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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박노자] 화랑은 무사 집단이었을까

by 마리산인1324 2009. 7. 12.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LUMN/71/22748.html

 

 

화랑은 무사 집단이었을까 [2008.06.27 제716호]

 

 

검술 연습과 함께 기도를 하고 연애 행각을 벌인 젊은이들… 멸사봉공과 충군애국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시대와 함께 변한다.” 화랑의 이미지에 이 상투적인 말 이상으로 어울릴 표현은 없다. 시대마다, 사회·정치 세력은 그들에게 필요한 화랑의 모습을 생산·유포해왔다. 각종 단절과 갈등이 심한 한국사인지라 시대의 변천이 극적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에 따라 화랑을 보는 시각도 계속 달라져왔다. 고려시대를 봐도 문인마다 화랑을 보는 눈을 약간씩 달리했다. 유교 지상주의적 <삼국사기>에서 화랑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열전(列傳)에서 발견되는데, 열전에 나온 69명의 인물 중에서 21명이 ‘멸사봉공’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이었다. 관창(官昌)과 김흠운(金欽運) 등 열전에 등장하는 7세기 중반 전쟁 시기의 대표적 화랑들은 대개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열심히 싸우다가 장렬히 죽는 것으로 아군의 사기를 높인 이들이거나, 관리로서 청렴을 보인 이들, 또는 효도 실천과 관련된 이들이었다.

 

» 박정희 정권 때 경주에 지은 화랑교육원. 전통 양식을 본받는 척했지만 건물이 주는 압도감이 너무 강해 경주의 아기자기한 집들과도 남산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사진/ 연합)

 

신채호, 화랑을 민족정신으로

<삼국사기>가 유교적인 화랑상을 제시한 반면, <삼국유사>의 화랑상은 자연스럽게도 상당히 불교화돼 있다. 미륵보살은 6세기 말 흥륜사 진자(眞慈) 스님의 애절한 기도에 응답해, 국선 미시랑(未尸郞)으로 태어나 신라가 부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불국토임을 증명한다. 수행자 혜숙(惠宿)은 호세랑(好世郞)의 옛 제자로, 화랑 조직의 새로운 국선이 짐승을 필요 이상으로 마구 죽이는 등 불살생계와 살생유택의 가르침을 두루 짓밟자, 그에게 자기 허벅지의 살을 먹으라고 준다. <삼국사기> 같으면 언급될 리가 만무했던 이들이 <삼국유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또 한편으로 도교적 취향이 강했던 이규보(1168~1241)나 이인로(1152~1220)는 술랑, 남랑, 영랑, 안상 등 사선(四仙·네 명의 국선)을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자연을 즐기고 결국 도와 하나가 되는 뛰어난 옛 도사쯤으로 묘사했다. 같은 옛 제도를 놓고 이야기하지만 화자마다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다.

 

고려시대도 이 정도였지만, 근대에 접어들어 화랑에 대한 입장 대립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이익(1681~1763)과 같은 실학자는 <성호사설>에서 화랑제도를 주로 인재 등용 방법으로 이해했지만, 근대 초기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화랑을 일차적으로 ‘한국적 무사도’로 보곤 했다. 일본 어용학자들이 무사도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남성적 민족성과 한국인의 비겁함·태만함·여성스러움을 대조시킬 때,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겐 우리에게도 남성다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주된 과제처럼 인식됐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화랑들의 무공과 무사정신을 찬양했을 뿐 아니라 화랑사상을 한국 고대의 무속신앙(소도신앙)과 관련시켜 “우리 고유 사상의 진수”로 단정했다. 이 사상을 과감하게 확대해석한 신채호에 따르면 윤관의 여진 정벌이나 묘청의 반란까지도 “사대주의에 맞선 우리 고유 화랑 사상의 발로”였던 것이다(<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 1926). 화랑을 뛰어난 무사이자 우리 민족정신의 화신으로 본 것은 당시에 신채호만이 아니었다. 신채호보다 고증 정신이 더 강했던 동료 민족주의 국학자 안확(1886~1946)도 특히 1910년대 말~1920년대 초반에 “고대 조선의 무사도의 꽃, 화랑”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살생유택으로 표현되는 관인(寬仁)의 정신, 그리고 충신(忠信)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화랑도라는 이름의 우리 고유의 무사도는 서양의 기사도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요지로 화랑들을 찬양했다(<조선무사영웅전>, 1919).

 

이와 같은 찬양 일변도의 화랑 이야기에 대한 1930년대 좌파 지식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태준(1905~49)은 귀족 자제인 화랑들을 아예 “노예 반란의 진압 준비를 위해서 무장하여 군사 연습을 일삼았던 노예주들의 자위단(自衛團)”으로 봤다(<신라 화랑제도의 의의>, 1933). 이와 같은 사관을 출발점으로 삼은데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정통으로 보는 북한의 사학자들은 ‘노예주의 자위단’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세속오계를 ‘반동적인 도덕규범’으로 규정하고, 화랑들의 전공(戰功)을 ‘범죄적인 동족상잔에서 얻었다’고 깎아내리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조선전사>, 1979).

 

이와 정반대로 안확류의 민족문화론을 바탕으로 삼은 남한의 관용 사학은 특히 독재 시절에 화랑에 대한 국수주의적 찬양에 열심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식적 사가(史家)’라고 할 이선근(1905~83)은 군의 정훈 교과서가 된 <화랑도 연구>(1950)에서 신채호를 능가하려는 듯 화랑정신을 윤관과 묘청뿐 아니라 3·1운동의 정신에까지 연관시킨다. 그렇게 해서 화랑정신이 ‘애국·멸공 정신’의 원조 격이 되어 육사의 소재지가 ‘화랑대’라고 불리게 되고 유신정권 초기에 경주에는 서라벌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유사(類似) 전통 양식의 화랑교육원이 생겼다.

 

그러다가 박정희식 군사주의가 상대적으로 퇴조하고 성에 대한 터부가 많이 깨진 최근에는 김별아의 <미실>(2005)이나 심윤경의 <서라벌 사람들>(2008)과 같은 소설에서 화랑들의 동성애와 이성애, ‘비보이처럼 현란한 무예 훈련’ 등이 강조된다. 말하자면, 화랑은 민족 전사에서 얼짱과 몸짱, 섹시남으로 변신한 것이다.

 

군인보다는 ‘다정한 젊은이’

군자이자 효자, 불교적 수행자, 국가가 등용하려는 인재, 전사, 무장한 노예주, 애국정신의 화신, 그리고 연애와 섹스에 뛰어난 얼짱…. 우리에게 알려진 화랑의 이미지는 이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사극과 학교 교육 등의 영향으로 여태까지 다수에게 가장 익히 알려진 화랑의 이미지는 ‘용감한 무사’ 또는 ‘충효의 청년’이 아닌가 싶다. 구한말과 일제 시기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유포된 이 이미지는, 특히 화랑을 원체 부정하는 북한과의 이념 대결 과정에서 남한에서 거의 당연지사처럼 굳어져버린 듯하다. 물론 이 이미지는 단순한 허상은 아니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진흥왕대에 여성 위주의 원화(源花) 조직을 없애고 젊은 남성 위주의 화랑 조직을 대신 세운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귀족 자제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그들을 군에서 활용할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화랑들의 군사활동이 가장 일찍 드러나는 것은 사다함(斯多含)이 대가야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562년이지만, 신라 후기인 822년까지도 화랑인 명기(明基)와 안락(安樂)이 김헌창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즉,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화랑 조직은 나름의 군사적 의미를 계속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전사로서의 화랑’ 이미지의 문제는 그 허구성이라기보다는 일면적인 성격에 있다. 즉, 화랑들이 군사교육을 받았음이 틀림없지만, 과연 그것이 그들만의 특징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주된 특징이었는지 충분히 의심해볼 만하다.

 

같은 시대의 중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신라 귀족들에게는 군사교육과 군사활동이 그 생활의 당연한 일부분이었다. 전쟁이 나면 전장에 나가야 했고, 전장에 나간 이상 또 용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줄 모르는 이에게 고대국가는 꽤나 무자비했다. 고구려는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성을 지키다 항복한 자를 살인자나 강간범과 똑같이 취급해 목을 베는 것이 관습이었는데(<구당서> 동이전), 신라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추측된다. 화랑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이 당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패했음에도 전사하지 않고 도망갔을 때 그의 매정한 아버지가 “내 아들 목을 베라!”고 외치고 부자의 연을 끊지 않았던가? 전쟁이 일상화돼 있는 사회에서 ‘임전무퇴’란 화랑만의 덕목이라기보다는 국가가 장려하는 ‘상식’이었으며, 화랑들이 이 덕목의 실천에 남보다 더욱더 힘써야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화랑이 아닌 이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을 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신라의 순국 군인들 중에는 화랑이 아닌 중급·하급 귀족으로서 7세기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이들(필부, 죽죽, 눌최, 취도, 해론 등)이 화랑 계통의 전사자보다 더 많다. 전사해야 할 때 전사하지 못하면 본인이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가족까지 그 가격(家格)이 떨어지는 반면 한 명의 전사자가 가문의 위치를 올릴 수 있었던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즉, 적진에 뛰어들어 고투하다가 비장하게 전사하는 유의 행동은 화랑의 전유물이라기보다는 당시 신라 국가가 보편적으로 독려(거의 강권)하는 행동양식이었다.

 

승려 등 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남성에게 살생이 일상의 일부였던 시대 분위기에서 화랑들이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동시대인들에게 비쳐진 그들의 모습은 용감한 군인이라기보다는 ‘과민하고 다정한 젊은이’에 더 가까웠다. 예컨대 초기의 화랑이었던 사다함을 보자. 원래 용모가 준수하고 행실이 방정해 신라 상류 사회의 ‘인기 스타’였던 그는 562년에 대가야와의 전쟁에 나가기 위해 진흥왕에게 특별히 몇 차례에 걸쳐서 부탁을 해야 했다. 보통 15·16살의 어린 화랑들에게는 참전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사다함에게는 예외로 장교가 되는 것이 허가됐다. 믿을 만한 자료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어떤 고대 내지 중세 문헌을 기반으로 해서 근대에 접어들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1989년에 ‘발견’됐다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은 아예 낭도를 거느리고 사사로이 전쟁터로 나갔다.

 

특히 우정을 소중히 여겨

<삼국사기>는 사다함의 전공(戰功) 못지않게 그가 가야인 포로들을 풀어줌으로써 인의(仁義) 정신을 보여주고 임금이 하사하는 전답을 받지 않으려 하는 등 겸양과 청렴을 과시한 것을 강조한다. 사다함이 <삼국사기>의 주장대로 단짝 친구 무관랑(武官郞)이 죽은 것을 슬퍼해 자진(自盡)을 했는지, 아니면 <화랑세기>의 이야기대로 거기에다 그의 애인인 미실 공주의 배신이 가세되어 삶의 의욕을 잃은 것인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사다함과 같은 화랑의 최고의 인생 가치는 국가가 요구한 ‘멸사봉공’과 함께- 또는 멸사봉공보다도- 대인관계에서의 정(情)이었던 것이다.

 

특히 남성 사이의 우정을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시 신라 귀족 자제들의 보편적인 분위기였다. 587년 도교에 입교해 신선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신라의 젊은 귀족 대세(大世)가 중국 남부로 밀항했을 때 “나도 남자다. 너는 어째서 나를 놓아두고 혼자 가려 하느냐”라며 그를 따라간 것은 그의 충실한 친구 구칠(仇柒)이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먼 길에다 조국을 영원히 떠나는 관계로 가족들과도 영별하는 길이었지만, 남자가 어찌 친구를 혼자 보낼 수 있으랴? 일각의 주장대로 사다함과 무관랑, 그리고 대세와 구칠이 동성애 커플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화랑을 비롯한 당시 신라 젊은이들에게 무(武)보다 정이 더 본질적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화랑의 이미지도 다양하지만, 역사의 실체로서의 화랑들도 대단히 다양했다. 김유신(595~673)과 같은 잔혹한 정계 거물이 7세기 초반 한 명의 국선이었다면, 도둑질을 한 친구들을 고발하기가 싫어서 차라리 그들의 손에 죽는 길을 택한 비극의 영웅, 하급 귀족인 검군(劍君·?~628)도 그때에 화랑 조직의 낭도였다. 같은 조직 안에서 성격이 판이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경우다. 또 일정한 국교가 없던 신라에서 화랑 조직에 속한 귀족 자제들이 유교와 불교, 도교, 그리고 토착적 무속까지 동시에 두루 학습·실천하면서 독특한 혼합적 세계관, 윤리관을 만든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랑은 독실한 불자와 유교적 경세(經世)에 뜻을 둔 이들이 함께 어울렸고, 검술 연습과 함께 불보살과 산신에게 기도를 하고, 과감한 연애 행각을 벌였다. 이 섞임, 다의성(多義性), 다성(多聲)의 카오스는 신라인의 삶 그 자체였다. 그 혼돈과 다양성을 ‘충군애국’이나 ‘멸사봉공’ ‘충의 정신’과 같은 상투적 관용구로 표현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아름다운 혼란의 역사에 ‘국방색’을 덧칠하는 것은 큰 죄악이 아닌가?

 

참고 문헌:

1. <신라사회사연구> 이기동, 일조각, 1997, 232~309쪽
2. <신라 골품제 사회와 화랑도> 이기동, 일조각, 1984, 315~361쪽
3. ‘승려낭도고-화랑도와 불교와의 관계 일고찰’ 김영태, <불교학보> 제7집, 1970, 255~272쪽
4. <新羅花郞の硏究>, 三品彰英(미시나 아키히데), 三省堂,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