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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봉국사 주지 월서 스님(세계일보081204)

by 마리산인1324 2009. 4. 3.

 

<세계일보> 2008.12.04 (목) 17:24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1204003101&subctg1=&subctg2=&sid=3000227

 

 

[선차를 마시며] <2> 조계종 계율수호 선봉장 봉국사 주지 월서 스님

“모두 비우고 내려 놓아라… 행복이 저절로 들어오니”

 

  • ◇월서 스님이 서울 성북구 정릉2동 봉국사 경내에서 상기된 얼굴로 불교정화 시절 무용담 한토막을 들려주고 있다.
    “월서야, 밭일 끝났으면 가서 나무해 오너라. 이놈아! 뭘 꾸물거리느냐.”

    불가에서 행자 시절은 서럽고 고달프다. 불교정화 운동에는 호랑이 같았던 월서(月棲·71) 스님도 스승 금오(金烏·1896∼1968)스님에 대한 기억은 아프기만 하다. 1956년 환갑의 나이로 구례 화엄사 주지로 있던 노스님은 스무 살의 새파란 제자가 노는 꼴을 보지 못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9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놔두지 않고 볶아댔다. 월서 스님은 땅 파랴, 나무하랴, 참선하랴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탁발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2년 전 지리산 실상사를 찾았을 때, 금오 노스님이 “너는 절에 가서 스님 하면 좋겠다”는 한마디에 발심해 출가했건만, 스승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1년 만에 사미계를 받아 선방에서 책 좀 들여다보려는데, 극구 막았다. 오직 가부좌 틀고 앉아 참선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형인 탄성, 사제인 고(故) 월조 스님과 함께 노스님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

    하루는 월서 스님이 어찌나 해인사 강원(사찰 내 불교대학)엘 가고 싶던지, 스승 몰래 절집을 빠져나가는데, 노스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일주문 밖에서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두 번이나 결행했지만, 모두 좌절됐다.

    ‘영원히 여자를 멀리 하리라’

    스승만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는 일이 또 있다. 대구 동화사 포교당인 보현사 원주(주지격)로 있을 때였다. 밤늦게 젊은 보살(여성 신도)이 상담차 찾아왔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12시 통금 사이렌이 울렸다. 상담을 서둘러 끝냈지만, 통금시간에 보살을 절 밖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원주 방을 내주고 자신은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이 터졌다. 대중들이 원주 방에서 나오는 젊은 보살을 발견하고 오해가 빚어진 것이다. ‘괴이한 소문’은 꼬리를 물고 동화사 조실로 있던 금오 스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노스님은 노발대발했다. 월서 스님이 아무리 무릎을 꿇고 “오해”라고 해명했지만, 노스님은 “이런 놈은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며 대중공사에 붙이라고 지시했다.

    당시 불가에는 ‘지리산 참회’와 ‘금강산 참회’라는 용어가 있었다. 수행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전자는 대웅전에서 3000배 참회를 하면 용서해주는 것이었고, 후자는 매우 엄격한 체벌로 대중의 의견을 물어 볼기를 치는 것이었다. 결국 대중 70명가량이 모인 회의에서 ‘볼기형’으로 정해졌다. 월서 스님은 이날 어찌나 호되게 맞았는지,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큰스님께서 뻔히 오해인 줄 알 텐데, 절대 인정해 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부처님께 하소연하고 싶어 지리산으로 들어가버렸지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이 정도로 험악해지면, 대부분은 속가로 귀의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 시절, 중도하차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월서 스님은 노스님의 행동이 ‘제자를 위하고, 절집의 규율과 법통을 세우기 위한 고육지책일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염도 깎지 않고 생쌀을 씹으며 오직 견성의 일념에 불탔다. 20일쯤 지났을까. 번뇌와 망상, 일체의 미움이 사라지더니 마음속이 텅 빈 듯했다. 그러면서 ‘영리여자원(永離女子願)’이라는 글귀가 마음속에서 선명히 일어났다. 이때 그는 ‘영원히 여자는 멀리하리라’는 서원을 세웠다. 그 뒤 여성들이 이상한 눈빛만 보여도 걸망 메고 줄행랑을 치기 십수차례. 월서 스님은 그 서원을 평생 지키며 살고 있다.

    “수행자는 냉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의 실수로 일생을 망치게 되지요. 큰스님이 참선을 강조한 것도, 수행이 바탕이 돼야 공부도 잘할 수 있음을 뒤늦게 알았지요. 큰스님이 없었으면 오늘의 월서도 없었을 겁니다.”

    제자에 대한 엄격함, 그것은 ‘언어의 길이 끊어진 자리를 가리키기 위한 노스님의 방편’이기도 했다. 금오 스님은 큰 키는 아니지만, 어깨가 넓고 강단지며 눈이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했다고 한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지만, 너그러울 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싸움에 임하면 물러설 줄 모르는 배포로 제자 월서를 무쇠처럼 담금질해 놓은 것이다. 노스님에 대한 신뢰가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단단해지면서 월서 스님은 금오 스님이 1954년부터 발기인을 맡아 추진 중인 불교정화 운동에 힘을 보탰다.

    비구와 대처승이 계율 문제로 ‘피 터지게’ 싸울 무렵, 월서 스님의 별명은 ‘제무시(미군 트럭 G.M.C)’였다. 떡 벌어진 어깨에, 키 180㎝에 가까운 그가 버티고 있으면 뚫을 자가 없었다.

    성철 스님과 ‘氣싸움’

    “저는 참 행복한 수행자입니다. 효봉 스님과 동산 스님, 서암 스님 등 근현대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을 빠짐없이 친견했지요. 성철 스님 밑에서도 한 시절 혹독하게 하안거(夏安居)를 지냈습니다.”

    1990년 그가 국회의장격인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내려놓을 때다. 원로 대접을 받으며 평탄한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한국불교 ‘선방 1번지’인 해인사 선원을 찾아가 하안거 방부를 들인 것이다. 하안거는 3개월간 두문불출한 채 선방에서 참선만 해야 하는 수행자들의 여름철 혹독한 수행기간으로, 종단 고위간부의 파격적 행동에 모두가 놀랐다. 월서 스님은 성철 스님 밑에서 꼭 한 철을 나고 싶었는데,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조계종 종정이자 해인사 방장인 성철 스님은 3년 뒤 82세로 열반에 들었으니, 월서 스님의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월서 스님과 성철 스님의 ‘기싸움’ 한 토막. 월서 스님이 방부를 들인 50여명의 선방 스님들과 기도정진 중 성철 스님에게 화두를 한번 받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다. 그래서 퇴설당으로 찾아갔더니,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월서라고 예외는 아니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성철 스님에게 화두를 받으려면 3000배를 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3000배를 하고 오라는 뜻이었다. 월서 스님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퇴설당을 빠져나왔다.

    “안거를 보내며 3000배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화두 안 받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때려치울까 하다가, 3일간 나눠서 하더라도 꼭 하고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월서 스님은 점심공양 시간을 쪼개 해인사 장경각에서 하루 1000배씩 절을 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셋째 날 3000배를 모두 마치자 가사 장삼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월서 스님은 일주일 후 발걸음도 당당히 다시 퇴설당을 찾았다. 그런데 성철 스님이 건네준 화두는 여러 가지 화두를 카피한 종이 가운데 ‘마삼근(麻三斤)’이라고 적힌 쪽지 한 장이었다. 중국 동산선사가 “부처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받고, “내 삼베옷 무게가 세 근”이라고 답한 데서 유래한 화두로, 누구에게나 주는 ‘흔한’ 것이었다.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 너머로 깨우침이 있었다. ‘화두 참구야말로 정신집중의 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계율은 우주 질서 지키기

    지난 10월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에 오른 월서 스님은 요즘 서울 성북구 정릉2동 봉국사 염화실에서 산다. ‘도심속 산사’인 봉국사는 700년 고찰로, 북한산 정기가 곧바로 떨어지는 느낌이 좋은 곳에 앉아 있다. 월서 스님은 불국사 주지, 총무원 총무부장, 재무부장, 호계원장(대법원장격), 중앙종회의장 등 반세기 동안 짊어졌던 종단의 중책을 모두 벗어놓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스님은 좋아하는 붓글씨도 실컷 쓰고, 대중과 차담도 즐긴다. 50년 만에 찾아온 마음의 평화 때문인지, 얼굴빛도 어린아이처럼 해사하다.

    가끔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호계원장 소임 시 호법신장처럼 철두철미하게 계율을 지도했는데, 불법(佛法) 수호를 위해 한 일이지만, 마음 한쪽이 무겁다. 그래도 멸빈자 8명을 사면한 것은 큰 위안이 돼 준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찾아 종단의 일꾼이 됐다. 지난해에는 북녘 동포와 외국인노동자를 위해 난생 처음으로 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붓글씨를 쓰느라 오른쪽 어깨뼈가 튀어나왔지만, 그 덕에 8000만원의 기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스님은 올해 법문집 ‘행복하려면 놓아라’(휴먼앤북스)를 펴냈다. 행복이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비우고 내려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귀결점이며, 계율은 불가뿐 아니라 속가 사람들도 지켜야 하는 우주의 질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자신이 온몸을 던져 전하려 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는 또 지난 10월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은사 스님을 재조명하기 위해 ‘금오 스님과 불교정화운동’(전2권·금오선수행연구원)을 펴냈다. 앞으로 매년 한 권씩 금오 스님의 법어집도 낼 계획이다.

    “큰스님이 하도 무서워 절대 제자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문득 다른 문도 스님들로부터 ‘열반하신 금오 스님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어버이 같은 큰스님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가르침을 한 자락 청하니, 스님이 ‘금강경 오가해(金剛經 五家解)’에 나오는 글을 써 준다.

    ‘竹密不防流水過(죽밀불방류수과)/ 山高豈碍白雲飛(산고기애백운비)’

    ‘대나무가 아무리 빽빽해도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고, 산이 아무리 높아도 흰구름 지나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물과 구름처럼 걸림 없이 살라는 뜻일 터지만, 어떠한 역경이라도 물과 구름처럼 뚫고 가라는 가르침으로도 들린다. “부처님 슬하에서 종소리 들으며 입적하고 싶다”고 소망하는 월서 스님. 그는 이제 삼각산의 큰 나무가 되어 봉국사 대중들을 안온하게 품고 있다.

    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 월서 스님은

    193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1956년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 계사로 사미계를, 1959년 범어사에서 동사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남지장사, 분황사, 불국사 주지,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재무부장, 중앙종회의장, 호계원장 등 종단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지난해 4월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현재 서울 정릉 봉국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월서 스님은 1994년 종단 개혁 후 호계위원과 임기 4년인 호계원장을 두 차례 맡아 종단의 질서를 바로잡고 계율을 확립하는 데 선봉장이 됐다. 지난해 북녘 동포와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위한 첫 서예전을 열어 자비 보시행을 실천했으며, 최근에는 불교정화운동과 은사인 금오 스님에 대한 선양 사업에 몰두하는 등 종단과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애정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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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8.12.04 (목) 17:24, 최종수정 2008.12.08 (월)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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