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노자59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함석헌 전집> 20

 

노자 59장

 

 

사람 다스림과 하늘 섬김
治人事天莫若嗇


59. 治人事天莫若嗇, 夫唯嗇, 是以早服, 早服, 謂之重積德,  
     重積德, 則無不克, 無不克, 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低, 長生久視之道.

 

사람 다스림과 하늘 섬김에 아낌만한 것이 없다.  그저 오직 아낌, 이를 일러 일찍 돌아감, 일찍 돌아감을 일러 속알 거듭 쌓음, 속알 거듭 쌓으면 이기지 못함 없고, 이기지 못함 없으면 그 꼭대기를 알 수 없으며, 그 꼭대기르르 알 수 없으면 써 나라를 둘 수 있다.  나라의 어머니를 두면 써 길고 오랠 수 있으니, 이를 일러 깊은 뿌리 단단한 꼭지로 길이 살이 오래 보는 길이라 한다.

 

  嗇 : 嗇자는 본래 來와 0의 두 글자를 합하여 만든 자인데, 래는 밀이고 0은 곡간이어서,         밀을 곳간에 쌓아두고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서부터 두고 쓰지 않는다, 아낀다         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早服 : 복은 복과 같다.  뿌리 혹은 이치로 일찍 돌아감.
  重積德 : 덕은 속알, 혹은 속의 힘. 타고난 바탈의 가지고 있는 자기 실현의 힘, 능력.  중             은 거듭함.,  그 힘을 서두름 없이 조용히 길러감.
  克 : [論語][언연篇]의 克己復禮의 극과 같은 뜻.  자기를 이김.
  低 : 대와 같음.  꽃, 열매에 붙은 꼭지.

 

이것은 노자가 춘추전국시대의 임금들을 마음속에 두고 한말인데, 한마디로 한다면, 나라가 옳게 되려면 그것을 다스리는 임금들이 욕심이 없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전장(全章)을 요약한다면, 색(嗇)이라는 한 글자에 가닿고 마는데, 그 아낀다는 말은 지금은 그리 좋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인색이란 말에서 보듯이 사람으로서는 가장 부끄러울 만한 심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두쇠, 깍정이처럼 더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노자는 거기서 물질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주 영원히 무한한 종교적인 진리에까지 이르는 뜻을 캐냈다.  거기 노자의 어짊이 있다.
사실 오늘 인류 문명의 달리는 방향을 살펴보면서 이 장을 읽는다면, 노자는 마치 2천년 후에 올 세계를 미리 내다보며 미리 경고하는 마음으로 하기라도 한 듯이 보인다.  오늘 세계의 씨알들은 정치하는 비인간들의 끝을 모르는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시키는 대로 고역을 하다가 닳아 없어지는 존재 아닐까?

첫머리에 '치인사천'(治人事天)이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인간이 있은 이래 노자 자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허구한 역사과정을 돌이켜보며 인간의 일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한 말이다.
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김, 갈수록 복잡해가는 문명에 목적도 허고 많은 목적이요, 수단방법도 허고많은 수단 방법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이 둘밖에 없다.  사람 다스림이요, 하늘 섬김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학문이라면 '인천지학'(人天之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자도 [대자사](大字師) 첫머리에서 "사람의 하는 것을 알고, 하늘의 하는 것을 알면 다시없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을 누가 다스리고 하늘을 누가 섬길까? 노자 자신이 "천하는 신비로운 그릇이라, 해서는 아니된다는 하는 놈은 무너지고, 잡는 놈은 잃는다"(29장)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도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 꽃을 보라"하면서 무엇 먹을까 무엇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마태복음 6:25-34) 그만 아니라 예로부터 어질다던 모든 어진 이들은 다 같이 사람은 다, 또 사람만 아니라 거미, 쇠똥구리에 이르기까지, 다 제 살아가고 제 노릇 할 수 있는 바탈(性)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가지고 있다고 말해왔던 것이며 또 현대의 생리학 심리학이 그것을 다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사람을 다스린다는 말은 쓸데없는 것이요, 또 필요하다 하더라도 사람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제 스스로 할 것이지 누가 해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 노자는 왜 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것을 정치의 일로 말했을까? 노자는 공상가는 아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눈을 감는 사람은 아니다.  이점에서는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다 일치하는 해석을 가진다.  뭔가 맨 첨부터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늘(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맨 첨의 맨 참, 맨 첨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근본의 근본인 그 이름 할 수 없는 이, 왜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이 찾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이)에 잘못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지만 그 모순대로 말하는 데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립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의 시작은 근본에 돌아간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근본에 돌아간다는 데서 아낀다는 태도가 시작된다.  욕심의 인간으로 보면 가장 못된 악이 가장 좋은 선이 된다.  그래서 '막약색'(莫若嗇)이라, 이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왜? 그래야 모든 욕심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생리적 심리적 또 정신적 모든 정력을 쌓아서 이 근본으로 돌아오는 데 전력해야 되기 때문이다.  '조복'(早服)이란 일찌감치 돌아온다는 말이다.  헤매어나간 아들일진대 될수록 일찌감치 돌아오는 것이 최고선이다.  최고가 아니라 사실 이것만이 선이지 그밖에 또 무슨 선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물쓰듯하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것은 도둑놈만이 하는 일이다.  오늘날 세계를 어지럽히는 원인은 소비경제론 에 있다.  성경에 있는 비유 이야기에, 협잡을 해먹고 주인에게 쫓겨나가는 종놈이 제 동류에게 관대한 선심을 쓴 것은 인간을 대표하는 행동이었다.  (누가복음 6:1-8) 그러고 보면 정치가들이 통굵은 낭비를 자랑으로 아는 것은 이유없는 것이 아닌 동시에, 그 말로가 멸망밖에 없는 것이 환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로 일찌감치 돌아가기 위해 아껴야 한다.  아끼는 것이 씨알이다.  지위 없는 사람일수록, 가난한 사람일수록, 무식한 사람일수록 아낄 줄 안다.  그만큼 하늘의 씨가 그 속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탕자가 제 몫을 다 찾아가지고 나갔을 때는 다 불어먹었고, 거지가 된 때에 비로소 깨달아 곧 돌아올 수가 있었는데, 맏아들이로라고 자격을 스스로 가진 자는 도리어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다는 것이다.
거듭 속알을 쌓으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본래를 말한다면 부족없이 사람노릇 할 수 있는 속알(德)을 타가지고 나왔지만 역사가 흘러 스스로 문명 발달했노라고 자부하는 동안 근본에서는 멀어지는 반면 사치는 점점 늘어난 인간이다.
 
신체적으로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문, 사상적으로까지 사치한 인간이 됐다.  제도의 사치, 법의 사치, 말의 사치, 사상의 사치, 오락 의식의 사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살기 위한 경제.  정치가 아니라 사치하기 위한 정치요 경제요, 그것을 해나가기 위해 사치 중의 사치인 전쟁의 사치, 또 그것을 단장하기 위한 예술, 스포츠의 사치다.  사치는 곧 속알 팔아먹은 정도를 표시하는 부호다.  사치하면 하는 만큼 속에 정신도 노력도 없다.  기술이란 기술은 다 사치를 위한 것이요.  기계란 기계는 결국 전쟁준비를 위한 것인데, 전쟁의 목적은 사치한 정치의 계속 유지에 있다.
이제라도 살 길 찾으려면 잃어버린 하나님 모습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단숨에는 아니된다.  붙은 버릇은 한번 결심으로만은 아니 없어진다.  속알을 거듭거듭 쌓아가야 한다.  생명에는 시간이 든다.  길러야 한다.  그것이 '중적덕'(重積德)이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희망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되지 못한 오기부려 사나와지지 말고, 겸손히 끈질기게 믿는 마음으로 또박또박 쌓아나가면 그속의 생명력은 물질계의 법칙에 매여 있는 것과는 다르므로, 기적적으로 자라 겨자씨보다도 작던 것이 언젠가 자라 앞을 막았던 죄악의 난관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을 체험할 것이요, 점점 자라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원 무한에 이를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치인사천(治人事天)할 자격이 있다.  그것이 나라를 둘 수 있다는 말의 뜻이다.  그 나라는 이미 이따위, 지배 피지배의 정신적 도덕적 권위는 하나 없이 힘과 사치로만 그 체면을 유지해가는 정치의 나라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임금이나 대통령이나 정치가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근본되는 이가 있어서 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유국지모'(有國之母)라고 했다.  노자는 여성으로 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는 강강(强剛)보다는 유약(柔弱)을 좋아한다.  경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것이 영적인 생명을 표시하는 데 더 적당하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냐 모냐가 문제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 되는 이를 모셔야 한다는 말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하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라와 권세와 거기 따르는 영광은 사람의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만 나라 일을 맡을 자격이 있다.  노자는 그것을 다루는 데서는, "제 몸 사랑하기를 나라 사랑하는 것보다 더중히 아는 사람은 나라을 가져다 부탁할 만하다"고 했다 (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제 13장). 몸을 사랑하고 아낌은 제가 하늘의 아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치 뿌리 깊은 나무가 왕성하고, 그 꼭지가 단단한 꽃이나 열매가 어떤 폭풍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같이, 그런 사람, 그런 나라는 영원 무한할 것이니, 그것이 도,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는 말이다.
  
문명이란 본래 처음부터 사치다.  탐스럽고 인류답고 먹음직하다 할 때 벌써 사치의 길로 든 것이다.  하나님은 안 보이게 되고 사람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두 주인을 못 섬긴다 하면서 하나님과 돈을 맞세운 것은 생각 깊이 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돈을 주인으로 섬겨 내려왔다.  사치하기 위해서다.  제가 가질 수 없는 나라, 권세, 영광을 제 것이라 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가, 거기 대한 심판이 오늘의 문명이다.  가지가지의 발명을 해서 여유를 얻는다고 했지만 여유는 덮어놓고 좋은 것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쓰느냐가 문제다.  그 여유는 영적 생명을 위한 속알 거듭 쌓음에 쓰려 하지 않고 주로 욕심의 만족, 사치를 위해, 그래 그것으로 뽐내며 씨알에게 열등감을 주는 데 썼다. 그 결과가 오늘날 인류의 큰짐인 다국적기업과 대국가주의와 전쟁이다.  인간이 이 세 겹 무거운 짐, 멍에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으려면 그저 아낌의 좁은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종교사상 이야기 > 함석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석헌, "서양에선 더 배울게 없어"(조민환)  (0) 2006.12.20
노자60  (0) 2006.12.19
노자56  (0) 2006.12.19
노자47  (0) 2006.12.19
노자36  (0) 200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