷을 홀딱 다 뺏아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밖으로는 언광 좋게 영혼 구원한다 하는 종교성당 위에'라는 글에 대해서도 윤신부는 "실신(失神)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였다면 별문제이지만, 본 정신으로 그렇게 말하였다면 신성한 성당을 지독하게 모함하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함씨가 "나는 모가지를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신부 목사는 절대 아니 된다. 되면 무엇보다도 백주에 아무것도 없는 껌껌한 방구석에 불을 켜놓고 거기 절을 해야겠으니 그런 얼빠진 짓이 어디 있으며"라고 하자 윤신부는 "우물안 개구리의 만용도 이만하면 어지간하다. 함선생이 신부는 안되겠다니 천만다행이다. 설령 신부가 되겠다 할지라도 천주교회는 함선생 같은 욕설가, 험구가(險口家), 모든 것을 혼동시만 하여 도무지 분별할 줄 모르는 그런 인물을 신부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고 통박했다. 윤 신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함씨가 공산당이 쓰는 말을 쓰고 있다는 등 사실상 색깔론으로 공격한다. "복음서를 손에 들고서 천당 지옥도 믿지 않는 미지근한 함선생이요, 현실의 모든 방면에 대하여 그처럼 지독한 불평과 불만을 품고있는 함선생이면 복음서와 함께 그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현행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入黨)함이 여하(如何). 그렇다고 나의 이런 말을 공산당에 입당을 권고했다고 함석헌식(咸錫憲式)으로 알아들을 것은 아니다. 함선생의 흐리터분한 이론보다는, 바르지는 못하지만 공산당의 이론이 더 분명하지 않느냐는 말에 불과하며 함선생이 그 괴상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간다면 아무리 복음서를 들고 있을지라도 경찰당국으로부터 공산당의 오열(五列)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게 되리니 조심하란 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함석헌씨의 본격적 반격= 윤 신부가 자신의 글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자 함씨의 반박 또한 한 옥타브를 높였다.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사상계> 57년 6월호)는 글에서 "천하의 신부가 다 떠들어도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은 다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자존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제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무슨 종교요, 진리가 무슨 진리일까? 그들과 씩둑깍둑할 필요가 없고, 말을 한다면 그 꼭지되는 교황과 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로마 교황더러 와서 말하라 하라. 그러면 대답하리라. 아니 아니, 그가 와도 말하지 않는다"면서 윤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고 반격했다. 함씨의 논전의 화살은 이제 천주교 그 자체를 향해 시위를 떠난 셈이 된 것이다. 함씨는 "윤신부는 나더러 왜 '일부 기독교도들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씌우느냐'고 했다. 양심있는 민중아 판단하라. 이것이 종교가의 소리인가? 종교란 하나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에서 하나를 보잔 것 아닌가? 이 세상 맘몬의 자손들처럼 수로 따지자면 진리랄 것이 무엇이며, 정신이랄 것이 무엇인가? 간디의 말과 같이 진리에서는 최소가 최대로, 최대가 최소 아닌가? 나는 예수께 배우기를, 잃어지지 않은 99보다 잃어진 하나가 더 중하다고 배웠다. 잘했다 칭찬을 받을 땐 그것은 우리 가톨릭이다 하고, 잘못했다 욕먹을 땐, 아니 그것은 일부의 경거망동이라, 슬쩍 벗어나고. 영리인가? 야비인가? 지극히 적은 자 하나가 잘못 가도 그 위해 책임을 지잔 것이, 내가 알기엔 기독교지, 통계 숫자로 퍼센테이지 따지잔 것이 기독교는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나는 가톨릭은 불사신인 줄 알았는데, 함석헌 한 사람의 말에 분이 털끝까지 올라 어쩔 줄을 모르리만큼 그렇게 적고 얕고 신경질적이었던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참 하늘아들이 됐지. 들은 체만 했어도 속살이 드러나지는 않았지! 나를 위대하게 만들지 말아라!"고 반박했다. 함씨는 윤신부가 공산당의 오열(五列)이라 한 것에 대해서도 "그나마도 솔직하게 '너는 공산당이지'하지 않고, 맘은 그 맘이면서 독자가 보면 그렇게 보도록 쓰면서, 말은 '공산당 식'이라 했다가,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함이 여하(如何)'했다가, 또 다시 '그렇다고 나의 이런 말을 공산당에 입당을 권고했다고 함석헌식으로 알아들을 것은 아니다' 한다. 이것이 친절에서 나오는 말인가, 비웃음에서 나오는 말인가? '함석헌은 공산당이다'하는 말을 뒤집어 하는 말인가"고 반론을 폈다. 윤 신부가 자신을 공격한 근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와 내가 개인적으론 한번 본 일도 없는데 그가 왜 나를 그렇게 심히 두 번씩 공격할까? 그가 나를 마지막에 공산당의 오열이라고까지 몰 때는 신부로서의 자기의 명예를 내걸고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은 내가 사실로 공산당이고 아니고를 물을 것 없이, 즉 다시 말하면 거짓 고발이 아니고 사실을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사도로서의 그의 인격에는 치명적인 자상(自傷)임을 알고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자의 도덕으로도 그것은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 일'임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높은 교양과 깊은 수양을 가진 그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 스스로 신부로서의 자격을 내적으로는 잃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적 자살인 줄 알면서도, 왜 그는 그런 일까지를 하여 내 입을 막아 보려고 했을까? 거기는 내 말을 강제로라도 막지 못하는 날엔 자기와 자기가 속해 있는 가톨릭이라는 체계 전체가 어차피 치명상을 입는다 생각했기 때문 일 것이다". 논조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더욱 격렬해진 함씨와 윤 신부간의 논전은 두 차례의 공방으로 끝났다. 윤신부는 '함석헌씨의 답변에 답변한다'(<사상계> 1957년 7월호)에서 '함석헌씨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밝히면서 함씨의 주장에 대해 반전을 꾀한다. 이번 논쟁은 무교회주의자인 함씨와 가톨릭을 대표하는 윤신부 사이의 논전 이상의 의미를 지니면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사상계> 8월호는 '함씨의 글을 읽어보면 지나친 말로 된 문장이 자주 튀어나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은 불쾌를 느껴야 할 이런 글을 읽고서도 독자의 대부분은 도리어 공감과 쾌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는 내용의 독자의 글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어쨌든 함씨가 민중의 가슴을 향해 호소하는 식으로 쓴 글이 발단이 돼 벌어진 두 종교인의 논전은 마침내 종교논쟁으로 번졌고, 또 종교지도자들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대립까지 보여준 것도 사실이나 우리나라의 사회사상사에 남을 중요한 논전임에는 틀림이 없다. <함석헌 약력>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1947년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76년 명동사건,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저서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등이 있다. <윤형중 약력> 세례명 마태오. 충청북도 진천 출생. 193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중림동 본당의 보좌가 되었다. 1933년 가톨릭청년사 사장에 이어 <경향잡지>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이기간 동안 언론.저술 활동을 통해 교리를 전파하는 데 몰두, 특히 교리강좌를 개최하여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천주교로 귀의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954년에는 가톨릭대학교 의학부장, 1959년에는 미리내본당 신부, 1961년에는 복자수녀회 지도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자서전> <나의 교우록>이 있다. <사진>왼쪽부터 함석헌씨, 윤형중 신부. <종교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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