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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박노자] 박제상은 적국으로 갔는가

by 마리산인1324 2009. 7. 12.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LUMN/71/21970.html

 

 

박제상은 적국으로 갔는가 [2008.03.14 제701호]

 

 

신라 왕자를 왜국에서 구한 충신의 대명사… 과연 당시 일본은 하나였는가, 원수의 나라였는가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왜왕이 화를 내어 박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겨내고 갈대를 베어낸 뒤에 그 위를 걷게 했다. 그러고서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제상이 답했다.

“계림의 신하이다.”

왜왕이 또 뜨거운 철판 위에 그를 올라서게 하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계림의 신하이다.”

 

» <삼국유사>에서 문무왕은 “왜인으로부터 삼한을 보호하려고 사후에 동해의 용이 됐다”고 나오지만, 신라는 문무왕 시절 왜국 세력들과 큰 갈등이 없었다. 경주에 있는 문무대왕암.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고려의 반일 의식이 투영된 <삼국유사>

김구가 <나의 소원>에서 “나는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는 박제상의 말을 인용한 덕분인지 한국의 대다수 교양인들이 <삼국유사>에 실린 박제상 관련 내용을 익히 안다. 일찍이 왜국에 인질로 간 아우 미해(미사흔)를 어떻게든 구출하려는 형 눌지마립간(재위 417~458), 나라와 임금을 위해서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용감하게 사지로 뛰어든 충신 박제상, 남편이 간 왜국을 향해 계속 울며 슬퍼하다가 나중에 그 자리에서 죽어 산신이 된 그 부인, 왕자 미해를 먼저 보내고 겁없이 왜왕의 처벌을 기다렸던 박제상의 대담함, 그리고 왜왕이 가한 끔찍한 고문과 생화장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스러운 죽음…. 비장미가 넘치는 이 고대의 충신전(忠臣傳)이 근대 반일 애국주의 사상과 부합되어 남북한 양쪽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됐다. 박제상이 어린이용 위인전에도 들어가고, 또 박제상이 왜국으로 갔을 때 출발지였던 울산에 ‘충렬공 박제상’의 기념관까지 세워져 ‘충의효열 테마관광’을 위한 ‘관광자원’으로 곧 이용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박제상이 왕자 미해를 구출하고 비장하게 죽은 418년에 신라와 일본열도 내의 각종 정치세력들이 단순히 ‘적대관계’에만 있었던 것인가? 과연 박제상이 단순히 ‘항왜’(抗倭) 인물일 뿐이었을까?

 

식민지 시대를 거친 현재로서야 일본을 ‘적국’으로 간주하기가 쉽다. 그래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박제상 전기에서 그가 “적국으로 갔다”고 명문화돼 있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현대인으로서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적국’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믿기 전에 한번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라는 자료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삼국유사>가 편찬된 1280년대 초반에는 일본이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정벌해야 할 말 그대로의 ‘적국’이었다. 거기에다 고려가 13세기에 이미 왜구에 시달리기 시작한 사정까지 겹치기에 <삼국유사> 곳곳에서는 왜인에 대한 현재적 적대의식이 고대의 인물에 투영된다. 예컨대 문무왕(재위 661~681)에 대해서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감은사를 지었다. 왜인으로부터 삼한을 보호하려고 사후에 동해의 용이 됐다”고 나오지 않는가? 문제는, 일부 왜군이 663년에 오랜 우방인 백제를 도우려고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맞서 백강 전투에서 백제 편에서 싸운 것 이외에는 문무왕 때나 그 직후에 왜국 세력들과 이렇다 할 만한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백제의 영토를 놓고 당나라와 갈등을 일으킨 신라도, 당나라의 침략을 우려해 연안 지방의 방어시설을 증축한 왜국도 660~670년대에 서로 우호적으로 접근했다.

 

668년에 신라 사신 김동엄이 도일했을 때 왜왕 천지가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배 한 척씩 선물로 보내는 등 백강 전투에서 비롯될 수 있었던 관계 악화를 적극적으로 예방하려고 했다. 문무왕이 죽은 뒤에도 일본과는 정기적으로 사신이 왕래하고, 일본의 학승들 중에서 당나라로 유학 가는 이들보다 가까운 신라로 유학 가는 이들이 더 많았다. 720~730년대에 신라보다 발해와 더 친하게 된 일본이 발해와는 적국이던 당나라의 가까운 우방인 신라를 몇 번 침략하지만, 이는 감은사 창건보다 훨씬 늦은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문무왕이 왜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됐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신라 시대의 대일 의식이라기보다는 13세기 후반의 다소 적대적인 대일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란에 빠진 당시의 일본을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던 김부식도 <삼국사기>(1145)에서 왜국과 왜인들을 일관되게 ‘반문명’ ‘야만’ 세력으로 그리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 현실을 제대로 캐자면 김부식이나 일연과 같은 고려시대 문필가들이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적국이자 야만국가 왜국에 가서 왕자를 구출하고 순국한 충신 박제상”의 유교적인 충신전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그 세부적인 부분에 착안해봐야 할 것이다.

 

일본 문화에 기여한 신라 출신 도래인들

일단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보자. 왕자 미해를 인질로 잡고, 박제상을 고문해서 화형했다는 ‘왜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이었을까? 우리에게야 일본국이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쉽게 상상되지만 실제로 6세기 중반 이전까지 일본열도의 정치 사정은 훨씬 복잡했다. 긴키(나라현·교토·오사카 등 관서지방)에서 야마토(大和) 정권이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외의 지역에선 독자적인 대외관계까지도 전개할 수 있었던 강력한 호족세력들이 잔존했다. 예컨대 야마토와 가까운 관계에 있던 남가야(금관가야·김해)에 신라가 520년대 후반에 강한 압력을 넣는 데 불만을 품은 야마토 정권이 신라 침략을 기획하자 신라와 친했던 규슈 북쪽의 실력자 이와이(磐井)가 527년에 야마토 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해 몇 년간 야마토의 힘을 적극적으로 소모시키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신라가 남가야를 성공적으로 병합시키고 말았다. 규슈 북부의 정치체인 ‘왜노국’(倭奴國)이 기원후 1세기 중반부터 중국과 통교했는데, 탈해이사금의 시절인 59년에 사로국이 처음으로 관계를 수립한 ‘왜국’이 바로 이 ‘왜노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야마토 정권의 전신인 야마타이(邪馬臺國)국에서 무당 히미코를 신성한 상징으로 삼은 강력한 정권이 출발하자 사로국은 빠르게 173년에 히미코와도 관계를 맺었다.

 

» 신라 계통의 도래인들은 5세기 일본열도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고, 박제상도 도래인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대마도에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사진/ 한겨레)

그렇다고 수많은 신라인들이 바다를 건너가 정착해 살았던 규슈 지방과의 교역이나 각종의 크고 작은 갈등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왜 사신을 모욕했다가 결국 왜인들에게 253년에 살해된 신라 귀족 석우로(昔于老)에 대한 유명한 설화에서 등장하는 ‘왜국’은 바로 규슈 중부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박제상을 죽인 ‘왜인’들의 실체는 어땠을까? 박제상 이야기와 골격이 거의 똑같은, “신라 왕자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구출하여 화형을 당한 신라인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이야기를 실은 <일본서기>에는 그 구출 장소가 대마도로 돼 있는데, 6세기 중반 이전까지 대마도를 통제해온 것은 규슈 북쪽의 세력들이었다. 또 구출 이후에 왜인들이 오늘날 양산 지역을 공격해 복수했다고 돼 있는데, 5세기 초반에 이런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던 세력 역시 긴키의 야마토 정권이라기보다는 한반도와의 교통로를 장악했던 규슈 북쪽의 세력이나 혼슈 남쪽의 오카야마현을 중심으로 했던 기비(吉備)국이었을 것이다. 결국 박제상 이야기의 역사적 실체는 ‘일본’ 전체와의 ‘투쟁’이라기보다는 신라와 규슈 북쪽 내지 혼슈 남쪽의 지방 호족 사이의 하나의 일시적인 갈등이었다. 그 갈등이 일본을 도외시하거나 적대시했던 고려시대의 사가들에 의해 하나의 ‘영웅 전설’로 낭만화된 것이다.

 

그러나 후대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준 이와 같은 갈등들이 있었다고 해서 과연 고대국가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가고 있던 5세기의 신라가 일본열도의 각종 세력들과 적대적 관계에만 있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왕자 미해를 402년에 혼슈 남쪽 내지 규슈 북쪽의 정치세력에 인질로 보냈다는 ‘인질 외교’는 이들 일본열도의 추장 세력과 우의를 맺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5세기 초반의 신라 왕실은 한편으로는 왜인들의 약탈 행위를 억제하려고 강대국 고구려의 도움을 빌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408년에 왜인 약탈의 근거지였던 대마도에 대한 정벌 계획을 접는 등 대왜(對倭) 관계에서 ‘전쟁’보다 ‘통교’에 무게를 두었다. 왜인과의 교역, 왜국으로의 이민에 가야·백제가 여전히 신라를 앞서고 있었지만, 신라 계통의 도래인들도 5세기 일본열도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20년에 신라에서 일본열도로 “훌륭한 수공업자”가 들어오고, 또 443년에 건설·건축 계통의 전문가들이 들어왔다.

 

신라 금관에서 발견된 일본 구슬

<삼국유사>의 박제상 이야기에서 그가 왜왕으로부터 주택을 하사받고 자신이 사냥, 낚시해서 얻은 고기 중 일부를 왜왕에게 바쳤다는 것으로 봐서는, 그 역시 도래인 행세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에 규슈 북부나 혼슈 남쪽에서 신라 계통의 도래인들이 허다했기에 박제상이 의심을 받지 않고 ‘위장 이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왜인들이 박제상을 의심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신라 중앙귀족 가문에 속했으면서도 직책상 삽량주, 즉 오늘날 경남 양산시를 통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왜인들의 침입 통로인 이 지역은 또한 왜와의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박제상이 이 지역 지방관 출신의 관료였기에 왜인들에게 좀더 쉽게 접근해 그에게 맡겨진 ‘공작’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5세기 초반에 고구려의 원조에 힘을 입었던 신라가 왜인과의 철 무역을 장악해왔던 남가야에 타격을 입혀 그 동맹 세력인 왜와의 갈등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고, 500년까지 신라가 왜인들의 약탈에 계속 시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갈등은 5세기 신라와 왜인들의 다면적이고 포괄적인 ‘관계’의 일면에 불과했다. 신라의 공격이 남가야를 약화시켜 김해 세력이 일본열도에 철을 수출하는 것을 방해했지만, 그 대신에 신라산의 철정(鐵鋌·쇳덩어리)들이 5세기 초반부터 긴키와 오카야마의 고분에서 부장되기 시작한다. 한반도에서도 일본열도에서도 똑같이 실생활에서 철 소재 내지 일종의 현물 화폐 기능을 했던 이 철정들은, “땅의 귀신들에게 묏자리를 산다”는 의미에서 수장들의 고분에 매장되곤 했던 것이다. 철정뿐만인가? 신라산 금관들이 규슈 북쪽의 5세기 고분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일본열도산의 곱은 구슬(곡옥·曲玉)이 경주의 그 유명한 금관 제작에 사용됐다. 철, 철 제품과 구슬을 맞바꾸고 있었던 5세기의 신라와 일본열도 지배계층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뒤 고려시대의 왜구 약탈이나 근대의 일제 침략 등으로 우리 일본관이 부정적으로 바뀌어 일본의 한 부족국가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이야기와 같은 고대 신라의 긍정적인 대일 교류 서사보다 박제상 이야기와 같은 비극적 항왜 영웅서사가 더 유명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아시아인들이 서로 더 가까워져야 할 이 시대에 와서는, 신라-왜 관계에서 ‘갈등적 측면’보다 ‘교류’ ‘교역’, 그리고 ‘상호보완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맞지 않을까?

 

참고문헌:

1. <새로 쓰는 고대한일교섭사>, 박천수, 사회평론, 2007, 85~149, 301~331쪽
2. <고대한일관계사> 연민수, 혜안, 1998, 343~397쪽
3. <완역 일본서기> 전용신 옮김, 일지사, 1997, 170~206쪽
4. <삼국유사> 이가원, 허경진 옮김, 한길사, 2006, 101~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