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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활

마을공동체 교육운동과 마을수준교육과정(문재현2001)

by 마리산인1324 2009. 8. 21.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2001년 5월

http://www.maul.or.kr/

 

 

마을공동체 교육운동과 마을수준교육과정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문재현

 

1. 여는 글

 

우리 모임이름을 마을수준교육과정연구소에서 마을 공동체 교육연구소로 바꾼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여기에 대한 사회의 반응을 우리 입장에서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이름을 바꾼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이는 대중매체에 우리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본격적인 사회적 활동도 전개하지 않았던 그 동안의 실천과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것은 우리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대중매체를 상대로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홍보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 사회단체, 교육운동 단체들의 활동에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소통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대중매체에 매달려 기존의 사회적 소통관계에 얽매인다면 운동의 자립성은 물론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창출함에 있어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우리의 삶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단지 이상이 아닌 일상 생활의 규범으로 구체화하고, 그러한 삶의 가치와 즐거움을 사회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우리 활동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이 장애가 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일정정도 검정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내용에 동의하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경 험을 나누고 지원해 왔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교사들, 한국보육교사회원들, 여러 사회단체 활동가들, 우리가 개최한 연수에 참가했던 교사들인데 그들은 우리가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전에 마을 수준교육과정 연구소에 대해서 사람들이 물어올 때 설명하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마을공동체 교육연구소라고 하니까 설명하기도 쉽고 사람들도 바로 이해해서 좋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 특히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마을공동체 교육과 마을수준교육과정이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오히려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말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마을공동체가 서지 못하면 마을수준교육과정이 불가능하고 마을수준교육과정이 있어야 공동체교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이름을 바꾸었다하더라도 마을수준교육과정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우리모임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두 개념은 포괄하는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개념이 교육학적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마을공동체 교육은 그것이 공동체운동과 연결될 수밖에 없어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임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같은 관료조직의 통제를 받는 연구단체가 아니라 교육운동단체이기 때문에 마을공동체 교육이란 말이 우리의 지향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가 본격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물어올 것이다. 강의나 소모임 활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모임이 어떤 모임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각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말로 답변해왔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의 실천이 말의 문화를 몸에 익히기 위해 즉,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표현력과 문제해결능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집중해 왔기 때문에 글로 정리하는 것에 덜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이제 말의 문화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지금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글을 통하여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우리 삶과 모임의 질적 발전을 위해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내용에 대해 모임 전체가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 위해 먼저 내 생각을 정리해 본 것이다.

 

2.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마을수준교육과정에 대해 이해하려면 공동체로서의 마을과 교육학 용어인 교육과정에 대한 개념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다양한 수준의 교육과정 즉 국가수준교육과정, 지역수준교육과정, 학교수준교육과정, 개인수준교육과정간의 위상과 기능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1) 마을에 대한 이해

 

우리 이름이 마을수준교육과정연구소였을 때 내가 어디에 강의를 가거나 다른 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났을 때면 항상 두 가지 질문을 받았다.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이 17세기에서 19세기에 형성된 전통적인 마을인가에 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농경중심사회에서 형성된 마을운영원리와 공동체 문화요소들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가에 대한 것이었다. 앞으로 우리 연구원들도 많이 받게 될 질문인데 여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 정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검증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을이란 개념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를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 속에는 우리가 가져다 써야 할 자원이 무한하며 그러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공동체 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실천 속에서 검증해 온 공통적인 생각이고 감정이다. 먼저 우리가 실천하려고 하는 공동체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와 어떻게 다른지 정리해보자.

 

17c - 19c 에 형성된 마을 공동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였다. 시장의 보완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급 자족적인 생활공동체였고, 독자적인 생활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장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종교공동체였고 마을 남성들이 모두 두레에 참가해서 공동노동을 하는 생산공동체, 대동놀이를 같이 하는 놀이공동체였다.

 

이처럼 의례와 노동, 놀이의 모든 국면에 걸쳐서 다양한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 규범이 마을의 통일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공동체를 오늘날에 그대로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농촌마을의 경우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 마을의 운영원리를 한 종교집단이 배타적으로 정할 수는 없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농기계의 발달로 인해서 공동노동이 사라졌다. 더욱이 시장의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어 한 마을 단위의 생산과 소비만으로 경제활동의 완결성을 보장할 수 없는데다가 이농현상으로 인해 젊은 세대가 없어 마을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도시의 경우에도 사회경제적 조건이 다른데다가 공동체 의식이 희박하고 물리적인 시설 면에서나 지역사회 운영에서 자치적 요소가 약하기 때문에 옛날 공동체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밖에도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가부장적 운영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향하는 시대정신의 맞지 않는 요소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양반중심의 동족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좀더 수평적인 지향이 강했던 평민마을의 경우에도 마을 운영은 남성 중심, 어른 중심이었고 여성과 아이들은 참여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참다운 대동정신을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새로운 공동체는 기존의 수직적인 인간관계의 규범을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규범으로 변화시켜낼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 속에서 우리가 가져다 써야 할 자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알아야 된다고 말하면 이미 죽은 문화를 살릴 필요가 있냐고 빈정댄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당신은 숟가락, 젓가락으로 밥을 먹지 않는가? 집에는 온돌을 깔지 않았는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수 천년간의 마을 생활 속에서 형성된 문화요소는 단순히 관념적인 요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서와 몸의 지향으로 깊이 자리잡고 있다. 밥을 먹을 때 국물이 있어야 한다든지, 숟가락과 젓가락을 갖춰야 한다는 음식생활의 문화규범, 온돌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주거에 있어서의 문화규범, 아직도 가족생활과 사회생활의 일치를 보장하는 규범인 명절과 제사, 통과의례 등 과거 수 천년간 마을 생활 속에서 발전시켜온 정서와 논리, 관습은 아직도 우리생활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단지, 의식적인 수준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통적 문화요소는 우리의 생활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 봉건적 요소(양반 문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문화요소를 살려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를 새롭게 혁신하는 것이 문화전승과 창조의 바람직한 방향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마을 문화 속에서 가져다 써야할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무엇보다도 협력과 상부상조의 문화전통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품앗이와 두레이다. 현재 협력의 전통을 말 할 때 반드시 말하는 것이 향약과 두레이다. 그런데 향약은 양반 지배층이 농민들을 자기 통제하에 두려는 수직적인 규범이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적인 지향과 맞지 않는다. 일제 침략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향약을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라고 선전한 것은 새로운 지방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인들이 향약의 수직적인 문화요소를 지배를 위한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두레는 조선 후기 사회 경제 문화 정치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두레 노동과정을 통해 결합된 농민들은 임원을 선거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 훈련을 받았고, 갑오농민전쟁시기 무장된 농민들의 자치 단위였던 집강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분제를 실제적으로 해체시키고 있었다. 일제가 마을 공동체 문화 특히 두레를 탄압한 것은 그것을 그대로 둘 경우, 그들의 지배가 매우 힘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레의 전통은 두레노동 과정에서 발달했던 풍물이 전통문화부흥의 대중적 기반이 되고 학교에서 학급공동체를 만들려는 교사들이 그 전통을 살리려고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우리에게 일정한 빛을 던지고 있다. 다만, 두레 역시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남성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 생산공동체이기 때문에 도시에서의 주거공동체 운동에서 참고하기에도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품앗이의 경우는 어떨까?. 품앗이는 우리 민족의 오랜 호혜적인 전통이면서 현재에도 사회관계의 기본적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단순히 품을 주고받는다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돌려가며 술과 음식을 산다든지 숙제를 해 준다든지, 아기를 돌아가면서 보아주는 것처럼 인간생활의 규범으로 확립되어 있는 호혜적인 관계 전반을 의미한다.

 

지금도 가족관계 친구관계 이웃관계 등의 깊이 베어 있는 품앗이 정신은 지역화폐 운동이나 품앗이 육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역공동체 운동의 규범적 원리로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 외에도 제사와 명절, 다양한 세시 풍속도 사람들의 삶을 일치와 협력으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와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단오와 대보름과 같은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발전해 온 세시풍속을 활성화하여 마을 사람들의 소통을 촉진시킨다면 공동체 운동의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으로 둘 수 있는 것은 입말문화전통 즉 속담과 수수께끼, 이야기, 노래, 대동놀이 전통이다. 이러한 말의 문화는 마을 공동체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매개체였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매체가 사회적 의사소통의 중심이 되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그러한 말의 문화는 효용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시대이건 말은 의사소통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매체 즉 말, 글,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 쌍방향 매체인 컴퓨터 중에 말의 문화는 가장 기본이 된다. 말의 문화가 살지 않을 경우 글, 대중매체, 쌍방향 매체 그 어떤 매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PC 통신이 더 많은 영상과 소리로 원거리 의사소통을 매개할 경우 말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지도 않고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 대화과정에서 풍부한 표정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 있는 말이 의사소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작은 공동체운동을 할 경우 말의 문화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우리의 실천과정을 통해 검증되는데, 마을, 학교, 유치원 같은 기본적 생활단위를 움직이는 것은 일방적인 강의나 글이 아니라 아이들 놀이와 대동놀이, 이야기였다.

 

우리가 강의를 할 때 글을 읽어보라고 하면 그 학습 단위는 분열이 되어 각자 자기 속으로 후퇴하지만 그 사람을 향해 직접 말하고 놀 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도시의 경우에도 골목단지나 아파트 단지가 공동체의 운동의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가까운 사람들끼리 말과 몸의 문화가 아니라 글과 대중매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공동체로서의 자신들의 정체감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 공동체 운동과 교육은 민속적 방법으로부터 지혜를 빌려와야 한다. 한 사회에서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문화를 전달하고 가르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크게 형식적 교육방법과 비형식적 교육방법이 있다. 비형식적 방법은 민속적 방법 또는 생활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한 기관이나 교사가 없이 오랜 경험과 전통, 공동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가 전승되는 것이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공동의 가치와 기대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교육 방법이다.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이나 숟가락이나 젓가락의 사용방법, 김치와 온돌에 대한 정서와 감수성은 이러한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보여준다. 삶의 요구 속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즐거운 방법으로 배우는 이러한 방식이 깊게 연구되지 않고서는 현대교육은 출구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형식 교육은 학교 등 제도적 기관으로 존재하며 특별한 전문가가 사회화를 담당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비형식적 교육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형식교육만 강조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과 친구 관계, 마을 속에서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즉, 학자들의 세계로 사회화되고 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전통에만 집착하는 교과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분열된 사회상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동들이 실제 경험하는 세계와 교과학습이 다름으로 인해 학습에 흥미를 잃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책임지지 않고 학문은 원래 어렵다든가, 학생이 이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생활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으로 생활에 필요한 기능과 지식, 태도를 배우지 못하게 되면 사회성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 행동양식을 습득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학문의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욱이 정보화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 학습해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되어 생활과 학습, 학교와 사회의 통합은 현대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배우고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교사가 되는 비형식적 교육방법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받아들여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요즘 들어 공동체 운동이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분열된 지식과 인간관계를 극복하려는 모듬살이의 욕구가 인간의 내면과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협력의 전통은 인간 진화과정의 중요한 추진력이었다. 원시시대에 돌도끼를 잘 만드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말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협력의 전통 속에서 인간은 진화해왔고, 자기를 도울 사람이 주변에 없다든가 그 사람이 배신한다면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우애와 협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따라서 공동체 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되살리는 복고적인 방향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주체적인 자기 존재의 발견이며 농촌마을, 도시의 골목단지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환경문제, 교육문제, 교통문제, 여성문제, 아이들 인권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성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파편화 되어 있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문화 속에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자원들이 풍부하게 녹아 있으며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공부해야할 우리 사회의 고전이다. 현재 진행되는 공동체 논의들은 서구의 이론과 개념들을 빌려와서 사용하고 있는데 풍토와 문화, 역사적 경험의 차이가 있는 외국의 사례를 모방하기 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요소들을 끌어내어 실천의 자원으로 삼는 지혜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3.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

 

1) 교육과정이란?

 

교육과정은 흔히 설계도에 비유된다. 건물을 지을 때 설계도가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작업에 참여하기 때문에 통일된 계획 및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지배세력이 자기 영토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하나의 의식으로 묶어서 국가적으로 동원하려는 과정에서 근대교육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육에서도 국민을 상대로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 어떤 교육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계도를 누가 만들 것이며 그 설계도에 담는 내용은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교육과정, 즉 설계도를 만드는 권리를 국가가 배타적으로 독점해 왔다. 그 결과 교육에 대한 국가적 의도를 반영한 국가수준교육과정만이 존재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는 설계도를 만드는 과정 및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국가,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권력을 장악해 온 군부와 재벌, 법조인 등 지배연합이 그 권리를 독점해왔으며 폭력을 통해 다양한 사회세력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부정해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7차에 걸친 교육과정의 변화가 교육 내적 요구가 아니라, 외적인 상황, 5․16 쿠데타나 전두환 집권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따라 이루어졌고 교육과정을 새로 집권한 자들의 이데올로기 및 명분을 국민들에 주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들을 통합하는 무기로 사용해왔다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 의도가 반영된 지역수준 교육과정, 마을의 의도가 반영된 마을수준 교육과정, 학교의 의도가 반영된 학교수준 교육과정, 한 인간의 권리와 욕구가 담긴 개인 수준 교육과정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요즘 들어 예전과 달리 자율적인 교사단체와 학부모단체가 생겨나 자신들의 생각과 이념을 교육과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7, 80년대의 민주화 투쟁 특히, 군대를 직접적인 정치적 자원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든 6월 항쟁과 그 이후 전개된 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다. 요즘 전교조가 7차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라든지 우리가 마을 수준교육과정을 추구하는 것들은 오랜 세월동안 진행되어 온 민주주의 투쟁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회적 힘은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과거의 제도와 관행 및 이를 유지하려는 보수세력의 활동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들은 과거처럼 힘으로 누를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경쟁이데올로기를 학교교육과정에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다시 사회질서를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교육적 용어들, 경쟁력이나 수요자 등의 개념은 지배세력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용어를 통해 교육개혁의 의미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을 극복하고 국가수준 교육과정의 질적 변화(현재처럼 국가권력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 마을, 개인, 학교, 지역 등 다양한 수준에서 교육과정을 설계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사회정치세력이 국가수준과 지역수준, 학교와 마을수준에서 권력관계를 재편해 나가면서 민주화와 인권, 평등과 같은 민주세력의 정치적 쟁점을 교육적 숙고와 연결하여 실제적인 지지를 획득할 때 가능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3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폐지, 인권법 제정, 부정부패 방지법 제정)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도 단순한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배워야할 공식적 지식의 방향을 결정하는 교육적 쟁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합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철학적 방향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정 결정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사회와 국가 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므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전체 사회와 지역사회의 전적인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수준교육과정을 만들 때에도 기획 과정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세력이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고 사회적 토론이 넓고 깊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각계 각층이 참가하는 TV토론을 매 단계마다 최소한 몇 차례씩 치러야 할 것이고 마을과 노조, 가정의 토론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즉, 결정된 교육과정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와 권리가 반영된, 즉 한 사람을 우주처럼 존중하는 교육과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생이 자기주도로 설계도를 만들고 부모와 지역사회 및 다양한 사회 세력이 그에 대해 상담 및 협력을 할 수 있는 교육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과정이 사람들 삶과 연결되어야 하고 생애교육의 관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지식의 폭발 및 개념 중심의 교육은 학교 교육과 사람들의 생활을 분리하고 있다. 또, 교육하면 학교교육을 생각하는 현재의 경직된 교육현실은 교육과 생활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적 관점이 요구된다. 현대사회의 지식의 폭발 및 개념 중심의 교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내용 그 사람의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고 삶과 지식을 통합할 수 있게 해야한다. 교육이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나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존재의 학습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교육력을 여러 사회적 단위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정과 학교, 마을, 지역, 국가 나아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세계 시민 교육까지 충실하게 준비되어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와 지역사회, 지역사회와 세계가 서로 열려있어야 하고 교육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올바르게 분담해야한다.

 

한 사람이 성장하려면 개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우호적인 세계가 필요하며 참다운 교육개혁은 이렇게 한 사회의 사회 문화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차원 높은 공동의 노력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2) 마을수준 교육과정

2-1. 마을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마을수준교육과정은 마을의 의도와 계획이 반영된 교육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을의 의도이다.

 

마을의 의도는 아이들은 마을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라나게 하기 위한 교육목표의 수립, 교육내용의 선정이 공동체성원의 합의 속에 하나의 문화규범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도가 형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할 것이다.

 

오늘날의 농촌마을을 고려할 때 과연 마을의 의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에 대해서 의심한다. 오랜 식민지 경험과 군사정권의 억압아래 주체적 참여가 억압되어 사회적 능동성과 활력이 떨어지는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면 충분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한다. 하나는 공동체를 되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교육만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미신을 깨는 것이다.

 

먼저 공동체를 되살리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농촌마을의 경우, 아직 공동체의 기풍이 남아있기 때문에 교육목표와 내용을 정립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농촌의 피폐화로 인해 한 마을에 아이들이 몇 명밖에 되지 않는 현재의 조건에서 마을단위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구(면)단위의 공동노력을 통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할 것인데 영아기부터 지역부모들이 공동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한 정부와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할 것이다.

 

한편, 도시의 경우 공동체의의식도 약하고 상호작용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의도를 형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농촌과 달리 새로운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어 공동체 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현재 아파트 공동체 운동, 녹색 아파트 운동 등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깊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나라와 같이 교육적 요구가 높은 나라에서는 아파트 공동체 운동 등은 새로운 교육운동의 토대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교통문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들이 교육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지역 주민운동을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자원인 주부들의 참여를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즘 주부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품앗이 육아 및 교육화폐 운동은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음성의 마을 공동체를 생각하는 학부모 모임이나 서울시 송파구 거여동 품앗이 모임, 공동육아 어린이집, 한국보육교사회 교사들에게 지원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시공동체운동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것은 품앗이인데 이러한 움직임이 일부 주부가 아니라 대다수 부모들의 생활 규범이 되고 지역사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다양한 공동체 활동이 펼친다면 지역사회의 상호작용 및 교육내용을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의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협력할 수 있는 부모들은 학교활동에서 적극 참여하여 자신과 마을 의도를 학교에 반영시키고 학교와 지역사회를 통합하는 사회적 힘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전교조처럼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단체가 학교 분회 활동을 지역사회 속에서 전개하여 마을과 학교의 교육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과 교육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적 전진이 이루어질 것이다.

 

교육에 대한 마을의 의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장애는 학교의 역할에 대한 미신이다. 지금까지 학교가 교육을 독점해왔기 때문에 대다수 부모들은 제사, 세시풍속 등 집안이나 마을에서 배워야 하는 것조차도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나라 학부모들은 교육열이 높다고 하지만 교육내용에 대한 것은 사교육이나 학교에 넘겨 버리고 자신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삶엔 결정적 영향을 미치려고 하면서도 삶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긍정적인 교육적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마을 수준교육과정을 실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2-2. 우리는 왜 마을수준 교육과정을 강조하는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마을수준교육과정"이라고 하면 매우 낯설어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말을 배운 적이 없어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수준교육과정이 아니라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참다운 공동체교육을 하는데 있어서 학교가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첫째, 마을이 의식주를 기본으로 한 생활공동체인 반면, 학교는 인위적인 공동체로서 삶의 기본단위가 되지 못한다는 것, 둘째, 교육주체인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서로의 역할에 대해 불신하는 상황인데 이러한 문제는 학교를 중심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지역사회가 바로 서로 학교가 지역사회기관으로 올바르게 기능 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을수준교육과정이란 말은 우리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일 것이다.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의 수많은 마을에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마을수준교육과정을 존재할 텐데 왜 우리가 이러한 개념을 최초로 발명하게 되었을까?

 

이는 우리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서구사회는 식민지 경험을 거친 적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마을자치와 세시풍속이 살아있다. 따라서 학교가 지역사회의 기관으로 분명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 수준교육과정이라는 말을 특별히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 식민지 등은 고유문화를 파괴하지 않은 상태에서 분리지배를 했기 때문에 마을과 부족의 전통 속에서 사회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새삼 마을수준교육과정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의 고유문화를 부정하고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식민지 정책 때문에 마을 공동체 문화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마을을 부정하고 몇 개의 마을을 하나의 마을로 묶었고 동제, 대동놀이는 치안을 방해하고 풍속을 해친다고 못하게 하는 등 마을이 가진 공동체적 활력을 파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이후에도 군사정권의 억압은 마을의 활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왔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마을의 기능이 약해져 마을의 사회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오늘날 마을이 공동체적 활력을 잃게 된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결과이다.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발전, 그 기초로서의 정치적 자치훈련과 교육적인 공동체의 형성 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3) 마을 수준 교육과정의 현대 교육적 의미

 

컴퓨터의 발달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의 지식의 독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즉, 교육능력을 가지고 있는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지식을 전수 받는 것이 교육활동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칠판을 중심으로 교탁이 있고, 그 앞에 책상이 일렬로 배열된 교실풍경은 이러한 교육을 위한 물리적 환경이었다. 그런데 정보혁명은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개념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정보가 넘쳐나므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보접근의 평등성과 함께 넘쳐나는 지식을 올바르게 선별하고 이를 자기존재의 풍부함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이 학교라는 일정한 공간에서 학생이라는 일정한 시기에 교과서라는 획일적인 내용을 전수 받는 것이었다. 새로운 환경은 일생을 통하여 공부하고 어느 장소에서든지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자기주도적 학습, 문제해결학습, 협동학습, 통합교육, 동기부여학습 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즉, 단순히 개념학습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환경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제적인 것이지만, 그 보편성 속에서도 지역마다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참여해야만 해결 될 수 있다. 교육 역시 지역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담아야 하며 이러한 방향을 확립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교육의 효율성 면에서도 지역교육이 가진 장점은 탁월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마을 공동체교육을 강조하면 국제화시대에 너무 좁은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한다. 이는 현대 교육학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현대교육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내적 동기 부여이다. 사람들이 공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흥미,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를 배워도 내가 사는 땅의 텃새와 철새의 생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새의 개념을 배웠고 동네에 굴러다니는 돌덩어리나 바위를 지구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질학적 개념을 배웠다. 실제 자기 마을에서 출발하여 우리 마을에서 배우는 우주 역사, 생명의 역사, 인간의 역사 등을 배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가 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행동과 최대학습을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문화환경의 조성이지 마을단위의 폐쇄적인 의식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다. 마을 교육의 첫 단계부터 국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고 이는 의식주 생활문화의 비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학습능력은 한 사람의 지능이나 적성, 노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3가지 성장 촉진적 요소, 무조건적 지지, 솔직성, 공감적인 이해 등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환경이 보장될 때 효과적으로 개발된다. 이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인 협력은 경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왜곡되어있는 우리 교육의 파행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요즘 학교에서도 지역화 교육과 통합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통합교육에 있어서 고전적이 책은 James B.Ingram의 "교육과정 통합과 평생교육"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 4차 교육과정 이후 통합교과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통합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었는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길에 인용해 보겠다.

 

"1단계는 교수의 단계이며 교과와 학문을 초월한 지식의 구조화가 계속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는 통합의 책임이 교사들에게 있다. 교사가 아동에게 제시하는 세계의 모습이 통일성이 있고 또 그 모습이 아동에게 의미가 있도록 하는 것이 교사의 과제이다.

 

2단계는 학습의 단계이며 아동에게 통합적 능력을 계발시켜준 단계이다. 아동은 자신의 경험을 인지적으로 구조화하는데 적극 참여하며 교사의 임무도 이 과정에서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과업을 자기 나름대로의 방씩으로 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개별화 된 교수-학습 방법을 채택해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동은 자신의 경험을 분별하고 통합하는 것을 배운다.

 

3단계에서는 개별성이 가장 중요하다. 2단계는 인격의 단계이며 인격의 통일성과 통합을 의미한다. 전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동은 자신의 삶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아동은 분명히 자신의 경험을 우주적 경험과 조화시킬 수 있다. .....

 

4단계에서는 이상의 전체적인 통합의 과정이 절정에 달한다. 이는 지역사회의 단계이며 인간관계의 조화와 지역사회의 창조를 포함한다. 교육과정 통합의 정당성은 지역사회의 지식의 분열에 대처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우리가 생각했던 이념과 통합교육의 근본적인 이념이 놀랍게도 닮지 않았는가? 다만 우리는 사회적인 실천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기 때문에 4단계를 보다 실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4. 마을수준 교육과정이 가능하기 위한 교육 내적 조건

 

마을 수준 교육과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치적 조건의 변화와 함께 마을 안에서 교육 내적인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사회․정치적 조건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심화, 공동체 운동의 발전, 마을에 대한 다학문적 접근 및 연구의 축적 등을 말한다. 이러한 조건에 대해서는 앞의 글에서 계속 강조해왔으므로 특별히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교육 내적 조건을 중심으로 말하겠다. 단, 학문적 접근의 경우 요즘 학계의 동향이 촌락 사회사, 마을 고고학, 마을 민속학 등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교사와 마을의 노력이 있을 경우 이 방향을 더욱 촉진할 수 있다는 것만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마을수준교육과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교육 자원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원은 사람과 지역자료 및 시설, 재정 등을 포함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학교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할 때 마을 수준 교육과정은 학교수준교육과정을 만드는 과정으로부터 촉발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가 아직 마을단위 학부모들과 관계를 이제 맺어 가는 단계이지 그들과 목표와 전략을 통합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마을수준교육과정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새로운 학부모 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올해는 한뫼가 읽을 수 있는 우리 마을지, 면지를 만들어 마을 단위 교육 계획을 더 구체화할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이 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교사이기 때문에 이 글은 교사들의 노력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1) 인적기반 (지역사회 지향적 교사와 학교의 조직문화)

 

마을수준교육과정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지식기반이나 심리적 준비정도를 볼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사이다. 부모와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관심들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지역의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역사, 지역정보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 이에 비해 교사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닌데다가 몇 년 후에 그 지역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교사들의 이러한 의식 및 생활이 극복되지 않고서는 교육과정의 통합도 힘들 것이고 마을 수준 교육과정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학교의 건설적 역할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마을수준교육과정을 실현할 수 있는 교사는 누구일까?

 

나는 요즘 교사들을 특성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권위주의 교사, 교과중심 교사, 아동중심교사, 지역 사회 참여하는 교사로 나누어 보았다. 권위주의교사는 아이들을 교실에 꼼짝못하게 묶어두고 끊임없이 통제하려는 훈육형의 교사이다. 교과중심교사는 아이들의 삶과 환경에 대한 별다른 관심 없이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동중심교사는 아이들 하나 하나한테 아주 열심이고 잘 대해주지만 아이들을 삶의 환경 속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교사를 말한다. 이러한 교사는 아이들을 문제 해결자로 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는 학교를 지역사회의 기반으로 교사를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지역사회의 현실적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네 유형의 교사들 중 권위주의 교사와 교과중심교사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교사들이 마을수준교육과정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마을수준 교육과정이 국가인정을 받고 일정 궤도에 올라 설 때만 합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동중심교사의 경우 한계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가 인내심을 가지고 그 교사가 아이들을 공동체의 역사와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참여를 이끌어 낼 가능성이 높다.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는 한 아이를 이해할 때도 그 아이를 둘러싼 자연환경, 인간관계, 역사문화환경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아이가 전인적 통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재조직하려고 한다. 이러한 교사에게는 지역전체가 학교이고 지역사회의 모든 문화요소가 교육내용이고 모든 사람들이 교사가 된다.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는 아주 극소수이다. 우리 연구원들, 지역사회 환경문제, 사회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할 것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마을수준교육과정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우리뿐일 것이다. 이제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과정에 대해서 우리 경험을 정리해 보자.

 

우리 회원들이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 첫 번째 하는 일은 마을에 인사를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는 어떤 사람이 특정지역에 발령이 나거나 새로 개업을 할 경우, 이웃과 관련인사들에게 인사를 다닌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새로 발령 난 교사와 지역사람들의 관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다. 만나면 먼저 인사하자니 그렇고 인사 안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중요한 실천이 마을 방문이다. 마을 방문이라는 것은 기존의 가정방문이 한 아이만 대상으로 가는 것이고, 그 가족한테 접대 등의 부담을 줄 수가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을 경로당에 가서 노인들에게 인사도 하고 학생들과 동네 뒷산에 올라가고 노인들에게 마을을 지명을 배우면서 인사 하나가 사람관계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실감하였다.

 

사실, 학교를 둘러싼 인간관계, 즉 교사와 부모, 아이와 교사의 관계는 비우호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교사는 학부모를 경계하고 부모는 교사들한테 불만이 있어도 내 아이가 손해를 볼까봐 말을 못한다. 아이들한테는 그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을 보이지 않는 교사는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대상이고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들한테 교사들은 매년 절망한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번의 우호적인 만남으로도 교사와 부모, 아이들사이에 깊은 신뢰가 쌓이는 것을 경험했다. 이는 부모들이 입을 모아 '마을을 인사를 오는 선생님을 처음 봤다.', '우리 선생님 며느리 삼고 싶네', '뭐든지 도와줄 테니 언제든지 오슈' 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고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확인된다.

 

지금은 동료 교사들이나 새로운 교사가 발령 나면 같이 마을을 다니자는 제안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에는 거부했던 사람들도 1․2년이 지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일관된 실천 및 경험의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적극적으로 마을에 대해서 배우려고 했다. 마을에 대한 개괄적 조사는 물론 인간관계, 자연환경, 아이들놀이, 민요, 대동놀이 등을 조사했고 그것을 자료로 정리하고 있으며 노래와 놀이 등을 배우면 내 입과 몸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교사들이 이러한 교사들이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담장을 허물고 교실을 개방하여 학교를 지역사회의 문화기지로 만들고 향토자료실을 만들어서 기존의 자료를 갖추어 놓는 것은 물론, 우리가 연구 정리한 자료들을 정리해야만 우리의 실천이 한 단계 더 성숙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향토자료실은 학교에 도서관이 있으면 하나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고 새롭게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그러한 문서와 수업자료들을 모아 정리해 놓는 교육과정 연구실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슬라이드나 문서 등은 교실마다 중앙에 갖추어 놓아 지역이 교육과정에 언제든지 담길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를 바탕으로 교사연수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학교 운영위원회에 제안하고, 관철하여 제도화하는 것은 물론 학교 운영위원회 기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교사들의 협력은 그 자체가 지역과 학교의 가장 강력한 교육자원이 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교사가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그러한 과정을 서로 협력하면서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아 존중감을 갖게 될 것이고 자신이 배워야할 참다운 모델을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는 지역의 자료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회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두말할 것 없이 그 지역 사람일 것이다. 교수들이 그 지역의 지명이나 이야기, 노래, 성터 유적 등을 조사하려면 노인들을 찾아야한다. 또 지역사회의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이장이나 젊은 사람들을 찾아가 함께 토론해야한다.

 

교사가 지역사람들의 도움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학교와 마을수준교육과정을 만들 수 있는 기본바탕이 된다.

 

지난번 쟁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조사한 것을 예를 들어보자.

 

쟁기를 만들려면 손으로 잡는 부분은 소나무, 물에 들어가는 부분은 버드나무, 뒤틀리거나 힘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은 박달나무나 물푸레나무를 쓴다. 마을 노인들은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그 나무가 자라는지, 언제 채취하는 것이 좋은지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나무들을 찾아서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산에 가는데 산에 가는 과정에서 지명도 배우고 놀이도 배우고, 옛날 마을에서 달맞이했던 곳,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 어디인지 배우고 산에 얽힌 이야기도 배운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감이며 참여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마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감수성을 길렀다.

 

또 보다 적극적인 노력으로 조사한 내용을 비디오 테이프, 오디오 테이프, 슬라이드, 사진첩 등으로 만들어서 마을에 전달하였는데 이는 마을의 역사관, 생활관 등을 만들자고 제안을 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었다 이렇게 마을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교사는 지역사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될 것이고, 교육의 구조적인 문제를 전체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한 사회 정치적 실천 능력을 함께 길러 나가야 한다. .

 

2) 공동체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부모와 지역사회

 

공동체 문화가 전승되고 현실에 맞게 새롭게 재창조되려면 기성세대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새로운 세대에게 반드시 알려 주어야 한다. 공동체와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문화화․사회화는 교육의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대다수의 기성세대 특히 학부모들은 그러한 임무를 자각하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모든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억압적인 학교교육의 결과이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교수-학습과 학교운영과정에서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는 교육을 식민지 지배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고 교육을 통해 우리 나라 사람들을 일본인, 즉 일본말과 풍습, 일본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식민지 교육의 목표에서 조선말과 문화는 가장 강력한 장애 요소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배척하였다.

 

지역사회의 차원을 보더라도 마을 통합, 면 통합 등을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렸고 학교차원에서도 운영에서 주민들의 참여를 배제하고 교육내용에서도 지역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문화를 낡고 원시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고향산천과 사람들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없애고 일본적인 것만을 동경하는 인간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1922년 조선총독 '사이또'가 조선인에 대한 교육시책을 설명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능, 무의,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해 부정적인 지식을 갖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질 것이다. 그런 연후에 일본의 위대함을 가르친다면....."

 

일제는 이러한 목표아래 교육과정을 만들었고 조선인들을 자기 집안만 생각하는 인간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요즘도 그러한 교육의 효과는 사회적 관심을 가지는 사람한테 " 네 앞가림이나 해! " 라고 쏘아붙이는 모습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인문교육을 배제한 실업교육이고 역사에 있어서 조선은 스스로 발전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타율성론이다.

 

그들은 조선인이 그러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경우에만 면서기, 순사, 교사, 군수가 되게 했고 해방이후 그러한 자들이 새로운 국가 운영의 주역이 됨으로서 일제시대의 생각과 감성 즉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기 것을 무시하는 태도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오랜 군사통치 아래서 학교생활을 경험했던 부모들은 학교를 무서운 곳, 무조건 적응해야 하는 곳, 자기 삶과 다른 것을 배우는 곳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하였다. 7․80년대 민주화 투쟁은 이러한 억압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활력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 이후 교육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학부모 운동이 일어나 새로운 학부모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일반적인 제도 문제를 주로 제기하고 있을 뿐 새로운 인간관계의 변화와 지역사회의 창조라는 과제에 다가서고 있지 못하는 것이 한계이다. 그러면 지역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부모는 어떤 일을 할까?

 

먼저, 부모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정과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전해주려고 할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고 아빠의 어렸을 때의 경험이나 그때의 마을 모습을 가르쳐 준다든지 어렸을 때 '오디', '산딸기', '개암'을 따먹던 곳에 같이 가서 그 서식지와 특성들을 가르쳐 주고 그때 했던 놀이들을 같이 해본다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값진 교육이 될 것이다. 나아가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의 문제 등을 같이 이야기하고 자신의 아이와 사회적 문제에 공감적으로 참여 할 수 있다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열어놓게 될 것이다.

 

또 그러한 내용을 가르칠 것을 학교에 요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학교에서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학교와 집안, 마을에서의 교육이 일치되어 아이들에게 통합적인 세계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제 한 마을에서도 우리 마을에서 배우는 우주의 역사, 생명의 역사, 밥상에서 배우는 우리의 역사 문화, 옛집에서 배우는 기후, 철새를 통해서 배우는 세계 등 다양하고 통합적인 교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요즘 부모들은 웬만하면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개념 사용이 가능한데 이러한 장점이 민속적 경험과 연결된다면 훨씬 깊고 풍부한 문화를 창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조화와 새로운 사회를 창출할 줄 아는 부모는 그 자체의 최고의 교육자원이고 참다운 삶의 모범이 될 것이다.

 

도시의 경우에도 이러한 교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간 기회를 활용할 수 있고 도시에서도 토박이 노인을 찾아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도시의 옛날 원형경관을 되살려 보는 것은 공간 속에서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한 방법이 된다. 또, 도시계획과 물리적 시설의 의미를 발견하는 학습을 통해 공동체를 위한 공간적 상상력과 창조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공간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도시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실천활동의 하나이다. 이러한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노인들과 젊은이, 어린이 사이에 교류와 상호작용이 생겨나고 노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지 않고 자기 역할을 지역사회로부터 부여받은 당당한 주체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부모와 지역사회가 할 일은 마을을 교육적인 환경으로 만들기 위한 하부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한 마을이 얼마나 공동체적인가를 알려면 그 마을에 공동공간이 있는가, 마을 축제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공동공간은 마을회관과 경로당 등 기성세대 중심이다. 미래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역사관, 생활관 등을 갖춘 마을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마을 공동체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미래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역사관, 생활관 등을 만들고 현재 있는 공동공간의 기능을 변화시켜야한다. 돈이 없어서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없다면 마을회관, 동사무소를 활용하고 마을회관에 마을의 자연환경, 역사 문화자료, 마을의 현실적 문제 및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자료 등을 갖춘 방을 만들면 된다. 농촌의 경우, 마당에는 마을에 있는 물질자료들을 모아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때 생활자료들은 옛날 것만이 아니라 전기가 들어오면서 변해온 마을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까지도 갖추어야한다. 1년 중에 기간을 정하여 부모들이 직접 설명해 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또, 마을 주민 전체가 참가하는 마을 굿도 되살려야한다.

 

마을 굿에 참여하는 과정 사람들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마음을 모으는가를 보면서 아이들은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옛날 부모들은 억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문화적 모범을 보임으로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이와 달리 요즘은 의식적인 노력과 교육적인 깊은 배려 속에서 이러한 공동체 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도시에서도 이런 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통의 목마름을 아는 또래 엄마들이 소모임을 만들어 품앗이를 하면서 아이 어르는 소리, 아이들 노래, 대동놀이를 배우고 이를 아파트 굿을 여는 자원으로 활용하고 작은 도서관 운동 등을 통해 지역자료와 생물도감 등을 갖춘다면 도시에서도 다양한 상호작용들이 있게 될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만을 생각하며 사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는 우리 교육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보수적으로 조직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회를 황량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교육인 것이다. 문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사람들, 즉 대다수의 민중들이 이러한 경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참여하려고 발버둥친다는데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교교육과 사회적 선발의 정당성이 내면화되고 교육은 더욱더 경쟁적이 되어 간다. 이는 사회적 재앙이다.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고, 없는 자는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그 사회를 어떻게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모들이 이렇게 소모적이고 폭력적인 경쟁을 포기하고 자기 아이만이 아니라 아이들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참다운 미래를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에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또 공동체를 위한 교육제도가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정치적 참여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하는 부모는 억지로 가르치지 않아도 그 삶의 모습만으로 아이들에게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5. 닫는 글

 

지금까지 마을수준 교육과정이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였다. 실천적으로 종합하면 마을수준교육과정은 마을공동체 속에서 실현될 수 있고 마을수준교육과정이 가능하려면 1.사람(인적기반), 2.자료, 3. 재정 등이 있어야한다.

 

사람은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교사와 학부모일 것이고 이들의 활동을 통해 자료가 확보될 것이며 재정은 마을공동체와 학교에서 학교수준교육과정 , 마을수준교육과정개발을 개발할 수 있는 영구적인 재정확보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민주화, 교사의 각성과 연대, 학부모의 참여, 교사와 학부모의 공동노력, 지역사회의 지원, 정부의 지원 및 사회 민주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단순한 교육적 주제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문제이기도 한 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해왔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의 활동을 통해서 힘과 지혜를 길러왔다. 마을의 다양한 자원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능력과 함께 그것을 교육과정개발과 연결시키는 방법과 기술을 익혀왔고 배운 것을 몸에 익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실천적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실천을 해온 것은 외적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살려는 내적 동기에 의한 것이었다. 이일을 좋아하고 지속적이 힘을 길러가자.

 

우리 내용을 접한 사람들이 적극적 지지까지 받고있는 지금 이일을 못해 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교육백년대계란 말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내용이 사회적 의제로 설정되고 모든 삶의 단위에서 규범적 의미를 확보하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몇 사람이 연구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동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각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적 현상을 읽어내는 사회적 통찰력과 자신의 잠재능력, 모임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낼 수 있는 집중력, 그리고 일생동안 이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내적인 즐거움과 지구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