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선교> 1993.10.16
이슬람의 신비주의-수피즘(Sufism)
(권형기 / 아세아연합신대교수, 프랑스 소르본 대학 이슬람학 박사)
수피사상의 발전
종교사의 사료에서 신앙의 세속화나 타락화에 반대하며 그 순수성을 찾으려는 민중의 정화 운동이 수없이 일어난 사실을 알수 있다. 이슬람역사에서도 물질적 이득과 개인적 영달에만 관심을 두는 속된 이기주의의 발전에 대한 저항 또는 정화운등이 일어났는데 주로 신비주의적 교의를 내세웠다.
이슬람의 보든 종파, 법학파 및 신학파가 그 형성기에 해당하는 초창기 300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처럼 수피운동도 그 근원은 이 시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신비주의 운등이 확산되어 일반신자의 인기를 끌어 대중화 되고, 결국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순니와 쉬아의 양파가 이를 포용하게 된 시기는 11세기 후반기 이후였다. 수피 Sufi라는 용어는 그리스에의 소피아 Sophia(지혜)의 아랍어 음역, 순수Safa라는 아랍어 단어, 예언자가 최초로 세운 메디나의 성원 맨앞줄 예배 자리 Suffa 또는 신비주의자들이 입고 다닌 털옷 Suf 등에서 유래했다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털옷매시 유래했다는 데 타당성을 두고 있다. 더구나 수피운동에 대한 기록 가운데 11세기 이전에 나은 것은 현존하고 있는 것이 없으며 이 용어 자체도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9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수피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전에 유대교, 불교, 기독교 및 영지주의 Gnoticism등에서 이슬람에 개종한 사람을 통하여 신비주의적 영향을 받은 무슬림이 있었다. 이들은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떠나 금욕zuhd생활을 통하여 신에게 헌신하는 고행자의 길을 택했다. 이들 금욕주의자들은 의심한 처지 없는 독실한 신자였고 신에게 가까이 하는 길은 오직 금욕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후대의 수피들이 그 기원을 우마이야조 말엽의 대신학자인 하산 알 바스리(728년 죽음)에서 찾는 것이다. 그는 굶주림과 가난을 정의의 징표로, 부를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악으로 보았다. 여기서 수피주의가 비록 금욕주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그 기원이 후자에 있음은 명백하다.
금욕주의자를 수피사상의 기원으로 보고 그 발전상황을 보면 이슬람의 초창기 200년 동안 일부 신자는 개개인의 자발적인 독실성에서 스스로 금욕적 신앙생활을 실천해 나갔다. 마치 이슬람 성법과 신학의 발전에 따라 쿠란 연구가와 하디스 수집가들이 울라마로 성장했듯 금욕주의적 신앙생찰에서 정신적 내면을 사색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종종 쿠란 귀절을 낭송하면서 감동하여 울었기 때문에 낭송자 qurra' 또는 우는 이 bakka'un등의 별명도 가졌다.
이들은 때때로 설교자가 되어 쿠란귀절을 유대교, 기독교, 중도의 전통적 영지주의사상, 심지어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일명 배화교, 페르시아제국의 국교)의 자료까지 동원하여 설득력있게 설교했으므로 점차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9세기 전반기까지는 이들의 조직은 형성되지 못했고 단순히 이슬람 성원에서 만난 의기상통한 신자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이슬람의 경쟁자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떼를 지어 쿠란귀절을 외치는 디크르에 dhikr 심지어 음악과 춤을 등원하여 황홀경에 빠지자 예배의 중심지로서의 성원은 그 지위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 금욕주의자들이 무슬림 철학자를 통하여 신플라톤철학 받아들여 그 사변적 체계를 정립해 나가자 수피사상은 한층더 찰기를 찾게 되었다., 즉 신플라톤철학은 금욕주의적 생활에 그 합당성을 주장할수 있는 이론적 계기가 된 것이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고 영혼을 오직 영원한 신적인 것에만 돌리는 금욕주의자들은 플로티누스 Plotinus(270년 죽음)의 유출설과 범신론에 힘입어 정신적 내면세계의 탐색에 긍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신의 힘이 우주의 구석 구석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실감했고 이 지상의 일은 모두 신의 뜻을 반사하는 거울 속의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영상은 실재를 반영하는 한계내에서만 그 실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물질적 허울을 벗어버리고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노력속에서 신의 영원한 미와 선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수피주의자에게는 영지 ma'rifah, gnosis에 이르는 질은 오직 하나이다. 즉 법학파나 신학파의 간접적 지식 'ilm은 통하지 않고 神格과의 합일되거나 흡수되는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색과정 때문에 수피들 가운데서 수많은 시인이 배출되어 아랍 및 페르시아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수피주의는 자발적인 금욕과 가난을 둘다 포용하고 있으나 그 어느것과도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명한 수피철학자 수흐라와르디 Shihab at-Din Suhrawardi(1234년 죽음)는 말했다. 수피사상의 완숙기에 출현한 이 학자는 진정한 수피에 대한 정의에서 수피가 가난에 집착하고 부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허약의 징표라고 주장한다. 즉 수피가 된 동기는 신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에 두지 않아야 하고 오직 신에 가까와지는 길, 곧 신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종시키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부와 가난에는 무관심하게 된다고 보았다. 신자는 신을 위해 올바르게 행동하고 qawwain 올바른 것만 증언해야 한다고 믿었다. 수흐라와르디에 따르면 올바른 행동이란 첫째 믿음 man, 둘째 지식 'ilm(종교적 사항에 관한것) 세째 직관 dhauq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보고 이 셋이 참된 수피가 되는 과정에 놓인 단계라 하였다.
어떤 신자가 첫째 단계에 있을때 그는 외모와 옷맵시에 있어서만 진정한 수피 mutashabih(비슷한 이)이고 둘째 단계에 들어설 때 수피 냄새가 저절로 나게 되는 이 mutasawwif가 되며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야 진정한 수피가 된다고 했다. 직관의 단계에서 수피는 신의 생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첫째 단계의 사람을 금욕주의자 zahid, 둘째 단계의 사람을 영지주의자 'arif, 세째 단계에 이른 사람 즉 진정한 수피를 사랑하는 이 muhibb라 한다. 영지주의자는 신의 은총을 통하여 정신적 조명을 받았으나 개인적 노력으로 이를 보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조명의 결실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 majdhub을 뜻했다. 세째 단계에서의 진정한 수피는 신에 가까와지는 길에서 부딪치는 모든 고난을 즐기고 직관을 통하여 끊임없이 신의 생동을 느끼는 神智的 단계로 보는 것이다. 수흐라와르디는 그의 주저 [[[조명의 예지 Hikmat al'Ishraq] 에서 이와같이 논하면서 예지가 곧 빛임을 주장하고 그 보편성을 강조한다. 여기셔 그는 고대 조로아스터교에서 숭앙한 빛 개념을 그의 수피사상에 결합시켜 조명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란의 사파위조 Safawi(1501-1732)에서 이 철학은 계승발전되었고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수피의식과 사상이 지배층의 신학인 순니체계와 그 간격을 넓혀가자 점차 자기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작업과 그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첨예화 되었다. 수피들은 쿠란과 예언자의 하디스 가운데 신자의 검약성을 강조하는 귀결을 과장해설하여 금욕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한 반면에 일부 올라마는 수피들의 극단적 금욕주의, 속세이탈 현상 및 수도원생활의 강조를 이슬람의 현실참여정신에 위배된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즉 수피들의 현세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울라마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었다. 이것은 이슬람의 구조 전체를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피들도 쿠란의 가르침이나 예언자의 생애를 거올삼아 신자의 신앙생활을 심적으로 정화 내지 순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므로 공통점은 여전히 존재했다.
중근동지방의 전래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마니교, 또는 영지사상의 신비주의에 심취한 추종자도 이슬람에 개종한 이가 많았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종교인 불교의 신비주의도 수피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의외의 일로 여겨지나 점차 확실성을 띠게 되었다. 즉 왕위를 버리고 방랑생활을 한 부처 Budhasaf의 이야기라든가 아바시아조의 유명한 해학가 자히즈 Al-Jahiz(868년 죽음)는 인도 출신 승려들의 동냥 행각이 시리아에까지 진출한 것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들을 진디크 Zindiq(4장 1절, p.66, 주3)라 지칭했다. 이 명칭은 본래 마니교의 추종자를 뜻하나 점차 무슬림에게 생소한 종교의 성직 종사자를 모호하게 부르는데 사용했다. 이 승려들은 짝을 지어 다니면서 같은 곳에 두 번씩 자는 법이 없으며 이 방랑생활에서 수련 하는 목표는 聖心, 순결성 및 성실성을 함양하고 굶주림과 어려움속에서 스스로를 극기하는데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살생하지 않는데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이와같은 주변환경 때문에 수피사상이 여러 기성종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생활태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슬람 내부에서도 그 수용자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쉬아파는 그 교의에 秘敎的 색채가 농후했으므로 수피사상에 매우 민감했다. 특히 알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상속인 wasi으로서 쿠란 구절의 은유적의미 tawil를 알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수피들은 알리를 이슬람 신비주의의 원로로 받드는 것이다. 그러나 순니들은 예언자가 옴마의 전체 신자를 뒷전으로 미루고 어느 특정인에게 秘傳的 지식을 전수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잇다.
쉬아 이슬람은 알리의 이슬람이라 말할 정도로 그의 비중이 크다. 즉 쉬아파와 수피 추종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영지 irfan의 전당이라면 알리는 그 문이라는 하디스 구절에서 그의 비전적 해득능력을 다같이 인정하나 수피사상 체계에는 이슬람 성법체계가 없다는 점이 쉬아파는 크게 다르다. 이슬람 자체가 계시의 양면성 즉 顯在性 zahir, exoteric과 內密性 batin, esoteric을 지니고 있으므로 수피사상의 기원을 이 내밀성에서 찾고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온 영향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자는 것이 오늘날 무슬림 신학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구미의 중동학자는 외부적 요소가 수피사상의 모체가 되었으며, 쉬아 이슬람을 통하여 순니 이슬람에 도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쉬아파의 종말론에서 나온 마흐디 mahdi(올바른 지도자)의 구세주 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순니 이슬람신학은 이 마흐디 사상을 공식적으로 받아 들이지는 않았으나 이슬람의 얼이 지상에 이루어지지 않는데 대한 역겨움 때문에, 이루고 싶은 욕망에 불탄 대중의 마음속에는 마흐디 사상이 커다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쿠란의 마흐디 구절에 대한 해설속에 이 구세주 사상의 일부를 순니신학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순니 이슬람과 수피운동의 틈이 크게 벌어져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조짐이 심각하게 되자 양측에서 순니와 수피사상을 결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엇다. 이 운동은 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개인주의적 수피사상과 이슬람 공동체 위주의 순니 사상은 서로 대립적인 갈등으로 치닫는 움직임과 이 긴장을 풀어 화합하려는 움직임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화합작업에 선봉을 선 사람이 무하시비 Hrith al-Muhasibi(857년 사망)이다. 그는 본리 신학자였으나 수피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순니신앙을 양심의 內面에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즉 금욕주의자의 篤實性을 살려 이슬람의 율법과 의식에 추가하여 신앙의 외면적 활동에 활기를 불어 넣으려 했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법규나 쿠란과 하디스의 字句에만 얽매인 공허한 외면 활동을 비난하는데 두지 않고 내면의 省察을 통하여 신앙심의 순수성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 자아비판에 둔 것이다.
신앙심의 내면적 탐구에 주안점을 두고 잇는 수피사상은 종전까지의 단순한 독실성과 신에 대한 무조건의 사랑만을 주장하는 사태에서 오래 머물수는 없었다. 신에 이르는 정신적 여로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 신학자 가운데서도 개종자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의 내면적 탐구를 조정하고 신을 향해 가까이 가는 정신적 여로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순이 올라마는 수피의 주장이 허용된다면 정신적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비난하자 체험의 객관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그래서 정신적 여로에 있어서 常態 bal와 宿所 maqam 개념을 설정하여 여로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즉 숙소와 숙소 사이에 있는 상태를 단계로 보아 그 이름을 쿠란 구절에서 인용했다. 곧 참회, 금욕, 인내, 감사, 위탁, 희열등의 이름을 붙였다. 이 이론은 발전하여 마지막 단계를 자기 소멸 Fana 즉 신성에 의한 인간성의 대체 즉 신과의 합일을 전개되는 교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교의는 비스타미 Bistami(260-874)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 교의는 더욱 발전하여 안사리 Abd Allah Al-Ansari(481-1088)는 신앙심의 각성 yaqaza(34장 46절)에서 신과의 합일 tawhid(3장 18절)까지를 크게 10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를 또한 열 개로 나누어 전 여로를 100단계의 소단계로 세분했다. 여기서 숙소란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달성될 수 있지만 상태는 신의 은총에 의존되는 것이다. 즉 전자에는 심정의 안정성이 보이나 후자에는 심정의 변화화 진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면적 탐구에 의한 정신적 여로의 원리가 어느정도 정리되자 신성속에서 인간성의 자기소멸은 신의 은총을 받은 수피는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즉 성인과 예언자, 다시 말하면 성인성과 예언자성의 관계가 분명해져야만 했다. 곧 이 문제의 해결은 순니파와의 화합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하르라즈 Al-Kharraz(899년 사망)는 비스타미의 신성속에서의 자기 소멸이론을 수정 보완하여 신속에서의 살아 남음 baqa이라는 이론을 전개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자기 소멸은 인간성의 파괴를 뜻하는 부정적인 면이 강하나 [살아 남음]에서는 긍정적 측면이 강하여 인간의 자아의식이 엿보인다. 즉 전자는 인간의 결점인 세속의 파괴를 의미하나 후자는 善性의 영향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과의 합일에 있어서 예언자와 같은 완전무결한 인간은 완전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음으로써 순니 이슬람이 주장하는 예언자의 특수 지위를 인정해 준 셈이 되는 것이다.
바그다드 출신의 주나이드 junaide(911 사망)는 이 고나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무하시비의 제자인 그는 수피의 체험과 수련양식을 비판하면서 상태 hal의 과정에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비스타미를 비롯한 여러 수피는 자기망상의 포로가 되어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체계적 지식 'ilm이 영지 marifah 보다 우선하며, 금지가 허용보다 우선된다는 원칙을 내세워 수피의 관행에 있어서 신앙 지상주의적 경향과 무절제한 관용적 경향 latifudinarian을 다같이 배격하려 했다. 이 결과 정신의 내면적 탐구와 체험을 사회규범으로서의 이슬람 성법에 접합시켜 예언자적 사명의식이 이슬람 공동체에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수피들의 사고방식에도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신속에서의 자기 소멸과 살아남음과 같은 것에는 모순되지만 또한 통합될 수 있는 범주를 설정했다. 즉 수피들의 믿음속에서의 황홀경과 제 정신을 차리는 것, 신과의 합일과 분리, 신앞에 자신들이 나타날 수 있느나 없느냐 등과 같은 상반되는 범조에서 달관된 수피는 앞부분만 달성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피는 황홀경에 빠지기는 하지만 제정신을 차릴 수 없으며 합일을 추구하지만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고 신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에게는 양극단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변증법에서의 정반합의 경지를 동시에 포용할 만큼 예언자의 사고와 활동영역은 넓게 부여되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교의를 전개함으로서 수피사상에는 순지파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수피사상의 대의를 촉진하면서도 또한 순니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움직임은 9,10세기 동안에 계속되었다. 특히 수피학자인 사르라즈 Al-Sarraj(987년 죽음)와 칼라바디 Al-Kalabadhi (995년 죽음)의 저서속에 화합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1세기에 들어와서 쿠샤이리 Al-Qushairi(1073년 죽음)의 명저 '서한문 Risalah]은 수피사상과 순니신학의 화합을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이었다. 이러한 수피사상의 활발한 움직임은 이슬람 신학에도 어느 정도의 반�을 일으켰으나 중요 신학파의 체계에는 별다는 자극이 되지 않았다. 단지 기적을 변화환 아샤리파의 신학자 바킬라니 Al-Baqillani(1013년 죽음)가 수피인 할라즈 hallaj의 기적론을 수용한 정도이다. 수피 가운데서 신학파로 성장한 집단은 갈리미야파인데 이들은 서기 900년 이전에 등장하여 250년간 존속했으나 그 교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그러나 수피사상을 가장 맹혈히 지속적으로 비판한 신학파는 한발리파로서 이븐 타이미야 ibn Taimiyah(1328년 죽음)와 18세기 와하비 운동의 창시자 와합 Muhammad ibn 'Abd Al-Wahhab(1792년 죽음)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수피사상의 비이슬람적 요소를 제거하고 이것을 이슬람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만들어 순니 이슬람을 재건한 이는 가잘리 Al-Ghazali였다.
이 화합은 결국 13세기 이후부터 19세기까지 이슬람의 성격과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종래까지의 무타질라파나 아샤리파 등의 사변적 신학 kalam을 독실성의 바탕위에 올려 놓아, 이슬람에 새로운 생동력을 불어 넣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지역에 이스?이 교세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수피사상의 옷을 입고 저질의 관행이 이슬람에 들어와 미신적 경향이 촉진되었고, 한편 神智學의 발달로 공동체 중심의 신학사상은 퇴조하게 된 것이다.
9세기부터 수피사상은 바그다드를 비롯한 여러지역의 학교에서 교과과목으로 가르쳐지기 시작했고 11세기에 들어와 놀라운 속도로 선교되어 전 무슬림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그 원인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종교적 면에서 보면 수피 장로는 신과 직접 영적 교접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순니 올라마가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종교적 마력은 매우 강력했으므로 수피사상은 점차 종파속의 종파로소 독자적 교의, 관행 및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수피로서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련과정, 즉 한단계 한단계 신에 가까워짐으로써 수피 수련자의 인간성은 점차 바래지고 신성이 풍기게 되는 것이다. 수피사상의 높은 얼과 혹독한 수련과정에도 불구하고 수피 지도급 인사는 점차 대중인기에 이끌려 갔다. 그 결과 수피 세력은 막강하게 성장하고 그 반면에 올라마의 영향력은 감소되어 14세기에 이르라 순니 이슬람을 뒷전으로 밀어내게끔 된 것이다.
수피세력의 확대 발전에는 이런 종교적 동기뿐만 아니고 사회적 정치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특히 문맹자들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의식을 수피주의는 제시한 것이다. 즉 노래와 춤등 법석을 떠는 여러 의식을 통하여 농촌 무슬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구나 노래와 춤을 혼자보다 무리를 지어서 해야만 더 큰 신명이 났기 때문에 저절로 종단 Tariqah(길)이 형성된 것이다. 이 종단의 종교의식을 통해서 수피사상은 조직된 전문직업계층과 연관된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오스만 터키의 군조직인 예니체리 yenicheri(Janussaries)를 비롯하여 여러 전문 수공예인, 시장 상인이 종단을 형성하여 수피성인들의 후견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종단은 중세 유럽의 장인조직(guild)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 수피종단은 국가 권력의 遁마용에 대한 제어장치로써 작용했다. 특히 11세기에 들어와 무슬림세계의 정치적 단일성이 무너져 군소제국으로 분열되어 정세게 매우 어지러웠다. 올라마는 술탄의 횡포를 그래도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보다는 나은 필요악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오만한 태도는 더욱 심했다. 따라서 수피종단은 정치적 횡포에 반대하는 항의집단으로 기능했다.
수피운동의 올라마에 대한 혐오감은 단순히 종교적 근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올라마층은 국가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다. 국가 권력이 시행하는 법률은 올라마가 입안하여 제정한 종교법이었다. 따라서 올라마층은 이 법률의 시행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의 관료층이었고 동시에 성직자였다.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올라마와 그들의 이슬람은 국가의 동맹군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교의상으로는 수피사상과 순니가 어느 정도의 타협점을 이루어 공된되어 갔으나 전자는 일반 신자의 신앙적 욕구와 쉽게 결합된 반면, 후자는 고유의 교의에 충실하면서 전자에 대한 관용적 태도반 갖추게 된 것이다.
종단에는 대종사(아랍지역 shaikh, 인도와 페르샤 pir, 둘다 장로의 뜻)아래 많은 제자(아랍어 faqir, derwish, 둘다 가난한자라는 뜻)들이 있었다. 기적도 행하는 대종사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고 성인 숭배적의식이 매우 강하여 지도받지 않은 이 be-pir 란 용어는 바로 무신론자로 취급할 정도였다. 종단 제자의 믿음에는 막 생명을 잃은 몸뚱이가 그 청결자의 손에 맡겨지듯 제자는 스승에 위탁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 성인 숭배사상은 순니 신학에서는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비록 순이 올라마의 일부가 온건한 수피사상을 익혀 그 자신 수피가 되었지만 동료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절대 순종하는 종단의 윤리에 승복하기 힘들었다. 이점이 18세기에 일어나 무슬림의 종교개혁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7장 2절 참조)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수피운동은 명목상으로 이슬람에 개종한 사람이나, 확신없이 개좋안 사람의 종전 관행 및 믿음과도 쉽게 타협하는 관용적 태도를 취하여 아프리카엣는 물활론적 신앙과 인도에서는 범신론적 사상과도 어울려 선교에 지대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갖가지 비이슬람적 요소를 끌여들여 조잡한 관행을 도입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수피종단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질라니 'Abd al-Qadir al-Gilani(1166년 죽음0가 세운 카디리야 qadiryah와 아프마드 알 리파이 Ahmad al-Rifai(1182년 죽음)의 리아이야 rifayahi가 있는데 이들은 이라크 지역에서 발생하여 아시아지역에 널리 보급되었고 이집트에서는 아흐마드 알 바다위 Ahmad al-Badawi(1276년 죽음)의 바다위야 Badawiyah종단이 유명하다. 그외에도 200여개의 중요한 수피종단이 있으며 여기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분단이 갈라져 나왔다. 이들 가운데는 순니 올라마가 규탄하는 의식을 쉬아파, 기독교도 및 이교도도부터 도입한 종단과 그렇지 않은 종단으로 나눌수 있다. 후자는 온건하며 올라마와의 유대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인기도에 있어서 전자에 비하여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다.
금욕주의적 독실성에 바탕을 둔 초기의 수피사상이 9,10세기 동안에 이슬람 율법 위주의 공동체 변화에 대한 반발로써 나타난 현상이라면 영지주의적 수피는 사변적 신학에 대한 응수로써 발전된 것이다. 즉 이슬람학이 법학에서 신학으로 발전확대되어 간 것 처럼 수피사상도 그에 상응하여 진전된 것이다. 그러나 아샤리의 순니신학이 신의 전지전능성을 체계적으로 확립하여 모든 인간행위와 자연현상의 근원을 신의 뜻으로 간주하자 수피사상도 이에 집착하며서 더욱 강조하여 신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이 시기의 위대한 수피 할라즈 al-Hallaj(922년 죽음)는 [내가 곧 진리다. 뭄미-haqq](진리는 신을 의미)라고 자칭하여 결국 처형당했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은 수피뿐만 아니고 무슬림전체가 기억할 정도로 전설적 순교자가 된 것이다.
인간 양심의 순수성을 핵으로 하는 금욕주의와는 달리 영지주의자는 직관을 통한 영지 gonosis가 체계적 신학을 통한 지식보다 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수피학자 투스타리 al-Tustari(896년 죽음)는 [창조주의 비밀이 밝혀지면 예언자성이 무너지고, 예언자성도 비밀을 지녔는데 그것이 알려지면 지식이 무효가 된다. 그처럼 영지주의자도 비밀이 있는데, 밝혀지면 법률의 가치도 없어진다.]고 말했다. 즉 영지가 법률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주장한 것이다. 이 비밀의 논리가 후에 빛의 논리로 발전하여 신지주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가잘리의 신학과 수피사상을 순니 신학체계가 허용함으로써 해결점을 찾은 것이다. 또한 신지주의자 이븐 알 아라비 ibn al-Arabi(1240년 죽음)는 가잘리의 신학을 연구한 후 신지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슬람역사에서 수피사상과 종단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 측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부 수피는 이슬람에 해독을 끼쳤지만 대부분은 신앙과 일상생활을 융화시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11세기(이슬람력 5세기) 수피사상의 발전을 이슬람력 1세기에 있었던 제1차 정복에 버금간다하여 제2차팽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수피운도의 물결은 평화적 또한 전투적 방법으로 검은 아프리카대륙의 가나와 나이제리아의 거주민, 소아시아반도의 기독교도, 인도의 힌두교도, 나아가서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의 주민을 이스랄라메 개종시키는 등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업적은 올라마가 이슬람성법에 구애되고 정통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급급할 때 수피들은 헌신적인 신앙생활이나 시문학 똔느 신학과 철학을 통하여 정신의 우위성을 주장하여 성공한 점에 있다. 그 결과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순니 이슬람의 동맹군이 된 점에 있다고 하겠다. 즉 10, 11세기에 쉬아 이슬람에 속한 바그다드의 부와이호조 Buwaih(945-1055)와 카이로의 파티마조 Fatimah(909-1171)가 순니인 압시야조 Abbashitah(750-1258)을 정치적으로 압도할 때 수피사상이 등장하여 쉬아 교리와 경쟁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순니 이슬람을 구해준 셈이 되었다. 그 이후 쉬아파의 세력을 꺾였다. 16세기, 이란에 사파위조 Safawi(1500-1722)가 등장하여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할때까지 그 활동은 위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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