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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박노자] 신라엔 왜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by 마리산인1324 2009. 7. 12.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LUMN/71/22291.html

 

 

 

신라엔 왜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2008.04.24 제707호]

 

 

무소불위의 국가권력 때문에 자율적 시장 성립 어려워…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겐 불편한 사실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 국가가 만든 예술 ① 신라의 금관. 신라는 금속을 잘 다루는 나라였으나 금속화폐를 만들지는 않았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기원전 7세기 중반, 오늘날 터키의 서부에 위치했던 리디아라는 왕국에서 인류 역사상 중요한 발명 중의 하나가 이루어졌다. 지중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이라크)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한 리디아 상인들이 편리한 유통수단을 필요로 했기에 그 나라 왕실에서 최초로 금은화폐를 주조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원형의, 사자 등 신성한 동물의 이미지가 찍혔던 이 금은화폐는 그리스와 로마, 그 뒤 중세유럽 국가 금은화폐의 원조에 해당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의 활발한 무역관계가 낳은, 일률적 규격의 화폐 주조라는 아이디어는 곧 인도 서부의 간다라(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 지역으로 전파돼 거기에서 은화폐 만들기의 기원이 됐다. 이와 무관하게, 고대 중국인들도 춘추전국시대에 칼이나 대팻날 모양으로 만든 구리 덩어리를 화폐로 쓰기도 했고, 또 기원전 3세기 중반에는 최초로 가운데에 구멍이 난 원형의 돈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진시황제는 휴대에 편리한 원형의 돈을 통일해 보편화시켰다. 또 기원전 118년에 한나라에서 유통시킨 오수전(五銖錢)이라는 금속화폐가 기원후 621년까지, 즉 거의 7세기 동안 중원뿐만 아니라 한반도, 일본열도 등 인접 지역에서까지 널리 쓰이면서 명실공히 ‘동아시아의 보편적 지불 수단’이 됐다.

 

늘 저울을 갖고 달아야 하는 금괴나 은괴, 그리고 언제 상할지 모를 쌀이나 운반하기 버거운 포(布)·비단 등의 현물화폐보다 금속화폐나 동전은 쓰기에 훨씬 편리하다.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시장의 기능이 어느 정도 활성화된 기원전 6~5세기 이후 유라시아의 계급사회라면 금속화폐가 꼭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대륙과의 무역관계가 주로 관 주도로 이뤄졌던, 비교적 고립됐던 7세기 후반의 일본에서만 해도, 683년 4월15일부터 동전 주조에 대한 명령이 내려져 토착적 금속화폐의 역사가 출발했다. 한나라 이후의 오수전이나 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 건원중보(乾元重寶) 같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기축통화’와는 비교될 수 없지만, 일본산 금속화폐는 발해의 일부 유적(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지 등)에서 출토되는 등 ‘대륙 진출’에 나름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렇게 금속을 잘 다루는 나라가…

그러면 고대 한반도는 과연 어땠는가? 여기에 우리로선 얼핏 보면 풀기 어려운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한편으로는, 고대 일본에서 ‘금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금은 제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쳤던 신라는 적어도 6세기 이후로는 금은 수출국이었다. 특히 통일신라 시기에 당나라에 보내곤 했던 ‘방물’(方物)들의 목록을 보면 우황, 인삼, 작은 키의 말 등과 함께 꼭 금과 은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철과 구리 등도 신라에서 상고시대부터 채광되고 가공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변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금속의 제작·수출을 잘해왔던 신라가 금속화폐만큼은 역사상 만든 적이 아예 없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996년에 금속화폐 제작이 처음으로 명령되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금속화폐 만들기의 시도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가가 유공자에게 보상을 하거나 땅을 구입했을 때는 전형적 현물화폐인 곡식, 비단 등을 쓰거나 금을 무게로 달아 이용했다. 예를 들어 김유신이 673년에 숨졌을 때 국가에서 보태준 장례식 비용은 비단 1천 필과 조(租·쌀) 2천 석 정도였다(<삼국사기>). 경주 괘릉 근처에 있던 숭복사(崇福寺)를 885년에 보수·개축했을 때 나라에서 구입했던 부근 토지의 가격은 도곡(稻穀) 2천 점(苫), 즉 약 3천 석이었다(최치원, <대숭복사비>).

 

» 국가가 만든 예술 ② 경주 불국사. 국가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인력을 동원해 만든 건축물이다. (사진/ 한겨레 윤현주 기자)

금속을 다루는 재주로 명성을 날리는 나라에서 서비스와 물건의 값을 불편하게도 곡물로 치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금속화폐가 널리 쓰였던 인접 국가들의 사정을 보면 놀라운 일인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신라에서- 발해와 마찬가지로- 금속화폐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명기하지 않는 각종 개설서들의 태도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금속화폐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보통 언급되지만 신라의 사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거의 누락되곤 한다. 개설서의 저자들이 상세한 설명을 왜 꺼리는지는 신라가 화폐 제작을 독자적으로 하지 않았던 이유를 밝히기만 하면 쉽게 알게 될 것이다.

 

첫째, 한반도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 중국 중심의 화폐 사용권에 있었다. 서북 지방 같으면, 고조선 시기를 거쳐 고구려 초기까지 칼 모양의 명도전(明刀錢)과 같은 중국 금속화폐가 지배계층에서 이용됐다. 물론 유통수단이라기보다는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하는 ‘위신재’로 더 많이 기능했겠지만, 일단 중국 돈을 이용하는 것은 관습화됐던 듯하다.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낙랑이라는 한나라의 군현이 성립되고 낙랑 중심의 무역 네트워크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함께 아우르자 한나라의 동전들은 한반도 최남단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낙랑과 가야, 왜 사이의 중계무역 기지였을 듯한 전남 여수군의 거문도에서 980여 점의 한나라 오수전이 출토됐다.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초반에 낙랑과의 무역에서 얻었던 오수전들은 가야 지역(마산·창원·김해)에서는 물론 제주도나 강릉, 서울의 풍납토성, 경주에 가까운 경북 경산시 임당 등에서도 출토된다. 경주 지역에서는 그 시기의 오수전이 아직 나온 바 없지만 조양동 고분군에서 한나라에서 만들어진 듯한 유리구슬 등 중국제 위신재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초기 신라도 마찬가지로 낙랑 교역권에 포함돼 있었다.

 

국가의 직접적 인력 동원

둘째, 낙랑 중심의 무역 네트워크가 위기에 빠진 3세기 초반 이후로는 중국 동전의 공급이 어려워지는 반면 가야·신라 지역에서 일종의 금속제 현물화폐로 각종 쇠로 만든 물건들을 쓰기 시작했다. 3세기 중반의 중국인에 의해서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처럼 시장에서 거래할 때에 쇠를 쓴다”는 평가(<삼국지> 동이전)를 받았던 신라·가야인들은 철로 만든 납작한 도끼(판상철부·板狀鐵斧)나 쇳덩어리(철정·鐵鋌)를 만들어 일종의 화폐 대용으로 쓰고, 위신재나 수장의 무덤에 같이 묻는 부장품 등으로도 썼다. 이러한 ‘철 화폐’가 일본에서도 대량으로 발굴되고 백제와 고구려 유적에서도 일부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국제성을 띠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반 이후로는 철 화폐가 종적을 감추는 반면 신라 귀족들의 무덤에서 금은 팔찌, 목걸이 등이 대량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와 같은 금은보화가 귀족들 사이에서 화폐를 대신했으리라 추측된다. 또 5~6세기의 천마총에서 나온 섬유제품들이 잘 보여주듯이 6세기 이후의 신라에서는 직조기술이 크게 발달해 고급 비단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고급 직물류는 귀족 사이에 또 하나의 ‘지불 수단’이었다. 국내에서도 유통되고 중국으로도 수출되는 고급 직물들의 생산은 하도 중요해서 이를 담당하는 부서인 기전(綺典), 조하방(朝霞房) 등을 궁중에 따로 둘 정도였다. 초기의 철, 중기나 후기의 금은 제품과 비단 등은 신라 귀족의 ‘돈이 아닌 돈’이었다.

 

» 국가가 만든 예술 ③ 칼 모양의 명도전. 고구려 초기까지 사용된 중국 금속화폐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셋째, 국가도 평민들도 굳이 ‘돈’을 가질 필요가 없었을 만큼 신라는 직접적 인력 동원와 현물 수취를 중심으로 행정력을 행사했다. 국가와 백성을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세금인데, 통일신라 시대 농민들의 세금은 쌀과 대두, 콩, 호두, 잣, 마(麻), 사(絲), 포(布) 등으로 내게 돼 있었다(<신라촌락문서>). 고려 초기와 마찬가지로 세율은 토지 소출의 약 10분의 1로 생각되지만 생산력 수준이 낮고 대다수 호구가 가난했던 당시 사회에서 농민의 거의 모든 잉여 소출을 국가 또는 일정 지역에 대해 수조권(收租權)을 행사했던 귀족들이 수취했다고 볼 수 있다. 돈으로 거래될 만한 잉여 소출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하에 있던 농민들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돈의 또 하나의 쓰임새는 임금 지불인데, 신라라는 국가는 굳이 임금을 줄 일 없이 국가적 사업에 필요한 인력을 그저 무보수로 동원할 수 있었다. 15살 또는 16살 이상, 59살 이하의 평민 남성을 징발해 3년 동안 군부대에 보낼 수 있었으며, 또 1년 중에 약 한 달 동안 노동 부역(賦役)에 이용할 수 있었다. 또 전쟁이 없을 때 군부대가 바로 노동 부대로 변신해 국가적 토목공사에 이용됐다.

 

798년에 영천의 청제(菁堤)가 수축됐을 때 1만4140명의 ‘법공부’(法功夫)가 강제 동원됐는데(<영천청제비>), 이들은 바로 법당이라는 군부대의 병졸로 이해된다. 그들에게는 음식 제공은 이루어져도 굳이 돈을 지불할 필요는 없었다. 즉, 신라의 수많은 성곽, 제언, 궁궐 등은 노동력의 행정적 동원을 통해, 어떤 금전적 보상의 지불 없이 만들어졌으리라 봐야 한다. 하급 인력은 물론, 고급 기술인력도 국가가 굳이 돈을 주고 구입할 필요 없이 행정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신라의 왕실에 수많은 생산 부서들이 설치돼 있었으며 거기에서는 금속제품부터 직물, 신발 등을 만드는 일까지 다 맡아 했다. 거기에서 생산 관리자인 ‘어른’(옹·翁), ‘어미’(母) 등 남녀 기술자들이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궁노(宮奴)들을 거느리면서 물품 조달의 실무를 맡았다. 국왕의 ‘서비스’를 맡는 궁중 인력도 돈을 지불해야 할 자유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컨대 경문왕(861~875)의 귀가 나귀의 귀라는 비밀을 끝내 지키지 못한 그 유명한 복두장(?頭匠·이발사)은 이와 같은 궁노였을 것이다(<삼국유사>). 궁중에서 직접 조달되지 못하는 먹과 같은 일부 사무용품은 민간 공방에서 만들어져 대금 지불 없이 국가에 상납됐다. 민간 가마에서 만들어지는 토기도, 사지(舍知) 등 관등을 부여받았던 관리자의 책임으로 서라벌에 무료로 공납됐다.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 시장이라는 중간 영역을 형성할 만한 여력이 없던 직접 생산자들을 인신 지배하면서 돈의 유통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곳이 바로 신라였다. 돈이 주조·유통되기는 했으나, 역시 평민·노비에 대한 국가와 귀족들의 인신 지배가 계속 사회 질서의 골간을 이루었던 고려도 크게 봐서는 마찬가지였다.

 

» 명도전이 다량으로 발견된 풍납토성 유적. 기원후 2~3세기까지 중국 동전들은 한반도에서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사진/ 한신대박물관 제공)

이미 한나라 시절에 전국적인 상업 네트워크가 발전했던 중국과 달리, 신라에서는 국가 부문이 민간 또는 시장 부문을 철저히 압도했다. 민간인들의 자율적 시장 부문이 본격적으로 생기기도 전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이미 전국의 자원과 잉여가치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금속화폐를 필요로 하는 유통구조가 자리잡을 여지를 잠식해버렸다. 국가적 동원 체제를 출발점으로 한 한국 역사에서는 돈이 농촌사회에서 대량으로 유통될 만큼의 시장 부문의 발전은 18세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이루어졌다. 일본도 7세기 중반의 율령 국가 체제 완비 이후로는 ‘국가’가 ‘시장’을 완전히 압도하는 구조를 갖게 됐지만 8~9세기에 국가에 의한 임금 노동의 이용 사례가 있는 등 신라에 비해선 철저하지 못한 체제였다.

 

국가 위주의 사회, 부끄러운가

한국사 전개의 ‘내재적 목적’으로 근대적 자본주의를 먼저 선험적으로 설정해놓은 다음에 역사 기술에 착수하는 근대 민족주의 성향의 개설서 저자들에게는 명실상부한 ‘전국적 시장’의 구조가 한국사에서 아주 늦은 시기에, 아주 불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대단히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태도가 아닐까? 국가 위주로 발달돼온 사회는 몸에 밴 관존민비의 관습도 낳았지만 불국사, 황룡사, 석굴암, 고려대장경 등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또 일찍부터 발달한 국가 행정 체제의 운영 경험은 근대국가의 성립, 국가 위주의 압축적 성장모델 도입에도 나름의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긍정과 부정에 앞서 국제적 문맥을 고려하는 사실(史實)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김창석, 일조각, 2004
2. <신라 수공업사> 박남수, 신서원, 1996
3.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김기흥, 역사비평사, 1991
4. <한국 고대 무역사 연구> 윤재운, 경인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