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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석남사 주지 정무 스님(세계일보090116)

by 마리산인1324 2009. 4. 3.

 

<세계일보>  2009.01.16 (금) 01:50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115003536&subctg1=&subctg2=&sid=3000227

 

 

[선차를 마시며] <4>'효 법문 1인자' 석남사 주지 정무 스님

"이 세상 최고의 善은 孝… 부모 잘모셔야 大道 이뤄"

 

  • ◇정무 스님은 과거 선승들이 20년 걸려 깨치던 것을, 요즘 재가불자들은 20분 만에도 깨친다며 놀라워한다. 그는 깨침의 시기가 빨라지면서 모든 중생이 동시에 성불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아들딸 쓸데없다. 돈이 효자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여. 죽으나 사나 ‘아들딸은 내 울타리다’라고 생각해야 혀. 봉사 중에 으뜸 봉사는 가정과 자녀에게 하는 것이여. 자식은 셋 이상 낳아야 혀. 하나만 낳으면 키우는 데 애를 먹지만, 셋을 낳으면 저절로 커. 그리고 3대가 한 집안에 살아야 인성이 발달하는 법이여. 인간이 만든 최고의 제도는 가정이제. 가정은 영원할 것이여.”

    한 해가 저물던 지난해 말. 경기 안성시 금광면 개산리 석남사(石南寺) 법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신도들은 주지 스님의 법문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자리를 바짝 당겨 앉았다. 노 스님이 법단에 오르지 않고, 신도들과 무릎팍 맞대고 법문을 들려주는 것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일요일인 데도 나들이 안 가고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가상한 듯, 이야기 보따리를 있는 대로 풀어놓았다. 신도라고 해봤자 50명 남짓이었지만, 노 보살이 중간에 질문도 던지는 등 법당은 열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액운이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디, 액은 오고 감이 없어. 자기의 부정의식이 액을 만드는 법이여. ‘재수가 없다’, ‘병 걸릴 것 같다’는 부정의식이 액도 만들고, 병도 만드는 거이제.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곧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고 가르친 것이여. 근심 걱정하지 말고 편히들 살어.”

    # 충격 경험하면 죽음도 끄덕없어

    30여분 만에 끝난 짧은 법문이었지만, 신도들 표정엔 아쉬움과 환희심이 동시에 감돌았다. 이날 감로법문으로 새해, 새 희망을 불어넣은 주인공은 조계종 대종사 정무(78) 스님이다.

    석남사는 경기 최남단 서운산(瑞雲山·547m)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18세기 이후 사세가 기울어 당우는 몇 개 남지 않았지만, 영산전(보물 제823호)과 돌탑 2기, 인근의 마애석불에 옛 가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얹혀 있다. 신도들이 하나 둘 귀가하고, 기자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스님은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이따금 서운산에서 칼바람이 내려왔다.

    “평소 유언장 써놓고 살아야 해요. 죽음에 대해서도 연습을 해야 합니다.”

    스님은 대구 관음사 ‘죽음연습장’ 방문기를 들려줬다. 입구에 있는 노트에 유언을 써놓고 안으로 들어가면 널(관)이 기다린다고 한다. 널 안에 들어가 누우면 바깥에서 그대로 못을 박아 버리는 데, 웬만한 강심장도 깜짝 놀란다. 혹시나 했는데, 숨구멍도 뚫어 놓지 않았고, 판자 틈 사이에서 빛이 살짝 들어올 뿐이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들어가지만, 일단 들어갔다 나오면 현실에 충실해진다고 한다. 스님은 번지점프 이야기도 곁들였다. 처음에는 ‘왜 몇 만원씩 주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할까’ 생각했는 데, 거기에도 얻는 것이 있었다. 모두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사고를 당한다든지 충격을 받을 때가 있지요. 그런데, 충격을 미리 경험해본 사람은 끄덕없습니다. 죽음 연습도 그런 것입니다. 평소 비움을 배울 수 있고, 죽음이 닥쳐도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평상심을 가지면 지옥에 가도 아무 일 없어요.”

    쉬우면서도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그의 법문은 시나브로 입소문을 타 한 달에 절반은 사찰로, 방송국으로 불려다닌다. 늘 새로운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그의 손에는 책이 떠나질 않는다. ‘효 법문 일인자’의 명성이 절로 느껴졌다.

    정무 스님은 1958년 1월 전북대 수의학과 4학년 재학 중 군산 은적사에서 근세의 대표적 선지식 전강(1898∼1975)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무엇이 27세의 촉망받는 의학도를 졸업도 하기 전에 산문으로 끌어들였을까.

    “팔자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도(道)에 관심은 많았어요. 원불교 군산 개복동 교당의 김영신 교무가 법문을 잘해서 자주 들으러 다녔지요. 그런데 은적사에 대도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전강 스님의 인간 관계에 녹아버렸습니다. ”

    행자 생활은 당시 ‘승가평(僧家坪)’으로 불리던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보냈다. 부지런하고 음식 솜씨가 좋아 적어도 3개월은 해야 할 공양주 생활을 일주일 만에 끝냈다. 이후 김천 직지사, 부산 범어사, 대구 동화사 등 제방 선원을 옮겨다니며 고단한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스님은 1960년대 후반 ‘정화’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던 비구·대처승 분쟁 때 조계사에서 일주일 동안 금식도 하고, 20일간 옥고도 치렀다. 68년 10월 영주 포교당에서 처음으로 주지 소임을 맡았을 때는 당시 흔치 않았던 ‘수련법회’를 만들어 왕성한 포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 정조대왕, ‘부모은중경’ 읽고 통곡

    묘한 인연이었다. 1971년 10월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 주지 발령을 받으면서 효에 담긴 붓다의 가르침이 뜨거운 불덩이가 돼 가슴속에 들어온 것이다. 용주사는 이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세운 ‘효행의 원찰’. 당시 정조 임금은 장흥 보림사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받아 읽고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10가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으로, 부모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도록 한다. 정조는 특히 마지막 10번째 구절인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 대목에서 눈물을 쏟았다. 정조대왕은 훗날 단원 김홍도를 불러 ‘부모은중경’을 그리게 하는데, 백살 먹은 노모가 임종을 맞으러 방으로 들어가면서 댓돌 앞에서 뒤따라오는 여든 살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넘어질라, 조심하라’며 지극한 눈빛을 보내는 바로 그 장면이다.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 자식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정조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용주사에 얽힌 사연을 알고 경전을 다시 들여다보니,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선을 효라 가르치고, 최고의 악을 불효라 일러주는 등 효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요. 심지어 모든 비구에게 ‘땅에서 7보를 쌓아올려 28천에 이르는 것을 남김없이 모든 사람에게 보시한다 해도 부모 섬김만 못하다’고 이르셨습니다.”

    이때부터 마음이 단단해지면서 효 사상 전파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정무 스님은 기도·울력·참선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주포교당 시절 신도들 대상으로 3, 4일씩 수련법회를 해왔으나 용주사부터는 수련법회 테마가 효로 바뀌었다. 그가 석남사에서 가족단위 수련생을 위해 제작한 1박2일 ‘수련법회’ 책자에는 ‘효도하는 법 10가지’를 비롯해 ‘효도한 공덕 5가지’, ‘불효의 과보 5가지’ 등 효행 매뉴얼이 담겨 있어 그가 얼마나 효 사상 고취에 전력투구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효행을 위해서는 건강이 필수조건이기에 ‘음주의 36과보’, ‘과식의 5가지 손해’, ‘소식의 5가지 이점’ 등 건강 관련 지침도 적어놓았다. 이와 함께 성불의 장애가 되는 게으름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게으름에 인색한 노 스님은 지금도 손수 빨래를 한다.

    # 부모 잘 모시고, 검소하게 사는 것이 ‘大道’

    “부모가 바로 부처입니다. 도를 이루려면 부모를 잘 모셔야 해요. 부처님과 역대 조사 모두가 효자였지요.”

    특히 부모님을 집안에서 제일 큰 방에 모시고 제때에 봉양할 것과 부모보다 호화롭게 살지 말 것, 외롭지 않게 때때로 대화할 것 등을 신신 당부했다. 스님이 8년째 소임을 살고 있는 석남사 신도들은 효 정신이 몸에 밴 탓인지, 부모 자식 관계가 여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날도 보살 한 분이 성장한 아들을 데려와 스님에게 3배를 시키는데, 모자간에 신뢰감이 뚝뚝 묻어났다.

    법문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정무 스님은 효사상 함양을 위해 용주사(1980년)에 이어 석남사(2005년)에 와서도 ‘부모은중경탑비’를 세웠다. 3층으로 된 탑비 앞면에는 ‘부모은중경’ 구절이, 뒷면에는 절의 역사가 새겨져 사적비 역할도 한다. 불자들은 탑비를 돌며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터, 스님의 효 정신은 자연스럽게 가정살리기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님은 성품도 깔끔하고 사찰 건축에도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석남사에 와서도 도량 정비는 물론, 사찰 초입에 2층 누각인 금광루를 지어 절의 균형미를 한껏 살려 놓았다. 이를 위해 트럭 150대 분의 흙을 퍼 날랐다고 한다. 금광루가 없었다면 석남사는 앞니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을 것이다. ‘기존의 것을 고쳐서 쓰되, 정말 꼭 필요할 때 짓는다’는 불사 원칙을 잘 지켜온 것이다. 화장실을 뜻하는 해우소도 목재를 사용해 재래식으로 아담하게 지어 놓았다. 앞서 12년가량 머물렀던 용주사에 있을 때도 도량이 늘 가사 장삼을 수한 수행자처럼 단정했는 데, 은사인 전강 스님은 75년 인천 용화사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앉은 채 열반)하기 전에 잠시 용주사를 둘러보며 “정무가 사찰을 참 잘 가꿔놨다”며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어버이 같았던 스승의 빈자리는 클 수밖에 없다. 제방의 눈 푸른 납자들에게 지혜의 등불을 밝히며 누구보다도 노년을 아름답게 회향했던 은사 스님을 제자는 오늘도 닮고자 노력한다.

    “과소비나 사치의 결말은 공허하고,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부모 잘 모시고, 건강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인생에서 큰 뜻을 이루고 가는 겁니다.”

    ‘절대효행’을 중생 제도의 불교적 권도(權度)로 삼으며 종단의 대종사로, ‘전강 문중’의 큰 나무로 올연히 서 있는 정무 스님. 그는 늘푸른 소나무처럼 성성한 기개로 오늘도 중생 제도에 여념이 없다.

    석남사(안성)=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팔순에도 대중공양, 청소, 울력의 일상… 후학의 모범

    >> 정무스님은 1958년 2월 전북대 수의과를 졸업했고, 이에 앞서 1월 군산 은적사에서 전강 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았다. 196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영주 포교당, 목우암, 신륵사, 일출암, 만기사, 보적사, 영월암 주지 등을 거쳐 중앙종회 의원, 2교구 본사인 용주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가람 수호와 포교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1977년 종정 표창을 받은 데 이어 2007년에 포교대상을 받았다. 2007년 4월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지난해 10월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 반열에 올랐다. 현재는 대구 법왕사 회주이자 안성 석남사 주지로서 후학과 신도 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스님은 효 사상 전파에 매진해 용주사와 석남사에 ‘부모은중경탑비’를 세우고, 효행 매뉴얼이 담긴 ‘수련법회’ 책자를 만들어 평생교육 자료로 배포하고 있다. 팔순이 가까운 세수에도 새벽 4시 예불을 봉행한 뒤 1시간 동안 참선삼매, 대중공양, 청소, 울력, 공부 등 늘 일상을 유지해 후학의 모범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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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9.01.16 (금) 01:50, 최종수정 2009.01.16 (금)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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