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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문수사 주지 혜정 스님(세계일보081218)

by 마리산인1324 2009. 4. 3.

 

<세계일보> 2008.12.18 (목) 17:26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1218003403&subctg1=&subctg2=&sid=3000227

 

 

[禪茶를 마시며] 온몸으로 부처님 법문 포교하는 문수사 주지 혜정 스님

“명예욕 저 멀리… ‘苦海의 다리’되려 정진 또 정진”

 

  • ◇혜정 스님이 북한산 문수사 경내에서 “북한산은 서울시민에게 맑은 공기를 공급해주는 참 고마운 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혜정 스님 뒤편으로 문수사 대웅전 기와지붕과 그 너머로 북한산성과 보현봉 능선이 아름답게 조망되고 있다.
    북한산 문수사는 해발 650m의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지대가 높은 만큼, 뒤로는 문수봉(715m)이 병풍을 두른 듯하고, 계곡 건너로 보현봉(700m)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멀리 한강도 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전망지다. 아름다운 대남문도 지척이다.

    지난 일요일 구기탐방지원센터를 경유해 1시간20분 남짓 걸려 문수사에 오르니 70대 노스님이 등산객들을 위해 요사채에 마련한 공양간을 기웃기웃하고 있다. 등산객들이 밥이나 잘 먹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스님은 두 곳의 공양간이 남녀 등산객들로 꽉 찬 것을 보고 흐뭇한 표정이다. 단아하게 늙어가는 노스님, 한눈에 대종사 혜정(慧淨)임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은 그제서야 기자의 인사를 받고 반갑게 주지실로 안내한다.

    “문수사가 천년 고찰인데, 과거 수해를 입어 옹벽을 치는 바람에 마당이 시멘트로 변해 보기가 흉합니다. 내방객들에게 도리가 아니어서 내년에는 시멘트를 파내 마사토 벽돌을 깔고, 턱없이 작은 해우소도 새로 지을 계획입니다.”

    스님이 들뜬 목소리로 잠시 청사진을 펼쳐보였다. 그가 1985년 대구 동화사 주지를 마치고 문수사를 찾았을 때만 해도 문수사는 불탄 요사채와 작은 법당 한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사찰이 사유화돼 있어 스님이 소송을 걸어 종단 앞으로 바꿨다. 혜정 스님은 대웅전도 새로 짓고, 동굴 불당과 나한전 불사도 마쳐 여법한 천년 고찰로 돌려놓았다. 사찰 곳곳에 스님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는지, 경내를 가리키는 스님의 눈길이 그윽하다.

    주지실에 들어서니 터 자체가 좁아서인지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은사인 청담 스님 사진과 서옹 스님의 서예 작품 한 점이 고아한 맛을 풍길 뿐이다.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성철 스님이 그에게 혜정이라는 법명(이름)을 지어 줬고, 역시 종정이었던 서옹 스님이 보광이라는 법호(호)를 내려 줬다고 한다.

    고령의 몸으로 과연 문수사를 몇번이나 오르는지 궁금했다. 혜정 스님은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오르내려야 몸이 가뿐하다고 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문수사 돌계단이 닳도록 오르내린 때문인지 남달리 다리도 튼튼하고, 호흡에 큰 곤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60년 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는 혜정 스님은 행자 시절 이야기 보따리를 끌러 놓았다.

    스님은 18세 때인 1948년 봄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번뇌를 자르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봉암사에서는 광복 이후 혈기 방장하고 청정한 비구 스님들 사이에서 ‘왜색 몰아내기’ 일환으로 한국불교사에 빛나는 ‘봉암사 결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그 결기가 얼마나 뜨거웠으랴. 거기에 근현대 선지식이었던 성철 스님과 자신의 은사인 청담 스님이 넘치는 카리스마로 불교개혁을 진두지휘해 젊은 사미승은 처음부터 불교의 진면목과 마주한 셈이었다. 청담 스님은 46세, 성철 스님의 나이 36세 때였다.

    충주의 탄금대가 고향인 혜정 스님은 고2 때 우연히 문경의 은성광업소 소장이던 형을 따라 봉암사에 가게 됐는데, 성철 스님의 눈에 들어 결국 1년 뒤 학업도 마치지 못하고, 자의반타의반으로 산문에 들어선 것이다. 한때 부모가 출가를 반대했으나 두 분 스님의 인물됨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성철 스님이 저를 처음 보시고 사찰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고, 절을 둘러본 소감을 말해 보라고 하더군요. 제가 ‘신선이 공부하는 곳 같다’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혜정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꽤나 장황하게 털어놓았다. 당시 성철 스님은 “사람은 100년을 못 사는데, 꼭 1000년을 살 것처럼 행동한다”고 운을 뗀 뒤, 일본 불교의 국사(國師) 이야기 등 여러가지 지혜담을 들려주며 불교에 대한 관심의 불을 지폈다.

    이야기 하나는 이렇다. 일본의 한 어린 스님이 모친의 권유로 출가해 국사 자리에까지 오르자, 어머니에게 칭찬을 들을 요량으로 편지를 썼다. 그러나 노모에게 받은 답장은 ‘어미가 출가시켜 큰 스님이 되길 바란 것은 고해(苦海)의 다리가 돼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명예승이 됐으니 슬프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스님은 크게 각성하고 국사직을 내놓은 뒤, 다시 정진했다는 이야기다. 성철 스님의 지혜담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것도 부족해 똑똑해 보이는 학생 허복룡(혜정 스님의 속명)에게 ‘대보누각다라니경’을 외우게 한 뒤, 10분 후에 돌아와서는 다 외우자 “영리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허복룡은 불교가 점점 좋아졌다. 그 시절 그만하면 학력도 괜찮고 영민한 데다 성격도 참해 성철 스님이 일찌감치 재목감으로 봤음 직하다.

    그는 은사인 청담 스님에 대한 추억도 오롯이 되살려 냈다. 청담 스님은 혜정 스님 가슴에 스승 이상으로, ‘인욕(忍辱) 보살’이자 ‘자비(慈悲) 보살’로 살아있다. 은사 스님은 제자의 장삼을 손수 다려주는가 하면, 대중과 함께 큰 방에서 잠을 자다가 어쩌다 은사 스님 가슴 위에 발을 올려도 그때마다 슬며시 원위치로 가지런히 내려놔 주었다. 혜정 스님은 불교정화 시절 은사 스님의 가르침을 아직도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 대처승과의 싸움이 치열했을 무렵인데, 은사 스님은 “내가 너희 하고 같이 갈 때에 혹시, 누가 와서 나를 두드려 패더라도, 너희는 절대 대항하지 말고, 오히려 내게 ‘스님, 인과(因果)를 믿으십시오’라는 한마디만 해다오”라고 말했다는 것. 세월을 넘기면서 혜정 스님은 인과와 인욕 사상이야말로 불교가 가진 지고지상의 진리임을 깨닫고 있다.

    혜정 스님은 봉암사에 있을 때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을 따라 탁발도 나가고, 1000배씩 절 수행도 하며 불심을 키웠다. 그러나 1950년 3월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취지의 봉암사 결사가 중도하차하면서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혜정 스님은 경(經)을 더 배우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로 찾아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 선지식 한암 스님을 만나 근검 정신을 배웠다. 한암 스님은 흐르는 시냇물도 함부로 쓰지 말라고 가르친 분이었다.

    “그 시절은 조국과 한국불교가 처한 시대정신이 수행자들을 큰 인물로 기른 측면도 있지요. 그래도 요즘 스님들은 시대성에 잘못 물들어 자기 과시만을 하고, 남에게 대접 받으려고만 해 안타깝습니다.”

    청담, 성철, 한암, 서옹 등 큰 스승들의 가르침은 혜정의 지도자 정신을 조탁하는 데 커다란 자양분이 됐다. 청담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을 할 때, 혜정 스님은 잠시 해인사 재무국장(주지대행격) 소임을 맡았다. 어느날 태국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대회에 다녀온 청담 스님이 “앞으로 서구 사람들과 교류하려면 젊은 스님들은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한마디에 영어공부에 매섭게 매달린 적도 있었다.

    혜정 스님은 예일대 출신의 감리교 여성 선교사 르티 스튜어드가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 기회다 싶어 교류를 텄다. 혜정 스님이 영어 불전 ‘선(禪)’을 선물하자, 르티는 다 읽은 뒤 “심오하다”는 화답도 보내고, 서울의 태화기독교회관으로 초청도 해주었다. 혜정 스님은 도반 3∼4명과 영어회화를 배우며 뉴스위크지반까지 다닐 정도로 열심을 보였으나, 어느날 ‘수행자는 도를 깨치는 일이 본분’이라는 생각으로 영어공부를 접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불교 근대사를 배우기 위해선 일본어 경전을 꼭 봐야 해, 권위 있는 선생 밑에서 일본어는 철저히 익혔다.

    유난히 지인이 많았던 혜정 스님은 동화사에 있을 때 법조인 소개로 교도소 교화 활동을 시작한다. 이것은 서울 문수사에 와서도 이어졌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지금도 매월 한번씩 방문하는 편이다. 신도들이 주는 용돈을 아껴뒀다가 갈 때마다 불교서적도 수십권씩 사주고, 1시간씩 법문도 해준다. 재소자들에게 떡과 과일도 넣어준다.

    “구치소 안에 있으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지, 불교 이야기를 해주면 무척 좋아합니다. 모두가 가족같아 갈때마다 마음이 설레지요.”

    혜정 스님은 누구 앞에서나 붓다의 제자다운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쓴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삶의 지혜가 될 수 있는 법문을 들려주고, 차비를 낼 때는 단돈 천원이라도 더 얹어준다. 격무에 시달리는 택시기사가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만이라도 위로 받고, 기쁨을 얻는다면 더 바랄 나위 없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붓다의 가피를 전하려는 데는 은사 스님의 영향이 컸다. 청담 스님은 법당에 단 한사람의 불자가 앉아 있어도 법문을 들려줬다. 하루는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에게도 법문을 계속하자, 혜정 스님이 “큰 스님도 피곤하실 텐데,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고 힐문하니, 은사 스님이 “이놈아! 그래도 죽은 사람을 놓고 하는 법문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인욕은 억지로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극복했을 때 가능하다. 스승은 이것을 보여줬고, 그래서 성불했으리라 믿는다.

    문수사는 그가 중년을 바친 곳.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느 때는 광신도들이 시너통을 들고 찾아와 부처상에 불을 지르겠다고 윽박지르지 않나, 산 위에서 돌을 구르지 않나,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산을 오르는 일이 힘든지, 이제 젊은 신도로 많이 교체됐다. 그도 문수사를 떠날 결심을 하지만, 아직은 시절 인연이 ‘하산’을 허락지 않고 있다.

    종단의 큰나무가 된 혜정 스님은 종단 원로의원으로, 우이동 도선사 조실로, 청담스님사상연구소 논문심사위원으로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산재하다. 이뿐인가. 가끔 가톨릭 수도원과 사회단체에서 초청이 오면 법문도 다녀야 한다.

    그는 칼바람이 드센 오늘도 신새벽 일어나 북한산의 맑은 공기를 길어 서울 시민에게 보내주는 심정으로 정갈하게 새벽예불을 올렸으리라. 등산객들이 찾아오면 늘 반갑게 맞아주고 법문도 들려주며, 일요일이면 내방객 300여명에게 정성껏 공양을 챙겨주는 혜정 스님. 어린 사미 시절, 온몸으로 부처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그의 꿈인 ‘영원한 산중 포교사’가 문수사의 전설로 영글어 가고 있다.

    글·사진=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 혜정스님은   영어·일어 유창한 국제 포교사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종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중앙종회의원, 제9교구본사 동화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2007년 11월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현재 문수사 주지 소임을 맡고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혜정 스님은 출가 이후 포교 원력을 꾸준하게 실천해 왔다. 교도소 포교에 관심이 높아 오랫동안 법무부 교정위원으로 활동했고, 은사인 청담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 영어와 일본어에 유창한 국제포교사가 됐다. 북한산을 찾는 등산객에게 무료로 점심을 공양하는 것도 그의 포교원력 실천행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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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8.12.18 (목) 17:26, 최종수정 2008.12.18 (목)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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