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LUMN/71/22595.html
5세기 왜인들은 ‘후진 종족’이었나 [2008.06.06 제713호]
왜인들이 고급문화를 습득하고 한반도에 군사적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식민주의자들의 억지 주장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까? 일제시대에 상당수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이 침략의 명분으로 고대 일본이 4세기 중반∼6세기 중반에 일부 가야 지역을 ‘식민지’로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이용해왔던 만큼, 한반도의 많은 학자들이 이 설을 그대로 뒤집어 ‘우리 조상이 일본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정면 대응하거나 ‘백제 등 한반도 삼국이 후진국 일본에 선진 문물을 가져다주었다’는 부분만을 크게 강조해왔다.
광개토왕비문이 시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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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1931)에서 왜인들에 대해 “원래 아무 문화도 없이 사냥과 고기잡이로 살았던 몽매한 종족이었는데, 백제가 이들에게 왕인 박사를 보내어 처음에 한자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왜인들이 백제의 속국이 됐지만, 천성이 침략적이라서 백제를 가끔 범하기도 했다”라고 적었다. 일본 관학자들의 주장에 도전해 오히려 ‘왜인’들을 일개 야만 종족으로 취급해 한국 고대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단재의 마음이야 십분 이해되지만 사냥과 고기잡이밖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야만인들이 어떻게 해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는 왕인 박사를 이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단재의 독자들은 이미 1930년대에 품었을지도 모른다.
단재에 이어 북한의 석학 김석형(1915∼96)은 한술 더 떠서 고대 일본의 상당 부분을 한반도 출신들이 세운 고대 한국의 ‘분국’(分國)들이 다스렸다는 대담한 학설을 1963년에 내놓았다. “고대 일본이 우리의 속국이었다”는 단재의 신념을 구체화한 이 설을 남한에서 그대로 따르는 학자들은 거의 없지만 국수주의와 사이 멀었던 이기백 선생(1924∼2004)마저도 그의 명저 <한국사신론>에서 백제의 편에 서서 광개토왕의 군대와 싸웠던 왜인들이 “백제 유이민들이 왜의 땅에서 세운 나라들의 출신”이라고 적었다.
그 정도로 “후진적인 왜인”들이 한반도의 역사 무대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렸던 것은 종전 한국 사학계의 분위기였다. 대다수 개설서들이 ‘백제 문화의 동진(東進)’이라는 맥락 외에서는 고대 한반도에서의 왜인들의 활동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설서를 읽은 독자에게 남는 인상은, 5∼6세기 왜인들이 그저 백제인들에게 약간의 문화를 배워 조금 개화된, 후진적이고 고립됐던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5∼6세기 왜인들의 한반도 내 활동을 기록한 <일본서기>(720) 기사들은 나중에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됐지만, 일부는 전설적 성격이 강해 믿기 힘들고 또 일부는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개조·윤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사들을 배제하고 신빙성 있는 한국과 중국 사료, 그리고 고고학적 유물과 금석문만으로 봐도, 예컨대 5세기에 한반도와의 관계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기나이(畿內·교토∼오사카 지역)의 야마토 정권이 그렇게까지 ‘후진적’이지 않았으며, 한반도의 역사에 생각보다 훨씬 깊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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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삼국지> 등 1∼3세기 역사를 기록한 중국 사서에서 최초로 왜인들의 소국 연맹들이 등장한 뒤로 ‘왜’가 다시 대륙 쪽 자료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5세기 초반이다. 왜인의 대외 활동에 대한 당시의 가장 유명한 기록은 광개토왕비문(414)이다. 비문의 해석에 시비가 끊이지 않고 일본인에 의한 개작이 아니었느냐는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주류적’ 해석에 따르면 신묘년(391) 이래로 왜인들이 한반도에 건너가 백제와 소통하면서 신라를 침략하는 관계로 광개토왕이 기해년(399), 경자년(400), 갑진년(404), 세 차례에 걸쳐서 신라, 임나가라(가야 지역), 대방(황해도 지역)에서 왜인을 무찌르고 백제를 토벌하는 한편 신라를 하위 파트너로 삼았다고 한다. 비문에서 왜인들이 신라를 마치 ‘신민’(臣民)처럼 만들었다는 문장까지 보이지만, 이는 물론 문자대로 해석하면 곤란할 것이다. 광개토왕의 입장에서야 왜인들이 역외(域外)의 적대자였고 신라나 백제가 만만한 약소국들이었기에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신라나 백제의 입장은 당연히 달랐다.
신라로서는 왜인들이 서울인 금성까지 쳐들어와 며칠간 포위 공격(393·405)할 만큼 강군(强軍)을 가졌기에 왕자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 우의를 맺을 정도로 대접해야 했던 것이고(<삼국사기> 제3권), 백제로서도 역시 왕자를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로 주요한 파트너였다. 백제왕을 마치 왜국의 ‘신하’인 듯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사야 신빙할 것은 없지만, 한국 쪽 자료로 봐도 5세기 초기에 왜국 사신이 올 때 백제왕이 그를 ‘특별히 우대’(403)하거나, ‘예로써 대접’(409)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백제의 전지왕(재위 405∼420)은 원래 왜국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왜인 친위대를 데려와서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기에 더욱더 대왜(對倭) 태도가 극진했던 것이다(<삼국사기> 제25권). 경주 평야와 낙동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 중부 지방(황해도)에서도 동북아의 강대국 고구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신라·백제 왕자들을 인질로 데려가고, 백제왕의 즉위에 군사적 지원을 해줄 정도라면 과연 왜인들이 단순히 ‘후진적 오랑캐’였을까?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반부를 다스렸다는 이야기야 낭설이지만, 한국 자료로 봐도 왜국은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신라·백제 왕자들 인질로 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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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 자료에 비춰진 왜국도 결코 ‘후진적이며 만만한 종족’은 아니었다.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긴 하지만, <진서>에는 왜국이 고구려와 함께 413년에 중국 남부의 진나라에 조공한 것으로 돼 있다. 진나라가 송나라로 대체되자 왜왕 찬(讚)이 곧 거기에도 조공해 ‘안동장군’(安東將軍)이라는 칭호를 421년에 얻게 됐다. 고구려·백제 통치자들이 얻었던 화려한 칭호에 비해 레벨이 떨어지긴 했지만, 일단 왜국까지도 중국 중심의 조공외교의 국제질서에 그때부터 편입됐다고 봐야 한다. 그 뒤로는 5세기 말까지 왜왕들이 송나라에 빈번히 조공하면서 중국인들과 일종의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조공을 받으면 해당 변방 군주에게 칭호를 하사해야 하는데, 왜왕들이 청구한 칭호들이 대개 지나치게 야심만만해 중국인이 자주 깎았던 것이다. 예컨대 왜왕 진(珍)이 438년에 자신을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마한’ 등 여섯 나라의 통치자로 소개했지만 송나라에 의해서 단순히 ‘왜국왕’만으로 봉해졌다. 첫 시도는 실패였지만, 왜왕들이 그 뒤로도 계속 한반도 국가들의 국명을 포함하는 칭호를 요구했으며, 송나라는 451년부터 이 칭호들을 왜왕들에게 내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자신의 서한에서 “털보들의 55개 나라, 오랑캐들의 66개 나라, 또 바다 건너 북쪽의 95개 나라를 평정했다”고 자화자찬하고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했던 왜왕 무(武)는 ‘백제왕’으로까지 봉해지지는 못했지만,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 여섯 나라의 ‘도독’(都督)이자 ‘왜왕’으로 봉해졌다(478). 다음해에 중국 남쪽에서 송나라를 폐하고 등장한 제나라에 다시 조공한 왜왕 무는 ‘안동대장군’보다 한층 높은 ‘진동(鎭東)대장군’의 호를 하사받았다. 그의 국력이 커지고 있다는 걸 인지한 중국 지배자들이 그를 진급시킨 셈이다.
백제·고구려 사신들을 통해서 신라 등 한반도 정치체들이 왜왕의 통제권 바깥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었던 송나라 지배자들이 왜 5세기 중반 이후로 한반도 국가 국명들이 등장하는 칭호를 왜왕들에게 확정해주곤 했을까? 아마도 왜왕 무의 서한에서도 언급됐던, 해외에서의 군사적 활동에 나름의 ‘점수’를 주었던 모양이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따르면 5세기에 왜인들이 신라를 17회나 침범했는데, 금성을 10일이나 포위하는 경우까지 있었는가 하면(444) 1천여 명의 신라인들을 포로로 잡아 데려간 일도 있었다(462). 이 정도의 대담한 작전을 해외에서 벌이자면 적어도 2천∼3천 명의 병사들이 요구됐을 것인데, 소형 선박 이상을 만들지 못했던 당시 왜인 사회의 수준으로 이 정도의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필요했던 수백 척의 배를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배를 대량생산해 수천 명의 병력을 신라의 서울까지 이동시킨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김해의 금관가야나 고령의 대가야(가라국) 등 가야의 여러 나라들과 제휴해 그들의 영토를 거점으로 삼아 신라를 함께 괴롭혔을 터다. 5세기의 경남 김해시 두곡 43호분과 72호분, 그리고 고령군 지산동 32호분 등 가야의 여러 분묘에서 일본열도와 매우 흡사한 판갑(板甲·갑주의 일종)들이 출토되는 것은 이런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또 6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일본열도 식의 분묘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들이 영산강 유역인 광주시 명화동과 월계동, 전남 함평군 신덕·장년·마산리 그리고 장성군 영천리 등에서 발견되는데, 그 당시 백제 군대에서 활동했던 일본열도 계통 전사들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당시 백제에서 왜인들이 섞여 살았다는 것은 중국 자료(<수서>)에서도 언급된다. 즉, 왜왕이 한반도 일부 지역을 ‘통치’한 것은 아니지만 진한(신라), 마한(전남 지역), 백제, 가야의 여러 나라에 걸친 군사 활동을 왜인들이 전개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송나라가 5세기 왜왕들에게 신라, 백제, 임나, 가라 등의 국명들까지 보이는 칭호들을 내려준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감안해준 결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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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가야·왜 이질감 적었을 것
5세기 내내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왜인들의 구체적인 정치적 소속이 어디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밝혀주기가 어렵다. 예컨대 5세기 초반에 신라를 상대했던 왜인들이 오늘날 오카야마현(혼슈섬의 남쪽)에 있었던 기비(吉備)국이라는 지방 정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가야의 주요 파트너들이 북규슈 지방 정권들이었으리라 생각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야마토 정권(즉, 왜왕)의 통제력은 5세기 초반만 해도 매우 느슨했으나 5세기 후반에 들어서 상대적으로 강화됐다. 예컨대 왜왕 무와 동인(同人)으로 비정되는 유라쿠(雄略) 천황(재위 456∼479) 시절에 기비국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사가 보이는 등 기비국의 약체화와 복속이 가속됐다. 북규슈를 완전히 통일시킨 것은 536년을 전후한 시기였지만, 이미 5세기 후반에 북규슈 등에 대한 야마토 정권의 우세가 굳어진 상태였다. 도쿄 근처의 이나리야마(稻荷山) 1호 고분에서 발굴된 야마토 정권 귀족 워와케노 오미(乎獲居臣)의 철검 명문(471)을 보면, 그가 섬겼던 유라쿠 천황이 이미 ‘천하를 다스리는’(治天下) 군주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명문에서 유라쿠 천황의 개인 이름인 ‘와카다케루’가 ‘獲加多支鹵’라는 방식으로 표기돼 있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에서 한자의 음을 빌려 고유명사들을 표기했던 방식과 흡사하다. 백제 전문가들이 바다를 건너 활동한 한 결실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문자생활을 이 정도로 익힌 정치 집단을 과연 ‘후진적 야만인’으로만 봐야 할까?
<북사>나 <수서>와 같은 중국 자료에서 “백제나 신라가 다 왜국을 큰 나라로 받든다”는 말이 나올 때에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다. ‘큰 나라’이기보다는 양쪽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5세기 일본열도에서 한반도 출신들이 맹활약을 벌였듯이 일본열도 출신들도 한반도에서 상당한 군사적 등의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 그리고 5세기 야마토 정권의 문자나 중국 정치 사상 등 대륙 고급문화 습득 수준이 적어도 가야나 신라에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애써 부정할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국경이 없었던 그 시기에 백제인과 신라인, 가야인, 왜인들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은 지금의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
1. <한국고대사의 연구> 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361∼385쪽
2. <동아시아 속에서의 고구려와 왜> 한일관계사학회 엮음, 경인문화사, 2007, 1∼135쪽
3. <고대한일관계사> 연민수, 혜안, 1998, 61∼133, 343∼397쪽
4.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박천수, 사회평론, 2007, 129∼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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