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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노자56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함석헌 전집> 20

 

노자 56장

 

 

아는 이 말하지 않고 
知者不言


 
56.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아는 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이 알지 못한다.  그 입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얽함을 풀며, 그 빛을 누그리고 그 티끌을 같이 하니 이를 일러 까만 같음이니, 얻어 친할 수도 없고 얻어 버성길 수도 없으며, 얻어 도울 수 없고, 얻어 해할 수도 없으며, 얻어 높일 수도 없고, 얻어 낮출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높음이 된다.
  兌 : 音은 태.  입구 위에 八字.  아래에 사람 人字를 써 사람이 입을 벌리고 웃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塞其兌 : 색기태.  벌어진 것을 닫아버린다는 뜻이다.
  銳 : 音은 예.  날카로운 것.  칼이나 송곳 같은 것을 아주 뾰족하게 한 것.
  挫其銳 : 좌기예.  너무 날카로와 다른 물건과 사이에 잘못이 생기기 쉬우므로 그 날카로움을 조금 꺾어버린다는 뜻.
  和其光 : 빛을 고르게 조금 약하게 하는 것.  너무 강하면 오히려 안 보이기 때문이다.
  同其塵 :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
도라는 것은 본래 말로는 못하는 거다.  말로 못하면 어떻게 하나? 자기가 체험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체험을 하려면 말이 없이는 안된다.  무엇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 체험하는 내용은 역시 말로 되어 있다.  체험하는 능력이 뭘로 생기는가? 우리가 말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다.  말이라 하지만 참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말이다.  말은 신비로운 거다.
말이란 뭐냐? 그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말이 관계가 되는데, 보통으로 하면 행동과 말은 이 현상세계에서 하는 것이고, 도를 안다는 자리는 우리 생각이 구경자리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현상을 초월한 의미의 지경이므로 말로 할 수가 없다.그것은 정말 참으로 이해를 한다고 할까 깨달았다고 할까 그런 자리다.

그런 자리는 말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말 없이는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문제다.  말은 왜 있나? 사람은 말을 하는 물건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에게도 말이 있다.  사람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인류의 선조가 인간의 모양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물론 지금처럼 어휘 수가 많고 발달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일찍부터 말이 있었다.  또 사람만이 아니라 벌써 사람되려고 하는 그전 과정에 있던 영장류(靈長類) 중에서도 말은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사람 비슷한 잔나비 같은 것도 어느 정도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 옛날에도 새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근래에도 어떤 일본 학자의 말에서 잔나비의 어휘 수는 스물 몇 개라고 하는 것을 어디서 본 기억이 있다.
확실히 그것은 우리 듣기에 '짹짹' 하는 것 같지만 자기로서의 말이 분명히 있다.  그렇게 올라가면 언제부터 말이 있었는지 모르게 된다.  그런 말을 철학적으로 하면 "이 우주는 말씀을 가지는 우주다." 성경 [요한복음]에서 로고스(logos)라는 것을 '말씀'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물론 로고스에는 말씀이란 뜻도 있고 이성이란 뜻도 있고 이해한다는 뜻도 있고 이치라는 뜻도 있다................. 여러 가지 말로 번역할 수 있다.  또 '말한다'라는 동사도 있다.

그러면 사람이 없는 데서 말이 시작됐다고 보는 것보다는 그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이 우주에는 첨부터 말이 있었다, 뜻이 있었다는 말이다.  뜻이 있으므로 말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이지만, 또 말을 하는 동안 근본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  그래 어려운 거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은 붙잡은 말씀을 표시하기 위해서지만 그 작품 중에 말씀의 참모습대로를 전하는 것은 아주 드물다.
참으로 도를 아는 분이란 어떠냐?

'색기태'(塞其兌)에서 태(兌)는 입을 벌린 모양이다.  입 구(口)위에 있는 팔(八)은 입을 오므렸다 벌렸다 하는 거다.  그 아래 사람 인(人)이다.  이것은 사람이 입을 벌리고 웃는 모양이다.  입만이 아니라 무든지 벌어진 데 있으면 그건 태(兌)다.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이란 가만 있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뭘하려고 하고 발산하고, 말하자면 폭발하는 방사선 모양의 것이다.  물질의 성격을 따져 들어가면 다 그렇지 않은가.  생명의 성격도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런데 '색기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닫아버린다' 는 뜻이다.  발산만 계속되어버리면 그 자리를 잃어버린다.  약해진다.  그것은, 발산되는 것은 상대계에 나오는 현상인데,  도를 아는 분은 한없이 그렇게 만을 하지 않는다.  벌어져나가는 것을 닫고, 말을, 발표를 될 수록이면 아니하는 것이다.

'폐기문'(閉其門), 그 문을 닫아버린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무한으로 들어와도 좋다 하지 않는다.  밖에서 무엇이 내게 들어오면 벌써 내 본 그것대로 유지하지 못한다.  물 속에 무엇이 들어오면 물이 흐려지듯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닫아버리는 것이다.

'좌기예(挫其銳),  예(銳)는 날카로운 것, 칼을 간 모양, 혹은 송곳을 아주 뾰족하게 한 것이다.  생명의 활동을 가령 음. 양(陰陽)이라 하자.  생명이 가만있지 않으려고 하는, 활동하려고 하는 면을 본 것이 양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또 그렇지 않으려는 면을 본 것이 음이 라는 것이다.
그런데 살았다. 밝다, 간다 그건 다 양기로운 것이다.  날카롭다는 것은 그 양기의 강한 것을 표하는 말이다.  그러나 날카롭게 써버리면 그 양기가 없어져버린다.  그래서 너무 그렇게 하면 다른 것과 그것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예를 꺾는다는 것은 너무 날카롭게 그러면 다른 물건과의 사이에 잘못이 생기니 이것을 좀 꺾어버린다.  너무 뾰족하게 하면 안된다. 칼 갈아본 사람이면 안다.  너무 갈아서 날이 넘어버리면 그만 엇나가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다 갈고는 다시 날을 조금 죽여버린다.

'해기분'(.解其分)이라.  얼키설키 관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는 또 잘 안되는 점이 있다.그렇게 얼크러진 것을 분(分)이라 한다.  요새 분우하다, 분란이 일어난다 하는 것이다.  얼키설키한 건데 그걸 해(.解), 푼다, 끌러버린다는 것이다.
  
'화기광'(和其光)이란 빛을 화(和)한다는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보지만 전기를 그대로 쓰면 눈이 부시니까 유리를 끼워서 좀 화(和)하는 것이다.  그것은 흩어버린다, 부드럽게 한다, 좀 누그러뜨린다든지 그런 거다.  의견이 제각기 서면은 잘 안되잖는가.  그럴 때는 다소 좀 화해를 해서 조금 양보를 해야 한다.  빛이 너무 강하면 다른 것이 나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까 정말 빛은 우리가 못 본다.  그러지 않는가.  우주에서도 반사광만을 보지, 중간에 있는 미립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에 반사된 빛만을 우리 눈에 보게 되는 것이다.  태양을 눈으로 직접 보면 눈이 시어서 못 본다.  그 화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도통하면 겸손해진다.

'동기진'(同其塵)이라, 맑은데, 깨끗한 데, 순수한 데, 그런 것의 반대다.  티끌에 같이한다는 것은 도는 순수한 것, 맑은 것, 밝은 것, 그런 거지만 도에 반대되는 면으로 하면 그것은 '양'에 대해서 '음'적인 면이다.  그걸 너무 아니라고 차별을 해놓으면 또 내가 도 노릇을 못한다.  도를 다 감당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알기 쉬운 말로 하면 "말씀이 육(肉)이 돼가지고 세상에 와서 거한다"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기모습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 중에 가장 뭐하다는 사람도 거기에 견디어내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이치를 옛날 사람들이 벌써 알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갈때에 하나님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강해서 하나님을 보고 온 반사광선만 해고 일반사람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수건을 쓰고 대했다고 하는 것은 다 그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끼리도 그렇다.  사람이 엄숙한 것이 좋지만, 너무 엄숙하면 그 사람 곁에 가기 어렵다.  접근을 못하게 된다.  좀 엄하기는 물론 엄하지만 아주 남이 접근을 못할이만큼 너무 그렇게 해서는 못쓴다.  '깨끗'이 귀하지만 그 '깨끗'을 자랑해 사람을 차별하면 도리어 더럽다.  그렇지만 않을 지경으로 가는 것, 그것이 티끌에 같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도를 깨달은 '그이', 참으로 난 '그이'라고 형용하면 그이는 알기는 알지만 입을 다물어버린 것 같다.  무슨 말로 설명을 할 수 없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으므로 그것을 감당 못하니까 다문 것 같다.  문을 잠가버려서 밖에서 무엇이 들어갈 수 없게 한 것, 그 날카로운 것을 스스로 자기가 좀 어느 정도 꺾어버린 것 같다.
또 자세하고 복잡한 것 있지만 간단하게 비교적 알아볼 수 있게끔 좀 풀어버린, 빛을 누그려서 약한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있을이만큼 하는 것이다.  또 자기로는 상대는 티끌 같은 거지만 그 티끌에도 예수가 세리가 창기와 같이 앉아서 잘 잡숫고 마시고 그랬던 것처럼 한다, 그러는 것이 티끌에 같이하는 태도이다.

백이(伯夷)란 사람은 나는 깨끗하고 저 모르는 사람들......... 했는데, 그러면 아주 차별을 하는 것이 된다.  모자를 좀 비뚤게 쓴 것만 봐도 "아이고 저런 사람들" 하고 못견디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꺼려서 가까이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새옷을 입고 진흙 속에 빠지는 것 같아서 나는 안한다 하는 것이다.  아주 결백한, 맑은(淸) 사람이다.
그러면 그것이 도를 아는 사람은 안다고 그저 벌리고 너무 거리가 있는 점이다.  그래서 도를 아는 사람은 안다고 그저 벌리고 얼마든지 자꾸만 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한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날카로운 대로 그저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복잡한 그 관계를 꺼릴 것도 없이 그저 재주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빛이 강하지만 그 빛을 다 쓰려고도 아니한다.  자기는 깨끗하고 세상은 더럽지만 그렇다고 아주 차별을 해서 같이 못한다고 하지도 않는다.
뭐든지 도에서 나오지만 나와놓으면 자기가 감당 못하는 줄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참이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자꾸 참과 사랑의 두 면을 이야기하게 된다.  참이 참만으로 나오면 감당을 못한다.  물론 참에서 나오지만 그 다음에 나온 그것을 역시 사랑으로 쓰는데가 있어야 한다.  그래 반대되는 것 같은 두 면이 있다.
그러니 같은 걸 가지고도 참이라고 그러면 참 속에 사랑과 참이 다 있다.  또 사랑이라고 그런다면 사랑 속에 참과 사랑이 다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는 사랑이라고 했다.  그런 그것은 그때 역사 상황을 보아서 한 것이다.  유대나라의 역사를 보면 유대사람이란 본래 사색보다는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본래 사랑한다는 것보다는 굉장히 의(義)편이 강조된 하나님이었다.

김동길 박사가 말하는 것처럼 "불교에서 자비를 말하는 것은 좋은데 자비를 말했기 때문에 정의 편이 약하게 됐다" 는 것은 사실 옳게 말한 것이다.  그랬다가 불교사람들이 노하고 그랬지만 반대로 만일 불교사람들이 본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의를 너무 말했기 때문에 자비로운 면이 적다고 할 수 있다.  구약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주로 사랑이란 말로 표했다.  예수 전 모세 이후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지독한 하나님인지 모른다.  십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초 정해진 그거대로만 한다면 제단 위에 하루에도 몇 번 아침으로 저녁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세상에 죄 문제를 그렇게 이야기한 민족은 없다.

인도 사람들은 사색을 하니까 우리는 모른다 무지다 그렇게 표시했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행동주의니까 그 자리를 자기 자리로 체험해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한다.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다 하면 그럼 어떻게 하나? 우리가 하나님 보기에 용서를 받을 만큼 해야지.  그래서 죄의 용서를 빌기 위해 자기의 참혹한 그 모양을 나타내고자 짐승을 잡아 그것을 제단 위에 불사른 것이다.  그런데 그 짐승의 피가 아침으로부터 저녁까지 매일매일 끊쳐서는 안된다.  제단이 늘 피로 젖어 있어야 되는 하나님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그 천여 년을 그런 역사 속에서 내려왔는데 그런 건 좋은 면도 있지만, 그것 얼마나 어려웠겠나? 사실은 지나친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내려오다가 예수 나기 전 7 ,8백년전 이나 600년 전에 이사야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이사야가 비로소 처음으로 사랑을 외쳤다.  그전에 물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아주 크게 말한 것은 이사야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이다.

'제 2이사야' 의 놀라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르면 일찍부터 '제2이사야'를 많이 보신 점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아주 예수님에게 오면 '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무조건 용서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 그렇다.  원래 인간이 연약한 것인데 그걸 엄격한 그런 걸로만 주장을 하면 못견뎌내잖느냐? 구약 속에도 하나님이 노아 홍수로 심판을 하고 후회를 했다고 그랬다.  "아이 내가 괜히 그랬다."
인간이라는 것, 육신이 있는 한은 연약한 물건인데 그 꼴 보기 싫은 것 있지만, 사람을 써도 없이 다 없애버리겠다.  해놓고 보니까 끔찍해서 "내가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했다.  불교에서도 의를 알았고 그리스에서도 의가 대 덕목에 들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히브리사람들처럼 그렇게 강조는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불쌍한 사람을 동정해본다고 하는 점에서는 거기서 더 할 수가 없다.
그런데 후세에 사는 우리에게 오면 이쪽저쪽을 다 참작해서 조화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사람으로 하면, 그러니까 정의의 하나님의 그 '의', 그 지독한 면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예수에게서 보는 사랑의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 깊고 크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동양에서 말한다면 본래 자비라고 하는 것을 많이 강조했으니까 이제는 그런 것만이 아니고, 또 그저 불쌍하다 불쌍하다만이 아니라 역시 따질 건 따지고 잘못이다 지적할 건 지적하고, 좀 그런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필요를 느끼게끔 됐다.  그러므로 바꾸어서 서로 참작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정의 문제가 잘 안되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고 하나님의 성격, 굉장한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사람들은 본래 기독교 초기에 숲속에서 살던 유목민족이었는데 거기에 정의의 관념이 들어가고 이젠 정의라는 관념이 훨씬 우리보다 앞서 있다.  민권사상이 먼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걸로 보면 우리는 참 멀고 멀다.
도를 깨닫는 이는 자기가 참이기도 하지만 또 사랑도 하는 이니까 절대 자기의 그 모습들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는다.  그래 "색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이라 그런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것을 일러서 '시위현동(是謂玄同)이라고 한다. '까만 같음'이라, 아주 신비로운 뭐라 분별이 안된다.  높다 낮다의 여러 가지 제단이 있고 세세하게 계층이 있으나 갈리지 않은 것이다.  그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물이 없나? 있다.  무한한 차별이 있지만, 있으면서도 그걸 하나로 보는 '현동'(玄同)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지자불언'(知者不言)이요. '언자부지'(言者不知)다 작은 요런 판단으로만 해선 안된다.  요거조차 분별을 하는 그런 생각만 가지고는 거기에 접근을 못한다.  그러므로 열린 것을 막고, 문을 닫고, 날카로운 것을 좀 꺾고, 얽힌 것을 풀고, 또 빛을 누그리고, 티끌에도 같이하는 그런 태도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도를 너무 서양 생각으로 분석하고 분석해서 그렇게 따지고 따져서 하는 그것은 현상계에서는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원체 큰 그 자리는 모른다. '까맣게 하나로 보는'(玄同하는) 그 자리에 가야 한다.
 
그래서 그런 자리는 '불가득이친'(不可得而親)이요, 또 '불가득이소'(不可得而疏)다.   얻어서 친하게 할 수도 없고 가깝게 하려고 해도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또 소(疏)는 '성긴 것' 친구라고 해도 좀 뭔지'성긴 것', 제자가 스승한테 감히 가까이 못 가는 그런 것이다.  또한 버성기려고 해도 멀리 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불가득이리'(不可得而利), 또 그분에게 좋게 해주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줄 수도 없는 자리다.
또 '불가득이해'(不可得而害), 그이에게 나쁘게 하려고 해도 나쁘게 해지지도 않는 자리, '불가득이귀'(不可得而貴), 그이를 높일까 잔뜩 괴어서 높이려고 해도 높여지는 것도 아니다.  '불가득이천'(不可得而賤) 또 내가 낮추려 한다고 해서 낮춰지는 분도 아니다.  그래서 반대되는 조건을 여러 가지로 하지 않았다.  친소 . 이해 . 귀천 세쌍으로, 여섯가지 반대되는 걸로, 상대되는 걸로 했다.  그러나 이걸로 높이려고 해도 높아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보통 말하는 높은 자리도 아니고 보통 말하는 낮은 자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귀천을 초월한 자리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보통 말해서 할 수 없는 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지만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불가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 선악을 초월한 입장에 서신다.
  
우리가 말하는 상대계의 선이란 악 없이는 선을 알 수가 없고, 선없이는 악을 알 수가 없다.  어두움이 없이는 빛을 알 수가 없고, 빛이 없이는 어두움이 없는 그런 모양으로, 그러나 그런 따위는 아니다.  그런 따위는 상대계에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 자리는 아니다.
[바그바드기타]를 오래 못하다가 15장을 번역했는데, 15장이 또 그런 자리다.  그 정말 높은 그 자리는 뭔고 하니 멸불멸(滅不滅)을 다 초월한 자리다.  멸이 있으면 없어지는 때가 올 거다.  '불멸'은 꺼지지 않는 것인데 우리 몸은 '멸'이다.  그러나 우리 정신은 불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 정신 따위냐?  그건 아니다.  멸도 불멸도 아닌 초월한 자리 하나님은 '멸'에 계신 이도 아니고 불멸에 계신 이도 아니다.  하나님은 선한 이도 아니고 악한 이도 아니고 선악을 초월한 이, 아는 이도 아니고 모르는 이도 아니고 시비를 초월한 이, 이렇게 말하지 않고는 그 자리를 표현해 말할 수가 없다.
크리슈나가 말하는 최고의 정말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분은 멸불멸을 다 초월하는 초월계에 있는 그분이다.  고로 소위 상대적으로 말하는 그런 높은 이가 아니고 귀와 천을 초월한 그 자리에 있는 이기 때문에 천하유일의 귀가 된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고 그런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상대계에 있는 한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다면 그것은 역시 상대계의 존재지 하나님의 자리는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비를 선한 사람에게도 주고 악한 사람에게도 준다.
 우리 생각으로 하면 선한 놈에게는 좋게 해주고 악한 놈에게는 벌을 주어야 이 세상이 유지되지 그것 없이 되겠는가?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당연히 옳다.  그렇지만 옳다 그르다의 법칙이 성립되니까 그 다음에 요새 겪었던 것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쁜 놈은 죽여버려야지 한다면,  그럼 누가 나쁘냐?  표준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보기에도 터무니 없는 건데,  그렇기 때문에 깊은 자리에서 생각하는 이들은 그런 거는 안된다는 거다.  지자불언(知者不言)이요 언자부지(言者不知)라, 아는 이라고 다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입을 막고 문을 닫고 날카로운 것, 뾰족한 것을 꺾고 그 얽힌 것을 푼다.  또 그 빛을 고르게 한다.
  
'화기광'(和其光)을 유영모(柳永模)선생은 "아주 타버렸다"고 번역하셨다.  '아주 빛에 타버렸다.  그렇게 좋은 집도 아주 빛에 타버려...............' 아직도 빛이라 보이는 빛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거다.  허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화기광'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그 빛이지만 이 상대계의 눈으로 알 수 있게 했다.
  
'동기진'(同其塵), 티끌에 같이한다. 이를 일러서 현동(玄同)이라, 까만 같음이라 한다.  까맣게 깉이함이라 그래도 좋고, 다르긴 다른데 다르면서도 하나로 아는 것이다.  거길 들어가면 죄인이지만 죄인 그대로 용납한다.  하나님이 죄를 모르는 것 아니다.  죄인을 잘했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가 하나님 자리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면 꼭 될 것 같은데, 이거로 보면 꼭 그럴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된다.
그렇게 되는 이치는 그건 상대계에서 우리가 이리 돼서 얻은 지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계 초월계 없이는 안되는 거지만, 그런 의미에서 상대와 절대, 상대계 내놓고 따로 절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절대계 내놓고 상대계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상대에 있는 이 이치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맞추려고 하면 언뜻 그 이치가 옳은 것 같은데 그게 안되는 데가 있다.  그래서 늘 거기서 싸움이 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때에 너무 상벌주의에 기울어 그것대로 세상을 다스리려 한다.  그래서 나쁜 놈은 죽여라.  나쁜 놈은 죽이고 옳은 놈만 살려라 한다.  그런 논리가 서면 그 때문에, 그런 논리가 있기 때문에 공산당 아닌 사람이 공산당으로 죽게 된다.  그런 법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본래 선한 거지만 법이 도리어 나를 못살게 한다.
바울이 말한 그 법은 물론 이념이 아니다.  우리가 도덕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율법을 가지고 말하는 거지만 그래서 십자기 이야기도 나오게 된다.  의(義)가 있긴 있지만,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대로 감당을 못한다.  그러니까 그 문제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고서는 안된다 해서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인도식으로 사색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간디도 십자가의 이야기가 아주 없다.  그저 강조한 것이 "왜 기독교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살아 보여주신 대로 그대로 살려고 하지 않느냐?" 한다.  하지만 그거는 간디처럼 천품을 타고 난 사람들은 그 자리를 이해하고 감당할 수가 있지만 사람이 타고난 것이 다 같지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가 않다.  그건 아마 인도 사람으로서는 좀 알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이렇게 역사가 실행보다는 사색적으로 본래 그렇게 내려왔으므로 인도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간디도 왜 예수님 그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한 것이다.  거기도 또 이치가 있기는 있다.  간디는 또 아주 이러기도 했다.  "하나님한테 가서 용서를 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시 또 죄를 짓기 위해서 용서를 비는 것 같다."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에 그 교회 사람들이 열심히 기독교인이 되도록 노력을 해봤다.  그러나 안되고 말았다.  그것을 보면 주로 누구편이 잘못이냐 하면 간디가 잘못이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기독교인이 잘못이다.  그렇지만 간디가 "참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 소리는 실행을 하려고 애를 쓰다 못해 지친 사람에게는 잘 안 들어갔을 것이다.  깊은 의미에서 생각을 해도 일반 사람에게 십자가를 무조건 용서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쉽게 말하기도 어렵지만, 또 세상에는 그렇게 안하고는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얻어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버성기게 할 수도 없고, 얻어서 좋게 할 수도 없고 언짢게 할 수도 없다.  또 얻어서 높일 수도 없고 낮출 수도 없다.  알기 쉽게 한다면 친하려고 해서 친할 수도 없고 가까이 하려고 해서 가까울 수도 없는 이, 성기게 버성기게 하려고 해고 버성겨질 수도 없는 이, 좋게 하려고 해서 좋게 할 수도 없는 이, 나쁘게 하려고 해서 나쁘게 될 수도 없는 이,  높이려고 해서 높일 수도 없는 이, 낮추려고 해서 낮춰질 수도 없는 이, 그러한 자리이기 때문에 천하에 정말 참의미의 하나님 자리다.  사람의 제도로 된 사람의 윤리법칙으로 만들어놓은 높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대로 있는, 천하에 본래 있는 참, 높은 자리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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