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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활

[스크랩] 역대 노벨경제학상..

by 마리산인1324 2009. 6. 21.

노벨 경제학상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해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제정한 뒤 1969년부터 경제학 분야에서 뚜렷한 지적 공헌을 한 사람에게 매년 주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또는 ‘노벨 기념 경제학상’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를 받아 그의 유산을 기금으로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주는 상으로 1896년에 설정한 상금제도. 시상은 1901년부터 시작했다.

초기 물리학, 화학, 의학, 생리학, 문학, 평화의 5개 부문이 설정되었는데, 경제학상은 1969년에 새로 마련됐다. 첫 번째 경제학상 수상자는 계량경제학자인 틴 베르헨과 프리시다.

‘노벨 경제학상’은 경제학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으로, 스웨덴 중앙은행이 은행 설립 300주년 기념으로 제정했으며, 기금을 노벨재단에 기탁해 1969년부터 시상하고 있다.

시상 심사 등 절차는 노벨상 규정에 따르고 왕립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의 경제학상 심사위원회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며, 시상식도 노벨이 죽은 날인 12월 10일에 스웨덴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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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랑나르 안톤 시틸 프리슈, 얀 틴베르겐: 계량경제학 연구


Ragnar Anton Kittil Frisch(1895.3.3~1973.1.31.)

노르웨이의 경제학자·통계학자. 경제이론·실증분석 및 통계적 방법의 종합화, 수리경제학 발전에 공헌했다. 1969년 네덜란드의 J.틴베르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895년 오슬로에서 터어났다. 1931년부터 오슬로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계량경제학회(1931)의 창시자며, 1933∼1955년 기관지 《에코노메트리카 Econometrica》의 편집자로 일하며 제1회 UN 경제고용위원장에 선출되고(1947), 1955년 제1회 슘페터상을 받았다. 1969년 네덜란드의 J.틴베르겐과 함께 첫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의 업적은 경제이론·실증분석(實證分析) 및 통계적 방법의 종합화 등 여러 부문에 이르며, 특히 동태(動態)경제이론에서 정차미분방정식(定差微分方程式)을 도입해, 경제과정의 동태분석을 응용·발전시키는 등 수리경제학 발전에 공헌했다.

저서에 《경제 동학에 있어서의 파급문제와 충격문제 Propagation Problems and Impulse Problems in Dynamic Economics》,《완전회귀체계에 의한 통계적 합성분석 Statistical Confluence Analysis by Means of Complete Regression System》(1924) 등이 있다.


Jan Tinbergen(1903.4.12 헤이그~1994.6.9.)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계량경제 모델을 발전시켜 1969년 R. 프리슈와 함께 제 1회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는 동물학자 니콜라스 틴베르헨과 형제며 레이덴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29~45년 정부의 중앙통계국에서 경기순환에 대한 통계를 담당했으며, 1945~55년 중앙계획국 국장을 지냈다. 그 뒤 네덜란드 스쿨(현재는 에라스무스대학교에 흡수되었음)의 경제학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으며, 1933~73년 40년 동안 로테르담대학교에서 일했다. 그리고 1975년 은퇴하던 해까지 2년 동안 레이덴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틴베르헨은 1936~38년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의 경제자문위원을 지냈는데, 이때 그는 1919~32년의 미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분석을 마쳤다. 그의 선구적인 계량경제학적 연구는 이후 그가 더욱 발전시킨 경기순환이론이나 경제안정화정책의 실증적 근거가 되었다. 그 뒤 틴베르헨은 네덜란드 경제에 대한 계량경제 모델을 세웠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의 단기적인 계획은 물론 광범위한 정치·경제 계획의 수립에 적용되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경기순환에 관한 통계적 검증 Statistical Testing of Business Cycles〉(1938)·〈계량경제학 Econometrics〉(1942)·〈세계경제의 형성 Shaping the World Economy〉(1962)·〈소득분배 Income Distribution〉(1975) 등이 있다.



1970년-폴 새뮤얼슨: 경제이론의 과학적 분석 연구


Paul (Anthony) Samuelson(1915.5.15 미국 인디애나 게리~ .)

미국의 경제학자.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새뮤얼슨은 시카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4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부터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경제학교수로 일했으며, 여러 차례 정부의 경제고문 역할을 맡기도 했다. 뛰어난 경제이론가로 알려진 새뮤얼슨은 훌륭한 수학적 기법을 도입해 다양한 부문의 경제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경제분석의 기초 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1947)는 그의 저서 가운데 유일하게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연구서로 다른 저서에서 전개된 논리의 기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최적 행위의 보편성을 경제이론의 열쇠로 보았다. 새뮤얼슨은 레옹 발라의 일반균형이론으로부터 이어지는 경제학사상의 큰 흐름을 따라 이론을 전개하면서 그와 같은 접근법을 추구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에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실제로 새뮤얼슨은 경제체제의 역동성과 안정성, 국제무역론의 일반균형론으로의 통합, 공공재에 관한 분석, 자본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몰두하게 되었다. 특히 승수이론과 가속도원리의 상호작용에 대해 수학적 공식을 세운 것과, 소비분석에서 현시선호(顯示選好)의 이론을 전개한 것은 경제이론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명료한 산문체로 씌어진 그의 경제학 입문서는 그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더불어 공동 집필로 펴낸 선형계획(線形計劃 linear programming)에 대한 저서가 있다.


1971년-사이먼 쿠즈네츠: 국가의 경제성장에 관한 경험적 연구


Simon (Smith) Kuznets(1901.4.30(구력 4.17) 러시아 우크라이나 하리코프~1985.7.8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러시아 태생 미국의 경제학자·통계학자.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쿠즈네츠는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민 간 지 15년 뒤인 1922년 미국으로 이주했다(아버지는 성을 스미스로 바꾸었지만 젊은 쿠즈네츠는 원래의 성을 좋아했음).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2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1927년 국립경제조사국에 들어가 설립자 웨슬리 미첼과 함께 일했다. 이곳에서 쿠즈네츠는 그의 선구적 연구인 미국의 국민소득 분석과 좀더 일반적인 경제적 시계열 분석을 발전시켜, 국민경제 성장에 대한 연구의 폭을 넓혔다. 뒤에 많은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1930~54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1954~60년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1960~71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쿠즈네츠는 경제자료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대량 관찰의 중요성과 역사적 경험의 한 측면만을 근거로 하는 단순모형의 한계에 대해 역설했다. 쿠즈네츠에 따르면 정확한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자료가 인구구조, 기술, 노동의 질, 정부구조, 무역, 시장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야만 한다. 그는 특히 그가 모은 일련의 통계자료에 근거해 아무리 작은 경제성장이라도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노동과 자본의 축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장률의 순환적인 변동(지금은 '쿠즈네츠 사이클'이라고 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순환적 변동이 인구와 같은 기본요소와 관계 있음을 설명했다.


1972년-존 힉스, 케네스 애로: 경제의 일반균형이론과 후생이론에 공헌


Sir John R(ichard) Hicks(1904.4.8 잉글랜드 워릭셔 레밍턴스파~1989.5.20 글로스터셔 블록클리.)

영국의 경제학자. 일반균형이론에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 1972년 K. J. 애로와 공동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고, 196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힉스는 고전적 저작 〈가치와 자본 Value and Capital〉(1939)에서 경기순환론과 균형이론 사이의 모순을 극복했다. 이에 따르면 경제적 요인은 단순히 경기순환의 추세를 반영하기보다는 서로 균형을 향해 수렴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힉스와 애로는 경제의 능동적 요인들에 따라 서로의 효과가 상쇄될 때 균형이 달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이론은 공공 부문이나 사적 부문에 외국무역·투자정책·가격 등을 결정하는 데 널리 이용된다.

힉스는 1926~35년 런던정치경제대학, 1935~38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곤빌앤드케이어스 칼리지, 1938~46년 맨체스터대학교, 1946~52년 옥스퍼드대학교 너필드 칼리지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 뒤 20년 동안 옥스퍼드대학교 올솔스 칼리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명예교수가 됐다. 그의 전집이 1981~82년에 2권으로 출판되었다.


Kenneth J(oseph) Arrow(1921.8.23 미국 뉴욕시~ .)

미국의 경제학자. 후생경제학과 일반 균형이론의 발전에 기여했다. 1972년 존 R.힉스와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그의 이론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불가능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그는 타당한 사회적 선호관계가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특성으로서 4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 조건들을 동시에 충족하는 사회적 선호관계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애로는 1951년에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시카고대학교(1948~49)과 스탠퍼드대학교(1949~68)에서 강의했다. 1968~79년 하버드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일하면서 일류 경제이론가들을 양성했다. 1979년에 그는 스탠퍼드대학교로 돌아왔다. 주요 저작에는 〈사회적 선택과 개인적 평가 Social Choice and Individual Values〉(1951)·〈위험감수이론에 대한 에세이 Essays in the Theory of Risk Bearing〉(1971)·〈조직의 한계 The Limits of Organization〉(1974) 등이 있다. 1973년 미국 경제학회 의장이 되었다.


1973년-바실리 레온티예프: 투입-산출 분석


Wassily Leontief(1906.8.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러시아 태생 미국의 경제학자. 계량경제학 분야인 '투입-산출 분석'(input-output analysis)의 시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7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21~25년 레닌그라드대학교에서, 1925~28년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뒤 1931년 미국으로 이주해 1975년까지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특히 1948~75년 사이에는 하버드대학교 경제연구소에서 '미국 경제구조 조사사업'의 책임을 맡았다. 1975년 뉴욕대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고, 3년 뒤 그 대학의 경제분석학회 회장이 되었다. 그가 개발한 투입-산출 분석 체계는 매우 복잡한데 그 핵심은 '산업연관표'다. 이것은 여러 산업부문의 거래관계를 격자무늬의 표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각 산업부문간에 상호 원료구입 및 제품판매가 이루어지는 관계를 보여준다. 이 표에 정부·소비자·외국 부문과 기타 필요한 요소를 추가하면 한 나라 경제 내의 재화와 용역 순환에 대해 전체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투입-산출 분석은 경제계획 및 예측을 위해 50여 산업선진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레온티예프는 '선형계획'(線型計劃 linear programming)을 발전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선형계획은 경제운영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수학적 기법을 적용한 이론이다. 그는 또 미국에서는 노동보다 자본이 상대적으로 더 희소한 생산요소라고 말한 '레온티예프 역설'(Leontief Paradox)로도 잘 알려져 있다. 주요저서로는 〈미국경제의 구조 1919~1929:균형분석의 경험적 적용 The Structure of the American Economy 1919~1929 : An Empirical Application of Equilibrium Analysis〉(1941)·〈투입-산출경제학 Input-Output Economics〉(1966) 등이 있다.


1974년-군나르 뮈르달,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경제적·사회적·제도적 현상의 상호의존에 대한 선구적 분석


(Karl) Gunnar Myrdal(1898.12.6 스웨덴 구스타프스 달라르나~1987.5.17 스웨덴.)

스웨덴의 경제학자·사회학자. 1974년 F. A. 하예크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개발 도상국의 경제·사회 성장에 대한 그의 혁신적인 견해는 세계 현존하는 경제체제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다. 뮈르달은 스톡홀름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27년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4년 알바 레이머 뮈르달과 결혼했다. 1929~30년 미국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장학금을 받았으며 1930~31년에는 제네바의 국제연구소에서 부교수로 활동했다. 그 뒤 1933년부터는 스톡홀름대학교 정치경제학과장 라즈 히에르타의 제안을 받아들여 계속 그곳에서 일하다가 1967년 국제경제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1930년대 초까지 순수이론을 강조했다. 그것은 뒤에 그가 응용경제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가격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기대(期待)의 역할을 다루면서 F. H. 나이트의 연구 접근방식을 원용했다. 그 뒤 1931년 스톡홀름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거시경제학을 강의할 때에도 그 접근방식을 적용했는데, 당시의 강의내용은 그 뒤 〈화폐균형론 Monetary Equilibrium〉(1939)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사전(事前)의 또는 계획된 저축·투자와 사후의 또는 실현된 저축·투자 사이의 주요한 차이를 다루었다.

1938~40년 뮈르달은 뉴욕 카네기 재단의 초청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내 흑인들의 경제·사회 문제들을 연구해 〈미국의 딜레마:흑인문제와 현대민주주의 An American Dilemma:the Negro Problem and Modern Democracy〉(1944)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빈곤이 빈곤을 낳는다는 누적과정이론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발전경제학에 관한 그의 저서들에 주요한 기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부유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의 경제발전 격차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확대되어, 결국 부유한 나라는 규모의 경제로 이익을 누리는 반면 빈곤한 나라는 1차 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더욱 열악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뮈르달은 1947~57년 국제연합 유럽 경제위원회(ECE)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의 경제학과 사회학에 관한 연구성과들을 접합시킨 그 밖의 저서들로는 〈경제학설의 정치적 요소 The Political Element in Development of Economic Theory〉(1930, 재판 1953)·〈국내 및 국제적 불균형의 구조 Mechanism of National and International Inequality〉(1956)·〈복지국가를 넘어서:경제계획과 그 국제적 의미 Beyond the Welfare State:Economic Planning and its International Implications〉(1960) 등이 있다. 특히 〈아시아의 드라마:각국의 빈곤에 관한 연구 Asian Drama:An Inquiry into the Poverty of Nations〉(1968)에서는 10년 동안의 경제 관련 연구와 더불어 남아시아의 사회상을 대표하는 기득권 점유집단에 대한 연구를 보여주었다. 뮈르달의 저작에 대한 자료로는 헤럴드 본이 펴낸 〈군나르 뮈르달:1919~1976 저서 목록 Gunnar Myrdal:A Bibliography 1919~1976〉(1976)이 있다.


Friedrich A(ugust von) Hayek(1899.5.8 빈~1992.3.23 독일 프라이부르크 임브라이스가우.)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의 경제학자. 보수주의자로서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관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1974년에 스웨덴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G. 뮈르달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예크는 빈대학교의 식물학교수였던 아우구스트 폰 하예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빈대학교에서 법학·심리학·경제학 등을 공부했으며, 192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3~24년에 뉴욕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오스트리아 경제과학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1931년 런던으로 옮겨온 뒤 런던대학교와 런던정치경제대학에 자리를 얻었고, 1938년에는 영국 시민권을 얻었다. 1950~62년 시카고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 교수로 재직했고, 은퇴할 즈음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었으며, 잘츠부르크대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하예크의 보수주의적인 견해에 따르면 시장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개입은 인플레이션·실업·경기침체·불황 등과 같은 경제적 불안정을 불러올 뿐이다. 1944년에 그는 〈예종에의 길 The Road to Serfdom〉에서 온건한 점진적 개혁이나 정부의 개입은 궁극적으로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길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국가적인 재앙을 불가피하게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예크의 다른 저작으로는 〈물가와 생산 Prices and Production〉(1931)·〈순수자본론 The Pure Theory of Capital〉(1944)·〈자유주의 구조 The Constitution of Liberty〉(1960)·〈법, 입법, 그리고 자유 Law, Legislation, and Liberty〉(1978)·〈실업과 통화정책: 경기순환 주체로서의 정부 Unemployment and Monetary Policy : Government as Generator of the Business Cycle〉(1979) 등이 있다.


1975년-레오니드 칸토로비치, 찰링 코프만스: 최저 자원 분배론에 공헌


Leonid Vitalyevich Kantorovich(1912.1.19(구력 1.6)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1986. 4.7 소련.)

소련의 수학자·경제학자. 희소 자원의 최적 배분에 대한 연구로 타일링 코프만스와 함께 197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칸토로비치는 레닌그라드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30년 18세에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4년 레닌그라드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1960년까지 일했으며, 1971년부터는 경제계획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는 1964년 유명한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65년 레닌상을 받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1959년 출판된 〈경제 자원의 최선의 사용 The Best Use of Economic Resources〉이다. 1939년 선형계획 모형을 개발해 선구적으로 선형계획 기법을 경제계획의 수단으로 응용한 칸토로비치는 수학적 기법을 사용해 계획경제에서 자원의 상대적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경제체제에 궁극적으로 의존해 의사결정이 분산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비록 수학에 학문적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문제의 경제적 측면에 대하여 예리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서구 경제문헌에서의 잠재가격에 해당하는 해결승수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칸토로비치는 유명한 '개혁' 경제학자로서 소련의 정책을 비교조적·비판적으로 분석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Tjalling C(harles) Koopmans(1910.8.28 네덜란드 스흐라벤델~1985.2.26 미국 코네티컷 뉴헤이번.)

네덜란드 태생 미국의 경제학자. 1975년 소련의 레오니드 칸토로비치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주어진 경제적 목표를 최소비용으로 달성하기 위해 자원을 배분하는 합리적 방법을 각각 독자적으로 개발했는데, 이 방법은 ‘활동분석’으로 불린다.

위트레흐트대학교와 레이덴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1936년 레이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해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상업 선박 대표단에서 일했다. 여기에서 그는 미국의 여러 항구에서 영국의 특정한 목적지까지, 필요한 양의 상품을 최소의 비용으로 운반하는 항로를 선택하는 업무를 했다. 그는 산지에서의 원료비용과 여러 다른 항로로의 운반비용을 포함한 방정식 체계를 직접법으로 풀면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문제에서 필요한 방정식을 도출해내는 일반적인 수학모형을 고안해냈다. 그는 1944년 시카고대학교의 코웰 경제조사위원회의 연구원이 되어, 자신의 기법을 광범위한 경제문제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1955년 위원회가 예일대학교로 자리를 옮기자 코프만스도 함께 이동해 예일대학교의 경제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경제학의 현황에 관한 고찰 Three Essays on the State of Economic Science〉(1957)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경제분석의 방법론에 관한 것으로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1976년-밀턴 프리드먼: 소비 분석, 화폐 이론, 경제 안정화에 대한 연구


Milton Friedman(1912. 7. 31 뉴욕 브루클린~ .)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는 미국의 경제학자. 1946년부터 시카고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19세기 유럽에 풍미했던 자유주의를 주창했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62년 아내인 로즈 D. 프리드먼과 함께 쓴 〈자본주의와 자유 Capitalism and Freedom〉에서 그는 당시의 사회복지제도를 개인주의의 전통적인 가치에 반하는 중앙집권적·관료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부(負)의 소득세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다른 저작들로는 〈미국의 통화사 1867~1960 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1963)·〈미국과 영국의 통화추세 Monetary Trend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Kingdom〉(1981) 등 화폐이론과 관련된 것들이 다수 있다.

 

1977년-베르틸 올린, 제임스 미드: 국제무역이론에 공헌


Bertil (Gotthard) Ohlin(1899. 4. 23 스웨덴 클립판~1979. 8. 3 볼레달렌.)

스웨덴의 경제학자·정치가. 무역의 역학적 원리에 대한 근대적 이론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1977년 제임스 미드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올린은 15세 때 대학에 입학해 룬드대학교와 스톡홀름대학교의 엘리 헤크셰르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국제 무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찍부터 시작되어, 1922년에는 무역 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한 동안 옥스퍼드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하버드대학교 연구소에 있을 때는 프랭크 타우시그와 존 H. 윌리엄즈의 영향을 받았다.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924),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에 코펜하겐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30년에는 헤크셰르 교수의 후임으로 스톡홀름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이 당시 올린은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케인스와 논쟁을 벌였다. 배상금에 관한 이 논쟁은 일방적인 국제보상에 관한 근대적 이론 정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3년, 〈국내 교역과 국제 무역 Interregional and International Trade〉이라는 책을 내 올린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올린은 이 책을 쓰면서 국제무역의 토대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그의 책보다 먼저 발표된 헤크셰르 교수의 저서와 그 자신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사용했던 접근방식을 발판으로 삼았다. 오늘날 이 이론은 ‘헤크셰르-올린 이론’이라 불리며, 이 분야에 있어 표준이론이 되었다.

또 이 책은 올린이 그 뒤 정립한 ‘실질임금 보호효과’에 관한 이론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경제학의 여러 학파 중 ‘스톡홀름 학파’에 속해 있던 올린은 스톡홀름 학파의 학문적 토대를 세운 너트 윅셀의 뒤를 이어 이 학파를 이끌었는데, 이 학파에서는 주로 거시경제정책에 관한 이론들과 케인스의 경제이론을 능가하는 ‘총수요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들을 다루었다. 올린은 스웨덴의 자유당 총재(1944~67)로 일했으나, 공직에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 1938~70년에는 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4~45년에는 스웨덴 전시(戰時) 내각의 상무장관을 지냈다.


James Edward Meade(1907.6.23 영국 잉글랜드 도싯 스와니지~1995.12.22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영국의 경제학자.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경제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77년 베르틸 울린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옥스퍼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1930~31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당시 케임브리지에서는 케인스의 저서 〈화폐론 Treatise on Money〉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 책은 뒤에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1936)으로 발전되었다. 뒷날 미드의 정책이 케임브리지 학풍과 더불어 좌파적 성향을 보인 것은 아마도 케임브리지 시절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에 전시(戰時) 경제학자로 활약했으며 1946~47년에는 노동당정부의 수석경제학자로 일했다. 그 뒤 1947~57년에는 런던경제대학, 1957~68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그 뒤 1974년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전임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에는 사회민주당 자문역을 맡았다.

미드는 공공정책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입장을 견지해 1948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총소득 산출에 관한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미드의 초기 연구 주제는 국제 경제정책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 연구 성과는 〈국제경제정책론 The Theory of International Economic Policy>의 집필로 정리되었다. 이 저서는〈국제수지론 The Balance of Payments〉(1951)·〈무역과 후생 Trade and Welfare〉(1955)의 2권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국제수지론〉에서는 케인스의 요소와 신고전주의 요소를 하나의 모형에서 종합하고자 시도했다. 그 모형이란 다양한 금융·재정 정책이 국제수지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한편 제 2권 〈무역과 후생〉에서는 여러 형태의 무역정책이 경제후생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했다. 또한 무역규제의 후생효과에 대한 상세한 분석도 내놓았다. 미드의 이 같은 연구노력은 뒷날 무역차별과 효과적인 보호무역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1978년-허버트 사이먼: 경제기구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연구


Herbert Alexander Simon(1916.6.15 밀워키~ .)

미국의 사회과학자. 심리학·수학·통계학·경영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업적으로 유명하다. 1978년 이 모든 분야를 총괄하는 이론을 세워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36년 시카고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4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학교수 등을 지내다가 1949년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런대학교의 경영학·심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 뒤 같은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와 심리학 교수를 지냈다.

사이먼은 ‘행태주의’로 알려진 기업의 의사결정이론에 대한 연구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저서 〈경영행위 Administrative Behavior〉(1947)에서 그는 단일한 의사결정으로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경제 모델과 개념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전통적 접근법 대신 의사결정 과정에서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는 접근법을 제시했다. 사이먼에 따르면, 각 의사결정 단위는 가격과 생산물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 틀은 더 만족스러운 이론적 접근법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윤의 극대화를 제 1의 경제적 동기가 되는 요인으로 강조하는 전통적인 접근법과 달리, 복잡성과 위험은 최소화하면서도 이윤을 포함한 여러 경제적 변수를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획득하는 행위에 관한 개념이 핵심을 이룬다. 사이먼은 이를 통해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고려하지 않던 의사결정 과정의 심리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뒤 사이먼은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서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작업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컴퓨터·경제학·경영에 관한 저서도 여러 권 썼다.

 

1979년-시어도어 슐츠, 아서 루이스: 개발도상국의 경제과정 분석

 

Sir (William) Arthur Lewis(1915.1.23 영국령 서인도제도 세인트루시아∼1991.6.15 바베이도스 브리지타운.)

영국의 경제학자. 경제개발에 관한 연구와 교역조건에 대한 혁신적 모델을 제안한 업적으로 1979년 시어도어 W. 슐츠와 공동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가 작성한 모형은 농업 노동생산성의 상대적 차이에 따른 저개발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역조건을 다룬 것이었다. 루이스는 정부장학금으로 런던경제학대학에서 공부하고 1937년 졸업한 뒤 연구를 계속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8∼47년 런던경제학대학의 강사로 재직한 뒤 1947∼58년 맨체스터대학교의 경제학 교수, 1959∼62년 서인도제도 유니버시티칼리지의 학장, 1962∼63년 서인도제도대학의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1963∼68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그는 여러 국제위원회를 비롯해 아프리카·아시아·카리브해 등지의 여러 나라 정부에서 경제개발에 관한 고문 역할을 맡았다. 카리브 개발은행의 설립에도 참여해 1970∼73년 의장직을 맡았으며 1963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저서로는〈경제계획의 원리 The Principles of Economic Planning〉(1949)·〈경제성장론 The Theory of Economic Growth〉(1955)·〈개발계획 Development Planning〉(1966)·〈열대지방 개발 1880∼1913 Tropical Development 1880∼1913〉(1971)·〈성장과 경기변동 1870∼1913 Growth and Fluctuations 1870∼1913〉(1978) 등이 있다.


Theodore William Schultz(1902.4.30 미국 사우스다코타 알링턴 근처~1998.2.26 일리노이 에번스턴.)

미국의 경제학자. 경제발전에서 교육·재능·활력·의지 등 인적 자본의 역할에 관한 영향력 있는 연구로 1979년 W. 아서 루이스 경과 공동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27년 사우스다코타주립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슐츠는 위스콘신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존 R. 코먼스와 여타의 비정통적인 사상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30~43년 아이오와주립대학, 1943~72년 시카고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특히 1946~61년 경제학과장으로 재직했다. 경제발전에 대한 슐츠의 견해는 농업발전이 공업화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후진국 농업의 연구과정에 고전적인 경제분석을 적용하면서 인적 자본에 대한 연구에도 통상적인 의미의 자본에 적용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발전의 원천이자 빈곤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인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와 그 수익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주요저서로는 〈불안정한 경제에서의 농업 Agriculture in an Unstable Economy〉(1945)·〈교육의 경제적 가치 The Economic Value of Education〉(1963)·〈경제성 장과 농업 Economic Growth and Agriculture〉(1968)·〈인적자본에 대한 투자 Investment in Human Capital〉(1971)·〈인적 투자 Investing in People : The Economics of Population Quality〉(1981) 등이 있다.


1980년-로렌스 클라인: 경기변동에 대한 경험적 모형의 개발과 분석

 

Lawrence Robert Klein(1920.9.14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 .)

미국의 경제학자. 국가경제·지역경제·세계경제에 대한 거시 계량경제 모형을 개발한 공로로 198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2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를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폴 사무엘슨 교수 밑에서 수학했으며, 1944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4~47년 시카고대학교에서 계량경제 연구에 참여했고, 1948~50년 국립경제조사국의 고문을 지냈다. 1949~54년 미시간대학교의 연구조사 센터에서, 1954~58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통계연구소에서, 그리고 1958년부터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워턴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68년에 벤저민 프랭클린 좌(座) 경제학·재정학 교수가 되었다.

클라인은 계속되는 연구로 경제활동에 대한 보다 자세하고 복잡한 일련의 모형을 개발했는데, 워턴 모형은 국민총생산·수출·투자·소비를 예측하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그의 야심적인 노력의 결과인 링크 계획(LINK project)은 선진산업국·계획경제국·개발도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자료를 통합해 무역 및 자본의 이동을 예측하고, 정치 및 경제 정책에서 예시된 변화가 초래할 효과를 검증하는 것이다.


1981년-제임스 토빈: 경험적 거시경제 이론


James Tobin(1918.3.5 미국 일리노이 섐페인~ .)

미국의 경제학자. 투자행위에 관한 이론을 공식화하는 데 공헌했다. 그의 이론은 금융시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제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198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39, 1940년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1941~42년 워싱턴 D.C.의 물가관리국에서 경제학자로 일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해군예비대로 복역했으며 구축함 커니호의 2등 지휘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947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50년 예일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스털링좌(座) 경제학교수가 되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편 1955~61, 1964~65년 카울스 경제조사재단의 책임자로 일했다. 토빈은 위험, 포트폴리오 관리, 기초상황에 대한 금융시장의 정보전달 역할 등과 같은 문제들을 명확하게 분석해 케인스 학파의 경제분석적 유용성을 현저히 증대시켰다. 그의 저서로는 〈미국의 사업 신조 The American Business Creed〉(공저, 1961)·〈국가 경제정책 National Economic Policy〉(1966)·〈경제학 논문집 Essays in Economics〉(3권, 1971~82)·〈10년 뒤의 새로운 경제학 The New Economics One Decade Older〉(1974) 등이 있다.


1982년-조지 스티글러: 정부 통제의 경제적 효과

 

George J(oseph) Stigler(1911.1.17 미국 워싱턴 렌턴~1991.12.1 일리노이 시카고.)

미국의 경제학자. 시장행동과 정부규제의 효과에 관한 예리하고 비정통적인 연구로 198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31년 워싱턴대학교를 졸업한 뒤 1932년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38년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6~38년 아이오와주립대학, 1938~46년 미네소타대학교, 1946~47년 브라운대학교, 1947~58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활동을 하고, 1958년 시카고대학교로 옮겼다. 1963년 아메리카 연구소(American Institutions)의 찰스 R. 왈그린 공로교수가 되었으며, 1981년 명예교수가 됐다. 그 사이 1977년에는 시카고에 ‘경제와 국가 연구 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경제학에 기여한 스티글러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정보경제학에 대한 연구,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전통 이론의 정교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공적 규제가 갖는 효과에 대한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정부의 시장 규제 효과는 거의 미미한 수준일 뿐이며, 오히려 소비자의 이해와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결론지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가격이론 The Theory of Price〉(1946)·〈지식인과 시장 The Intellectual and the Market Place〉(1964)·〈경제사상사에 대한 소론 Essays i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1965)·〈시민과 국가 The Citizen and the State〉(1975)·〈설교자로서의 경제학자와 그 외 논문들 The Economist as Preacher, and Other Essays〉(1982) 등이 있다.


1983년-제라르 드브뢰: 수요·공급 이론의 수학적 증명

 

Gerald Debreu(1921.7.4 프랑스 칼레~ .)

프랑스 태생 미국의 경제학자. 중요한 경제이론을 발달시켜 198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6년 파리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드브뢰는 1950년 시카고의 코울스 경제학연구재단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1955년 재단이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의 예일대학교로 넘어가자 함께 옮겨갔다. 고전이라고 할 만한 그의 전공 논문 〈가치이론:경제적 균형에 대한 공리적 분석〉은 1959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논문에서 드브뢰는 수요·공급의 균형현상에 대한 수학적인 기초를 세웠다. 이 균형현상은 1776년 애덤 스미스에 의해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되었던 개념이다. 스미스는 이것을 이기적인 개인이 부지중에 사회에 공헌하도록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다.

드브뢰는 또한 수요·공급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분석하는 기법도 개발했다. 1962년부터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수학·경제학 교수로 일했으며 197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84년-리처드 스톤: 국민소득 회계체계 개발

 

Sir (John) Richard (Nicholas) Stone(1913.8.30 런던~1991.12.6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영국의 경제학자. 국민경제활동, 나아가 국제적 규모의 경제활동을 추적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회계모형을 발전시켜 198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물로서, ‘국민소득회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스톤은 원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영향을 받아 1935년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고, 1957년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6~40년 런던의 한 중개회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1940년 케인스의 초청으로 영국정부의 중앙통계국에 들어갔다. 제 2차 세계대전 뒤에는 1955년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신설된 응용경제학과를 담당하다가 1955~80년 P.D. 리크 교수로 금융론 및 회계학을 가르치고 1980년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78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1941년 스톤의 방법론을 적용해 최초로 영국의 국민소득과 지출에 대한 공식적인 측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보다 중대한 연구는 1950년대에 이루어졌다. 그는 최초로 투자·정부지출·소비를 측정하는 구체적인 통계양식들을 제공함으로써, 국민부기 체계의 기초를 완성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국제연합(UN)과 같은 국제 조직에까지 자신이 개발한 모형을 적용시켰다. 스톤의 저서로는 J. E. 미드와 공동 집필한 〈국민소득과 지출 National Income and Expenditure〉 (1944)을 비롯, 〈투입-산출과 국민회계 Input-Output and National Accounts〉(1961)·〈사회과학에서의 수학과 그 외 논문들 Mathemetics in the Social Sciences and Other Essays〉(1966)·〈경제의 수학적 모형들과 그 외 논문들 Mathemetical Models of the Economy and Other Essays〉(1970) 등이 있다. 또한 연재물 〈성장을 위한 계획 1962~74 A Programme for Growth 1962~74〉의 편집장 겸 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5년-프랑코 모딜리아니: 가계저축과 금융시장 분석


Franco Modigliani(1918.6.18 로마 ~ .)

이탈리아 태생 미국의 경제학자, 재정학 교육자. 가계저축과 금융시장의 동학(動學)에 대한 연구로 198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유대계 물리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원래 법률 공부를 시작했으나, 1939년 파시스트 통치 때 이탈리아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사회연구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44년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46년 미국시민으로 귀화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특히 1962년부터는 줄곧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경제학 교수로 일했다.

모딜리아니는 여러 가지 실용적인 경제이론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 성과를 올려 노벨상을 받았다. ‘생활주기 이론’으로 알려져 있는 개인저축에 관한 분석도 그 가운데 한 분야였다. 이 이론은 한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하는데, 그것은 곧 사람들이 젊었을 때 재산을 저축하는 것은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후에 자신이 소비하기 위한 준비라고 보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가 많은 사회와 반대로 노년인구가 많은 사회에서 저축률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금지급사업이 각각 장래에 어떤 효과를 불러올 것인지를 예측하는 데도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또한 금융시장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어떤 회사의 부채구조나 규모 등의 재무구조와 미래의 잠재수익이 각각 그 회사 주식의 시장가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중요한 연구를 했다. 마침내 그는 한 회사 주식의 시장가치는 1차적으로 투자가들이 그 회사에 기대하는 장래 예상 수익량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견해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가 기업의 장래 기대수익가치를 수량화하기 위해 고안한 기법은 회사의 정책결정과 재정수립을 위한 기초수단이 되었다.


1986년-제임스 뷰캐넌 주니어: 경제에서 정부 역할의 제한을 주장하는 정치이론

 

James M(cGill) Buchanan(1919.10.2 미국 테네시 머프리즈버러~ .)

미국의 경제학자·교육가. 경제적·정치적 의사결정을 분석하는 독특한 방법인 ‘공공부문의 선택이론’을 발전시켜 198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0년 미들테네시주립대학의 이학부를 졸업하고 1941년 테네시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5년간 해군에서 복무한 다음, 다시 시카고대학교에 진학해 1948년 박사학위를 받고, 1950~69년 많은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 뒤 1969~83년 버지니아 종합과학기술연구소의 경제학 교수로 일하다가, 1983년에는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시에 있는 조지메이슨대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공동으로 혹은 혼자 많은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저서로는 고든 털럭과 함께 쓴 〈동의의 산술:입헌 민주주의의 논리적 기초 The Calculus of Consent:Logical Foundations of Constitutional Democracy〉(1962)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의 자기 이해와 다른 사회적 힘, 즉 비경제적 강제에 대해 논했다. 그 밖의 저서로는 〈공공재의 수요와 공급 The Demand and Supply of Public Goods〉(1968)과, 로버트 D. 톨리슨과 함께 편집한 〈공공부문의 선택이론:경제학의 정치적 적용 Theory of Public Choice:Political Applications of Economics〉(1972), 리처드 E. 와그너와 함께 쓴 〈적자 속의 민주주의:케인스의 정치적 유산 Democracy in Deficit:The Political Legacy of Lord Keynes〉(1977), 제프리 브레넌과 함께 쓴 〈조세권 The Power to Tax〉(1980) 등이 있다. 또한 뷰캐넌은 1969년 ‘공공선택연구소’를 공동으로 설립해 소장으로 일했다.


1987년-로버트 솔로: 경제성장론에 공헌


Robert Merton Solow(1924.8.23 미국 뉴욕 브루클린~ .)

미국의 경제학자. 경제성장이론을 크게 발전시킨 공로로 198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7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석사, 195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58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61~62년 경제자문위원회에서 일한 뒤 1962~68년에는 이 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50년대에 솔로는 국민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의 상대적인 기여도를 보여주는 수리 모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전통적인 경제이론가들의 사고와는 반대로, 지속적인 성장을 달성하는 데는 자본 축적이나 노동력의 증가보다 기술 진보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기계의 발명이나 노동력의 숙련도 증진과 같은 질적인 향상으로써 효율성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것이 단순히 기계나 공장의 수를 늘리는 양적인 투자에 비해 훨씬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1960년대부터 각국 정부가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기술적인 연구개발에 보다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8년-모리스 알레: 시장이론과 자원의 효율적 이용에 공헌


Maurice Allais(1911.5.31 프랑스 파리~ .)

프랑스의 경제학자. 거대독점기업의 효율적인 가격결정과 자원배분을 제시하는 원리를 발전시켜 198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광산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알레는 1937년 국영프랑스광업공사에서 일하다가 1944년 광산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40년대부터는 경제연구를 담당하는 정부의 다양한 연구기관을 이끌었고, 197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임원이 되었다. 알레는 자신의 주요저작들, 특히 1940년대에 출판된 2편의 매우 유력한 논문에서 국영 공익사업체와 같이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독점기업의 운영에 관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이들 독점기업의 생산물이나 서비스의 가격을 결정하는 이론적 기초를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적정한 사회적 편익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설정했다. 이와 같은 원리는 국영기업의 계획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직접적인 규제보다는 가격조건에 의해 수립되도록 이끄는 역할을 했다. 이로써 알레의 이론은 거대국가독점에 효율적인 시장경제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연구는 제 2차 세계대전 뒤 수십년 동안 서유럽 경제에서 나타난 국가소유 독점기업의 성장으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1989년-트리그베 호벨모: 경제예측을 위한 통계기법 개발

 

Trygve (Magnus) Haavelmo(1911.12.13 노르웨이 셰드스모~ .)

노르웨이의 경제학자. 경기예측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으며, 1989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호벨모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웨이를 떠나 1941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논문 〈계량경제학의 확률적 접근 The Probability Approach in Econometrics〉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미 오슬로대학교에서 2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논문의 혁신적인 주제가 노벨 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1944년 미국의 정기간행물인 〈이코노메트리카 Econometrica〉에 게재되었다. 호벨모는 1947년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전까지 시카고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50년 후반에 객원교수로 시카고대학교를 다시 방문했다. 1979년 오슬로대학교의 정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호벨모의 통계기법은 경제의 한 측면에서의 변화가 다른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예측하는 계량경제학 모형을 발전시켰다. 즉 그는 통계적 확률이론이 경제학 모델들에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계량경제학 분야에 대한 호벨모의 업적으로 국민경제의 경로에 대한 예측이 쉬워졌으며, 보다 정확한 경제정책 입안이 가능해졌다.


1990년-해리 마코위츠, 머턴 밀러, 윌리엄 샤프: 금융시장과 투자의 의사결정에 관한 연구

 

Harry M. Markowitz(1927.8.24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

미국의 금융가·경제학자. 주식시장의 위험·수익을 평가하고 기업의 주식·채권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론을 내놓아 1990년 머턴 밀러, 윌리엄 샤프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마코위치는 1947년 학부를 마친 뒤 1950년 석사 학위, 1954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2~60년과 1961~63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에 있는 란드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동료 샤프를 만나 가까워졌다. 계속해서 그는 1963~68년 산타모니카 합동분석 센터, 1968~69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일했고, 1969~72년 뉴욕의 재정(裁定)관리회사, 1974~83년 뉴욕 주 요크타운힐스에 있는 아이비엠(IBM)의 T. J. 윗슨 연구 센터에서 일하다가, 1982년 뒤로는 뉴욕시립대학교의 바루치대학에서 금융론 교수로 일하고 있다. 마코위치는 자산구성이론(portfolio theory)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의 이론은 자산을 다양하게 분산 보유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위험을 극소화할 수 있는 '적정한' 자산관리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자산에 대한 위험을 측정해 자산을 분산 보유하는 그의 기법은 이제 보편적인 투자방식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밖에 경제분석 프로그램 작성을 위해 심스크립트(Simscript)라는 컴퓨터 언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Merton H(oward) Miller(1923.5.16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

미국의 경제학자. 1990년 해리 M. 마코위치, 윌리엄 F. 샤프와 공동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모딜리아니-밀러 정리로 알려져 있는 그의 연구 성과는 1985년 노벨상 수상자인 동료 프랑코 모딜리아니의 이론과 더불어 금융론 분야의 선구적인 연구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하버드대학교 출신인 밀러는 1944년 문학 학사 학위를 받고 미연방 재무부에서 일했다. 1952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1년까지 지금의 카네기멜론대학교인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에서 일했으며, 그 뒤로는 시카고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금융론 교수로 일했다.

밀러의 연구는 마코위치의 자산구성이론과 샤프의 자산가격결정모형에 기초를 두고 출발했다. 자산구성이론, 즉 포트폴리오 이론은 부(富)를 위험과 기대수익의 조건이 각기 다른 여러 형태의 자산에 가장 적절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며, 자산가격결정모형은 증권 가격이 어떻게 위험과 잠재 수익을 반영하는가를 설명한 이론이다. 이를 발전시킨 모딜리아니-밀러 정리는 기업의 자본자산구조와 배당정책 및 기업의 시장가치와 자본비용 사이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 정리에 따르면 한 제조업체의 가치는 수익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그 기업의 자본구조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기업의 투자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 그 기업에서 발행한 증권의 수익성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밀러는 기업재무 분야에서 이론적·경험적 분석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경영대학원의 R. 매코믹 공훈교수로 일하면서 시카고 상업어음거래소의 감독자로도 일했다.


William F(orsyth) Sharpe(1934.6.16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

미국의 경제학자. 1990년 해리 M. 마코위치, 머턴 H. 밀러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1961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57~61년 랜드사에서 일하면서 마코위치를 만나 그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61~68년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교, 1970년 뒤부터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투자자문회사를 세워 직접 운영했다.

샤프는 증권가격이 어떻게 위험과 잠재수익을 반영하는가를 밝히는 금융이론상의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위험자산은 보다 덜 위험한 투자의 방향으로 배분될 수 있으므로, 그의 이론은 위험자산의 시장가격형성이 어떻게 해서 위험자산과 투자자의 포트폴리오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지에 중심을 두었다. 또한 그는 합리적인 투자의 분산으로도 상쇄되지 않는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측정하기 위해 '베타'라는 척도를 도입했다. 투자분석가들은 '베타'를 이용해 어느 하나의 주식 믹스를 보유할 때와 일반적인 주식 보유의 위험을 비교한다.


1991년-로널드 코스: 법률 연구에 경제원칙 적용


Ronald H. Coase(1910.12.29~ )

영국의 경제학자. '거래비용'개념의 도입, 시장실패가 발생해도 정부개입이 불필요하다는 '코스정리' 이론 등으로 199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10년 12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학업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 뒤, 1964부터 시카고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1964~1982년《법률·경제저널 Journal of Law & Economics》의 편집장을 지냈다.

코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7년 한 논문에서 '기업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부터다. 그는 이때부터 '거래비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기업의 존재를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거래비용은 계약을 맺기 이전 단계에 드는 정보수집 비용, 계약작성 비용, 계약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데 드는 비용, 계약 위반에 대한 벌칙 집행 비용 등 거래 행위에 관계되는 모든 비용을 말한다.

코스는 1960년 다시 《The Problem of Social Cost》라는 논문에서 시장실패가 발생할 경우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는 전통 후생경제학의 명제를 뒤바꿔 놓은, 이른바 '코스 정리'라는 이론을 내놓는다. 즉 당시까지의 경제분석은 제도의 틀 안에서 경제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반해 코스는 미시경제론을 통해 경제제도의 구조를 설명하는 원칙을 구체화해 시장 실패가 발생하더라도 당사자들 사이의 자발적 협상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정부의 개입이 불필요하다는 이론을 내놓은 것이다.

나아가 개인들 사이의 협상 결과가 어찌되었든 국민소득의 가치나 구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거래비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했다. 이 거래비용 개념과 재산권에 대한 분석 등으로 정부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러한 코스의 연구방법을 추종하는 학파까지 생겨났는데, 이 학파를 일컬어 ‘신제도학파’라고 한다.

코스는 경제의 제도적 구조와 기능을 위한 거래비용, 재산권의 중요성을 밝힌 공로로 199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논문에는 《회사의 본질 The Nature of the Firm》이 있으며, 저서에는 《영국의 방송:독점에 관한 연구 British Broadcasting:A Study in Monopoly》가 있다.


1992년-게리 베커: 사회학에 경제이론 적용


Gary S. Becker(1931~.)

미국의 경제학자. 미시경제의 분석영역을 폭넓은 인간행동과 상호작용에까지 확대한 공로로 199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베커는 1954년 처음 강단에 선 뒤 1957~69년에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그 뒤부터 현재까지는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경제학의 분석영역을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인간행위 등에까지 확대시켜 결혼·자살·이혼·인종차별·출산·자녀교육과 여성의 사회참여, 종교·범죄행위 등 많은 사회문제를 경제학적 시각으로 밝히고자 했다.

1964년에 출판된 대표적 저서인 〈인간자본 Human Capital〉에서 그는 인간을 자본으로 규정하고 인간자본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정과 국가가 교육·훈련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자본의 질을 결정하는 데는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성실성·근면성·정직성·성취욕구 등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강조했다. 베커는 인간이 효용극대화를 추구해 행동하는 합리적인 존재라는 평범한 가정을 이론적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시카고학파의 명제를 그의 경제학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베커의 주요논문에는 〈차별화의 경제학〉(1957)·〈시간할당의 이론〉(1965)·〈범죄와 형벌〉(1968)·〈가족행위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1976년)·〈가족관계론〉(1981) 등이 있다.

 

1993년-로버트 포겔, 더글러스 노스: 경제사에 공헌

 

Robert Fogel(1926~ )

미국의 경제학자. 시카고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미국경제 발전과정에서 철도와 노예제도가 어떤 공헌을 했는가를 새롭게 조명한 공로로 1993년 D.노스와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하버드대학교 인구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경제문제 연구는 방법이 중요하며 통계자료에 따라 검증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노예제도가 비인간적 생산방법이기는 하나 당시 상황에서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결정에 따라 노예제도가 붕괴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으나 학자로서 통계자료에 의한 객관적 연구결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저서에 《철도와 미국의 경제성장》, 《계량경제사의 연구》(1971), 연구 논문에 〈연방토지정책의 효율성 연구〉 등이 있다.


Douglas North(1920.11.5~ )

1920년 11월 5일 매사추세츠주(州)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 때 워싱턴대학교 시애틀캠퍼스의 교수로 있다가 1983년부터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캠퍼스 교수로 일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발전을 분석하면서 인구나 기술의 변화 못지않게 제도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경제사 연구에 신제도학파의 거래비용 개념을 도입했다. 그에 의하면 경제발전은 경제제도의 진화로 이룩되는데 경제제도의 진화는 거래 주체들의 거래비용을 감소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경제제도의 발전을 이해하려면 경제요인 이 외에 이데올로기 등 정치·사회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제도는 사회 여러 그룹들이 그들의 이익증대를 예견할 때 생겨나고 기존제도는 이 발생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는 경제사학에서도 다른 경제학 분야와 같이 계량적 방법론의 도입에 공헌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시카고대학의 R.포겔 교수와 함께 ‘경제이론과 계량적 방법을 통해 구조적·제도적 변화와 상호작용이 경제현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설명함으로써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93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그의 저서인 《제도·제도변화와 경제적 성취》(1990)에서 국가 간 빈부의 원인을 분석해 화제를 일으켰고, 그 밖에 《미국의 경제성장》(1961), 《제도적 변화와 미국의 경제성장》(1971), 《서방세계의 번영: 신경제사》(1973), 《경제사에서의 제도와 변화》(1981) 등이 있다.


1994년-라인하르트 젤텐, 존 포브스 내시, 존 하사니: 게임 이론 개발

 

John F. Nash(1928.6.13~ )

1920년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1994년 J. 하사니, R. 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내시는 기업체간의 상호작용과 시장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체스나 포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적용되는 전략에 초점을 두고 연구해 ‘내시균형’이라는 개념을 세웠다.

게임에서 각 경기자들이 어떤 특정한 전략을 선택해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경기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경우를 ‘균형’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중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해서만 최적인 전략을 찾아내서 균형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 즉 ‘내시균형’은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한 본인의 최적전략이라는 성격을 띤다.


Reinhard Selten(1930.10.10~ )

1930년 10월 10일 브로츠와프(독일어로는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1961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뒤 본대학교로 옮겨 일했다. 현대의 시장분석과 기업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나 군사전략에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게임이론에 대한 학문적 공헌으로 J. 하사니, J. 내시와 함께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체스 등 일반적 게임이론에서 사용되는 전략을 써 기업간의 상호행동과 시장동향을 예측하는 게임이론을 체계화한 것이다.

내시가 상대방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게임참가자 또는 기업가가 자신들의 전략을 선택하는 공식을 상호간 정보교류를 전제로 한 '협조적 게임(담합)'과 정보교류가 없는 '비협조적 게임(경쟁)'으로 구분한 것에 대해 젤텐은 내시의 균형개념에 다양한 주체를 역동적으로 참여시키고 행동양태를 비교·분석해 균형이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고 특히 비협조적 게임이론을 심화시켰다. 게임이론은 경제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환경분야·국제무역·사회복지문제연구 등 사회 전반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최신의 최적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John Charles Harsanyi(1920.5.29~2000.8.9.)

192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950년 공산주의 독재를 피해 오스트리아에 정착했다. 그 뒤 미국으로 이주, 웨인주립대학교에서 3년 동안 경제학과 교수로 일했다. 그 뒤 1964년부터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경영경제학 교수로 일했다. 1960년대 미군축기관의 자문을 맡아 군축협상 대처방안에 대한 모델을 개발하는 데 게임이론을 응용했다.

R. 젤텐과 18년 동안 공동연구를 한 끝에 1988년 《게임에서의 균형선택에 관한 일반이론》을 냈다. 게임이론의 연구 및 개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 젤텐, 내시와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1995년-로버트 루카스 주니어: '합리적 기대 가설'을 발전·적용


1995년, 시카고대학교는 재직 중인 저명교수 명단에 또 하나의 노벨상 수상자 이름을 추가했다. 이로써 시카고대학교 교수진은 최근 6년간 5번에 걸쳐 노벨상 수상자를 내게 되었는데, 그 5번째 수상자는 로버트 에머슨 루커스 2세(Robert Emerson Lucas, Jr.)로서 그는 '합리적 기대 가설'을 발전·적용한 공로로 199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30년대의 대공황 이래 미국 정부는 경제의 방향을 수정하고 싶을 때마다 세율이나 금리를 조정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의 불경기 때 금리를 낮추고 산업투자를 늘린 것은, 실업률과 지나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루커스는 간단한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가 빚어진 까닭을 설명했다. 상업과 산업, 노동자와 소비자들이 워낙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몇 번이고 거듭해서 조종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부의 경제운용정책을 미리 예측할 줄 알게 되고, 그 '합리적 기대'를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방침을 조정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세율이 내려가서 수익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 기업들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 더 높은 임금을 주었기 때문에, 불경기 때 정부는 세율을 낮추었다. 정부의 경제관리들은 이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인플레이션은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정부의 전략이 빗나갔다. 노동자들은 올라가는 물가를 상쇄하기 위해 훨씬 높은 임금을 요구했고, 이것이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급상승시키는 원인이 된 것이다.

정부의 경제관리들은 〈합리적 기대와 계량경제학의 실제 Rational Expectations and Econometric Practice〉(1981;동료 교수인 토머스 사전트와 공저)와 〈경기순환이론 연구 Studies in Business-Cycle Theory〉(1981) 같은 루커스의 저서에 관심을 가지긴 했으나 1980년대에도 여전히 낡은 모델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스웨덴왕립과학아카데미는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1995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루커스가 합리적 기대 가설을 발전시키고 적용함으로써 "거시경제학적 분석을 변화시키고 경제정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깊게 했다"고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거시경제학은 경제의 여러 부문이 어떤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가와 관련해 하나의 경제체제를 전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스웨덴왕립과학아카데미에 따르면 '합리적 기대'는 "거시경제학의 연장 상자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표준부품"이었다. 루커스의 이론은 세계 정부의 정책입안자들이 경제전략을 논의하고 개발하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루커스는 1937년 9월 15일 워싱턴 주 얘키모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카고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학위(1959)와 경제학 박사학위(1964)를 받았는데 1976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였다.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친(1963~74) 뒤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루커스의 후기 저서들(일부는 동료 교수들과 공저)은 거시경제학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1996년-제임스 멀리스, 윌리엄 비크리: 정보가 불균형한 상태에서의 경제적 인센티브에 대한 이론


노벨상 수상은 거액의 상금(1996년에는 각 부문에 112만 달러) 이상의 것을 가져다 준다. 당장 국제적 명성을 얻을 뿐 아니라, 학계의 좁은 울타리 밖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연구가 하루 아침에 널리 알려진다. 대개 새벽에 전화로 수상 사실을 통보받는 수상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언론 매체의 중압감에 눈뜨게 될지도 모른다. 캐나다 태생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윌리엄 비크리(William S. Vickrey)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비크리는 스코틀랜드 태생으로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제임스 멀리스(James Alexander Mirrlees)와 함께 1996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비크리는 상을 받은 지 불과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알려진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전례 없는 활동과 그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언론의 성화 때문에 심신이 혹사당한 탓으로 추측되었다. 이 두 경제학자가 수상자로 선정된 데에는, 정보가 불완전하거나 불균형한 상황에서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것이 높이 평가되었다.

두 사람이 연구한 미시경제학 분야는 도박꾼이 상대에게 정보를 알려주거나 숨김으로써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학 분야인 게임 이론과 관련되어 있다. 비크리와 멀리스는 불완전한 정보가 예기치 않은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들을 해명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효율적이고 공평한 누진세 제도를 시행하고 싶은 정부는, 소득이 많아지더라도 세금이 늘어나면 노동자의 근로 의욕이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생산성을 저하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 '바람직한 소득세' 문제는 '도덕적 해이' 문제와 비슷하다. 보험증서가 보장하는 보상 범위가 너무 크면 보험 계약자가 통상적인 위험보다 더 큰 위험을 고의적으로 무릅쓸 수 있는데, 이에 따른 보험사의 위험 부담이 '도덕적 해이'의 전형적인 예다. 모든 당사자가 같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고전경제학 모델들은 인센티브나 그와 비슷한 변수들을 방정식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윌리엄 스펜서 비크리는 1914년 6월 21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빅토리아에서 태어나 1935년 미국의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1937, 1947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각각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은 뒤, 평생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인간의 행복한 생활에 관심이 많아서, 실용적인 연구과제를 자주 선택했다. 그는 교통혼잡 해소방안을 연구해, 가장 혼잡한 시간에는 통근열차의 운임과 유료도로의 통행료를 올려서 이용자 수에 따라 운임과 통행료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시간별 요금체계는 오늘날 전기회사와 전화회사들이 널리 시행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제안으로 그는 세계 도시계획자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의 새로운 착상이 당장 채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논문 〈투기억제, 경매, 경쟁 봉인 입찰 Counterspeculation, Auctions, and Competitive Sealed Tenders〉 (1961)에서 '비크리 경매'라고 부르게 된 방식을 제안했다. 이 방법은 봉인 입찰로 가장 많은 가격을 적어낸 사람이 경매물건을 차지하되, 그 물건의 낙찰가격은 두 번째로 많은 가격을 매긴 사람이 적어낸 액수가 된다. 따라서 입찰자들은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제시해 자신이 인식한 가치보다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남에게 빼앗길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그 물건의 합당한 가격으로 여겨지는 액수를 제시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므로 낙찰자에게 그의 입찰가보다 더 낮은 가격을 보장하는 것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고 비크리는 주장했다.

제임스 알렉산더 멀리스는 1936년 7월 5일 영국 스코틀랜드 미니개프에서 태어나 1957년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3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9~95년 옥스퍼드대학교, 그 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정밀하고 기술적인 그의 수학적 기량은 비크리의 이론적 창의성을 보완했고, 1970년대에 발표된 그의 혁신적 모델과 방정식들은 비크리의 책에서 자주 다루어진 '바람직한 소득세'와 '도덕적 해이' 문제를 명확히 설명해주었다. 멀리스의 방법론은 정보의 불균형을 다루는 경제학에서 표준적인 규범이 되었고, 후배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에 그것을 응용했다.

 

1997년-로버트 머턴, 마이런 숄즈: 주식 옵션과 다른 파생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방안 제시


노벨 경제학상은 대체로 실용적인 가치보다는 공론에 치우친 무미건조한 학술적 개념을 정립한 학자에게 수여되기 마련이라는 통념이 1997년에는 들어맞지 않았다. 수상자인 미국의 로버트 C. 머턴(Robert C. Merton)과 캐나다 태생인 마이런 새뮤얼 숄스(Myron Samuel Scholes)는 자신들이 정립한 개념을 활용할 방도를 찾았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수익까지 얻었다. 이 두 사람은 주식 옵션(투자자 또는 매매업자에게 장래 확정된 시기에 자산을 사들이거나 팔 권리를 부여하는 취득계약) 및 다른 파생물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에 해답을 마련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데, 그 해답이 지난 20년 동안 세계 경제의 시장 성장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들은 확정리부증권(確定利附證券)과 그 파생상품을 주요 투자대상으로 삼는 60억 달러 상당의 회사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사의 대표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돈을 투자하기도 했다. 머턴은 그 회사의 공동설립자였다.

숄스가 경제학 분야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공식 때문인데, 피셔 블랙과 공동으로 만든 블랙-숄스 옵션 평가공식이 그것으로, 블랙은 1995년 사망한 탓에 노벨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노벨상은 사후에는 수여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출판업자를 찾는 데 약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숄스와 블랙은 1973년 〈저널 오브 폴리티컬 이코노미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지에 획기적인 공식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주식 옵션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투자자들은 재정 손실을 예방하기 위한 위험부담금을 대략 추산할 수는 있었지만, 정확하게 예측할 수단은 없었다.

수학적으로 복잡하기는 했어도 블랙-숄스 공식은 비교적 간단한 일련의 변수 즉 현재의 주식가격, 미래의 옵션 계약부가격, 만기일, 완료일, 그리고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무결손 투자이율 등에 기초한 것이었다. 위험부담금이 이미 주식가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주식 옵션 투자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그 공식은 금융파생상품 시장 고유의 높은 위험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공식의 의미는 옵션의 가격이 재무부 증권 같은 여타의 무결손 투자를 반영할 수 있도록 보험이나 연계매매 장치의 한 형태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공식을 응용한 결과 옵션 및 다른 파생상품의 거래가 투자자에게 더욱 매력적인 투자대상이 됨으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랙-숄스 공식은 전 세계 매매업자들에게 주식 옵션 평가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중반이 되자 시카고증권옵션거래소의 매매업자들은 휴대용 계산기로 즉석에서 옵션 가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머턴은 블랙-숄스 공식에 의거해 자신의 수학 지식을 활용해 무배당 주식을 상정하는 등의 몇몇 제한이 완화될 수 있는 것임을 입증했다. 그는 공식에 변화를 주어 주택 저당이라든가 학생 대부 등 옵션 이외의 다른 경제적 문제들과 일반적인 위험관리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숄스는 1941년 1월 7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티민스에서 태어나 온타리오 주 해밀턴에 있는 맥매스터대학교(1961년 문학사)를 다녔고, 시카고대학교(1964년 경영학 석사, 1970년 경영학 박사)에서 노벨상 수상자인 머턴 H. 밀러에게서 배웠다. 숄스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 1968~73)과 시카고대학교(1973~ 83)에서 교편을 잡은 뒤 스탠퍼드대학교의 법학 및 재정학 교수가 되었다.

머턴은 1944년 7월 31일 미국 뉴욕시티에서 저명한 사회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학교(1966년 이학사)에서 공업수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공과대학(1967년 이학석사)에서는 수학에, MIT(1970년 박사)에서는 경제학에 전념했다. 그는 1970년부터 MIT의 슬론경영대학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88년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로 취임했다. 몇몇 경제 전문지와 상호기금회사의 이사이기도 한 머턴은 저서 〈시연속 재정학 Continuous-Time Finance〉(1990)을 비롯해서 기업재정에 관한 경제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1998년-아마르티아 센: 복지경제학과 사회적 선택에 대한 연구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빈곤 문제에 관심을 두고 후생경제학과 사회적 선택 문제에 기여한 공로로 1998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센은 기아의 원인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학자로서, 실제로 존재하거나 예상되는 식량 부족의 결과를 예방 혹은 제한하기 위한 실제적 해결책을 개발하는 데 앞장 섰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센의 연구가 "중요한 경제적 문제들에 관한 논의에서 윤리적 차원을 복원시켰다"고 평가했다. 노벨상위원회는 경제학의 사회적 토대에 관한 그의 연구를 높이 평가해, 주로 시장경제 분야를 연구하는 보수적인 학자들에게 주던 지난 몇 년간의 전통을 깨고 그에게 노벨상을 수여했다.

후생경제학은 경제 정책을 공동체의 복지에 미치는 효과의 측면에서 평가하려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이 문제에 평생을 바친 센은 '경제학자의 양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영향력 있는 논문 〈집단적 선택과 사회복지 Collective Choice and Social Welfare〉(1970)는 개인의 권리, 다수의 지배, 개인적 상황에 관한 정보 획득 등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여기에서 자극받아 기본적 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센이 개발한 빈곤의 정도를 측정하는 빈곤지수는 빈곤층의 경제적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유용한 정보를 산출해냈다. 그는 불평등에 관한 이론적 연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태어나고 유아 사망률도 더 낮은 일부 빈곤한 나라에서 여성의 수가 남성보다 오히려 더 적은 이유를 남자아이들의 보건 위생 상태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센이 기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개인적 경험 때문이다. 9세 때인 1943년 그는 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벵골 대기근을 목격했다. 그는 당시에 인도에 식량이 충분히 있었더라면 그처럼 엄청난 인명 손실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인도의 농촌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 식량을 구입할 능력이 없었고 그 때문에 식량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센은 〈빈곤과 기아 : 자격과 박탈에 관한 에세이 Poverty and Famines : An Essay on Entitlement and Deprivation〉(1981)라는 저서에서 많은 경우 기아가 발생한 때에도 식량 공급량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센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식량 공급량의 감소보다는 임금 감소, 실업, 식량 가격 상승, 식량 배급 체계 미비 등의 수많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회 내 특정 집단의 기아를 유발시켰다.

식량 위기 문제를 다루는 각국 정부와 국제 단체들은 센의 연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에 따라 정책 입안자들은 당면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방법만이 아니라, 공공사업 추진이나 식량 가격의 안정으로 빈곤층의 소득 감소를 보전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정치적 자유를 굳게 신봉하는 센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는 곳에서는 지도층이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에 기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공중보건의 개선과 같은 사회 개혁이 경제 개혁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센은 1933년 11월 3일 인도 벵골의 산티니케탄에서 태어나 캘커타의 프레지던시대학을 다녔다. 그 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학사학위(1955)와 석사학위(1959), 박사학위(1959)를 받았다.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동안 그는 애덤 스미스 상(1954), 렌베리 장학금(1955), 스티븐슨상(1956)을 받았다. 그는 인도와 영국의 많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는데, 인도의 자다브푸르대학교(1956∼58)와 델리대학교(1963∼71), 영국 런던대학교의 런던 경제학대학(1971∼77), 옥스퍼드대학교(1977∼78)에서 교편을 잡다. 미국 하버드대학교(1988∼98)로 옮겨 경제학과 철학 교수로 일했다. 그 뒤 1998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가 되어 지금에 이른다. 센은 인도인으로서는 여섯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첫 경제학상 수상자다.



1999년-로버트 먼델: 서로 다른 환율체제하의 통화ㆍ재정 정책과 최적통화지역 분석

 

노벨 경제학상은 수상자의 연구성과를 국제적으로 인정해 준다. 그 연구성과는 이전에 널리 받아들여진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통화동태론과 최적통화지역에 관한 연구로 1999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출신의 로버트 알렉산더 먼델(Robert Alexander Mundell)은 국제통화경제학 부문에서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각 국마다 고정환율제와 변동환율제 등 환율체계가 다른 상황에서 정부 정책이 국제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으며, 바람직한 통화정책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개방 경제를 위한 거시경제학 이론의 방향을 전환시켰으며, 이 분야에 대한 국제적 연구를 고취시켰다.

먼델이 환율과 환율이 통화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거시경제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조사부(1961~63)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노동과 통상이 자유로운 경제지역, 즉 최적통화지역에서는 단일통화가 성립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단일통화의 장점은 통상에 드는 거래 비용을 줄이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2개국 이상이 단일통화를 사용할 경우 불리한 점은 수요가 하락한 지역에서도 일정한 고용과 임금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먼델의 초기 연구는 캐나다가 미국 달러화에 대해 고정환율제를 실시해야 하는가, 변동환율제를 실시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자체 통화를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먼델의 연구는 정통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변동환율제가 시장의 힘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연구한 경제학자였다.

이전까지는 경제학자들이 주로 국내 경제에 입각한 이론 모델만을 전개했다. 그 경향은 특히 미국의 경제학자들에게 해당되었는데, 미국 국내 시장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먼델은 이러한 초기의 폐쇄적 경제 모델에 대외무역과 자본이동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국제적 자본 이동성의 정도에 의해 정책의 안정성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규명했다. 그의 결론은, 자본시장에서 한 나라의 환율은 그 국민이 자체 통화를 소유하려는 의지와 욕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같은 의지와 욕구는 그 국민이 자국 경제의 전망, 인플레이션, 통화 정책 등에 대해 얼마나 인지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먼델의 주창 뒤 30년 이상 연구가 진행된 결과, 먼델의 이론은 실제 적용을 통해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그의 이론은 1999년 1월 1일 유럽 연합(EU) 15개 회원국 가운데 11개국이 단일통화인 유로(Euro)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유럽이 먼델의 정의에 따른 최적통화지역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유로화의 도입은 아직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기업과 국가가 경제적 생존과 경쟁성 확보를 위해 세계화를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했고, 환율의 불안정성이 세계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라고 간주했다. 먼델이 증명한 바에 따르면, 중앙은행이 한 나라의 통화공급량을 통제하는 통화정책은 고정환율제를 취하는 경제, 즉 중앙은행이 통화시장에 개입할 권한을 가지지 못하는 경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변동환율제를 취하는 경제에 자극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경을 넘어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허용하는 것이다.

먼델은 1932년 10월 24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킹스턴에서 태어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1953년 학사), 워싱턴대학교(1954년 석사), 런던경제학대학과 매사추세츠공과대학(1956년 박사) 등에서 공부했다. 그 뒤 그는 시카고대학교 정치경제학 연구원(1956~57)으로 일했고 나중에는 경제학과 교수(1966~71)를 지냈으며 〈저널 오브 폴리티컬 이코노미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 밖에 그가 맡았던 학술적 직책으로는 제네바 국제관계대학원연구소의 여름학기 교수(1965~75) 등이 있다. 1974년부터 그는 뉴욕시티의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여러 국제기구에서 중책을 수행했고, 몇몇 정부의 경제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먼델은 〈인간과 경제학 Man and Economics〉(1968), 〈통화이론: 개방경제하에서의 이자, 물가, 성장 Monetary Theory: Interest, Inflation and Growth in the World Economy〉(1971) 등을 비롯해 많은 저서와 논문을 썼다.

먼델은 구겐하임상(1971), 자크 뢰프상(1983) 등을 받았고 파리대학교 명예박사학위(1992)를 받았다. 1998년 9월 그는 올린(무역의 역학적 원리에 관한 근대적 이론을 세워 197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경제학자로 ‘헤크셰르-올린 이론’의 창시자) 이론에 관한 강연을 했으며, 그 뒤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2000년-제임스 헤크먼, 대니얼 맥패든: 개인 및 가계의 행위선택에 관한 통계분석기법 개발


James J. Heckman(1944.4.19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

미국 경제학자. 헤크먼은 미시적인 데이터에 대한 통계적 분석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공로로 대니얼 L. 맥퍼든과 노벨 경제학상(2000)을 함께 받았다.

개인에게 작업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는 무엇이며 개인의 작업시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경제적 동기는 교육과 직업, 거주지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육수준이 임금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개인 및 가계의 행동에 관한 미시적인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임금분석, 교통·통신체계 발전, 경제·사회정책 입안은 물론 경제학의 경계를 넘어 사회과학 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칠 것이다. 헤크먼은 이러한 미시적인 데이터에 대한 통계적 분석의 가능성을 현실화시켜 미시계량경제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경제학과 통계학의 접점에 자리한 미시계량경제학은 개인·가계·기업이 속해 있는 수많은 집단에 대한 경제학적 정보인 미시적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고성능 컴퓨터가 등장함에 따라 미시적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높아졌고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갖는 중요성은 이러한 통계분석 기법을 노동경제학에 응용해 개인의 노동참여와 노동공급의 의사결정에 대한 선택이론 모형을 구축한 데 있다. 이것은 이를 테면 1년 동안의 교육이 임금에 미치는 영향, 교육수준과 나이라는 조건이 주어졌을 경우 남자와 여자의 임금 차이 등의 까다로운 문제들을 분석해내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로써 미시경제학과 사회과학이 풀지 못한 난제 가운데 하나인 개개인의 경제활동 방향과 경제적 영향을 분석해내기까지 일관된 그의 화두(話頭)는 분석도구와 실증의 결합이었다. 이로써 그는 세금이 노동공급과 자본축적에 미치는 영향, 공공직업훈련과 기업의 직업훈련이 임금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 개발도상국에서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 민권운동과 '사회적 약자 보호법'(Affirmative action)이 미국에 미친 영향 등을 분석하는 것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다. 정부가 국민의 노동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감세정책을 수립할 때 취업자들의 임금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실직자들이 원하는 적정 임금수준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방법론에 바탕한 것이었다.

헤크먼은 194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1965년 콜로라도대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학부 전공은 수학이었는데 이는 뒷날 그가 복잡한 통계자료들을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1968)와 박사학위(1971)를 받았으며 컬럼비아대학교 조교수(1970~73)·부교수(1973~74),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부교수(1973~77), 랜드사 자문역(1975~76)을 거쳐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1977~) 및 사회정책평가센터 소장(1991~)으로 일하고 있으며 1990년에는 예일대학교에서 통계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Daniel L. McFadden(1937.7.29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롤리~ .)

미국 경제학자. 엇비슷한 여러 가지 상품들 가운데 특정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같은 개인의 선택 문제를 통계학적 방법으로 분석한 선택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선택이론은 여행·이민·대학입학에서부터 주거지·내구재 선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주거지 선택이론의 경우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의 고속통근철도(BART) 설계와 전화 서비스, 노인용 주택에 대한 투자에 응용되었다. 경제 주체들의 심리와 행동을 반영한 이른바 '맥퍼든 생산함수'도 그가 고안해낸 것이다. '다른 경제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분석도구를 만드는 디자이너'로 자칭하는 맥퍼든은 이러한 개인 및 가계의 행위와 관련해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통계적 분석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30년 지기인 제임스 헤크먼과 노벨 경제학상(2000)을 함께 받았다.

맥퍼든은 193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의 한 목장에서 태어났다. 6세가 될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외딴 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1957년 미네소타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우주선연구실에 들어가 지구대기 바깥의 광원에서 나오는 X선을 검출·분해하기 위해 고안된 X선 망원경의 구성과 제작에 참여하고 연구를 병행하면서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인간 행위의 분석으로 점차 이동해 갔다. 마침 미네소타대학교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행동과학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은 사회학·사회인류학·문화인류학·심리학·생태학·경제학·지리학·법학·정신병리학·정치학 등을 아우르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였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해 인간행동의 일반 원리를 탐구한 그는 인간의 학습과 선택에 대한 흥미로운 수학적 모형을 만들어나갔다. 그 뒤 1962년 경제학 분야의 행동과학 연구로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피츠버그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1962~63)를 거쳐 1963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경제학과 조교수(1963~66)·부교수(1966~68)·교수(1968~79), 예일대학교 어빙 피셔 연구소 교수(1977~78),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통계학센터 소장(1986~88)으로 일했으며 1990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로 돌아와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다. 미국 경제학회가 40대 이하의 경제학자에게 수여하는 '예비 노벨경제학상'이라 불리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1975)을 비롯한 많은 상을 받았다.

잠재적인 다양한 모델과 선택이론 및 그 적용, 대규모 표본 계량경제학, 표본이론, 상품이론, 소비자이론 등을 연구해온 그의 현재 연구과제는 노인경제학, 저축행위·주거이동· 건강·사망등과 사망률의 동력학, 심리측정을 이용한 소비자 수요 분석, 계량경제학의 시뮬레이션 방법 등을 아우르고 있다.


2001년-조지 애컬로프, 마이클 스펜스, 조셉 스티글리츠: 시장 참여자들의 불균등한 정보 소유가 시장에 끼치는 영향 분석


George A. Akerlof(1940.6.17 미국 코네티컷 뉴헤이번~.)

미국의 경제학자.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는 2001년 노벨 경제학상(스웨덴 리크스방크에서 제정하여 리크스방크 경제학상으로 불리기도 함)의 공동 수상자로, "1970년대 정보의 비대칭성이 시장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현대 정보경제학(The Economics of Information) 이론의 핵심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를 들어, 미국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조지 A. 애컬로프 교수와 스탠퍼드대학교 A. 마이클 스펜스 교수, 컬럼비아대학교 조지프 E. 스티글리츠 교수 등 세 명을 선정했다.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는 "시장에서의 정보의 비대칭성에 관한 이론은 지난 20여 년 간 경제학에서 활발히 연구되어온 분야이며,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전통적 농업시장에서부터 선진국의 금융시장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폭넓게 응용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경제주체가 동등한 수준의 정보를 지닌 상태에서 움직인다고 본 전통적 경제이론의 입장이 실제의 경제현실에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애컬로프는 '정보 비대칭 이론'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1970년 〈레몬 시장 The Markets for Lemon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비로소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와 시장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공식적으로 시도했다.

애컬로프가 예로 든 중고차 시장에서는 중고차를 사려는 사람에 비해 파는 사람이 차의 결함 등에 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중고차 구입자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만 멀쩡한 '레몬'(lemon : 흠이 있는 낡은 차를 가리키는 구어)을 비싼 값에 속아 사는 낭패를 겪기 일쑤다. 속아 산 적이 있는 사람들은 중고차 시장을 찾지 않고 아는 사람을 통해 품질이 담보되는 중고차를 사려 들고, 좋은 차량의 소유자는 제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 팔려고 든다. 결국 중고차 시장에 양질의 매물은 사라지고 질이 낮은 매물들만 남아 있게 된다.

이처럼 정보의 격차가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도리어 품질이 낮은 상품이 선택되는 가격 왜곡 현상, 곧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 이루어지거나 전체 시장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애컬로프의 '레몬 원리'다. 그러나 애컬로프는 이 논문에서 단지 비대칭성 문제가 시장에 미치는 역효과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 해결의 가능성까지 예측한다. 곧 경제주체들 스스로 그 역효과를 상쇄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이를테면 중고차상들이 판매한 차량에 대해 일정 기간 수리를 보증하는 제도를 도입한 사례라든지 브랜드 유지를 위해 프랜차이즈 등 다양한 계약형태가 등장하는 경향 따위도 그 예측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또 애컬로프는 이 같은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특히 개발도상국 경제권에서 만연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제 3세계 지방금융시장에서 엄청난 고금리의 대출이 빚어지는 까닭도 이것으로 밝힌다. 그는 오늘날 이른바 '닷컴사'들의 상장가가 추락을 거듭하면서 주식시장의 'IT 거품'이 터져 버린 이유도, 정보가 부족한 '개미군단'이 부실한 닷컴사가 남발하는 주식의 수익성을 과대 평가하게 되고 그런 닷컴사들이 외형상 급성장함에 따라 '역선택'이 이루어지면서 '레몬' 주식이 주식시장을 지배하게 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경제 이론가들은 기록에 없는 일정한 규칙의 테두리 안에 있는 요소만을 써서 양식화된 모델을 발전시켜 왔다. 마치 프랑스 주방장이 요리에 해초나 회를 쓰지 않듯이, 신고전주의 모델에서는 심리학·인류학·사회학 등에서 비롯되는 가설들은 아예 세우지 않는다. 나는 경제 모델의 구성 요소의 성격에 제한을 두는 어떤 규칙도 수긍할 수 없다." 애컬로프는 이러한 자신의 지론을 실천에 옮기듯, 정보의 비대칭성에 관한 연구 이외에도 노사간 또는 노동자 상호간 사회심리적 요인이 노동시장의 효율성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종래의 낡은 사회 관습이 경제 효율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등을 자신의 연구 영역으로 삼는 등, 사회학·사회인류학의 관점에서 경제이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며 여타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저명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애컬로프는 1940년 6월 17일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1962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조교수(1966~70)·부교수(1970~77)·교수(1977~78)로 일했고, 1980년부터 다시 같은 학교에서 경제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또한 인도통계연구소 객원교수(1967~68)·런던경제대학 교수(1978~80)로 일했으며, 하버드대학교 연구원(1969)·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선임위원(1973~74)·연방준비제도이사회 객원 연구위원(1977~78)으로도 일했다.

현재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위원(1994~) 겸 고문, 미국경제학회 부회장, 계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 American Economic Review> 부주필 등을 맡고 있다.

 

A. Michael Spence(1943 미국 뉴저지 몬트클레어~.)

미국의 경제학자. 2001년 노벨 경제학상(스웨덴 리크스방크에서 제정하여 스웨덴 리크스방크 경제학상으로 불리기도 함)은 1970년대부터 경제주체간 정보 보유 수준의 불균등, 곧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ic information)이 금융·노동 시장 등 숱한 경제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해명하고 이를 체계화함으로써 현대 정보경제학(The Economics of Information)의 기틀을 마련한 조지 A. 애컬로프와 A. 마이클 스펜스, 조지프 E. 스티글리츠 교수 등 미국의 경제학자 셋에게 돌아갔다.

1970년 애컬로프는〈레몬 시장 The Markets for Lemon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중고차 시장을 예로 들어 정보가 공평하게 공유되지 않을 경우 빚어지는 시장 왜곡 현상을 풀이함으로써 '정보 비대칭 이론'의 신기원을 열었다. 이에 이어 1973년 발표한 논문에서 스펜스는 신호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해, 정보 격차의 해소 방안으로 이른바 '시장 신호 이론'(market signaling)을 제기함으로써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시장 신호 이론 또한 정보 비대칭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애컬로프의 이론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스펜스는 개별 경제주체들이 상호간 정보 보유량의 격차가 있는 시장에 참여하면서 그 문제를 조정해 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정보량이 풍부한 쪽에서 정보량이 부족한 쪽에 어떻게 자신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함으로써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지를 보여준다. 경제주체 한 쪽이 이러한 '시그널링' 효과를 거두려면 다른 한 쪽에게 자신의 능력 또는 자신의 상품가치나 품질을 확신시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이 수단은 비교 우위를 지녀야 할 뿐더러 일정한 비용을 들여야 한다. 이러한 개인적 조정 과정으로 애컬로프의 이론에서 정보의 격차로 야기되는 시장 왜곡 현상, 즉 '역선택'을 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스펜스가 논문에서 최초로 제기한 신호 이론의 연구 영역은 노동시장이다. 그에 따르면 정보 보유량의 격차가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신호로 작용하는 것이 학력이다. 구직자 상호간 학력의 차이는 시그널링 비용과 관련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고용주는 구직자 상호간 생산성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고용주는 구직 당사자에 비해 구직자에 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일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능력 곧 생산성의 상대 우위를 입증하는 신호를 고용주에 전달해야 채용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테면, 직장에 다니는 고졸 학력자가 야간·방송통신·사이버 대학 과정에 다니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학력의 신호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나아가 스펜스는 시그널링을 통해 노동시장의 기능이 더 원활해지기 위해서는 학력이나 각종 자격을 인증할 수 있는 사회적 보완기제가 필요하며, 동시에 교육기관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스펜스는 이 신호 개념을 비단 노동시장 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시장 사례에 적용함으로써, 정보 격차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여러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상장사들은 회사의 수익을 자본이득으로 처리해 주식의 가치를 높이는 대신 으레 고액의 세금을 감수하면서까지 주주들에게 높은 배당금을 지불하는 쪽을 택한다. 상장사가 노리는 바는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를 더 끌어 모아 자사 주가를 상승시키는 데 있다. 이때 배당금이야말로 상장사에 비해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의 주관 기관인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는 스펜스가 "시그널링에 관한 연구 이외에도 1996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윌리엄 비크리와 제임스 A. 멀리스의 연구 성과를 보험시장 분석에 응용하는 데 앞장 섰으며, 1975~85년에는 게임 이론이 풍미하는 가운데 이른바 '신산업조직론' 범주 내의 전략적 시장 행태를 다각도로 밝히는 작업에서 선구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스펜스는 1943년 미국 뉴저지 주 몬트클레어에서 태어났다. 1966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68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경제학부 부교수(1973~75), 하버드대학교에서 조교수(1971~75)·특별명예연구원(1975~76)·객원교수(1976~77)·교수(1977~83)·문리대학장(1984~90) 등으로 일했다. 1981년 미국경제학회에서 경제학 발전에 기여가 가장 큰 40세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2년마다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았다. 현재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명예교수, 계량경제학회(Econometric Society) 특별회원아다.


Joseph E. Stiglitz(1943. 미국 인디애나 개리~.)

미국의 경제학자. 1901년에 시작된 여타 5개 부문 노벨상과 달리 1969년에 첫 수상자를 배출한 노벨 경제학상(스웨덴 리크스방크에서 제정하여 리크스방크 경제학상으로 불리기도 함)의 2001년 상금 1,000만 크로나(약 93만 3,000달러)는 조지프 E. 스티글리츠를 비롯해 정보경제학(Economics of Information)이라는 현대 경제학의 신기원을 이룬 미국 경제학자 셋에게 돌아갔다. 스티글리츠는 공동 수상자인 애컬로프와 스펜스에 이어 정보 비대칭(asymmetries of information) 이론과 관련, 왕성한 연구 활동을 통해 숱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정보경제학의 이론체계를 실질적으로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경제학계에서는 그의 노벨상 수상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애컬로프는 정보의 격차가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곧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라는 시장 왜곡 현상이 발생한다는 데 주목했고, 스펜스가 정보 보유량이 많은 경제 주체가 보유량이 적은 상대 주체에게 신호를 보냄(시그널링)으로써 시장의 정보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식에 천착했다면, 스티글리츠는 정보가 부족한 경제 주체가 상대적으로 정보가 많은 쪽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는 점을 규명함으로써 정보 비대칭 이론을 사실상 완결지었다.

스티글리츠는 보험시장을 전형적인 사례로 들어 스펜스의 시그널링과는 역방향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정보 불균형이 해소될 수 있는 또 다른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보험사는 보험상품 판매 초기에 개별 고객의 신상이나 성향에 관한 정보 보유량에서 해당 고객 본인에 미치지 못한다. 고객이 더 많은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의 상황을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조작해 제시한 경우라도, 보험사는 평균 사고위험율을 기준으로 보험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적정한 금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지급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보험시장에는 보험 가입자 가운데 사고 위험율이 낮은 우량 고객은 비싼 보험료에 반발해 사라지고, 사고 경험이 있거나 위험이 상대적으로 큰 가입자만 남는 까닭에 보험사로서는 역선택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시장 왜곡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른바 '스크리닝'(screening)에 주목한다. 보험사는 고객에게 효과적인 인센티브를 제시함으로써 고객의 위험 상황에 관한 정보를 추출해 낼 수 있다. 정보를 추출·심사하는 이 스크리닝 과정을 통해 보험사와 고객 사이에 비로소 정보의 균형상태'(equilibrium)가 형성되며 보험사는 보험 계약자들을 대상으로 상이한 사고 위험 등급을 설정하고 고객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보험상품을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스티글리츠는 경제 주체 간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빚어지는 비효율 사례를 설명하기 위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가령, 자동차보험 가입자는 일단 보험에 가입하고 나면 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전보다 느슨해지거나 구태여 전처럼 비용을 들여가며 차량을 정비하려 하지 않을 수 있다. ‘보험 처리’라는 뒷받침을 믿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는 애초 보험시장의 이와 같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였으나, 오늘날 대단히 다양한 시장 상황에 아주 유효한 개념으로 적용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전통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한 시장', 곧 수요·공급의 일치로 효용이 극대화되는 시장 개념은 정보의 완전성을 전제로 했다고 지적하고, 현실 시장경제는 정보에서 심대한 결함 또는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완전한 시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정보의 불완전성이 비록 사소한 정도일지라도 막대한 경제적 후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새로운 경제학 모델은 정보의 비대칭성, 곧 '더 아는 사람이 있고 덜 아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는 시각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맥락에서 그는 보험시장의 분석을 필두로, 노동시장·신용거래시장·국제금융시장 등 여러 시장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시사하는 바를 폭넓게 조명했다. 그는 이 같은 연구 업적으로, 시장의 작동 원리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사고 방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학자 경력 30여 년 동안 미시경제학·거시경제학·산업조직론·국제경제학·노동경제학 등 경제이론의 모든 하위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의 단초를 제시하고 그 기초를 다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려 300여 편의 논문과 저서 12권을 남겼다.

스티글리츠는 1943년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태어나서, 1964년 매사추세츠 주의 애머스트대학을 졸업하고, 1967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7살에 예일대학교 교수가 된 뒤 옥스퍼드대학교·프린스턴대학교를 거쳐 1988년부터 스탠퍼드대학교 경제학 석좌교수로 있다가 2001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직을 맡았다.

그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회 위원(1993~95)·위원장(1995~97)으로 일하면서 연금제도의 단순화 작업, 항공관제 시스템의 기업화, 원격통신·금융·환경규제 등의 개혁에 관여했다. 그는 또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부총재(1997~99)로 있으면서, 당시 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외환 위기에 대응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및 재정 긴축 처방을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하고 나서는 등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경제 정책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개발도상국의 대변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답게 2001년 10월 10일 노벨상 수상 통보를 받은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선진 제국의 자국 중심 시장개방 논리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지구촌의 뿌리 깊은 경제 불균형을 해소함으로써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적 활로를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스티글리츠는 1979년 미국경제학회가 경제학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40세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격년으로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았다. 또 29살에 계량경제학회 특별회원이 되었으며, 미국학술원 특별회원, 계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 American Economic Review> 편집위원 등으로 일하고 있다.

  

2002년-대니얼 카너먼, 버논 스미스: 실험경제학 분야 개척

 

Vernon L. Smith(1927.1.1 미국 캔자스 위치토~ .)

미국의 경제학자. 실증적인 경제 분석에서 실험이 필수 불가결함을 입증함으로써 실험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가격 형성과 시장의 관계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통해 대안적 시장의 중요성을 밝히고 대안적 시장 모형을 엄밀한 조건하의 실험실에서 먼저 테스트해 봄으로써 최적 모형을 찾아내는 이른바 '풍동 실험'(wind-tunnel tests : 풍동[風洞]은 항공기나 그 밖의 기계 또는 어떤 물체의 모형이 공기 중에서 움직일 때 나타나는 영향이나 공기 저항을 연구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빠르고 강한 공기흐름을 일으키는 장치)을 제창했다. 2002년 이스라엘 태생의 미국 인지심리학자 다니얼 카너먼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스미스는 1920년대 말 세계대공황이 시작되기 몇 해 전 벼락경기가 한창이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정치활동가였는데 특히 어머니는 사회당 지도자 유진 V. 뎁스를 존경하는 자칭 사회주의자였다. 뒷날 그가 경제학에 발을 딛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념적 배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학 총론을 수강했는데, 이 때 경제학에 매료되어 이 대학을 졸업한(1949) 뒤 곧바로 경제학으로 방향을 돌려 캔자스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각각 경제학 석사학위(1952)와 박사학위(1955)를 받았다. 이후 캔자스대학교·퍼듀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매사추세츠공과대학·예일대학교·캘리포니아공과대학·캘리포니아대학교·애리조나대학교·조지메이슨대학교에서 일하면서 <미국 경제학 리뷰 American Economic Review>·<경제행위와 조직 Journal of Economic Behavior and Organization>·<경제이론 Economic Theory>·<경제 설계 Economic Design>·<경제방법론 저널 Journal of Economic Methodology>·<위험과 불확실성 저널 Journal of Risk and Uncertainty>·<카토 저널 The Cato Journal>·<사이언스 Science> 등의 편집에 관여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전력시장 민영화에 컨설턴트로 참여하고 미국 에너지 산업의 규제완화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학부 시절에 자연과학적 훈련을 쌓은 그는 경제학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응용하는 쪽으로 일찌감치 방향을 잡았다. 1956년 과학적 방법에 입각한 그의 첫 경제학 실험이 행해졌다. 자신이 가르치던 퍼듀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 그는 태생적인 사회주의 신봉자답게 시장 메커니즘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한된 조건에서 경제학의 개념 및 이론들을 실험한 결과, 시장 메커니즘은 뜻밖에도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정보가 빈약하고 참가자수가 적더라도 피실험자들은 경쟁 평형(competitive equilibrium)을 이루기 위해 한 쪽으로 급격히 쏠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 여러 실험으로 그는 특히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의 주장과는 달리, 완벽한 정보를 가진 다수의 경제 행위자가 시장 효율성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발견했다.

1962년 그는 자신의 초기 실험 연구 결과를 담은 실험경제학의 기념비적 논문 <시장행위에 관한 실험 연구 An Experimental Study of Market Behavior>를 <정치경제학 저널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 발표했다. 한편으로는 자본 이론 전문가, 환경경제학의 선구자로서 명성을 쌓아가면서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그는 경제학이라는 실험의 불모지대에서 자신이 갈고 닦은 실험경제학적 연구 방법을 속속 발표할 수 있었다. 1977년 그는 논문 <사회적 선택에서의 만장일치와 자발적 동의의 원리 The Principle of Unanimity and Voluntary Consent in Social Choice>를 <정치경제학 저널>에 발표해 공공 선택 결정을 위한 체계적인 기구 설계 연구의 단초를 마련했다. 1982년에는 실험경제학적 방법론의 지침이 된 논문 <실험과학으로서의 미시경제 체계 Microeconomic Systems as an Experimental Science>를 <미국 경제학 리뷰>에 발표했으며, 경제학적 시스템 설계에 관한 실험경제학적 응용인 <공항 시간대 배정을 위한 조합입찰 메커니즘 A Combinatorial Auction Mechanism for Airport Time Slot Allocation>을 <벨 경제 저널 Bell Journal of Economics>에 발표했다. 이어 1988년에는 주식시장의 거품과 합리적 기대를 고찰한 <실험적 현물 자산 시장에서의 거품, 붕괴 및 내생(內生) 기대 Bubbles, Crashes and Endogenous Expectations in Experimental Spot Asset Markets>를 <이코노메트리카 Econometrica>에 발표했다. 1994년에는 <선취권, 재산권 및 흥정 게임에서의 익명성 Preferences, Property Rights and Anonymity in Bargaining Games>을 <게임과 경제행위 Games and Economic Behavior>>에 발표해 개인끼리의 교환에 관한 체계적 연구의 출발을 알렸다. 2000년에는 최근의 논문을 한데 묶어 <흥정과 시장 행태 Bargaining and Market Behavior>를 펴냈다.

실험경제학은 그가 닦아 놓은 기초에서 출발해 1950~60년대에 완만하게 성장하다가 1970~80년대에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실험적 연구는 현실 세계의 많은 기구들의 경제적 성과로 확장되었으며, 그가 제시한 '풍동 실험'을 정책 결정에 응용하려는 노력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또한 다중시장의 수렴성이 발견되고, 공모(共謀)와 가격통제 및 기타 유형의 시장개입이 사상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고찰되었으며, 공영방송의 프로그램 편성 방법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시장이 연구되었는데, 이러한 연구들은 모두 그의 공헌에 젖줄을 대고 있다.

공공선택학회·미국경제학연합회 회장, 국제실험경제학연구재단 총장으로 일했으며 아담 스미스상(1995)을 받았다. 미국예술과학 아카데미 특별회원, 미국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다.


Daniel Kahneman(1934. 이스라엘 텔아비브~ .)

이스라엘 태생의 미국 인지심리학자·경제학자. 이스라엘 출신의 동료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1937~96)와 함께 불확실한 조건에서의 인간의 판단 및 의사결정에 관한 선구적인 심리학적 실험 연구를 통해 경제심리학·행동경제학·실험경제학이라는 불모의 분야를 개척하면서 경제학 연구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02년 미국의 경제학자 버논 스미스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카너먼은 1934년 텔아비브에서 유대계 프랑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생후 3개월 때 부모를 따라 파리로 갔다. 6살 때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자 그의 가족은 노란 별을 달고 다녀야 했고 강제수용소에 끌려갈 상황에 놓였다. 다행히 화학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독일군에게 끌려갔다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으로 분류되어 풀려나오자, 그의 가족은 미점령 지역으로 도망가 숨바꼭질을 하듯 옮겨 다니며 숨어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1944년에 죽고, 그는 어머니와 함께 2년 뒤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 유년시절에 겪은 공포는 그에게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거나 지식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불신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며(1954 졸업)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1961)를 받았다. 그 뒤 히브리대학교(1961~78),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1978~86),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1986~94)에서 심리학을 강의하고 1993년부터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공공문제를 강의했다.

1973년 그는 트버스키와 함께 불확실한 조건에서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관한 지배적인 경제 이론인 기대효용이론의 전제, 즉 인간의 '합리적 판단'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이른바 '휴리스틱스 이론'(heuristics and bias)을 발표해 큰 주목을 끌었다. 이는 불확실한 조건에서 판단을 내릴 때 인간은 확률이나 효용극대화 이론을 복잡하게 따지려 들기보다는 경험 법칙에 비춰 어림짐작으로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방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형적인 예는 '택시 시나리오'이다. 어느 날 밤 어느 택시가 행인을 치고 달아났는데, 한 노인이 자신의 집 창문 너머로 파란색 택시가 뺑소니를 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피해자의 변호사는 사건을 성립시키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제시했다. 첫째, 이 도시에 택시 회사라고는 '블루택시', '블랙택시' 두 곳밖에 없는데, 사건 당시 운행된 택시의 85%는 검은색, 나머지 15%는 파란색이며, 둘째, 사건 당일 밤과 비슷한 조건에서 목격자의 시력을 면밀히 검사한 결과 사건 당시 뺑소니 택시의 색상에 대한 목격자의 판단 정확도가 80%라는 것이었다. 주어진 조건에서 뺑소니 차량이 파란색일 수학적 확률은 절반도 안 되는 0.41, 즉 41%에 불과하고 뺑소니 차량이 실제로 검은색일 확률이 더 높지만, 배심원은 목격자의 진술이 옳을 확률이 0.8, 즉 80%이므로 뺑소니 택시가 파란색이었다고 판단하고 블루택시 회사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기 십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배심원의 평결을 옳다고 받아들인다. 또한 평결 뒤 배심원에게 수학적 확률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배심원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유명한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은 아이가 많이 태어나는 큰 병원이든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작은 병원이든 사내아이 출산율이 모두 60%를 넘을 것이라고 생각해,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의 경우 표본이 크다고 해서 불확실성이 극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확률론에서 말하는 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을 배제하고 작은 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주식 투자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펀드 매니저가 2년 연속 주가지수를 알아맞힌다고 생각되면 실제 그의 수익률이 다른 펀드 매니저들보다 훨씬 낮아도 그를 더 유능하다고 판단하기가 일쑤여서, 주가가 별 까닭 없이 널뛰기를 하게끔 만든다. 또 다른 예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이다. 피실험자들에게 무작위로 추출한 개인들에 관한 정보를 주고 이들을 '판매원' 또는 '하원의원'으로 분류하게 한 결과, 대부분의 피실험자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사람들을 정치인으로 쉽게 단정했다. 심지어 인구구성에서 정치인보다 판매원이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음을 사전에 알려 주었지만 결과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트버스키와 함께 '전망 이론'(prospect theory)이라는 획기적인 이론을 수립해 1979년 계량경제학회지 <이코노메트리카 Econometrica>에 발표함으로써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불확실한 조건에서의 의사결정에 관한 이 논문에서 두 사람은 전통적인 이론적 관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행동, 즉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소한 설비 보험 계약서에는 선뜻 서명하면서도 몇 푼 안 되는 할인 혜택을 받으러 소액 구매를 위해 장거리 운전을 마다하지 않거나, 반대로 그 정도나 그보다 더 비싼 상품을 절약하는 일에나 평생수입이 줄어들고 있다는 달갑지 않은 뉴스를 접하고도 소비를 줄이는 일에는 인색하게 구는 행동들을 실험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위험이 수반되는 일련의 의사결정을 할 때, 전통적인 기대효용이론의 모델과는 달리 손익의 비중과 확률을 다르게 잡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설령 기대 손익의 크기가 같더라도 기대 이익에 따르는 기쁨보다는 손실에 따르는 괴로움을 더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경제학자들은 주식 투자자의 경우 1달러를 잃을 때 느끼는 고통이 1달러를 벌 때 느끼는 기쁨의 2배에 이른다고 본다. 또한 두 사람은 등가(等價)의 상황이라도 손익의 어느 쪽과 관련되는가에 따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다름을 발견했다. 이들은 또한 사람들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보다는 손실을 피하기 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경향을 보임을 발견했다. 주식 투자자들의 경우 눈앞의 이익에 대해서는 위험을 기피한 반면 눈 앞의 손실에 대해서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이들의 연구는 일련의 실험과 이론화, 일상 경험의 날카로운 포착을 통해 불확실한 조건에서의 판단 및 의사결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 양식을 설득력 있게 설명함으로써, 심리학은 물론 통계학·법학·의학경영학과 의사결정자가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해 손익을 판단해야 하는 제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을 법정에 가져갈 것인지를 고심하는 소송 당사자나 안전조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공학자, 파리 신혼여행과 할부 차량 구입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저울질하는 신혼부부의 의사결정을 이들의 연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무엇보다도 경제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험심리학회·계량경제학회·미국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 미국실험심리학자연합회·미국심리학회 특별회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미국심리학회 특별공로상(1982), 힐거드상 평생공로상(1995)을 받았다. 미국·이스라엘 이중국적자다.


2003년-로버트 엥글, 클라이브 그레인저: 통계 분석 방법을 개선해 미래 예측의 정확성을 높인 공로

 

Clive William John Granger(1934~ )

영국의 통계학자로 계량경제학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공적분 모형’을 개발해 금융시장에 대한 예측의 신뢰성을 높이고, 경제통계학과 파생금융상품 시장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미국의 엥글(Robert F. Engle)과 함께 200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34년 영국 웨일스 웨스트글러모건주(州)의 스완지에서 태어났다. 1955년 노팅엄대학교 수학과를 거쳐 1959년 같은 대학교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1974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 경제학부 교수가 된 뒤 (2003년 기준)현재까지 같은 대학교 교수로 있다.

정통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면서도 계량경제학 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1980년대 장기적·단기적 관점을 결합해 시계열(time series) 분석에 쓰이는 공적분(cointegration) 모형을 개발했다. 이 모형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분석하는 정적(靜的) 분석, 곧 안정적인 시계열 분석에 쓰이는 통계방식이 불안정한 자료의 분석에 응용될 경우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음을 제시한 모형이다.

이 모형을 이용하면 현재 시점의 경제지표를 분석할 때 과거의 경제변수까지 포함시켜 시계열을 분석할 수 있어 장단기적 불안정성은 물론,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불안정성까지 알아낼 수 있다. 이 때문에 공적분 모형은 환율·물가, 장단기 금리차 등을 설명하는 각종 경제이론의 실증적인 분석에 활용되고 있다.

그레인저는 공적분 모형을 개발해 시계열분석에서 비정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제거하거나 적절히 평가하는 기법을 제시함으로써 금융시장에 대한 예측의 신뢰성을 높이고, 경제통계학과 파생금융상품 시장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미국 뉴욕대학교의 엥글(Robert F. Engle)과 함께 200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Robert F. Engle(1942~ )

미국의 계량경제학자로, 통계를 활용해 시장의 위험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 분석기법으로 금융시장에 대한 예측의 신뢰성을 높이고, 경제통계학과 파생금융상품 시장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레인저(Clive W.J.Granger)와 함께 200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2년 미국 뉴욕주(州)의 시러큐스에서 태어났다. 1964년 윌리엄스대학 물리학과를 거쳐 1966년 코넬대학교에서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69년 같은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부터 1974년까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조교수,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부교수를 지내고,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UCSD) 부교수를 지냈다.

1977년 UCSD 정교수가 된 뒤, 경제학부장(1990~1994)을 거쳐 현재까지 같은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뉴욕대학교 스턴경영대학원 석좌교수로 있다. 1981년 미국경제학회 회원, 1987년 전미경제연구소(NBER) 연구원, 1994년 미국계량경제학회 회원, 1995년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계량경제학 분야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1982년 영국의 인플레이션에 관한 논문으로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뒤, UCSD의 동료 교수인 그레인저(Clive W.J.Granger)와 함께 통계를 활용해 시장의 위험을 측정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자동회귀조건부 이분산(ARCH:autoregressive conditional heteros kedasticity) 모형을 개발해 여러 기간대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시계열(time series) 분석의 변동성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량경제학 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 모형은 확률적인 분석에 의존하던 기존의 변동성 예측 기법에 일정한 변동성을 전제로 하는 통계적인 방법을 응용한 것으로, 옵션선물 등 파생금융상품의 위험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엥글의 모형은 경제학자들 뿐 아니라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금융 전문가들에게도 꼭 필요한 분석기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엥글은 이 자동회귀조건부 이분산 모형을 개발해 시계열 분석에서 비정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을 제거하거나 적절히 평가하는 기법을 제시함으로써 금융시장에 대한 예측의 신뢰성을 높이고, 경제통계학과 파생금융상품 시장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레인저와 함께 200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2004년-핀 쉬들란, 에드워드 프레스콧: 동태적 거시경제학에 기여


Finn E. Kydland(1943~ )

노르웨이의 경제학자로 실물경기변동이론을 주장해 미국 거시경제학자 프레스콧(Edward C. Prescott)과 함께 2004년 공동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3년 노르웨이 남서부 로갈란주(州)에서 태어났다. 노르웨이어(語) 발음은 쉬들란이다. 1968년 노르웨이 경제·경영스쿨(NHH)을 졸업한 뒤, 1973년 미국 카네기멜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모교인 카네기멜론대학 경제학 교수로 몸담아 2004년 현재까지 같은 대학교 교수, NHH 교수, 댈러스·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자문역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경기변동론, 통화 및 재정정책, 노동경제학 등이다. 실물경기변동(real business cycle)이론과 동태적 거시경제학 개념을 처음 도입한 동태 거시경제학자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 거시경제학자 프레스콧(Edward C. Prescott)과 함께 실물경기변동이론을 내세웠다.

두 사람은〈프레스콧-키들랜드 페이퍼 Prescott-Kydland Paper〉를 비롯한 여러 편의 논문을 공동으로 저술해 제 2차세계대전 뒤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해 온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이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물경기변동이론’은 경기변동에서 실물적 요인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보는 이론이다. 기본적으로는 경기변동을 균형 현상으로 파악하는 화폐적 경기변동이론과 같지만, 경기변동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을 생산성이나 기술혁신과 같은 실물적 요인에 둔다는 점에서 다르다.

두 사람은 이 실물경기변동이론을 바탕으로 케인스학파가 설명하지 못했던 1970년대의 석유파동 등 각종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등 거시경제학 분야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했다. 키들랜드와 프레스콧은 이러한 동태적 거시경제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4년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Edward C. Prescott(1940.12.26~ )

실물경기변동이론을 낸 미국의 경제학자. 이 이론으로 케인스학파가 설명하지 못했던 1970년대의 석유파동 등 각종 경제현상을 설명해 거시경제학 분야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 공로로 2004년 노르웨이의 경제학자 키들랜드(Finn E. Kydland)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40년 12월 26일 뉴욕주(州) 글렌폴스에서 태어났다. 1962년 스와트모어대학 수학과를 거쳐 1963년 케이스웨스턴 신학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67년 카네기멜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였고, 카네기멜론대학 경제학 교수, 시카고대학교 방문 연구교수, 노스웨스턴대학교 방문교수 등으로 일했다.

그 뒤 미네소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1980), 미국 경제학회 회원(1980),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1992), 시카고대학교 교수(1998) 등을 거쳐 2004년 현재 애리조나대학교 교수,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자문역 등으로 일하고 있다.

실물경기변동(real business cycle)이론과 동태적 거시경제학 개념을 처음 도입한 동태 거시경제학자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노르웨이 출신의 경제학자 키들랜드(Finn E. Kydland)와 함께 실물경기변동이론을 내세웠다. 이들은〈프레스콧-키들랜드 페이퍼 Prescott-Kydland Paper〉를 비롯한 여러 편의 논문을 함께 썼는데, 특히 위의 논문은 제 2차세계대전 뒤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해 온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이론의 한계를 극복한 논문으로 유명하다.

실물경기변동이론은 경기변동에서 실물적 요인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보는 이론으로 기본적으로는 경기변동을 균형 현상으로 파악하는 화폐적 경기변동이론과 같지만, 경기변동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을 생산성이나 기술혁신과 같은 실물적 요인에 둔다는 점에서 다르다.

두 사람은 이 실물경기변동이론을 바탕으로 케인스학파가 설명하지 못했던 1970년대의 석유파동 등 각종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등 거시경제학 분야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했다. 프레스콧은 이러한 동태적 거시경제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2005년-로버트 아우만, 토머스 셸링: 게임이론 분석으로 갈등과 협력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 공로

 

Robert John Aumann(1930.6.8~ )

이스라엘의 수학자이자 게임이론 분야의 대표적 경제학자다. '무한 반복게임(infinitely repeated games)'으로 가격전쟁·통상전쟁 등 경제적 갈등을 설명하는 데 공헌해 미국의 경제학자 셸링(Thomas Crombie Schelling)과 함께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30년 6월 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1938년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갔다. 뉴욕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역시 수학으로 석사(1952)·박사(1955년) 학위를 받았다.

1956년 이스라엘로 건너가 헤브루대학교에서 수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뒤, 2001년 명예교수가 되기까지 45년 동안 이 학교에서 강의했다. 그 밖에 프린스턴대학교, 예일대학교, 스탠퍼드대학교 등 미국의 여러 대학 교환교수로 일했다.

경쟁 주체가 상대편의 대처행동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인 게임이론 분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다. 특히 '무한 반복게임(infinitely repeated games)'으로 현실 세계에서 행위자들의 행태를 처음으로 분석한 경제학자로, 게임이론으로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밝혀 낸 최초의 학자로 꼽힌다.

오먼은 일회성 관계에만 주목하는 기존의 게임이론인 '수인(囚人)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이론을 보완해, 여기에 협력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게임이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즉 오먼은 사람의 일상은 오래 지속되면서 반복되기 때문에 이러한 반복의 과정에서 서로 협조하게 되고, 이로써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수인의 딜레마'의 한계를 극복했다.

오먼이 제시한 무한 반복게임은 가격전쟁·통상전쟁 등 경제적 갈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오먼은 게임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역시 갈등과 협상에 대한 게임이론의 권위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셸링(Thomas Crombie Schelling)과 함께로 200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저서로《게임이론 Game Theory》(1981),《게임이론 강의 Lectures on Game Theory》(1989) 등이 있고, 1994년에는 이스라엘 경제학상을 받았다. 2005년 현재 헤브루대학교 합리성센터 교수, 미국 내셔널아카데미오브사이언스와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있다.


Thomas Crombie Schelling(1921.4.14~ )

‘갈등과 협상에 관한 게임이론’을 낸 미국의 경제학자로 이스라엘의 오먼과 함께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대표적 저서로《갈등의 전략》이 있다.

1921년 4월 14일 캘리포니아주(州)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51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5년 미국 예산국 근무를 거쳐,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유럽부흥계획(마셜플랜)에 참여했다.

그 뒤 3년간 백악관에서 일한 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예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일했다. 같은 해 하버드대학교로 옮긴 뒤, 1959년부터 1990년까지 같은 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정치경제학을 강의했다.

1960년 저서《갈등의 전략 (The strategy of Conflict)》을 내면서 세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책은 게임이론으로 1950년대 미소 냉전 체제 당시 가장 큰 국제적 이슈였던 핵무기 경쟁과 세계 안보 문제 등 현실적 갈등을 날카롭게 분석한 책으로 유명하다.

셸링은《갈등의 전략》외에도《군대와 영향력》(1976),《미시동기와 거시행동》(1978),《전략과 군사통제 Strategy and Arms Control》(1986),《협상과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제한전쟁》(1993) 등 많은 책을 냈다.

이 책들은 군사전략, 군축, 에너지 문제, 환경보호, 기후변화, 테러리즘 등 전통 경제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로, 이 때문에 셸링을 정치경제학자로 보는 이들도 많다. 셸링의 이론은《갈등의 전략》에 압축되어 있는데, 그는 갈등과 협상에 대한 게임이론으로 갈등적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힘은 자신을 구속할 수 있는 힘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셸링의 주장에 따르면, 순종보다는 저항이, 저항보다는 보복이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이러한 셸링의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기업들의 경쟁전략, 정치적 파워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셸링은 게임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역시 게임이론 분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이스라엘의 오먼(Robert John Aumann)과 함께로 200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1990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미국 내셔널아카데미오브사이언스와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있다.


2006년-에드먼드 펠프스


Edmund S. phelps

1933년 미국 출생. 현재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200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에서 “거시경제 정책의 장,단기 효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공로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선정 이유를 발표 했듯이 거시경제학의 이론적인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펠프스는 1960년대 말에 주류적 경제학 견해였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사이의 안정적 역(逆) 상관관계, 즉 필립스 곡선(물가를 낮추려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반대로 실업률을 낮추려면 물가가 오른다는 이론)을 반박하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는데, 경제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은 ‘자연실업율(Natural Rate of Unemployment)’ 이론이다.

‘자연실업율’이란 사람들이 예상하는 인플레이션과 현실 세계의 인플레이션이 같아지는 점을 ‘장기균형’이라 하고 이때의 실업률을 ‘자연실업율’이라 부른다. 자연실업율 상태에서는 실업률을 낮추려 해도 물가만 올릴 뿐이다. 즉 물가 상승과 장기적인 실업률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실물경제의 변화가 실업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각국 중앙은행들이 경기부양 대신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펠프스는 경계가 뚜렷했던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 이론을 거시경제에 도입해서 ‘미시적 거시’ 모델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업적이 ‘합리적 기대’ 모형이다.

‘합리적 기대’란 경제주체가 경제상황의 모든 변수를 고려해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비자발적 실업’의 원인인데 케인즈는 경제가 침체되면 일할 의사가 있음에도 고용되지 못하는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하나 그 이유를 명쾌하게 분석하지 못했으나 펠프스는 이에 대해 고용주의 ‘합리적 기대’로 풀어냈다. 합리적 기대를 하는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결정할 때 노동자의 이직 위험이 있으므로 단순히 수요-공급이 일치하는 수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경우 합리적 기대를 하는 고용주들은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재고용의 추가 비용을 고려해 노동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임금을 제시한다. 모든 고용주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되면 시장 임금은 균형 수준보다 높게 되고 이는 노동 수급의 불일치를 유도해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펠프스는 또 기업에서 새로운 기술과 발전의 확산에 있어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분석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2007년-레오니트 후르비치, 에릭 매스킨, 로저 마이어슨


Leonid Hurwicz(1917.8.21. 모스크바 ~ )

미네소타 대학교의 석좌 교수로, 에릭 매스킨, 로저 마이어슨과 함께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mechanism design theory)의 기초를 수립한 레오니트 후르비츠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1917년 8월 2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938년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포르투갈로 강제 이주당한 뒤 미국에 정착해 하버드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했다.

레오니트 후르비츠가 처음으로 선보인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정부가 좋은 의도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더라도 대중은 개인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초의 정책 효과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정부는 개인의 이기심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적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중립적이고 효율적인 구조를 설계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현대 경제학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 잡은 '게임 이론'의 하부 이론으로서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내세운 '완전 경쟁 시장'이라는 비현실적인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의 확립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국가사회과학메달을 받고, 2007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경제학의 하위 분야인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의 기초를 확립해 현대 경제학과 정치학의 많은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에릭 매스킨, 로저 마이어슨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함께 받았다.

저서로는 ≪자원 배분 과정에 대한 연구≫(1978년, 공저), ≪사회적 목표와 사회적 조직화≫(1987년, 공저), ≪수학적 경제학의 진보≫(2003년, 공저) 등이 있고 (2007년 10월 기준) 미네소타 대학의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Eric Maskin(1950.12.12.~ )

미국의 경제학자다. 레오니트 후르비치, 로저 마이어슨과  함께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50년 12월 12일 뉴욕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인이다. 1976년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MIT와 케임브리즈 대학 등에서 연구했다.

2000년부터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에서 사회과학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에 대한 레오니트 후르비츠의 문제 의식을 '게임 이론'의 틀로 한층 정교하게 다듬은 공로를 인정 받아 레오니트 후르비츠, 로저 마이어슨과 함께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에릭 매스킨은 환경을 보호하거나 모든 시민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시장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정책 수준의 적절한 선택과 메커니즘, 기관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서로는 《Planning, shortage, and  transformation : essays in honor of J'anos Kornai》(2000년, 공저) 《Recent development in game theory》(1999년) 등이 있다.


Roger Myerson(1951.3.29.~ )

미국의 경제학자. 레오니트 후르비치, 에릭 매스킨 등과 함께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51년 3월 29일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1976년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82년에서 2001년까지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일했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mechanism design theory)’을 발전시킨 공로로 레오니트 후르비츠, 에릭 매스킨과 함께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정부가 정책을 입안하거나 제도를 개혁할 때 이해 당사자 간의 충돌로 실행이 어려울 경우 제도를 어떻게 설계해야 당초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로저 마이어슨은 게임 이론 분야에서 협조적 게임, 비협조적 게임이라는 두 가지 분야를 연구해 '불완전한 정보의 가치'라는 개념을 세우고, 경매 제도와 관련한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을 만들면서 경제학 뿐 아니라 사회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부터 시카고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Game Theory : Analysis of Conflict》(1991년), 《Probability Models for Economic Decisions》(2005년) 등이 있다.



2008년-폴 크루그먼


Paul Robin Krugman(1953.2.28. ~ )

미국 지식인, 경제학자, 컬럼니스트, 작가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경제학과 국제학부 교수이며, 2000년부터 블로그와 2주에 한번 씩 ‘Op-ed’로 뉴욕 타임즈의 컬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크루그먼은 그의 교역 이론 및 신교역이론과 환율 위기에 대한 해설을 담은 그의 교과서로 학계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 저서는 기업과 나라가 규모의 경제 때문에 생산하고 거래하는 것에 관한 모델을 제시한다. 크루그만은 1990년대 후반 ‘뉴이코노미’지의 비평가였다. 그는 1997년 동아시아 재정위기가 닥치기 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고정환율과, 타이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1998년 러시아 경제위기 직전에, 고정통화율의 유지에 이윤을 의존하는 LTCM (Long-Term Capital Management)와 같은 투자자들을 비판했다. 크루그먼은 일반적으로 신케인즈 경제학자로 평가되며, 그의 관점은 그의 저서 〈하찮은 번영 (Peddling Prosperity)〉에 요약된다. 크루그만의 〈국제경제학: 이론과 정치〉 (현재 8번째 개정판)은 미적분학을 포함하지 않는 국제경제학에 관한 표준적인 교과서다. 그는 1991년 미국경제학회에서 수여하는 존 베이트 클락 메달을 받았다.

경제학 연구논문학회 (IDEAS/RePEc)에 따르면 크루그만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명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자다.

크루그먼은 정치적으로 사회자유주의 또는 진보주의자로 평가되며, 조지 W 부시 정권과 외교와 미국 내 정책의 열렬한 비평가다. 많은 다른 경제학 평론가들과는 달리, 그는 동료에게 학계의 중요한 공헌자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한국브리태니커, 네이버의 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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