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 "서양에선 더 배울게 없어"(조민환)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0.

 

 

편집시각 2001년03월07일22시08분 KST

한겨레/사회/투데이포커스


[함석헌] 서양에선 더 배울게 없어

 
우리는 씨ㅇㆍㄹ의 민주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의례 흰머리, 흰 수염에 흰 고무신을 신고서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표표히 나타나곤 했던 함석헌을 기억한다. 흔히 '함석헌' 하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죽어 가는 시대의 양심' 및 <씨ㅇㆍㄹ의 소리> 등을 떠올린다. 간디와 톨스토이를 좋아하며 비폭력주의를 말하고 평화를 사랑했던 함석헌의 삶 속에는 성경을 제외하면 동양적 사유가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노장철학은 군사독재와 같은 어려운 시절에 자신의 생명수와 같은 구실을 해주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이룩된 서양문명의 문제점과 한계성을 본다. 이제 서양의 사상이나 문명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다가올 미래세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할 큰 차원의 사고와 지혜를 찾기 위해 동양의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고전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그의 입장은 시대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 변한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시각은 진리다원론으로 나타난다. 함석헌은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이단에 속하며, 사실 그는 이단으로 배척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문명의 충돌을 말하는 오늘날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함석헌은 <씨ㅇㆍㄹ의 소리>라는 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하였다.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버린 '씨ㅇㆍㄹ'이란 말은 스승인 다석(多石) 유영모가 <대학(大學)>의 첫머리인 "한 배움 길은 밝은 속 밝힘에 있으며, 씨ㅇㆍㄹ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므름에 있나니라(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즉 백성 '민'을 '씨ㅇㆍㄹ'로 풀이한 것이다. 씨ㅇㆍㄹ에서의 '알'은 본래 정신, 혼, 영을 의미하는 '얼'과 같은 말이다. 그가 '민' 대신 굳이 '씨ㅇㆍㄹ'이라 쓰는 것은 주체성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핍박받고 무시당한 민을 위하는 사상도 깔려 있다. 함석헌은 영웅사관이나 성인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나 성인들 때문에 민중이 고통받았다는 장자의 외침을 받아들인다. 함석헌은 기본적으로 씨ㅇㆍㄹ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씨ㅇㆍㄹ주의를 강조한다. 이 씨ㅇㆍㄹ주의를 <노자>, <맹자>를 포함한 동양고전에서 찾는다.
'함석헌' 하면 아는 사람은 '노장철학'을 떠올릴 정도로 그는 오랫동안 노장철학을 강의했고 노장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 또한 독특한 면이 있다. 그가 노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노장은 나라의 주체이면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노장철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평화주의, 무위정치, 백성을 위하는 마음 등이다. 함석헌은 노장철학에는 '씨ㅇㆍㄹ(민)'을 깔보는 '서민'이란 말이 없다고 본다. 이런 이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 행태와 전쟁을 비판하고 비폭력주의를 전개한다.
함석헌은 노자와 장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제도와 법이 까다로워져 나라의 주체인 민중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 암울한 상황에서 그같은 경향과 싸우며 세상을 건지려고 애썼던 사람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무위(無爲)'의 정치를 말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노장이 말한 무위정치를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치정치를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 민중을 믿고 그냥 맡기면 저절로 바로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씨ㅇㆍㄹ의 자율성에 무한한 기대를 거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함석헌은 정치를 매우 불신한다. 하지만 위정자가 '부득이'하게 정치를 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씨ㅇㆍ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정치'를 하라고 한다. 함석헌의 노장 이해의 특징은 노장 이해를 통해 민중을 위한 철학을 말한 것에 있다.
함석헌은 노장철학뿐만 아니라 유학사상에도 깊은 이해를 보인다. 공자는 중국 주나라 말기에 인심이 타락하고 어지러워졌을 때 낡은 제도에 새 정신을 넣고 고전을 연구해 제자를 가르치는 정신적 혁명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함석헌은 공자가 말한 '인(仁)'이란 본래 '사람(人)'을 의미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그리고 복숭아씨를 '도인(桃仁)'이라 하듯 '인(仁)을 '씨'와 연계하여 이해한다. 공자가 인을 중요하게 말한 것은 그것이 인격의 핵심, 우주의 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석헌은 맹자를 매우 좋아하는데, '타인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에 바탕한 '왕도(王道)' 정치, '호연지기(浩然之氣)' 등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함석헌은 맹자가 말한 애민(愛民) 혹은 보민(保民) 사상에 주목한다. 맹자는 성현의 길을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교, 도덕의 가르침으로 인생과 천하를 건지고자 하였는데, 그 주장의 요점은 '보민'이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민이 제일 귀하고, 사직이 다음으로 귀하고, 임금이 제일 가벼운 것이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라는 맹자의 말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 취할 수 있다(不嗜殺人者能一之)"는 말은 영원한 명언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올바른 정치란 바로 이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에 근간한 왕도정치라고 말한 맹자는 과연 어진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함석헌은 민중의 대변자로서, 때로는 시대의 예언자로서 살았다. 영어에 만일 'resist'란 말이 없었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라고 했던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지 않는 철학이 현실에 대해 무언인가 발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철학없는 민족'이라고 비판하는 그는 성경과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역사를 이해하고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동양고전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조민환(성균관대 BK21 연구교수)
1957년 생.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
중국 산동사범대학 외국인 초빙교수.
현 성균관대학교 BK21 연구교수.

 

'종교사상 이야기 > 함석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석헌과 간디와 틱낫한의 예수(오강남)  (0) 2006.12.20
함석헌-윤형중 신부의 논쟁(종교신문, 030205)  (0) 2006.12.20
노자60  (0) 2006.12.19
노자59  (0) 2006.12.19
노자56  (0) 200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