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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헌교수님 홈피>(2009년 2월 11일)에서 퍼왔습니다.

http://web.chungbuk.ac.kr/~ahnsah/tnboard/main.cgi?board=open_board

 

 

 

아나키즘 르네상스

 

안상헌 (충북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21세기에 들면서 아나키즘은 다양한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가히 ‘아나키즘 르네상스’ 시대라 할 만하다. 인터넷에서 ‘anarch(ism)’을 검색하면 평생 읽어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아나키즘 사상의 고전적 저술은 물론 지금 활동 중인 수많은 단체 및 조직들과 개인들의 주장에 관한 자료들이 넘쳐난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아나키즘 운동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범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으며 화려하게 재기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우리나라에서도 아나키(즘)에 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런 ‘아나키즘 르네상스’ 현상이 나타났을까?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21세기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현실 문제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거나 실천적으로 해결하려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인 해명이다. 여기에서 ‘잠정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범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아나키즘 운동은 그 유형과 갈래가 너무나 복잡하고 다기하여 하나의 원리나 이념에 입각하여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아나키즘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 1) 19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까지 전승되어온 ‘고전적’ 혹은 ‘전통적 아나키즘’ 운동, 2) 6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 아나키즘’ 운동, 3) 소련 및 동구권의 패망 이후 등장한 ‘새로운 아나키즘’ 운동과 ‘포스트-아나키즘’ 이념이 하나 혹은 여럿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하게 얽혀있다. 물론 이들의 최대공약수를 다음과 같이 약정해 볼 수 있다. 즉 ‘아나키즘 운동은 국가, 정당, 정부를 비롯한 일체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조직의 지배와 명령을 거부하고, 오로지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율적인 공동체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일체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가장 느슨한 정의조차도 아나키즘 운동을 구속하고 강제할 수 있다고 하여 거부하며, 그 대신 이념의 차이, 가치의 차이, 전술의 차이를 모두 인정하는 이질성과 다원성 그 자체를 아나키즘의 유일한 공통이념으로 간주한다. 물론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이러한 파격적인 ‘새로운 아나키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아나키즘에 상당한 정도 동의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오늘날의 ‘아나키즘 르네상스’ 현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일은 언제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2. ‘아나키즘 르네상스’의 계기들

 

‘아나키즘 르네상스’의 직접적인 두 현실적 계기는 1)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2)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아나키즘 르네상스’ 현상은 ‘현존했던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운동 이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세기에 발단한 아나키즘 사상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를 거부하는 혁명 사상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아나키즘 운동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이를 변혁하려는 사회주의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19세기에 등장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적색깃발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아나키즘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국제노동자연합’을 결성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 싸웠으며, 이러한 활동은 제1차 인터내셔널이 끝나는 1872년까지 지속되었다. 바쿠닌을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결별하게 되면서 두 진영은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적대적 대립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양자가 분열하게 된 결정적 차이는 정당의 역할과 민주주의 문제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들의 자유연합’을 통한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자기통제’를 주장한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이후 노동자계급운동이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은 급격하게 쇠락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소련과 동구권이 패망하는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소련과 동구권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패망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체제로 재편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박차를 가했으며, 그 결과 세계시장적 경쟁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범세계적인 반세계화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9년 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시위는 그 신호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반세계화운동은 21세기 민중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반세계화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동안 민중운동을 주도해 왔던 사회주의 운동은 조직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행태로 말미암아 실패한 운동으로 각인되어 배척받기 시작했으며, 그 대신 이념과 목표가 제각기 다른 운동단체들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연대하는 다원주의적 운동이론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동안 ‘수직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지배를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공동체의 건설’을 강조해온 아나키즘 운동이념이 반세계화운동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은 각종 사회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문화운동, 예술운동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아나키즘이 이토록 매력적이고 호소력 있는 이념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윌리엄은 한 마디로 “꿈과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회주의 혁명이 전체주의로 허망하게 끝나고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조차 절망감을 안겨주면서, 전통적 정치담론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공허감으로 채워진 정치문화”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정치’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지 않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신세대들은 신뢰할만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토피아의 몰락이 신세대 청년들에게 가장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역사적 상황을 만들어내었다. 새로운 아나키즘의 새로운 테제들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까닭은 대중들이 “유행하는 환상에 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행하는 환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곳에서는 사람에 대한 믿음 - 이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믿음, 이웃공동체에 대한 믿음, 개인들의 사적 관계에 대한 믿음 - 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이 유행하는 이유의 하나로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적 경향도 지적되고 있다. 퍼트남에 의하면, 미국인은 다른 사람들 - 가족, 친구, 이웃 - 과의 관계가 단절되어가고 있으며 ‘홀로 볼링족’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적 차원의 조직적인 집단적 정치행동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른 한 편 근래에 크게 늘어나고 있는 시민단체와 시민들의 지역사회에서의 자발적인 봉사활동방식도 아나키스트 운동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세대 간의 대화단절도 신세대의 행동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누가 다른 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래서 신세대들은 구세대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가 없으며, 서로 쉽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또래들끼리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적이고 미시적인 문화적 영향만으로는 ‘아나키즘 르네상스’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나키즘 르네상스’의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계화자본주의 시대에는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급진적 좌파들이 활동할 공간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직화된 민중들이 쉽게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민국가는 점차 투쟁대상으로서의 위상과 자격을 상실하고, 그 대신 훨씬 더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먼 어딘가에 존재하면서도 훨씬 더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초국적 자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화자본주의 현실에서는 급진적 좌파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구좌파들은 다른 운동들부터 권력의 집중화와 관료주의를 부추긴다는 불신을 받고 있으며, 신좌파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와 간부들의 노령화로 말미암아 점차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심지어는 여성운동조차도 권력관계에 대한 아나키스트적인 반대에 포위되어 있으며 이미 추월당하고 있다. 이처럼 냉소적인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는 현존하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세속적 종교를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한 마디로 “정치가 몰락한 곳에는 문화만 남으며, 공동체가 몰락한 곳에는 개인만 홀로 남는다.” 다른 말로 요약하자면, “정치적 근본주의와 문화적 근본주의의 장기적 긴장 관계 속에서는 문화적 근본주의가 선호되며, 이런 현실에서는 아나키가 모든 개인을 위한 것이 되며,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 된다.” 물론 아나키즘은 유토피아적 성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소수의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아마도 아나키즘을 오늘날의 근본주의자들을 위한 실행 가능한 가치관으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이러한 철두철미한 근본주의일 것이다. 마이클 앨버트에 따르면, 새로운 아나키즘은 “가족에서 문화, 국가, 경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화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활한 추진력이자,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제도로 나아갈 수 있는 창조적이고 고무적인 방식을 찾아내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활한 추진력”으로 간주된다.

 

철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포스트구조주의철학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철학은 체제나 권력에 대한 거대담론을 미시담론으로, 거시정치학을 미시정치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메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이 실패한 이후 정치적 개입을 위한 대안적 비전을 제공하려 했던 포스트구조주의철학은 아나키즘 전통과 접목함으로써 그들의 미시정치학적 관점을 포기하지 않고도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정치이론을 체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 정치이론은 “전통적 아나키즘이론의 선험적 성격을 권력의 실증성과 창조성으로 대치하고, 주체나 구조에 대한 분석을 실천과 실천집단들에 대한 분석으로 대치함으로써” 아나키즘에 새로운 이념적 활로를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뉴먼에 따르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전통적 아나키즘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바로 그 ‘지배 이념’을 재생산해내는 주된 이유가 권력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이해에 있다는 점을 구명해 줌으로써” 아나키즘에 새로운 이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을 활용하면 본질주의적인 보증이 없이도 정치적 저항의 가능성을 이론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근대적 권력은 본질주의적인 자기동일성을 통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본질주의적인 접근은 ‘권력’ 개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인간, 도덕, 휴머니즘, 자연, 저항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 걸쳐 잘못된 이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진정한 저항형식을 건설해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변혁을 가능하게 하려면, 권력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접근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은 기존의 모든 이성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담론을 무력화시키는 철학적 무기를 제공하며, 미학과 정치의 절합articulation은 축제적 퍼포먼스를 비롯한 시위현장에서의 다채로운 직접행동 방식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후 라클라우와 무프에 의해 제기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정치담론과 ‘근본적 민주주의 담론’은 ‘포스트아나키즘의 정치담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메이와 뉴먼은 아나키즘과 포스트구조주의 간에는 근본주의 정치이론을 이론화하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으며, 오히려 두 전통 사이의 긴장은 정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만드는 성찰의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아나키즘에 대한 담론은 이제 막 형성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 귀추가 어떻게 될 지는 미지수이지만 ‘신세대 아나키즘 르네상스’에 기여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아나키즘 운동은 다양한 부문운동과 광범위하게 결합되었다. 이는 아나키즘 운동을 상징하는 깃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동안 아나키즘 운동의 상징으로만 사용되어왔던 흑색깃발은 아나키즘 이념과 결합된 다양한 운동들의 고유색과 함께 어울리면서 다양한 색깔의 깃발들로 변용되고 있다. 이러한 변용은 아나코-공동체주의와 아나코-생디칼리즘이 적색/흑색 깃발을 사용하는 것을 모방하여 창안된 것이다. 예컨대, 아나코-여성운동은 사각깃발을 대각선으로 나누거나 별 모양을 수직으로 나누어 보라/흑색 깃발을, 아나코-생태주의운동은 녹색/흑색 깃발을, 아나코-동성애운동은 분홍/흑색 깃발을, 아나코-평화운동은 흰색/흑색 깃발을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진정한 아나키즘’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아나코-자본주의조차도 노랑/흑색 깃발을 사용한다. 이밖에도 60년대에 고안되었으나 널리 사용되지 않았던 서클-A가 표시된 다양한 깃발들이 ‘신세대 아나키즘’의 상징으로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아나키즘운동은 ‘운동들의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다원주의적 반세계화운동의 중심에서 ‘빨주노초파남보’가 함께 어우러지는 ‘차이와 연대’ 운동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3. 현대 아나키즘의 갈래들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나키즘 이념과 운동을 유형별로 나누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나키즘 단체들은 이념적 최대공약수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념과 실천에 있어 끝없는 차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히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란 추상적인 이론이나 이념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행동하고 있는 바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아나키즘의 갈래와 유형은 아나키스트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유형을 일정한 기준에 맞추어 엄격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다만 아나키즘 사상과 운동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위해 편의상 그들의 실제 주장과 구체적 행동방식을 근거로 하여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분류법으로도 아나키즘의 모든 유형을 망라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세대 아나키즘’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유형 구분에 있어 또 하나의 특징은 사회주의 계열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주의처럼 주창자의 이름이 들어간 ‘-주의ism’라는 명칭 사용을 기피한다는 점이다.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가끔 슈티르너-이즘, 프루동-이즘, 바쿠닌-이즘, 크로포트킨-이즘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있으나,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명칭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나키즘을 ‘특정 사상가의 이념을 따르는 죽은 사상이나 박제된 이념’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삶의 활동이자 운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1) 사회적 아나키즘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이 두 유형의 아나키즘은 19세기에 형성된 ‘고전적 아나키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유형에 속한다. 따라서 이 두 유형의 기원은 사회주의 운동과 아나키스트 운동이 분리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당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이 완전히 배타적인 운동이 아니었듯이, 이 두 유형의 아나키즘도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두 유형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지향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성격’과 ‘그것에 도달하는 방식’의 차이다. 전자는 ‘사회적 문제의 공동체적 해결과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비전’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사회적 문제의 개인주의적 해결과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적 비전’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국가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반국가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이 두 유형의 차이는 그것이 형성된 역사적 상황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전자는 유럽의 역사적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된 급진적 혁명이념인데 반해, 후자는 미국적 상황에서 장인적 기술을 가진 소규모 자영제조업자들의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비롯된 진화론적이고 개혁적인 변혁이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아나키즘은 ‘욕구를 기반으로 하는 분배체제’를 선호하는데 반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분배체제’를 선호한다. 수공업적 개인주의자들은 사회적 문제의 공동체적 해결이 자칫 -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교환의 자유를 포함한 -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것을 우려하는데 반해, 사회적 아나키즘은 ‘공동체적 소유만이 전체적인 삶에 있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사적소유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개인을 공동체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용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아나키즘은 다시 상호주의mutualism, 집산주의collectivism, 공산주의communism, 조합주의syndicalism로 세분할 수 있다. 이들의 차이는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전략의 차이에 있다. 상호주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공동체적 상호은행 체제를 통해 교환하는 노동자기업과 시장사회주의를 기반으로 삼는다. 이에 대해 다른 유형의 아나키즘은 상호주의는 존중하지만 - 자본주의적 시장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 경쟁과 독점을 낳는 시장체제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그리고 집산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전자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폐지’만을 주장하는데 반해, 후자는 ‘화폐경제 자체의 폐지’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조합주의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유로운 생산자의 자유로운 연합’의 ‘직접행동’을 통해 미래의 자유로운 사회를 세울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생산자 연합’을 자본주의 하에서의 ‘아나키즘을 실천하는 학교’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대치하는 새로운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의 건설과 지배를 반대하며, ‘생산자 계급의 자유로운 연합’의 ‘직접행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념과는 구별된다.

 

2) 녹색 아나키즘: 생태계 위기의 해결은 오늘날 모든 아나키스트들의 공통관심사이다. 생태주의적 사유는 고전적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에서도 발견되지만, 생태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거론한 아나키스트는 머레이 북친이다. 그는 아나키즘이 강조하는 ‘자유로운 발전, 탈집중화, 다양성, 자발성’ 같은 개념을 생태주의 이념에 반영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위계질서, 집중화, 국가, 부의 집중은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로운 발전과 다양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고 비판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는 에코-공동체와 에코-기술(혹은 그린-기술)을 주창한다.

 

녹색 아나키즘의 또 다른 유형인 프리미티비즘(원시주의)은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단지 자본주의적 위계질서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 그 자체, 기술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는 보다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이들은 ‘문명 그 자체의 파괴 혹은 종말’을 주장한다. 그러나 문명과 기술에 대한 녹색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까지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농경까지도 거부하고 수렵채취 시대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언어까지도 거부해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까지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고 낭만적인 주장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존재하며, 실제로 이들의 극단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아나키스트들은 거의 없다. 일부에서는 프리미티비스트들의 극단적 주장은 야만적 원시시대의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와 기술문명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원시사회를 사례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3) 평화주의적 아나키즘: 레오 톨스토이의 사상에서 비롯된 아나코-평화주의는 ‘비폭력 아나키즘’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나키즘과 평화주의의 결합은 ‘개인에 대한 일체의 지배와 예속’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근본이념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유형의 아나키즘을 ‘폭력적 아나키즘’으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좋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아나키즘은 억압자의 제도적 폭력에 대응하는 피억압자의 정당한 대항폭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아나키즘에서의 폭력 문제는 비폭력적, 점진적 변혁노선과 급진적 폭력 혁명노선의 문제이다. 급진적 아나키스트들에 있어 폭력은 ‘개인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제도적 폭력에 대한 폭력’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폭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혁명은 그만큼 약화된다’는 주장 사이의 논쟁도 존재한다. 실제로는 순수평화주의자인 아나키스트는 거의 없으며, 폭력은 필요악이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최소한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이와는 달리 오늘날의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온갖 상상력을 발휘한 전혀 다른 종류의 예술적, 축제적 퍼포먼스로서의 폭력(달걀 던지기, 돈 찢기, 물총 쏘기, 새총으로 창문 맞히기 등)을 시위현장에서의 ‘직접행동’의 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4) 아나코-페미니즘: 여성운동은 초창기부터 국가와 모든 형태의 권위를 반대해 왔지만 여성운동이 아나키즘과 이념적으로 결합한 것은 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일체의 권위주의적 지배와 착취를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과,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를 반대하고 여성의 인권을 강조하는 여성주의는 이념적으로 괴리가 없다. 다만 양성평등권만을 강조하며 제도적 억압에는 무관심한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에 대한 대안으로, 일체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결합하는 아나코-페미니즘의 등장했다. 사회주의 운동 하에서 남성중심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불만을 느껴온 여성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퇴조와 함께 아나키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이는 전통적 아나키즘 운동 내부에도 존재했던 성차별을 청산하는 ‘새로운 아나키즘’ 운동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억압적 결혼제도 대신에 양성평등 하에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자기통제’에 입각한 ‘자유연애’를 주장하기도 하고, 나아가 아나키즘과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를 결합하는 이른바 아나코-에코-페미니즘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5) 문화적 아나키즘: 그람시 이후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문화운동이 고조되었듯이, 아나키즘 운동 안에서도 정치와 경제 영역을 벗어나 있는 - 교육, 예술, 육아, 성도덕 등과 같은 - 문화 영역에서 권위주의적 가치의 청산을 위한 문화운동이 고조되었다. 문화 영역의 권위주의적 가치가 종식되지 않는다면 국가가 혁명에 의해 전복된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또 다시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양식 - 새로운 육아방식과 교육방식 - 을 통해 권위주의적 가치를 조장하는 전통문화를 타파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아나키즘 운동은 ‘직접행동’을 조직하여 자본주의 안에 ‘자유주의적 대안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는다.

 

6) 종교적 아나키즘: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무신론자이며, 종교와 신 관념을 반-인간적이고 세속적 권위와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것이라 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종교적 아나키스트들은 종교적 신념을 아나키즘과 결합시켜 ‘아나키즘이 반드시 무신론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종교철학자 엘륄은 “기독교성서의 사상은 곧바로 아나키즘에 도달한다. 아나키즘이야말로 기독교 사상과 일치하는 유일한 ‘정치적인 반정치적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북친도 ‘기독교는 의사-종교적 아나키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평화적 아나키스트이기도 한 톨스토이는 성경 읽기를 통해 “통치란 다른 사람에게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통치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통치자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며 결국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라는 이념을 끌어낸다. 나아가 그는 “자본주의는 도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개인을 파괴하는 노예운전수이며,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피터 마샬에 의하면 동양의 노자사상과 선불교에서도 아나키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반세계화운동가인 스타호크는 이교도와 영성주의까지도 아나키즘과 연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신론적 아나키스트들은 ‘성서는 역사적으로 세속적 세계의 위계질서와 통치자를 옹호하는데 기여해 왔으며,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숭배한다는 것은 자기예속과 노예근성의 한 형태이며 사회적 지배를 초래하게 만든다’면서 종교적 아나키즘을 비판한다. 특히 ‘종교적 교의’와 ‘아나키즘’이 상충할 경우 종교적 아나키즘은 언제나 ‘종교적 교의’를 먼저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정한 아니키스트’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7)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 위에서 제시된 여러 유형들은 전통적 아나키즘을 계승하거나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영성주의와 같은 다른 운동과 결합된 아나키즘의 갈래들이다. 그러나 형용사나 하이픈(-)을 부가하는 방법으로는 현존하는 아나키즘의 모든 갈래를 망라하기도 어렵거니와 아나키즘의 특징인 차이에 대한 관용과 개방적 특성을 드러내기도 어렵다.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본래 이 용어는 19세기 말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적 아나키즘’과 ‘집산주의적 아나키즘’ 사이의 치열한 논쟁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마르몰에 의하면,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anarchismo sin adjetives은 ‘서로 다른 경향을 지닌 아나키즘들에 대한 관용성’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나키즘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누구에게도 미리 정해진 각본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미래사회를 두고 어떤 특징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자꾸 분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본래적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나키즘이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사회’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조정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미리 예단하거나 결정해 둘 수 없으며, 따라서 연합방식이나 노동조직 그리고 사회적 삶의 형태에 대해 미리 결정된 어떤 단일한 형태로 수렴하려는 논쟁은 무모하며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모적 논쟁은 스페인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사회적 아나키즘 사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성으로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드 클레이르는 “자유와 실험만이 최선의 사회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아나키스트’라는 단순한 명칭 외에 다른 어떤 형용사도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나키즘 내부의 이러한 관용적 태도는 ‘새로운 아나키즘’의 다원적이고 개방적 성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진정한 아나키즘’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아나코-자본주의자’들은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을 빙자하여 ‘자본주의적 아나키즘도 아나키즘 운동의 일부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아나키즘의 일차적 관심사는 ‘국가의 폐지’이며, 경제체제 문제는 단지 부차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므로, 자신들이 지향하고 있는 ‘국가 없는 자본주의’도 아나키즘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나키즘이 단지 국가의 폐지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와 국가의 억압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과 뿌리를 같이 하는 반국가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운동’이라는 점을 고의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는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4. 21세기의 ‘새로운 아나키스트’들

 

위에서 살펴본 아나키즘의 여러 유형과 비교해 볼 때, 사회주의권의 패망 이후 등장한 21세기의 ‘새로운 아나키즘’은 다양성과 이질성이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새로운 아나키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아나키즘의 원리나 이론 그 자체’까지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새로운 아나키즘’은 상대성과 다원성과 특이성과 이질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을 뿐 만 아니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비견되는 ‘포스트-아나키즘’적인 성격까지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아나키즘’은 앞에서 살펴본 ‘구세대 아나키즘’과 뚜렷한 세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후자는 주로 60-70년대에 반전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문화운동 등을 주도했던 구세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데 반해, ‘새로운 아나키즘’은 주로 90년대 이후에 청소년기를 보낸 신세대들이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구세대 아나키스트들은 고전적 아나키즘 사상가들 -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 - 의 반국가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이념을 대체로 계승하고 있는데 반해,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고전적 아나키즘 이론을 공부하거나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학술이론을 경멸하며 ‘직접행동’을 중시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지적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직접행동’을 통해 만들어진 신념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들은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을 조직하는가에 따라 특징지어진다.” 즉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의 주안점은 “올바른 혁명이론을 논증하거나 유토피아적 삶을 개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이한 혁명적 활동들이 현실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루바치츠의 관찰에 따르면 “새로운 아나키즘은 오로지 대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즉 새로운 아나키즘은 범지구적 투쟁 대열에 참여한 아나키스트들이 다른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만 그 존재가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실천과 행동을 중시하는 신세대 아나키즘은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읽어야 할 특정 이론가 집단을 지목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그런 집단이 있다 하더라도 이론적 권위에서 나오는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대다수 아나키스트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오늘날의 신세대 아나키즘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점이 ‘새로운 아나키즘’의 투쟁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성이자 뿌리치기 어려운 매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세대 아나키즘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를 직접 관찰하거나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보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살펴볼 신세대 아나키즘의 활동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다행히도 새로운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에 관한 생생한 정보는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으며, 링크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그러나 ‘신세대 아나키즘’의 초창기 활동상황이나 이념적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은 그 출처가 묘연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아나키즘을 옹호하는 연구자들조차 아나키즘은 ‘일반이론이나 일관된 이념이 아니라 진화하는 전통’으로 간주한다. 존 무어에 의하면 “아나키즘의 특징은 끊임없이 자신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새로운 아나키즘의 토대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이러한 이론적 시도는 ‘아나키즘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칫 이념적인 보수주의자로 비칠 수 있다. 이렇듯 신세대 아나키즘은 보편적인 교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단지 가족유사성을 비교해 봄으로서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신세대 아나키즘’의 최소치는 ‘인간사의 모든 강제와 위계질서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월터에 따르면, “아나키즘의 본질, 즉 그것이 빠지면 아나키즘이 되지 않는 핵심 내용은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든 권위의 부정”이다. 그 외에는 아나키스트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아나키즘이 존재한다. 따라서 신세대 아나키즘의 유형과 갈래의 목록을 만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나키즘 르네상스’와 ‘신세대 아나키즘’의 등장에 기여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약간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1) 촘스키Noam Chomsky와 북친Murray Bookchin: 촘스키는 “자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의 동반자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70년대부터 아나키즘에 관한 많은 저술과 대담을 남겼다. 그는 아나키즘을 “일체의 착취와 지배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내의 자유주의적 갈래의 하나”로 간주하며 ‘아나키즘의 근본노선은 삶의 모든 측면에 존재하는 권위, 위계질서, 지배구조를 찾아내어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와 함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자유주의를 사회주의와 연관시키는 촘스키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지나치게 노동자의 자기통제와 자율경영 개념에 경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적이고, 고도로 조직화되고, 근본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변혁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비판에 초연하게 대응하며 신세대 아나키스트들과의 논쟁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나키즘의 노선에 관한 논쟁 그 자체가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소개된 북친은 촘스키와 같은 시기에 ????궁핍 이후 사회의 아나키즘????(1970)이라는 논쟁적 저술을 출판한 이래로 현대 아나키즘 이론의 중심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환경과 정치 문제를 결합시키고 생태학과 아나키즘을 결합시켜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라는 개념을 정착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생태학과 아나키즘은 모두 참여적 자유, 다양성의 증대, 상호주의와 복잡성, 다양성의 통일로 특징지어지는 이론과 실천 영역”이며,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생태학은 창조적 자유와 다양성의 증대의 관점에서 위계질서를 거부하며, 탈-중심적인 정치경제적 구조를 옹호한다. 그가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자치제의 목적은 국가주의를 단호히 반대하고, 극대화된 민주주의를 허용하는 공공영역을 여는 것이며, 개개인에게 최대의 권력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의 맹아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도 초기에는 아나키즘 운동을 “모든 형태의 지배를 발본색원하고, 모든 형태의 강제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리비도적 운동”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아나키즘도 실행계획을 가진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아나키즘을 ‘하나의 단일한 이념’으로 묶는데 반대했으나 최근에는 전통적 아나키즘의 네 가지 근본적 교의 - 탈-중심적인 공동체연합, 국가주의의 거부, 직접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공동체사회 건설 - 를 높이 평가하고 이에 동의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 결과 그는 아나키즘 운동을 반국가anti-state 운동을 넘어선 반정치anti-political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신세대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아나키스트로 위장한 국가주의자’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촘스키와 북친은 이성주의적 전통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구세대 아나키즘을 대표하며, 반이성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신세대 아나키즘과 대립한다. 촘스키는 가치문제를 토론하거나 새로운 대안사회를 구상하기보다는 주로 현대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구명하는데 역점을 둔다. 따라서 그는 아나키즘을 선호하지만 그의 정치비판은 언제나 이성주의적이다. 촘스키에 비해 북친은 훨씬 더 이성주의적이며 심지어는 형이상학적이다. 그는 ????사회적 아나키즘과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1995)을 통해 ‘사회적 자유에 대한 집단주의적 참여’를 주장하는 ‘사회적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개인주의적 참여’를 주장하는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의 전통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의 특징인 “과격한 모험주의, 개인주의적 허세,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이성주의와 닮은 이론에 대한 혐오, 이론적 비일관성에 대한 찬사와 다원주의, 상상력과 욕망과 무아경지에의 비-정치적, 반-조직적 영합, 일상적 삶에의 몰입”을 비판한다. 그는 아나키즘을 “조직화된 이성적 사회운동”으로 이해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대한 숙고와 사려’를 옹호한다. 그의 이성주의 옹호는 ‘기술’에 대한 지지에서도 발견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구세대를 대표하는 촘스키와 북친의 이성주의적 입장은 90년대 이후에 형성된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다.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이성주의적 좌파를 완전히 ‘흘러간 옛 노래’로 간주하며 그것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역사의 역행’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의 청사진을 믿거나 범주화하는 것을 거부”하며, “우리는 주의자ismoids가 아니라 인간man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론이나 전략’에 대한 논의보다는 ‘현재적 삶에 대한 좋고 싫음’을 확인하는 대화를 선호한다. 이는 그들이 좌파적 전통에 근거한 아나키즘 전체를 ‘죽은 도그마와 지겨운 수사학에 사로잡혀 있는 불행’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신세대 활동가는 “우리는 ‘공식화된’ 좌파 아나키즘 운동에 속하지 않으며, 이념적 도그마보다는 현재적 삶에 우위를 두며 자발성을 신봉한다”고 선언한다. 밥 블랙은 북친을 ‘학장님’이라고 비꼬면서 “좌파 아나키즘에서 북친보다 더 쓸모없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혹평한다. 그는 “북친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공동체적 국가주의자이며, 그의 자치제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는 아나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통상적인 정치와 이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의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감은 ‘북친을 넘어서기 위한,’ ‘추상적 이론과 이론체계의 구축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구세대 좌파를 넘어서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2) 지난 20년간 다양한 집단의 신세대 아나키스트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신세대 아나키스트 이론가로는 1) 아나코-프리미티비즘의 창안자인 존 체르잔과 데이빗 왓슨, 2)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을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에 끌어들인 하킴 베이, 밥 블랙 등이 있다.

 

2-1) 존 체르잔John Zerzan: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프리미티비즘을 주창한 그는 대담하게도 아나키즘의 근본이념인 ‘국가의 폐지’를 넘어서 ‘모든 기술과 문명의 폐지’를 주장해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 옹호자들에게 엄청난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프리미티비즘은 현대사회와 관련된 모든 질병과 불행 - 위계질서와 지배(인종차별, 여성차별 등)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질병, 스트레스, 폭력, 생태계 파괴 등 - 의 원인을 구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러한 질병과 불행의 원인을 “현대에 처음 나타난 질병이 아니라, 문명 그 자체의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견은, 성직자, 왕, 주인들에 의해 노예화되기 이전 시기인 농경시대 이전의 인간의 삶은 한가했고, 자연과 친밀했으며, 직관적 지혜와 성적 평등과 건강한 삶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데 반해, ‘기술, 농경, 가축화, 분업화, 도시화, 언어’ 같은 문명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순응과 복종, 인간과 자연의 괴리를 초래하는 사회체제를 만들어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는 문명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관계에 대한 아나키스트적인 분석방식을 통해 원시사회의 본성을 새롭게 통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상상하는 미래사회는 생태적으로 조화롭고 권위가 사라진 사회, 이름조차 부를 필요가 없는 얼굴을 마주하는 작은 사회 즉 ‘원시적 미래’ 사회이다.

 

체르잔의 주장은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청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를 따르는 프리미티스트들의 문명세계의 질병에 대한 일상적 저항방식은 기껏해야 ‘정치인 살해, 폭탄투척, 상가나 경찰서 창문에 돌 던지기’ 같은 것들이다. 체르잔 자신이 극단적인 폭력행위를 옹호한 적은 없지만 “체제를 해체하는데 도움이 되는 행위라는 미명 하에 저지르는 ‘닥치는 대로 파괴하기’는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과격한 문명비판론은 ‘문명 파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 활동가들의 문제점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부정 정신’을 망각하고 있다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된다.

 

2-2) 하킴 베이Hakim Bey: 베이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정답을 갖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모든 아나키즘을 거부한다. 그는 “카오스가 생명이다. 모든 쓰레기들, 모든 현란한 색깔들, 모든 원형질의 움직임들, 모든 운동들 - 이 모든 것들이 카오스다. 질서는 죽음이며, 정지이며, 결정체이며, 외계인의 과학이다.” 그는 이러한 존재론에 입각하여 정답에서 출발하는 모든 ‘총체적 접근방식’을 거부함으로써 ‘비결정성과 애매성과 우발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신념을 드러낸다. 그는 사회변혁방식에서 모든 권위주의와 신비주의를 반대하며 비-권위주의적 접근방식을 선호한다. 특히 그는 ‘TAZ(잠정적 자율지대)’를 혁명기지로 삼아 수백, 수천, 수백만의 저항과 차이와 비일상적 의식을 전염시켜 나가고자 한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에게 “존재론적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려면 과거의 낡은 범주와 접근법, 이념과 운동방식을 모두 버리라”고 부추긴다. 즉 ‘시적 테러’와 ‘예술적 사보타지’ 같은 자발적 행위를 통해 상상력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순수성이니 일관성이니 하는 관념 따위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방식에 있어서도 그는 ‘증권매장에 돈을 뿌리기(시적 테러)’와 ‘돈 파기하기(예술적 사보타지)’ 같은 갖가지 기발한 행동을 창안해 내었다. 또한 그는 축제와 놀이를 위계질서와 지배와 추악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의 맥락 안에 ‘TAZ’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축제는 중요한 변혁적 실천수단이자 사회변동의 원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즉 축제는 축제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내용을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축제는 ‘저항의 장소’이자 ‘반란의 장소’이다. 축제는 자율성의 내적 구조이자 의미이다. 축제 장소에서는 어떤 단일한 행동통일도 권장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을 혁명 이후의 사람들에게 내맡겨 놓듯이, 축제 장소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내맡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전에 결정된 어떤 목적도, 어떤 수단도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시위와 축제의 결합은 바로 이러한 시도들과 무관하지 않다.

 

2-3) 밥 블랙Bob Black: 블랙도 베이와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아나키즘’과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을 선호한다. 그는 “아나키즘은 좌파니 우파니 하는 범주를 넘어서야 하며, 특히 아나키즘의 사회주의적 근간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범주적 제약과 한계를 넘어서야만 프리미티비즘, 상황주의, 펑크문화, 심지어는 맥주문화와 같은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이념과 접근방식을 자유롭게 빌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제3형 아나키즘Type-3 anarchism’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그는 특정 유형의 아나키즘은 물론 아나키즘의 교의적 이념까지도 모두 거부한다. 그는 “anarch-ists들은 명칭에서 -ism을 삭제하고 그냥 anarchs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anarchs는 ‘우리가 믿는 신념what we believe’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존재what we are’를 나타내는 올바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2-4) 데이빗 왓슨David Watson: 왓슨은 새로운 아나키즘의 운동방식으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계획적 접근이 아니라 ‘비계획적이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충적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우리의 현재적 삶의 제한적 방식이나 체험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경험한 모든 체험들 - ‘현상세계에 대한 원시적 애니미즘, 고대문명이 물려준 지혜, 현대의 혁명, 자유, 퇴보의 전통’ - 로부터 폭넓게 최대의 영감을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지금까지 살펴본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서구문명과 사회의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주류문화가 긍정적 측면으로 간주해 왔던 과학, 기술, 자연지배, 언어, 이성주의, 정치, 노동 따위를 모두 거부하거나 비판한다. 그들은 “문명이 문제라면 자연으로 돌아가라, 노동이 더 이상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놀이로 대치하라, 정치이론과 정치조직이 혁명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어떤 이념이든 모두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신세대 아나키즘의 이러한 주장은 구세대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예컨대, 구세대에 속하는 앨버트는, 체르잔의 프리미티비즘의 문제점으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1)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 ‘좋은 분업’과 ‘나쁜 분업’의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기술 부재’와 ‘나쁜 기술’, ‘분업 부재’와 ‘나쁜 분업’의 문제만을 제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분업 그 자체’와 ‘기술 그 자체’의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부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2) “다양한 재앙을 초래하는 끔찍한 기술에 대해서는 올바로 지적했지만, ‘기술 그 자체’에 나쁜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우리에게 ‘나쁜 기술’을 부여하는 사회구조와 제도는 비판하지 않고, ‘기술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분업 비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즉 분업은 한 편으로는 ‘사유재산과 노동의 소외’를 초래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구증가에 따라 늘어나는 욕구를 효율적으로 충족할 수 있으며, 노동시간을 줄여 인간적인 삶의 활동시간을 늘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함으로써, ‘분업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이 그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북친은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에 속하는 다양한 경향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개별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생태계를 파괴하는 원천이 되는 경쟁적 시장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얼버무린다. 그들은 생태계 파괴의 원인이 마치 ‘과학’과 ‘유물론’과 ‘논리중심주의’가 인간과 자연의 거룩한 무아경지의 통일성을 파괴해 세계가 마법에서 깨어났기 때문인 것처럼 생각한다.” 북친에 따르면, 체르잔과 베이의 접근방식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회분석’보다는 ‘비이성적 쾌락주의’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라면 마땅히 기피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 이론과 실천의 절충적 결합을 사회적 아나키즘 옹호자들과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 옹호자들의 논쟁에서 어느 한 편을 들지 않는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론적 실천적 개방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적 태도가 ‘현대 아나키즘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종파주의는 아나키즘 운동을 분열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월터에 의하면 “신세대 아나키즘 이론가들은 대개 아나키즘 내부의 다양한 경향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나키즘의 다양한 측면은 다양성과 다원주의적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종파주의의 파괴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원리상의 차이’가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 내부의 이러한 차이를 아나키즘 운동의 매우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는 이론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베첼은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서로 다른 삶의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그들의 태도는 사회적 국외자인가 아니면 임금 노동자인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적 집단의 관계,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방법,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에 대한 비전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전술적 정치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심지어는 그 기반이 되는 철학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서도 그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론가들의 논쟁 중에는, 아나키즘 운동의 차별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즘 운동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되살려 장기적으로 유망한 원리로 되돌아가도록 요구하는 입장도 발견된다. 예컨대 아나코-프리미티비즘에서 아나코-조합주의자로 전향한 퍼체이스는 “광범위한 아나키즘 운동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산업노동자들의 대규모 실천을 불신하거나 기업 단위의 노동자조직 단체를 혐오하면서 오로지 자율적 환경공동체에 대해서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을 목격하고는, 아나키즘 운동의 하나의 공통적 기반을 찾아내고자 한다. 북친 계열에 속하는 뷰프도 아나키즘 진영을 떠돌아다니는 활동가들의 혼란상과 무질서에 주목하고는,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공통지반인 ‘상호부조, 비강제성, 자발적 협업, 수평적 조직, 탈중심화, 책임을 수반하는 개인의 자유’만이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모든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5. 직접행동: 실천적 아나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념이나 이론’보다는 ‘직접행동’과 ‘실천’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논문형식의 글쓰기는 무조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아나키즘을 “어떤 방식으로든 상호부조를 증진시키고,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자유주의적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실천적 활동”으로 간주한다. 그런 만큼 오늘날의 아나키즘에서 이론이 뒷자리로 물러나고 실천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론이나 추상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나키즘 저널은 그들의 활동에 대한 이론적 담론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의 실천적 활동을 보고하는데 관심이 더 많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를 아나키스트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가치 이념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직접행동’에는 DIY 미디어에서부터 이웃조직에 이르기까지, 대안적 에너지 실천부터 노숙자 무료급식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실제로 행동하는 모든 활동이 다 포함된다. 예컨대 Foot Not Bombs그룹은 혁명 이후의 먼 미래사회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상호부조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활동의 주목적으로 삼는다. 그들은 비폭력과 채식주의에 역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합의적 의사결정, 생태적 지속가능성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며, 노숙자들에게 채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그룹 활동가들에 있어 아나키즘이란 “정부에게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공동체가 직접행동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다른 아니키스트 집단은 ‘정치적 직접행동’에 역점을 둔다. 예컨대 시애틀 시위의 직접행동을 주도한 바 있는 Direct Action Network는 다양한 조직에 비폭력 직접행동을 훈련하고 지원한다. 또 다른 그룹들은 대중시위에서 거리공연과 같은 Yippie적 활동방식, 게릴라식 정원 가꾸기(초국적 거대농업기업에 대항하는 행동으로 도시지역에 꽃밭 만들기), 아나키스트 음악밴드 같은 것들을 이용한다. 거리시위에서든 도시서점에서든 이들은 정치철학이나 논쟁보다는 ‘직접행동’을 중시한다. 닐에 의하면, “귀납적 아나키즘”은 소책자나 선언문으로는 모든 인간의 꿈과 희망과 소망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다. 첫째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조직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의 직접행동을 고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아나키Anarchy는 이론가나 이데올로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현대 아나키즘에서 이론가의 역할은 필요 없는 것인가? 그루바치츠는 “아나키스트 이론가는 교사를 자처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지시를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탐구하고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아나키스트 운동도 이론이 없이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론가가 대중에게 아무런 지도적 원리도 제공하지 않고 대중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은 추수주의tailism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설사 아나키즘의 보편적 원리는 필요 없다 하더라도, 반성적 사유는 꼭 필요하다. 따라서 “지식인의 역할은 아나키스트들의 실천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필요로 하는 이론은 '고차적 이론High theory가 아니라 낮은 수준의 이론low theory이며, 운동과정에서 생기는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이론이다.

 

6. ‘새로운 아나키즘’의 근본 문제

 

현대의 아나키즘은 철학적으로 볼 때 ‘이성주의냐 반이성주의냐’, ‘기술이냐 자연이냐’, ‘이념적 교의이냐 직접행동이냐’, ‘자유냐 평등이냐’,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와 같은 해결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근본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근본문제는 아나키즘의 ‘출발점에 관한 문제’인 동시에 ‘도달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사실은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한 영원한 철학적 아포리아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활동가들에게 ‘제1원리로 돌아가라’거나, 이론가들에게 ‘실천적 직접행동에 나서라’거나 하는 어떤 시도도 아나키즘 안에 벌어져 있는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메워주지 못한다. 이러한 점이 바로 오늘날의 아나키즘이 대중들에게 주는 ‘매력’이면서 동시에 ‘절망’인 이유이다. 오늘날의 아나키즘이 대중들에게 주는 매력은 “기존의 정치철학을 넘어서 있다는 점과, 정치적이고, 실용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을 두루 포괄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아나키즘은 지난 10여 년간의 짧은 반세계화 투쟁과정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으면서도, 아나키즘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의 일천함은 아나키즘 운동의 통일성을 정립하고 유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아나키즘 운동에 적합한 핵심적 요소는 무엇인가? 가장 확실한 요소 중 하나는 어떤 유형의 아나키즘이든 아나키스트들은 “예속과 권위주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아나키즘의 근본이념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현존 사회에 예속과 권위주의적 지배가 존재하는 한 그에 맞서 끊임없이 싸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과두정치의 철의 법칙’과 ‘전문가집단과 관료주의의 야합이 초래하는 위계질서의 위협’은 아나키즘 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손톱 밑에 가시”로 남아있다. 또한 해방운동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유와 평등’을 모두 포용하는 아나키스트로 자리매김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그루바치츠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자율적 조직, 자발적 연합, 상호부조의 원리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가장 잘 보장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주의 같은 제도적 폭력에 기반을 둔 모든 사회적 관계를 거부한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은 진실로 자신만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형이상학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아나키스트 운동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이다. 즉 아나키즘 운동은 항상 ‘운동들의 운동’이다. 왜냐하면 억압의 고리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도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다. “억압은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해방이론은 이러한 다양한 원천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아나키즘의 또 하나의 새로운 특징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종합적인 패키지 이론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아나키즘은 반권위주의에 주목한 전통적 아나키즘 이념을 확장하여 ‘모든 형태의 지배’를 파악하고자 함으로써, “국가와 경제뿐만 아니라 양성 관계, 문화적 관계, 생태적 관계, 성적 관계, 추구가능한 모든 형태의 자유를 부각시키고자 하며, 이를 ‘권위주의적 관계’라는 하나의 프리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더욱 풍부하고 더욱 다양한 개념을 통해 파악해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아나키즘도 전통적 아나키즘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실천이론’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반대로, ‘직접행동’과 ‘행동을 통한 선전’은 오랫동안 아나키스트들의 핵심적 관심사였다. 이러한 관심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적, 문화적 지배나 사회적, 정치적 억압의 문제가 일단 주어지면, 아나키즘은 즉각적으로 가능한 행동과 가능한 장소와 가능한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돌진해 나아가는 유일한 전망을 제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아나키스트들이 참가하는 운동은 ‘국가권력의 장악’보다는 ‘통치기제를 드러내어 그 부당성을 밝히고 나아가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그로부터 더 큰 자율적 공간을 쟁취하는 데 역점을 둔다. 즉 아나키즘 운동은 “체제 이행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 즉 권위의 부당성을 밝히고 변혁의 전망을 촉진할 수 있는 제도, 자원, 기술, 경험의 획득과 더불어 “현존하는 제도의 대안이 존재한다”는 주장의 전파를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버에 따르면, “운동으로서의 아니키즘은 ‘조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의 결여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바로 그들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국가, 정당, 기업과 같은 ‘수직적 위계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탈-중심적이고 비-위계질서적인 합의제 민주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7. ‘아나키즘 르네상스’의 전망과 과제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21세기 현실운동의 이론과 실천에서 아나키즘이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아나키즘 사상은 전통적 아나키즘의 영역을 넘어서 다른 형태의 모든 현실운동의 영역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대안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반세계화운동에 끼치는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반세계화운동의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의 ‘새로운 대안사회’에 관한 구상은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과 수직적 위계질서에 의한 지배, 착취, 억압, 소외, 기만으로부터 개인들이 자유로운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아나키즘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이념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라는 기치 아래 아나키즘 이념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구상되고 있는 대표적인 대안사회이론으로는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parecon이론과 존 할러웨이의 ‘권력장악 없는 혁명revolutuion without taking power’이론이 있다. 물론 앨버트와 할러웨이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나키즘과의 연관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이론에 아나키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엘버트의 ‘참여경제parecon, participatory economy’ 모델은 그 명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대안사회에 대한 경제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연대성, 다양성, 평등성, 자율경영이라는 네 가지 기본가치에서 출발한다. 이 모델은 네 가지 기본가치에 입각하여 한 사회의 생산, 자원배분, 소득분배, 소비의 전 경제영역에 걸쳐 모든 사회구성원이 평등하게 수평적으로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참여적 의사결정방식’을 따르는 수평적 경제체제이다. 이 모델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장체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적 경제체제로, 그 핵심은 ‘수직적 위계질서와 조정자계급의 지배가 없는 경제체제’이다. 앨버트는 시장의 변덕에 따르는 의사결정이나 정치적 기술관료적 엘리트에 의한 의사결정을 반대하며, 그 대신 생산자와 소비자 평의회나 연합의 의사결정을 따르는 경제체제를 선호한다. 이 모델이 추구하는 기본가치는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기본가치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제도와 사회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기 때문에, 파레콘 체제는 아나키즘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앨버트는 “파레콘 모델은 개인과 사회 중 어느 하나를 우선시하는 제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회를 우선시한다’는 식으로 일면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그는 ‘미래사회는 미래 세대의 자율경영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적인 원칙을 견지하고 있으며, 반세계화운동의 전략문제에 있어서도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의 수평적 연대를 선호한다. 즉 그는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 - 환경, 인종, 여성, 반핵, 평화, 정의, 민주화, 계급, 소수자 등 - 을 하나의 조직적 위계질서로 통일하기보다는 부문운동의 ‘자율’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한 ‘경제’적 영역이 다른 영역을 지배하는 것에도 단호히 반대한다.

 

존 할러웨이의 ‘권력 장악 없는 혁명’이론은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을 추구한다. 그의 이러한 혁명이론은 기존의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의 문제점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모든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권력 장악을 통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권력은 세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원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투쟁을 이끈 지도자나 그가 속한 정당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전환된다. 둘째, 권력 장악의 논리는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논리이다. 국가권력을 투쟁 준거로 사용하는 혁명은 이전의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전의 현실로 회귀하게 된다. 셋째,국가는 투쟁을 공간적으로 제약하여 범세계적 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국가는 세계와 특정 영토의 경계를 분할하거나 제한하며, 외국인에 대한 차별정책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총체적 운동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그는 ‘권력 장악을 통한 투쟁’이 아니라, ‘자기결정권에 입각한 직접행동’을 통해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대안적 생산 활동과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그들 간의 사회적 연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자본주의체제에 작은 균열을 냄으로써 비자본주의의 영역을 점차 넓혀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틈새혁명interstitial revolution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지역 수준을 벗어난 범세계적인 투쟁’이 되어야 하며, 국가적인 ‘공간적 투쟁’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에 기초한 ‘시간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적 투쟁’이란 자본이 침투한 모든 영역에서의 단기적 투쟁이 아닌 장기간에 걸친 자본에 대한 지속적 거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체제는 국가의 틀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자본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혁명의 성공적 사례로 멕시코의 사빠띠스따 운동을 든다. 그들에게 있어 ‘혁명’은 ‘주어진 정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해되며, 혁명적 실천과 문화적 실천은 구분되지 않는다. 문화와 혁명은 ‘삶’으로 통일되어 있고,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고 통치해 나가는 과정이 곧 ‘문화적 실천’의 과정이자 ‘혁명적 실천’의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사빠띠스따 운동에는 조정자계급이 없다. ‘마르꼬스’는 단지 명목상의 부사령관이자 대변인일 뿐 민중이 모두 사령관이며, 따라서 권력은 사실상 모든 민중들에게 있다. 모든 민중들은 군인으로서 그리고 농민으로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자신들의 삶을 자율적으로 만들어간다. 사빠띠스따 운동의 실제를 반영하고 있는 할러웨이의 ‘권력 장악 없는 혁명’이론은 국가권력의 거부, 수직적 위계질서와 조정자계급의 거부, 자기결정을 통한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사빠띠스따 운동이념은 아나키즘의 직간접적 영향도 있지만, 원주민들의 전통적 합의제의사결정방식, 해방신학, 라틴아메리카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두루 반영되어 있는 그들만의 고유한 이념이다.

 

위의 두 사례에서 보듯이 21세기의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대안사회 운동에 끼치는 아나키즘의 영향력은 쉽게 확인된다. 이 외에도 최근에 세인들의 많은 주목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바 있는, 안토니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포스트구조주의자 중 한 사람인 들뢰즈 철학을 대대적으로 원용하여 주창한 ‘다중multitude’ 운동론과 ‘집단 지성’ 개념도 포스트-아나키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의 이념적 영향 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여러 자율주의운동 네트워크들도 포스트-아나키즘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반세계화자본주의운동과 대안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아나키즘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선뜻 자신들을 ‘아나키스트’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아나키즘 르네상스’는 앞에서 분석한 바 있듯이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등장한 세계화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는 범세계적인 반세계화운동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나키즘 이념의 부활은 반세계화운동을 하나의 거대한 ‘운동들의 운동’으로 묶어내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의 운동방식은 반세계화운동에 다채로운 실천적 행동방식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 운동은 세계화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동법칙과 체제의 근본모순에 대한 과학적인 객관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오로지 ‘일체의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지배로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 이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체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근본주의적 정치이념은 결국 ‘본래적 인간의 자율적 본성 혹은 본능’에 대한 모종의 믿음에 근거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신념에 기초한 운동은 윤리적, 도덕적, 휴머니즘적 성격을 지닌 운동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최근의 진화생물학의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로 서로 엇갈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결론은 미리 예단된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명제 가운데 하나인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의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여전히 유력한 명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아나키즘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정치적, 문화적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념이나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이념’으로서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현대의 아나키즘 운동이 단독적으로 존재하거나 활동하기보다는 현존하는 다양한 부문운동들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큰 매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만약 구체적인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유형의 특정한 운동들과 결합됨이 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경우에는, 오늘날의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과 활동에서 보듯이 아나키즘의 원리와 이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되며, 길을 잃고 헤매는 문자 그대로 ‘무정부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인류사 전체를 관류하면서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현실의 다양한 모순들도 모두 그러한 역사적 산물이며, 그러한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활동 또한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직면하는 모순의 원인은 다양하고 제각각일 수 있지만, 그러한 모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결여된 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아나키즘 르네상스’가 오늘날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 유의미한 이념으로 기여할 수 있으려면, 북친의 책제목처럼 ‘궁핍이 해결된 시대의 아나키즘’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특히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이 ‘21세기의 훌리건들’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려면, 19세기에 등장한 ‘고전적 아나키즘’이 초기산업자본주의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운동과 결합했듯이, 21세기의 ‘새로운 아나키즘’ 또한 세계화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해결하려는 반자본주의운동과의 재결합은 필수불가결한 과제로 판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촘스키가 ‘자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의 동반자’라고 말하면서 아나키즘을 ‘사회주의의 자유주의적 한 갈래’로 파악한 것은 의미심장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사회주의에 속하는 한 갈래’로 파악한 것은 보기에 따라서 문제의 여지가 있지만,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관계를 대립적인 적대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아나키스트’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아나키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앨버트과 할러웨이의 이론에서도 재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직접행동과 실천만이 아나키즘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이나,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정치담론의 영향 하에서 ‘정치적인 것의 상대적 독자성’을 주장하는 포스트-아나키즘 정치이론가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의 재구성’이 아니라 ‘현실의 해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발단하여 전 세계로 파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과 위기에 포스트-아나키즘 운동이 과연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대화와 두 전통의 재결합을 시도하는 ‘신세대 아나키즘’ 이론가가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미주>

 

1) 아나키즘의 상징인 깃발의 유래에 관해서는 Iain Mckey et alters, ed. The Anarchist FAQ, Version 12.2, 2008, Appendix 2: The Symbols of Anarchy 참조.

2) Leonard Williams, “The New Anarchists”, at the 2006 Annual Meeting of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August 31-September 4, 2006, 19쪽.

3) Nicolas Walter, About Anarchism, updated edition. Freedom Press, 2002, 12-3쪽.

4) Bob Black, Anarchy after Leftism, Columbia Alternative Library, 1997, 145쪽.

5) Black Bloc Interview.” In The Anarchist Papers, ed. Dimitrios Roussopoulos, Black Rose Books, 2002. 186-190쪽; Peggy Kornegger, “Anarchism: The Feminist Connection”, In Reinventing Anarchy, Again, ed. Howard J. Ehrlich, AK Press, 1996, 156-168쪽, 160-162쪽.

6) Robert D. Putnam, Bowling Alone: The Collapse and Revival of American Community, Simon & Schuster, 2000.

7) Leonard Williams, 2006, 21쪽.

8) David Graeber, “The New Anarchists”, New Left Review, no.13, 2002, 61-73쪽; Jeff Shantz, “Beyond the State: The Return to Anarchy”, disClosure: a journal of social theory, no.12, 2003, 87-103쪽.

9) 정체성 정치’란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 - 인종, 종교, 성별, 성지향성 등 - 이 지배권력에 의해 주변화되거나 차별받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하는 일련의 정치적 활동을 의미하며, 70년대 이후 주로 미국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10) Brown L. Susan, “Beyond Feminism: Anarchism and Human Freedom.” In Reinventing Anarchy, Again, ed. Howard J. Ehrlich. AK Press, 1996, 149-155쪽.

11) Leonard Williams, 2006, 21쪽.

12) Christopher Lasch, “The Disintegration of the New Left”, In Political Ideologies, ed. James A. Gould and Willis H. Truitt, Macmillan, 1973, 336-346쪽.

13) Simon Read, Everything You Ever Wanted to Know About Anarchism, but Were Afraid to Ask …, Rebel Press, 2004, 12쪽.

14) Michael Albert, “Anarchism?!”, ZNet, May 10. 2001.

15) Todd May, The Political Philosophy of Poststructuralist Anarchism,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3-4쪽, 87쪽.

16) Saul Newman, From Bakunin to Lacan: Anti-authoritarianism and The Dislocaton of Power, Lexington Books, 2001, 4-5쪽.

17) Saul Newman, 2001, 157쪽, 173-4쪽.

18)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Verso, 2nd edition, 2001.

19) Saul Newman, “The Politics of Postanarchism”, from Institute for Anarchist Studies, 2003; “Interview With Saul Newman” and “Interview With Todd May”, in Siyahi Interlocal: Journal of Postanarchist Theory, Culture and Politics, April 2005.

20) Saul Newman, 2003; Benjamin Frank, “Postanarchism: A critical assessment”, Journal of Political Ideologies, 12:2, 2007, 127-145쪽 참조.

21) The Anarchist FAQ, 2008, Appendix: The Symbols of Anarchy 참조.

22) Tom Meters ed, A Movement of moments: Is Another World Really Possible?, Verso, 2004. 참조.

23) 여기에서는 아나키즘에 관한 모든 것을 문답법으로 정리한 ????The Anarchist FAQ,????의 분류에 따라 정리할 것이다. (The Anarchist FAQ, Version 12.2, 2008, A.3.)

24) 신세대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에 따로 다를 것이다.

25) FAQ, A.3.1,

26) FAQ, A.3.2.

27) 북친과 체르잔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28) FAQ, A.3.5.

29) FAQ, A.3.6.

30) FAQ, A.3.7.

31) Peter Marshall, new edition, Demanding Impossible, Harper Perennial, 2007, 75쪽.

32) Leo Tolstoy,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Wildside Press, 2007. 242쪽.

33) 같은 책, 338쪽, 339쪽.

34) Peter Marshall, 2007, 53쪽.

35) FAQ, A.3.8.

36) “The Making of An Anarchist”, in The Voltairine de Cleyre Reader, AK Press, 2004, 107-8쪽.

37) ‘자유시장 아나키즘’으로도 불리는 아나코-자본주의는 국가의 폐지와 자유시장에서의 개인의 주권의 고양을 옹호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일종이다. 주창자인 Murray Rothbard는 사유재산을 반대하는 아나키즘과는 다른 형태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구별하기 위해 이 명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많은 비판이 있다. 가장 치밀한 비판은 FAQ, Section F 참조.

38) Albert Meltzer, Anarchism: Arguments For and Against, revised edition, AK Press, 1996, 18쪽.

39) Andrej Grubacic, “Power and Revolution: The Anarchist Century”, ZNet, May 11. 2006.

40) Todd May, The Political Philosophy of Poststructuralist Anarchism,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1-15쪽.

41) Andrej Grubacic, “A Talk on Anarchism and the Left”, ZNet, April 24. 2005.

42) Leonard Williams, 2006, 3쪽.

43) 아나키즘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는 Internet Anarchist University(http://infoshop.org/iportal/iau.php)이라 불리는 아나키즘 포털사이트를 통해 찾을 수 있다. 개별 아나키스트들이나 단체 혹은 조직의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정보는 Wikipedia의 Anarchism 항목(http://en.wikipedia.org/wiki/Anarchism)을 경유해 그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사이트와 저널 및 소식지를 추적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홈페이지에 올려두기 때문이다.

44) John Moore, “Prophets of the New World: Noam Chomsky, Murray Bookchin, and Fredy Perlman.” Social Anarchism, no. 20, 1995.

45) Nicolas Walter, About Anarchism, updated edition, Freedom Press, 2002, 32쪽.

46) Noam Chomsky, “Introduction”, In 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by Daniel Guerin, Monthly Review Press, 1970, vii-xx쪽.

47) Murray Bookchin, Post-Scarcity Anarchism, Black Rose Books, 1971.

48) Janet Biehl ed., The Murray Bookchin Reader, Cassell, 1997, 40-41쪽.

49) Bob Black, Anarchy after Leftism, Columbia Alternative Library, 1997, 76-87쪽.

50) Allan Antliff ed., only a Beginning: An Anarchist Anthology, Vancouver, Arsenal Pulp Press, 2004. 51쪽; “A Quick Guide to Anarchy for Journalists,” 5 August 1999.

51) Leonard Williams, 2006, 8쪽.

52) Antliff, 2004, 101쪽.

53) Bob Black, Anarchy after Leftism, Columbia Alternative Library, 1997.

54) 이들의 정치적 삶과 관심사에 대해서는 영국의 좌파 잡지인 ‘뉴 레프트’와 선진산업사회의 현대정치를 형성한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55) John Zerzan, Future Primitive and Other Essays, Autonomedia, 1998.

56) Geov Parrish, “The New Anarchists”, Seattle Weekly, 2-8 September, 1999.

57) John Zerzan, 1998, 16쪽.

58) John Moore, “A Primitivist Primer”, http://www.primitivism.com/primer.htm

59) John Zerzan, “Language: Origin and Meaning”, http://www.primitivism.com/language.htm

60) John Zerzan, “On the Transition: Postscript to Future Primitive”, http://www.primitivism.com/transition.htm

61) Hakim Bey, “Ontological Anarchy in a Nutshell”, Vernal Equinox, 1993.

62) Temporary Autonomous Zone

63) Bob Black, Anarchy after Leftism, Columbia Alternative Library, 1997.

64) Bob Black, “My Anarchism Problem.” http://www.spunk.org/texts/writers/black/sp001644.html

65) David Watson, Beyond Bookchin: Preface for a Future Social Ecology, Autonomedia, 1998, 240-241쪽.

66) Antliff, 2004, 64-65쪽.

67) Michael Albert, “Anarchism = Zerzan?”, http://www.zcommunications.org/znet/viewArticle/18622

68) Nicolas Walter, About Anarchism, updated edition, Freedom Press, 2002, 63쪽.

69) Tom Wetzel and Michael Albert, “About Anarchism: Tom Wetzel Interviewed by Michael Albert”, ZNet, August 29 2003.

70) Graham Purchase, “Anarcho-Syndicalism, Technology and Ecology”, Kick It Over, no.35(Summer), 1995.

71) Chaz Bufe, Listen, Anarchist!, See Sharp Press, 1998.

72) Albert Meltzer, Anarchism: Arguments For and Against, revised edition, AK Press, 1996. 61쪽.

73) Antliff, 2004, 13쪽.

74) “What Do Anarchists Do?” http://www.infoshop.org/do.html

75) ‘DIY(do it yourself) 미디어’란 자체적으로 만든 소규모의 독립미디어indimedia를 가리킨다.

76) 이 그룹은 샌 프란시스코에서 노숙자들에게 채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아나키스트 단체이다.

77) Chris Crass, “Towards a Non-Violent Society: A Position Paper on Anarchism, Social Change and Food Not Bombs,” http://www.practicalanarchy.org/fnb_crass.html

78) Direct Action Network (DAN)은 1999년 반-WTO 시애틀 시위 때 직접행동 부문은 조직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반권위주의 연합이다. 시애틀 사태 이후 미국, 캐나다, 영국으로 확대되었고 Peoples' Global Action 원칙에 기초한 통일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이 그룹은 합의제 의사결정방식을 통해 행동을 조적하며, 자율적 자매그룹의 연결망으로 구성된다.

79) Yippie는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 당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1967년 결성된 이 조직은 반전운동과 반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직접행동방식으로 거리공연과 같은 연극적 행동을 시도하는 청년운동의 ‘상징 정치symbolic politics’를 대표한다.(Todd Gitlin, The Sixties: Years of Hope, Days of Rage, 286쪽)

80) 귀납적 아나키즘inductive anarchism이란 그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Dave Neal, “Anarchism: Ideology or Methodology?”, 17 September 1997.)

81) Dave Neal, “Anarchism: Ideology or Methodology?”

82) Andrej Grubacic, “Power and Revolution: The Anarchist Century”, ZNet, May 11 2006.

83) Liz A. Highleyman, “An Introduction to Anarchism” in Howard J. Ehrlich, ed. Reinventing Anarchy, Again, AK Press, 1996.

84) ‘과두제의 철의 법칙the iron law of oligarchy’란 독일의 생디칼리스트 사회학자인 로버트 미첼스가 처음 주장한 정치이론으로, “모든 조직 형태는 - 그것이 민주주의적 조직으로 출발했든 독재적 조직으로 출발했든 간에 - 불가피하게 과두정치로 발전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1) 리더십의 기술적 불가피성, 2) 지도자의 자기조직화와 자기이익을 공고히 하려는 경향, 3) 지도자에 대한 감사, 4) 대중들의 비자발성과 수동성 때문이다. (Robert Michels, Political Parties: A Sociological Study of the Oligarchical Tendencies of Modern Democracy, Eden and Cedar Paul trans., Batoche Books, 2001.)

85) Andrej Grubacic, “Towards An Another Anarchism”, ZNet, February 7 2003.

86) Todd May, 1994, 63쪽.

87) Leonard Williams, 2006, 23쪽.

88) David Graeber, 2002, 61-73쪽.

89) Grubacic, 2002, 8쪽.

90) Howard J. Ehrlich, ed. Reinventing Anarchy, Again, AK Press, 1996.

91) Graeber, 2002, 70쪽; May, 1994, 44-66쪽.

92) Michael Albert, Parecon: Life after Capitalism, Verso, 2003.

93) 더 자세한 내용은 Michael Albert, Parecon, 89-170쪽, 261-264쪽 참조.

94) Michael Albert, 261쪽.

95) John Holloway,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The Meaning of Revolution Today, Pluto Press, 2nd edition, 2005.

96) 멕시코 치아파스 주의 원주민들은 목재, 커피, 옥수수 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지역 경제에 기반하고 있었으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취해진 멕시코 정부의 각종 조치는 이 지역공동체를 파괴했다. 생존에 위협을 느낀 농민들은 1992년과 1993년 대규모 항의 시위를 했지만 정부로부터 어떠한 반응도 얻지 못했다. 1994년 NAFTA의 발효와 동시에 시작된 원주민들의 자신들의 삶과 공동체의 자치를 위한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7) Andrew Flood, “Anarchists and the Zapatistas”, Ideas & Action, November 13 1999.

98)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 Multitude, The Penguin Press, 2004.

99) Karl Marx, “Thesen über Feuerbach”,, Marx Engels Werke, vol. 3. 1958. 6쪽.

100) 이러한 오명은 2001년 이태리에서 열린 G-8정상회담에 대한 대규모 반대시위에 참여한 아나키스트들의 행태에 대해 현지 언론이 붙인 이름이다. (“Anarchism as a Scapegoat of the 21st century: violence, anarchism and anti-globalisation protests”, thrall, issue 21, Sept-Oct. 2001.)

101)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자유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경향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Wayne Price, “Libertarian Marxism's Relation to Anarchism”, from NEFAC(North East 102) Federation of Anarchist Communists), 2005,

Staughton Lynd, Andrej Grubacic, Wobblies and Zapatistas: Conversations on Anarchism, Marxism and Radical History, PM Pres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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