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취임한 후 전 세계를 전쟁과 갈등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퇴임하자 전 세계 '양심 세력'은 크게 환호했다. 그러나 부시가 물러난 자리를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세계 최고의 종교지도자가 메우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2005년 4월 요한 바오로 2세를 계승한 베네딕토 16세. 그가 취임할 때 이미 우려를 표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취임 이후 그의 행적은 우려를 넘어서 그를 사임시켜야 한다는 극단론까지 나오고 있다.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교황이 전 세계의 골칫덩어리가 된 것이다.
특히 최근 있었던 '콘돔' 발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교황은 지난 3월 17일 아프리카 방문 길에 "AIDS의 대응방안으로 콘돔을 배포하는 것은 적절한 해법이 아니다"고 발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각국 정치권과 국제 보건 담당자들은 콘돔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확산을 80% 줄여준다는 조사 결과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보다는 교리를 우선시하는 잔인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교황이 현재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에이즈 감염자가 2200만여 명에 달하고 2007년의 경우 전 세계 에이즈 사망자의 4분의 3, 그리고 에이즈 감염자의 3분의 2가 아프리카 사람인 것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에이즈 확산 방지를 위해 일하는 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수많은 보건 전문가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고 분개하고 있다.
콘돔 발언 이후 교황의 지지율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지난 3월말 프랑스 가톨릭 신자의 43%가 교황이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대형사고 는 이번뿐 아니라 거의 연례행사처럼 되고 있다.
에이즈·동성애·이슬람 관련해 연이은 부적절 발언
올 2월말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집단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은 600만 명이 아닌 20~30만 명에 불과하고 가스실에서 처형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발언한 주교를 사면하고,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신의 처벌"이라고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신부도 부주교로 승진시켰다.
작년 성탄절을 앞두고 고위 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비판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또 2007년 5월에는 "가톨릭교회는 중남미 원주민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당시 인디언 부족들은 기독교를 조용히 갈망하며 유럽 선교사들을 환영했다"며 수백만에 달하는 원주민들의 죽음을 초래한 유럽의 식민체제를 옹호해 원주민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
또 2006년 9월 고국인 독일에서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가 가져온 것은 칼을 앞세워 믿음을 전파하는 식으로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들뿐"이라는 이슬람 혐오 발언을 했다. 그는 추기경 시절인 2004년 7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교회와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협력에 관하여'라는 교황청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다.
교황의 이 같은 행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의 현실인식이 매우 편협하고 시대에 뒤처졌기 때문이다. 그는 추기경(본명 요제프 라칭거) 시절부터 변하는 시대에 일반인은 물론 신도들의 일상 삶에도 어긋나는 구시대적인 가톨릭 신학과 교리를 수호해 '신의 롯트와일러'(도사견과 비슷한 독일산 맹견)라고 불린 정도로 강경한 수구보수주의자였다.
교황 즉위 전 해방신학 공격에 앞장서는 등 이단 심문관 역할 담당
그에게 물어뜯겨 치명상을 입은 대표적 인사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기수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다. 보프 신부가 1984년 <교회의 권력과 은총>(성요셉출판사)이라는 책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교황청은 그를 소환해 심문했다. 이때 그를 심문한 책임자가 당시 신앙교리청 장관이던 라칭거였다.
이후 보프 신부는 자신이 관여하는 잡지의 편집에서 물러났고 심지어는 모든 저작에 대해 소속 수도회(프란체스코회)와 주교의 검열이라는 이중 압박을 받아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어떤 저작 활동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오랫동안 진행된 탄압에 견디다 못한 보프 신부는 1992년 신부직을 벗어던지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평신도로서 살아가고 있다.
신앙교리청 장관에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물어뜯은' 라칭거는 교황에 오르기 직전의 미사에서도 "오늘날 근본주의라는 모략을 당하는 교회의 신조에 기초해 명확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가톨릭교회의 적으로 분파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 자유주의, 무신론, 불가지론과 상대주의를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강경보수파로 현재 지구촌의 말썽꾸러기지만, 한때는 자유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지지자였으며,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혁명적 발언으로 유명했던 칼 라너와도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여러 저서를 통해 교황직과 교황청의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서구사회를 휩쓴 학생혁명의 과정에서 보수주의자로 돌변했다. 당시 독일 대학가에선 학생운동세력과 학교당국이 폭력대결을 불사할 정도로 큰 갈등을 빚고 있었고 이 와중에 교수들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 같은 진보 성향의 인물조차 대학건물을 점거한 학생들을 비난하고 공권력 투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그의 머리에 피를 뿌리고 조롱하는 유인물을 살포하는 큰 봉변을 당했다.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본 예민한 성격의 라칭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라칭거는 체제수호자로 선회했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학생폭력의 직접 피해당사자면서도 자신의 정치·사회 견해를 철회하지 않은 것에 비해, 라칭거의 태도 변화는 그의 사상체계가 공고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라칭거는 요한 바오로 2세 밑에서 일하면서 과거 교황청을 공격했던 책들을 수정해 재출간하기도 했다. 자신의 과거 지우기를 한 셈이다.
이와 함께 독일 튀빙겐 대학의 동료이면서 교황제도를 비판해 바티칸으로부터 교수권을 박탈당한 한스 큉에게 가톨릭교회 내에서 강연할 수 없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황으로 취임한 후에는 라틴어 미사를 다시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자국어 미사제도를 유지한다는 전제는 깔고 있지만, 이는 교황 자신이 말한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가톨릭교회의 단일화를 이루기 위한 조치다. 결국 전통 회귀를 의미하는 가톨릭교회의 보수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조치들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기보다 대결적 태도를 고수하면서 체제를 수호하겠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세는 예수가 타파하고자 했던 율법주의자의 행동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특히 동성애, 낙태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도 양성평등에 대해서조차 수구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경직된 신학과 신앙으로 가톨릭교회의 폐쇄 분위기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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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베드로 성당 전 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인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맏형격인 베드로를 기린 것으로 역대 교황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막대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다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했다. |
ⓒ 백찬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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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교황의 발언과 행동들을 보면 마치 중세의 이단 심문관을 연상케 한다. 이단심문관은 가톨릭의 정통 신앙에 반하는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강압적인 방식으로 심문하고 재판에 넘긴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 그중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가르쳤던 조르다노 브로노는 화형에 처해졌으며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만일 베네딕토 16세가 중세에 생존했으면 가장 유명한 심문관이었던 베르나르 드 기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 교황과 교황청은 요한 바오로 2세와 자신이 추기경 시절 자행한 해방신학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이 현재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 하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기초공동체라는 조직을 통해 돌보고 그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면서 오히려 가톨릭교회를 수호했다.
해방신학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는 기득권주의자들의 주장을 옹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라칭거를 통해 해방신학자들에 대한 파문과 감시, 출판금지, 진보적 신학교 폐쇄, 해방신학의 영향력 밑에 있는 교구 분할과 보수주의 주교 임명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치 이단척결과 같은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해방신학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대신 외부에서 더 큰 적(?)이 가톨릭교회를 파고들었다. 오순절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와 같은 교단)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령을 파고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교회가 해방신학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 마치 1960·70년대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수도권의 도시빈민층을 흡수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세계 최대 가톨릭국가인 브라질은 1960년대까지는 인구의 90%가 가톨릭이었으나 2005년경에는 67%로 감소했다. 가톨릭교회의 보수화와 경직성, 권위주의,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대한 이해 부족, 영적 보살핌의 결핍이 신자들의 발걸음을 미국계인 오순절 또는 복음주의로 옮기게 한 것이다.
오순절교회의 성장에 대해 경계심을 드러낸 베네딕토 16세는 오순절 교회를 이단과 동일시하는 '분리주의자(sects)'로 부르며 영혼들을 얻고자 무차별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고 공격했다. 교황청은 결국 대형이벤트를 통해 브라질 가톨릭교회를 지켜내려고 했다. 브라질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안토니오 데 산타나 갈바옹(1739~1822년) 수도사를 성인으로 시성한 것인데, 그는 기적의 약을 통해 사람들을 치유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가 보이는 경직된 태도로는 갈바옹의 기적으로도 브라질의 가톨릭 교회를 살려낼 것 같지는 않다. 대중적 인기를 믿고 해방신학을 타도하기 위해 18차례나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했던 자신의 대부 요한 바오로 2세조차 오순절교회의 성장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황이 진정 브라질 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살리고자 한다면 지금처럼 생사람 잡는 이단심문관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이를 품는 자비심을 가진 인물로 거듭나야 한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는 교황무오류설에 근거해 권위와 율법으로 신자들에게 군림하고 이웃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남아있는 신자마저 진저리를 치고 교회 문을 나설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했던 요한23세가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감 있게 세상을 바라보고 평범한 사람들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교황청이라는 거룩한 공간을 벗어나 공장과 양로원, 감옥 등을 부지런히 찾아다녀 조니 워커(Johnnie Walk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비해 베네딕토 16세는 뒷방 영감처럼 집무실에 앉아 아첨이나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반복된 실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보프 신부가 베네딕토 16세의 즉위식을 보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교황을 희망하며, 바티칸보다는 리우의 판자촌에서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바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교황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예언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시대를 읽지 못한 교황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분주한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잘못을 엄중하게 묻고 책임지게 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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