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생명공동체 제4차 화엄광장> 발제문
2001년 8월 11일, 홍성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강당
[대안교육에 대한 성찰과 과제]
대안교육과 평화교육의 만남을 위하여
고병헌 ∣ 성공회대학교 교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전문위원
들어가며 들어가며
교육학에서는 전통적으로 교사, 학생, 교재를 교육의 3요소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이는 교육을 ‘기술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또 교육의 주요기능을 ‘지식전달’로 볼 때나 성립할 수 있는 이론인 것이다. 그런데 교육은 배울 사람과 가르칠 사람, 그리고 교재가 마련되어 있으면 언제든 가능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늘 관심의 초점은 가르치는 ‘방법’-개인적 차원에서의 교수방법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방법의 조직화’로서의 제도까지 포함하여-인 것이며, 그래서 이러한 관점에서의 교육개혁이란 언제나 ‘새로운’ 교육제도나 교수방법을 개발하거나 도입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을 감히 ‘엔지니어링’(교육공학)하겠다고 대들 수 있는 풍토인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기술적 차원’ 이상의 것이며, 교육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에 대한 정의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전통적인 방식대로 세 가지 요소로 정리하여 표현하면, 교육은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교육목적 혹은 교육이념)와, 그러한 이유에 합당한 내용(교육과정과 교과서, 그리고 주로 상담이나 생활지도라는 형식으로 표출되는, 비조직화된 교육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서의 교육내용), 그리고 이러한 교육이 일어나는 ‘공간’으로서의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교육목적이 지금처럼 지식전달이라면 사실 7차교육과정은 ‘개혁’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반드시 존중과 사랑에 기초할 필요는 없으며, 수업을 진행하는 데 방해가 안 되는 정도의 관계 맺음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의무교육 단계인 초등학교의 교육목적이 ‘쇄소응대(灑掃應對)’, 즉 생활을 잘하고(쇄소: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 인간간의, 그리고 좀더 넓게는 다른 생명체와 자연과 올바른 관계(응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수준별 학습’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참으로 엉뚱한 발상일 수밖에 없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 즉 올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 교육이 존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한다면, 여기서의 가장 중요한 교육내용은 ‘삶’ 그 자체이며, 가르치고 싶은 교육내용을 실제로 그 삶을 살아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통한 교육’은 지금과 같이 학생이 교사를 고발하고 교사가 학생의 ‘스승’이 되지 못하고 있는 관계에서는 불가능하며, 교사와 학생의 전인격적인 삶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만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초등교육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교육하는 것이며, ‘삶’은 결코 수준을 나누어서 교육하는 것이 아닐진대, 초등 단계에서부터 섣부르게 ‘수준별 학습’을 도입하는 것은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었던, 교육을 지식교육으로 환원하는 관점을 공식화하는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앞으로 지식교육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집안의 경제력’이 여의치 않은 절대 다수의 우리 아이들이 이른 시기부터 교육을 포기하고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결코 ‘불가피하지 않은’ 비극의 사회적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총량(總量)에서의 국가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것이다.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유행처럼 교실붕괴, 교육붕괴라는 말을 쓰고 있고, 또 ‘붕괴’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 교육현장에서 목격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우리 교육자들은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할 때이다. 교육에 대한 그 모든 비판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또 학생조차도 잘 따라주지 않는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과연 교육이 지속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육은 분명히 존재할 필요가 있으며, 오히려 앞으로 그 필요성이 더해질 것이라는 것이며, 대안교육은 바로 이러한 교육에 대한 시대적 도전에 대한 하나의 교육실천적 대응이다. 달리 표현하면, 대안교육은 무엇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의, 제도교육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교육이 시대적 사명을 다하기 ‘위한’, 시대적 도전에 대한 교육적 응전(應戰)으로서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대안교육은 참으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기존교육과 다르면 무조건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기존 제도교육 안에서는 대안교육이 처음부터 가능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교육실천이 대안교육 범주에 포함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기존의 것과 ‘다름’, 혹은 ‘새로움’이 아니라, 문명사적 변혁기에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산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길이라고 모두 산꼭대기로 이끄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새로운’ 과학기술 중에는 반(反)인간적, 반(反)환경적, 반(反)생명적인 것이 얼마든지 있듯이, ‘새로운’ 교육방법이 더 비(非)인간적일 수 있으며, 대안학교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제도권 학교보다 더 심각한 교육적 문제를 노출할 수도 있다. 참으로 대안교육적 실천에 대한 판단 여부는 교육인적자원부의 관계법에서 하고 있는 분류에 따를 일이 아니며, 그 교육실천 주체의 자의적 이름 붙이기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할 일도 아니다. 적어도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제도권 안에서도 제도권 밖에서도, 교육 주체가 스스로를 어떻게 명명하고 있든지 관계없이, 다양한 유형의 대안교육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그 판단 기준의 핵심적 성격은 ‘경쟁력’이나 ‘속도’와 같은, 현대 문명의 주류(主流)적 가치에 밀리지 않을 수 있는, ‘지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안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면 대안교육의 판단 기준인, 대안적 가치의 핵심적 성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현재 세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사적 변혁기에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기초로 해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성격이 비슷한 평화교육과 관련하여 대안교육이 실현해야 할 핵심적 가치의 성격을 구명(究明)하고, 그에 기초하여, 그간 우리 사회에서 전개된 대안교육운동에 대하여, ‘교육의 3요소’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아울러 시급한 과제에 대해서 진단하고자 한다.
1. 대안교육과 평화교육의 만남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체제가 몰락한 이후에 갈등의 최대 초점이 군비경쟁과 핵무기 개발에서 환경문제로 전이되었다는 점, 그리고 인류의 건강한 존속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쟁이외의 이유로 삶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환경파괴나 생태계 교란, 우리들의 식생활과 소비생활의 결과물인 환경호르몬, 유전자조작, 전자파, 실업, 빈곤, 기근, 사막화, 온갖 종류의 차별과 인권침해 …… 등이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위기의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로 꿰뚫는 보편적 원인도 감지된다. 독일 브레멘대학교 경제학 교수 홀거 하이데(Holger Heide)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지금 우리 사회 일반이 당면한 문제들의 복합적 관련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적 접근이 아니라 총체적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보통 말하는 환경 훼손 문제나, 인간 건강의 물리적․심리적 파손, 인간 관계나 공동체를 이루는 기초의 파괴 등은 사실상 모두 뿌리가 동일한 문제들이라고 봅니다. 그 뿌리는 한마디로, 인간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맺는 관계가 파괴적이고 착취적이라는 점입니다. 그 바탕에는 자본의 파괴적 합리성이 근본 문제를 이루고 있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실업 문제, 작업장 내 노동통제 문제, 사회 보장과 그 감축의 문제, 인종주의, 성차별, 국제 연대 등의 특수한 문제들도 모두 이 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만약 홀거 하이데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면, 즉 ‘인간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맺는 관계가 파괴적이고 착취적’인 것이 평화를 저해하는 근본 뿌리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이러한 분석이 한반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평화운동은 일반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의 전환에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우리의 관계 맺는 방식을 파괴적이고 착취적으로 만드는 근본 원인을 찾아서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세계화시대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평화운동과 평화교육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평화교육과 대안교육이 만나게 된다.
1995년 7월 5-6일 교육을 개혁해보고자 노력해 왔던 교사, 교육이론가, 학부모, 사회운동가, 학생, 일간지 기자 등 70여명이 천주교 수지교육원에서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첫모임을 만들어 낸 이래로 교육부가 1996년 말에 ‘학교 중도탈락자 예방 종합대책’을, 1997년 3월에 ‘부적응학생 교육을 위한 대안학교 설립‧운영 지원계획’을 발표하기까지, 실로 1년 6개월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대안교육운동’은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하기조차 힘든 정도의 사회적 관심을 받았으며, 그 추세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소위 우리 사회의 ‘교육개혁운동사’에서 매우 전례 보기 드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처럼 단기간에 ‘대안교육’이나 ‘대안학교’가 확산되게 된 데는 우리 사회에 평화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등과 같이, 지향점이나 운동방식에서 전통적 의미의 운동과는 약간 다른, 새로운 대안적 사회운동이 생겨나면서, 대안교육이 그러한 운동의 추진 동력으로서, 또 그러한 운동을 지속‧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다양한 운동주체들간에 확산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사회개혁 수단으로서의 평화교육과 대안교육의 위상과 그 가능성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현대 사회의 최대 문제중의 하나인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러저러한 노력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생태 위기의 근본적 해결은 지속적인 생산력 증대와 그로 인한 자원 고갈을 조장하는 소비주의적 삶의 양식을 포기하고 ‘지속 가능한 소비(sustainable consumption)’를 우리 모두가 일상화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소비’를 일상화한다는 것은 바로 생태적 질서를 인간 사회의 조직과 활동 원리에 도입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렇듯 ‘지속 가능한 소비’가 그 사회의 조직과 활동의 원리로 작용하는 사회를 우리는 ‘생태적 공동체’라고 부른다. ‘공동체’란 한마디로 삶의 원리로서의 ‘더불어 사는 삶’이 실체화된 ‘공간’을 말하는데, ‘생태적 공동체운동’은 생태 파괴로 대변되는 전인류적인 위기의 본질을 자각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의도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대안적 가치인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을 어떻게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만들며, 또 어떻게 그 방식을 다른 사람‧다른 집단‧자연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통일하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생태적 혁신을 위한 프로그램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로지 확실한 소득과 위치를 가진 깨어 있는 중산층 시민 정도가 자신의 자동차를 가급적 몰고 다니지 않고 물질적 부에 대한 광기 어린 맹신주의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며, 이런 것을 비교적 힘들게 살아가는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한테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 ‘희망’을 만드는 것, 바로 여기에 대안교육의 시작이 있으며, 왜 우리 사회에서 대안교육운동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사회적으로(특히 사회운동 단체에) 확산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를 어떻게 교육의 결과로서 ‘일상 생활화’할 것인가가 대안교육의 핵심적 내용이 될 것이며, 이는 그대로 평화교육의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다.
“공동체라는 테마는 단순한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근본적인 주제이다. …… 그것은 이웃, 마을, 더 큰 지방의 사회적․물질적 쇄신을 위한 실천적인 수단을 의미한다.”
평화운동, 평화교육이 공동체에 새삼스럽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세계 금융자본에 의해서 국가 경제가 절단 나는 것을 막고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 ‘잘사는 20퍼센트와 못사는 80퍼센트’로 나뉘어지고 있는 지금, 기근과 절대 빈곤의 확산을 막고 식량 위기를 완화함으로써 개인은 물론,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지금의 위기를 낳은 사고와 삶의 방식, 관계 맺는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방식이 필요한데, 공동체가 그 유력한 한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신화이다. 비록 유럽연합과 그 회원국들,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안이 없다는 생각은 공공 기관들에 대한 불신을 퍼뜨리며,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주체적인 삶(self-directed lives)을 살아갈 자유를 제한시키는 생각이다. 이 체제는 변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
“ …… 생태마을 건설운동은 아마도 글로벌 경제에 의존하는 현 상태에 대한 가장 완전한 해독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진 산업 세계에서 사람들은 현재 생활의 낭비와 오염, 경쟁과 폭력을 없애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의존하는 한편 더 협동적인 지방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러한 북반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노력들은 오늘날 세계의 덜 발전된 지역에 부과되는 서구형 도시 모델에 의미 있는 대안을 제공한다.”
지금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그리고 세계의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안운동, 대안사회운동’으로서의 ‘공동체운동’은 서구의 환원주의 사고,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 준 생활에서의 ‘편리’와 ‘진보’, 특히 17-18세기에 형성된 ‘진보’ 개념, 그리고 이런 것들의 총화로서의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인간과 자연간의 ‘존재론적’인 관계 맺는 방식을 ‘부정’하면서, 그리고 최근의 경제적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무한질주에 도전하면서 대안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운동의 전개방식도 과거의 공동체운동과는 다르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리 속으로, 이웃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운동이 가능하고, 참여 폭도 국가를 넘어 다른 지역, 다른 국가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연대가 가능하기 때문에 평화운동과 공동체운동 사이에는 많은 접점이 형성되며, 그만큼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대안적 평화운동, 평화교육도 다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공동체적 삶과 관계가 실천적 평화교육의 새로운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그 출발점이 공동체의 역사나 이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갈등하고 반목하며, 분열하고 차별하며, 자연을 파괴하는 오늘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상황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이어야 한다. 이제껏 우리의 평화운동, 평화교육의 주된 방식은 갈등이 문제라고 하면 갈등의 원인과 종류, 그리고 그 극복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지역이나 국제 분쟁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래서 국제이해가 ‘왜’ 필요한지를, 자연 파괴가 ‘왜’ 문제이며, 그래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이 ‘왜’ 중요한 지를 가르치는 것, 이것이 학교나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평화교육의 주된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어떤가? 국제분쟁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있는가? 개인이나 집단간의 갈등은 어떤가?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은 접어두고라도 쓰레기 양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이렇듯 교육과 현실이 서로 겉도는 것인가?
평화교육과 같이 사회를 변혁하려는 교육실천일수록 삶이 실려야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주위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고, 심지어 교사도 그대로 살지 않는 상황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우리 아이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교육에서는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교사가, 부모가, 사회가 먼저 그처럼 ‘살아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바로 이러한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는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2. 풀무학교, 평화교육적 대안교육의 한 전형
우리 사회는, 그리고 나아가 우리 인류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해서 미래의 지속적인 생존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기계적 세계관, 인간중심주의, 생산력주의, 성장주의, 경제가치 위주 따위의 가치관에 근거한 현대 산업문명이 지구촌 사람들을 ‘풍요와 소비’라는 허황된 꿈을 좇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부단히 ‘인공적 결핍’을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과소비 사회’로 몰아 가고, 그 결과 자원의 고갈과 생명체의 멸종, 그리고 생태계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의 파괴를 초래한 것이다. 물론 과학기술 만능주의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조차도 과학기술의 발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있다. 그러나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게놈지도가 막상 완성되고 보니 처음 기대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결과가 나왔다. 즉 생명의 신비는 여전히 과학기술이 닿는 곳 너머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모든 것의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리 나라는 마치 세계화․정보화만 하면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가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면서, 세계화의 성공적 추진에 맞추어서 온갖 제도와 법을 재정비하고 그런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개혁도 예외는 아니다. 1995년 5월 31일 ‘제 1차 교육개혁안’ 이후 계속적으로 발표되는 일련의 교육개혁안들은 바로 세계 산업체계의 변화에 대한 교육적 적응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제도바꾸기와 교육방법론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우리의 ‘교육개혁운동사’는 ‘교육제도개혁운동사’, 혹은 ‘교육방법론수입사(敎育方法論輸入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교육운동은 모두 교육제도의 개선이나 교실 현장에서의 수업 방법론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왔으며, 그 결과 사상적 차원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차이라는 것은 교육 현장에는 별로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해 왔다. 실로 그 동안의 교육운동 경험은 우리들에게 교육관련 법과 제도의 개선에 초점을 맞춘 교육(개혁)운동은 교육의 질적인 변혁은 물론, 법과 제도 그 자체도 변화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바뀐 토대 위에서 제도가 새로워지는 것이 진짜 발전이지요. 사람은 그대로인데 제도만 바뀌어서야 페인트칠 색깔만 바뀐 가짜가 아닐까요? ⋯”
이제 교육에서 진정으로 질적인 변혁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접근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교육에서의 변혁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재건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행동적, 제도적인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사고의 변화, 가치 형성에 있어서의 변화를 지향하는 방식, 현 체제의 제도적 가치를 문제시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교육체제, 사회질서가 뿌리를 두고 있는 토대 그 자체와 가치의 근본적 전제들을 점검하고, 제도와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를 점검하는 변혁주의적 방식으로만이 비로소 교육에서의 질적 변혁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교육방법론에 있어서도, 교육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방향을 정할 때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존재 의의를 아는 사람은 존재하는 방식도 안다”는 니이체의 말처럼.
우리의 대안교육 실천들은 바로 교육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 역사적 안목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인 교육적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는 가치가 부재한 사회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로 총론이 없이 각과 교과교육론만 난무하다. 한마디로 중심이 없이 너무 쉽게 바뀐다. 그래서 대안교육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러한 가치에 기초해서 우리의 다음세대를 교육하려고 하는 것이며,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바로 이 대목에서 대안교육과 평화교육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그리고 나아가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대안교육과 평화교육은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에 터 해서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 새로운 가치의 핵심적 성격은 공동체적이어야 하며, 지속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 영산성지고등학교, 양업고등학교, 한빛고등학교, 경주화랑고등학교, 간디학교, 원경고등학교, 두레자연고등학교, 푸른꿈고등학교, 세인고등학교 등의 정규학교와, 변산공동체학교나 실상사작은 학교 등과 같은 비정규 교육기관, 그리고 단기 프로그램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대안교육 실천들 속에는 우리 아이들을 이웃, 다른 인종 혹은 다른 민족,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적 인간,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짙게 묻어 난다. 기존의 상식에서 볼 때, 설사 좀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지속 가능한 소비생활’을 하며, 모든 생명과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교육이념, 바로 이 ‘지속 가능한, 그리고 지속 할만한 가치’에 근거한, 생명을 중시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생태적 교육이념이 우리의 대안교육운동의 핵심적 성격을 이루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교육을 꿈꾸거나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지속 가능한 가치’의 성격이 제임스 로버트슨이라고 하는 미래학자의 말속에 매우 간결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가속화시키는 것 대신에 우리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 미래에서 중요한 것은 계속적인 팽창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서의,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의 균형이다. 이것은 성장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은 기술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것이다. 유일한 현실적인 길은 이 작고 좁은 지구 위에서 서로 협동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에 최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 ”
그러면 이러한 교육적 실천이 우리 사회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통해서 평화교육으로서의 대안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풀무학원의 10가지 교육목표>
1. 예배와 성서과목을 통하여 성서 위에 학원을 세우고,
2. 자기와 남의 가치를 깨달아 존중하고 자기실현에 힘쓰는 기본 층의 평민을 기르고,
3. 입시 편중 교육을 배격하고 인문-직업 교육의 이원성을 극복하는 머리(학문), 가슴(신앙), 손(일: 노작)을 조화하여 생명을 가꾸는 교육을 위하여,
4. 배우는 사람 중심으로 각자를 소중히 여겨 소질을 계발하는 작은 학교를 지향한다.
5. 예배하고 배우며 생산하는 생활을 기숙사 중심의 공동체 생활
6. 교사회, 학우회, 이사회, 학부모회, 수업생회가 동등한 자격으로 협력 보완하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교육,
7. 도서, 음악, 영상 매체, 발표 등의 학생 문화 환경으로 밝은 학교생활이 되도록 한다.
8. 지역사회 중심의 생활 변화를 원칙으로 지역과 학교가 더불어 사는 협동 공동체를 만들고,
9. 평화로운 국제사회 속에서 살기 위하여 외국어를 배우고 국제 자매결연과 교류를 추진하며,
10. 자율정신과 바른 모습을 살려 사학이 사회를 향하여 할 수 있는 책임을 진다.
<풀무학원 교육목표의 점검>
1. 어떤 사람이든 절대가치를 가지는 훌륭한 것을 가지고 있다.
2. 교사는 학생의 성장을 돕는 진리 탐구자로 생활하고 일하는 친구요 협동자다.
3. 학생의 표정만으로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규모가 작은 학교라야 한다.
4. 학교는 수시로 변하는 관청의 지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5. 가정, 학교, 지역사회는 하나의 커다란 종합된 교육환경을 구성한다.
6. 정성껏 성실하게 남을 섬길 줄 아는 성숙된 인간을 꾀한다.
7.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랑과 진실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8. 이 모든 것들은 새 미래를 창조하는 공동체 생활의 실현을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더불어 사는 평민’을 교육하겠다는 목표로 1958년 개교한 풀무학교는 우리 나라에서 공동체적 가치에 기초한 평화교육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학교라고 볼 수 있다. 풀무교육이 가장 특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육이념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더불어 사는 삶’이다. 풀무교육이 말하는 ‘더불어 사는 삶’은 크게 네 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자신과 더불어 사는 것: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적인 차원에서의 ‘더불어 사는 삶’으로서, 머리하고 가슴하고 손하고 분리되지 않은, 즉 지식 따로 실제 능력 따로 가치관 따로 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도록 자기 자신하고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이 되어야 하고 교육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② 타인과 더불어 사는 것: 이 차원에서의 ‘더불어 사는 삶’을 경험시키기 위해서, 풀무학교에서는 전체 학생을 생활관(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하고 있다.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기숙사야말로 생활을 통해서 배우는 좋은 교실이 될 수 있으며, 특히 핵가족 시대에는 특히 ‘바닷가 돌이 파도에 씻겨서 매끄럽게 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교육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체육이나 음악에서의 합창과 같이, 공부도 친구들과 같이 해야 더 많이 배울 수 있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풀무학교에서는 이러한 활동에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학우회와 전교회의, 예배와 생활의 ‘공동체’ 등도 학생들이 ‘더불어 사는 삶’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역할하고 있다.
③ 지역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학교): 지역이 곧 열려진 학교이고, 학교는 곧 지역의 한 부분이다. ‘함께 사는 지역’을 위해서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 풀무학교의 생각인데, 이는 지역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께 사는 지역사회가 되어야 학교도 좋은 교육 환경 속에 있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학교는 그런 좋은 환경 속에 있어야 지역을 위해 일하는 인재를 공급해 줄 수 있으니까 서로 품앗이인 셈이라는 것이 풀무학교의 경험이다.
④ 이웃 나라와 더불어 사는 삶 (세계 평화): 풀무학교는 외국의 자매학교와의 교류를 통해 이른 시기부터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키워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는 특히 개교 초창기부터 평화교육을 풀무교육의 핵심적 내용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풀무학교에서는 ‘더불어 사는 삶’으로 표현되는 평화교육이 구체적인 교육과정으로,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학교생활을 통해서, 전체 학교 분위기에서 녹아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은 풀무가 지향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 중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대안학교들이 표방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가치관의 혼란, 가치관 부재의 시대, 변혁의 시대에 새로운 도덕적 가치와 정신적 질서의 필요성은 한층 더 절실해 지고 있다.
풀무학교의 평화교육은 또 다른 측면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종교라는 말에는 ‘맨다’는 뜻이 있다.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내 속에 들어와 하나가 되고, 나아가 이웃과 자연과 세계를 하나로 매어 질서와 평화를 낳는 큰 힘이 종교인 것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함으로써 자기 종교를 심화시키고 공통의 기반을 넓혀 대화를 촉진시켜 나아갈 때, 궁극적으로는 종교에 기초한 교육을 통하여 더 높은 진리와 사랑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풀무교육의 신념이다. 종교간의 평화는 사회평화 실현의 근간이다. 현실 세계의 분열과 대립 속에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 즉 종교는 현실을 근원적으로 바르게 풀어 가는 실제적인 사람과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올바른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풀무교육이 평화교육을 중심적인 교육내용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하면, 현대를 움직이는 대도시, 소비문화, 거대산업조직, 대량생산방식이라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본적 가치관이 있고, 풀뿌리 지방자치, 생명중시문화, 시민운동, 적정기술, 에너지 소비절약, 소규모기업, 환경생태친화적 농공산업, 도시와 농촌의 직거래라는 대안적 가치관이 존재하는데, 이 두 가치관을 비교하면, 인간을 기르고 더불어 사는 생활을 가르치는 교육이 택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매우 자명해지며, 풀무학교는 바로 후자의 ‘더불어 사는 삶’, 평화를 지향하는 삶과 교육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조국의 정신적 기초를 놓는 데 생애를 바칩시다. 남자나 여자나 여러분이 우리들 다같이, 작게 혹은 크게,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이 목표를 이루는 데 한 멤버가 되어 이 땅에 선을 이루고 조금이라도 밝은 빛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이 땅에 언제까지나 거짓이 넘치고 불의가 판치게 허락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선후배들은, 수업생이 나라와 가정과 친구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아가 하루하루 보람있게 보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배울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풀무학교가 있는 충남 홍성에서는 실제로 지역의 주요 기관 사이의 생산적인 협조관계에 기초한 풀뿌리 지방자치, 생명중시문화, 지역시민운동, 생태적 기술, 에너지 소비절약과 태양열, 풍력 등 대체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실험적 실천, 환경생태친화적 유기농업, 생협에 기초한 도시와 농촌의 직거래 등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막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하는 대안적 가치들이 이미 진작부터 실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중심에는 풀무학교와, 그 창업생들의 헌신적이 삶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풀무교육은 이미 43년 전부터 교육을 통한 ‘희망 씨’ 뿌리기를 해왔던 것이며, 지금에 와서 이제 그 결실을 우리 사회와 나누기 시작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대안교육(적어도 필자가 생각하는)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3. 대안교육에 대한 비판적 성찰
지금까지 풀무학교를 살펴 본 이유는 그 학교의 장점을 드러내어 우리 교육의 지표(指標)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라, 이 글의 목적인, 그 동안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실험되고 있는 여러 가지 교육실천에 대한 성찰의 기준으로 삼고자 함이다. 대안교육은 인간의 삶에 비유하자면 아직 돐도 안 되었고, 따라서 가지치기보다는 충분한 햇빛과 물로 성장을 촉진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각각의 대안교육 실천 단위에 대한 섣부른 비판적 성찰은 오히려 사기를 진작하기보다는 오히려 저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때때로 성찰하는 것도 필요한 법, 따라서 이 두 가지를 함께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본(本)을 세워서, 거기에 비추어 나를 스스로 성찰하는 것일 것이다. 스승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주절이 주절이 떠드느니 보다는, 이 사람이 바로 스승이다라고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백 번 낫듯이, 대안교육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이러쿵 저러쿵 논쟁하느니, 대안적 교육을 잘 하고 있는 학교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대안교육운동의 역사나, ‘특성화학교법’에 따라 새롭게 인가된 대안학교들 각각의 교육실천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각 대안교육 실천 단위들이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함에 있어서 중심적으로 짚어봐야 할 것들을, 앞에서 새롭게 정리해 보았던, 교육목적과 교육내용, 교육‘공간’(만남)이라는 3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과연 진선진미(盡善盡美)하고 있는가
대안교육을 실천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는 학교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며, 건물은 어떤 식으로 지어야 하는가, 교육과정은 어떻게 구성할 것이며,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학부모와의 관계, 학교 운영자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 등 참으로 많은,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자기의 힘으로 다시 한 번 답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안(代案)’의 의미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 목표에 이르는 도정”을 뜻하기 때문에, 교육의 이념과 철학을 다시 세우고,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를 수 있도록 교육의 모든 과정 하나 하나에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 대안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전제적인 조건이자, 동시에 특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안교육은 어떤가? 과연 앞에서 열거한, 대안교육을 위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철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였는가? 과연 대안적 가치에 기초한 교육을 원하였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교육이념이 녹아난 교육과정을 개발하였는가? 교육과정이란 한 마디로 교육이념과 철학의 구체적 표현이며, 동시에 그 실현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대안교육을 표방하는 교육 기관들은 각자의 ‘자립적인 교육과정’을 개발하였는가, 아니면 정부 주도의 7차교육과정의 시범학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흔히 가치와 이념, 철학의 문제를 젖혀 버리고 나면, 교육개혁은 그저 교육방법을 바꾸는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는데, 혹시 대안학교들도 대안교육을 방법론 차원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앞에서 인용한 니이체의 말(존재 의의를 아는 사람은 존재하는 방식도 안다)처럼 교육방법은 교육하는 이유에서 나온다. 만약 그 동안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교육목적 혹은 교육이념)와, 그러한 이유에 합당한 내용(교육과정과 교과서, 그리고 주로 상담이나 생활지도라는 형식으로 표출되는, 비조직화된 교육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서의 교육내용)”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대안학교들이 생겨나면서 했던, 사회적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물론 이 모든 일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풀무학교는 이미 43년 전부터 해 온 일이 아닌가! 풀무학교 만큼만이라도 하자!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성패는 사실 교사에게 달려있다. 교육의 시작과 끝은 교사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사실이다. 모든 교육적 기획의 성패는 결국 교사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 집단을 그처럼 혹독하게 몰아붙이면서 낙담하게 만드는, 최근의 교육개혁 방향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교육은 결코 교과서를 새로 집필하거나 수준별 수업을 한다고 해서 개혁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은 교사이며, 이는 대안교육에서는 더욱 그렇다.
“훌륭한 가르침은 하나의 테크닉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훌륭한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교사교육과정을 보면, 학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며, 가르치는 사람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의 교육계에 대한 회의와 의심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교육현장에서 경험하는 무기력과 좌절 때문에 우리 교사들 스스로 먼저 학교의 교육적 가능성에 대해서 불신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과연 우리 교사들은 그 동안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가르쳐왔는가, 우리 교사들 스스로는 자신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고, 어떤 삶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는가, 우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르친다는 생각 속에서 어쩌면 우리 교사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과 내면의 모습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아름다운 삶을 가꾸고 만드는 데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그 결과 황폐해진 교육현장에서, 스스로도 ‘바로 이거야’라고 답할 수 없는, 그래서 무엇이 과연 옳고 아름다운 것인지 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자신 없는’ 모습에 대해서 먼저 무기력과 좌절을 느끼고 서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물론 대안학교협의회에서 대안학교를 위한 교사교육과정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교육이념의 학교들의 다양한 요구를 공동 교육과정이 어느 정도 만족시키고 있는지는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하며, 아울러 학부모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안학교의 학부모는 제도권 학교와는 다르게 학교 운영과 교육에 늘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정은 사실 별 근거가 없다. 교육이념에 따라 교사를 양성하듯이, 그만큼의 노력으로 대안학교의 학부모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교육을 해야 한다. 대안교육은 결코 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세계적인 대안교육실천들이 저마다의 교육과정과 교재, 교육방법, 그리고 특히 교사양성과정과 학부모교육과정을 무엇보다도 먼저 확실하게 구축하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 우리 대안학교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대안적 철학하기
많은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지금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은 ‘본래’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고, 따라서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하고 있으며, 그래서 전달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는 학교교육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세속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교만해져 있고, 물질에 대한 사용가치에 길들여져 있고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물질적 욕망이 커지며 상대적 박탈감만 더욱 키워 가는 상황”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한편으로는 고학력사회, 지식기반사회, 세계화시대, 정보화시대, 생명공학시대를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똑같은 것을 ‘위험사회’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혼란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마디로, 인류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앞으로도 ‘행복’을 추구하면, 그것이 곧 ‘불행’의 씨앗을 만드는 것이라는 역설의 성립인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그토록 허우적대며 추구했던 그 지식덩어리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한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기술과 지식이(그리고 그에 기초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생태적 위기, 빈곤과 기아, 전쟁과 갈등을 낳는 주된 원인일 수 있다는 역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혼란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리고 더 나아가 전세계가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서 전달하고, 또 재생산하는 지식의 본질을 새롭게 구명(究明)하려는 노력은 바로 그 자체가 세계가,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위기 극복을 위한 철학적, 인식론적 기반을 세우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가치중립적(value-neutral)'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안학교에서도 그러한 생각이 목격되기도 하는데, 이는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분명 ‘가치내재적(value-ladenness)’이며, 바로 그 가치가 학교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과서를 만들고, 교육의 이념과 목표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교육에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특정한 ‘가치’는 대개 ‘지식’이라는 형태를 띠고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재생산되는데, 이렇듯 특정한 ‘가치’가 녹아난 지식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행동과 태도, 품성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세계와, 그리고 자연(다른 생명체를 포함한)과 관계 맺는 방식의 기본적인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본질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곧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는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며, 교육적으로는, 지식의 본질적 성격을 이해하는 작업 그 자체가 그대로 교육개혁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운동의 핵심적 주제가 된다.
“문명의 위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들은 인류사적인 전환기에 서 있다. 이 위기는 현대문명을 지켜온 세계관, 인간관, 교육관을 그대로 둔 채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나 교육을 보는 눈과 사고방식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혼미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과 같이 새로운 교육이념, 새로운 교육의 방향성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다.”
과연 우리는 교육을 변혁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위기에 처한 이 사회에 희망을 만들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지금의 위기를 낳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탈피해서 대안적인 방식을 모색하고, 그 위에 우리들의 교육을 새롭게 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안교육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대안적 철학하기’를 생활화해야 한다. 문명을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그 문명의 외현(外現)인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이며,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대안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 즉 일상적 삶에서의 ‘대안적 철학하기’인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안교육을 표방하는 많은 교육현장에서조차도 기존의 주류적 가치가 여과없이 관철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야외에서 상대편을 싸워 이기는 놀이 방식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단결과 협동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교사를 볼 때, 잡혀서 고통으로 팔딱거리고 있는 물고기를 둘러싸고 앉아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에서 사는 것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교사를 볼 때, 식판을 뒤집어 치게 하면서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을 통해서 국악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려고 대드는 교사를 볼 때, 일상에서의 삶의 방식이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교사를 만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안학교의 운영이나 분위기에서 대안적 가치가 녹아나 있음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 솔직히 대안교육이 가능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3) 자립형 사립고에 대하여
자립형사립고에 대하여, 제도권은 물론, 대안교육 진영 일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어떤 제도이든, 거기에는 장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획일적인 판단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립형 사립고에 대한 찬성 주장을 지켜보자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립(自立)’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남의 힘을 입지 않고 스스로 서기(자립)’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능력만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사업이라고 하면, 지금처럼 자립 능력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오로지 경제적 자립도에 두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인간을 교육하는 학교의 자립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의 자립을 기업처럼 경제적 자립 능력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가?
교육의 목적을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 즉 수신(修身)이라고 한다면, ‘수신’하기 위해서는 뜻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무릇 교육 기관의 자립 여부는 바로 이 교육적 ‘뜻’을 바로 세우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재정적 능력이야 학교 운영의 기본적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재정적 자립 능력과는 그리 큰 관계가 없지 않은가! 참으로 자립을 보장해야 할 것은 학교라는 건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적 ‘뜻’, 즉 건학이념인 것이다. 풀무학교를 보라! 지난 43년을 무엇으로 버텨왔는가! 풀무학교는 지금도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처럼 무지막지하고 엉터리 같은 시대에도 꺾이지 않고 지금에 이르러 세계적인 교육을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뜻’이었으며, 그 ‘뜻’의 ‘나눔’이었다. ‘뜻’을 같이 한 사람들간의 ‘만남’, 그리고 그 ‘뜻’에 기초한, 교사와 학생의 ‘만남’, 바로 이러한 만남이 풀무학교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아니 당시 사회의 기득권 층과 문교부의 유형, 무형의 압력과 방해를 극복하고 처음의 그 교육적 ‘뜻’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인 것이다.
“ …… 믿음과 민족의 삶을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로 보고,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해 살다간 속칭 ‘무교회 운동’의 창도자 김교신, 이 역사를 이끌어 온 주체는 민중이며 그래서 이 민중을 일깨워 하나님이 맡기신 귀한 세계사적 몫, 즉 고난을 섭리사적으로 삭인 평화사상으로 거듭나는 ‘씨’로 바로 세우자는 함석헌, 도시교육․선발교육․간판교육․출세교육으로 ‘사람’이 망가지고 그래서 이 겨레가 썩어가고 있다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새 교육을 열어 농촌교육․민중교육․정신교육․인격교육으로 이 민족을 소생시키자고 외치며 벽지 충남 홍성 풀무골에 풀무학원을 창설한 이찬갑, 뜻을 높이 세우는 일, 즉 이상의 적립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서양 격언 ‘뜻을 세우면 그대로 된다(a man is as he thinks)’면서 전인교육의 터전을 경남의 오지 거창에 세워, 이제는 전인교육의 산실은 거창고등학교라고 널리 알려지게도 한 전영창, ‘민중’과 ‘해방’을 하나로 다지면서 민중해방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민중신학자 안병무, 그리고 내가 지금 서평 형식으로 받들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 구원을 필생의 사명으로 살다 가신 청십자 의료보험의 창설자 장기려다. …… 나는 이 분들을 알게 된, 시체말로 ‘만남’의 은총에 감사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내가 간증해야 할 사항은, 이 같은 만남이 모두 나로서는 김교신을 만난 연유에 비롯됐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 듯이,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신학적 전개이고, 김교신과 함석헌, 이들의 제자 뻘인 이찬갑은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동인이고, 장기려는 『성서조선』의 정기구독자로 유치장 신세도 졌고, 광복, 월남 후에는 함석헌의 영혼의 제자이자 후원자였고, 전영창은 실은 이 장기려를 만나고, 장기려는 전영창을 만나, 이 둘이 의료구원 사업과 인격교육 사업을 하게 된다. ‘만남은 다시 만남을 낳는다’ 하거니와, 위 다섯 분의 만남이 그 전형적인 보기가 아닌가.”
좀 길게 인용되었지만, 이 인용 글은 우리에게 풀무교육은 무엇보다도 먼저 뜻을 굳건히 세우는 일, 그리고 그 뜻을 나눌 이(同志)들을 사회 곳곳에 많이 만들어 가는 것에 제 일의 힘을 쏟음으로써 비로소 ‘자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학교를 운영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은 국민 기본권 차원에서 당연하게 요구할 일이며, 더구나 스스로 ‘뜻’을 세워 교육할 수 있는가를 정부가 대신 판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오로지 경제적 자립 능력만을 고려한 판단은. 건학이념도 없는, 있다고 해도 별로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명목적으로 내 세우는 학교가 돈이 많아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과정을 ‘마음대로’ 운영하게 했을 때, 도대체 어떤 교육을 하게 될 것인지를 꼭 경험해봐야 알 수 있단 말인가! 대안교육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 학교의 이해관계로만 자립형 사립고 문제를 접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오며
이제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문제 인식에 공감할 수 있는 한, 이것이 곧 대안교육 발전을 위한 과제이며, 동시에 연대적 노력을 위한 제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대안교육의 존재 의의는 위기의 시대에 교육을 통해서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 따라서 대안교육은 대안적 가치 위에 서야 하는데, 바로 이 점에서 대안교육은 평화교육적 성격을 띠게 된다.
셋째, 평화교육적 대안교육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학교 중의 하나가 풀무학교이니, 풀무학교를 본(本)으로 하여 각자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자.
넷째, 대안교육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그 첫째가 교육이념과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러한 교육이념과 철학을 반영한 교육과정과 교재의 개발이 시급하다.
다섯째, 교육이념에 맞는 교사교육과정과 학부모교육이 시급하다.
여섯째, 교육의 자립은 경제적 능력에서가 아니라, 그 교육적 ‘뜻’에 좌우되는 것이니, 자립형 사립고에 대한 입장 정립에서 신중해야 한다. 학교의 자립은 ‘뜻’의 사회적 확산에 기초해야 한다.
이상의 정리한 내용들 중에서, 대안교육 영역에서 이미 잘 실천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실상사 작은학교는 그 교육의 기본 뿌리를 인드라망, 즉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치로써 주류적 가치관을 극복하고자 함을 교육의 목표로 두고 있으니, 그 교육실천이 이미 평화교육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며, 각 종단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들 역시 ‘뜻’에 기초한 자립의 기반을 이미 굳건히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학교들은 그 ‘뜻’과, 그 ‘뜻’을 실현하는 과정이 ‘진선진미’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될 것이다. 또, 각 교육 기관들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의 성격이 서로 다를 것이니, 처한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래도 공통적이며, 따라서 연대할 수 있는 과제라고 판단되는 것만을 간추린 것이다. 부족하지만 <화엄광장> 토론을 위해서 준비한 글인 만큼, 토론을 여는 역할만 할 수 있다면 대 만족이며, 이 글이 놓치고 있거나 잘못 짚은 부분이 있다면, 토론을 통해서 바로 잡히길 희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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