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LUMN/71/23228.html
고대 한반도는 공포의 전제왕국? [2008.08.29 제725호]
일제에 의해 토지의 사유재산제가 정착됐다는 뉴라이트의 주장,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슷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면 먼저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백인의 부담’과 ‘남성적인 서양에 의한 여성적인 동양의 계도’를 노래한 키플링(1865∼1936)류의 시가일 것이다. 그렇다. ‘깨끗하고 부지런하고 용감한 일본인’과 ‘더럽고 게으르고 비겁한 조선인’을 대조시킨 20세기 초 일본의 통상적 조선 인식, ‘조선의 명물’이라고 하여 기생들에 초점을 맞춘 100년 전의 일본 엽서들이야말로 일본 지배자들이 전유한 오리엔탈리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이란 이밖에 구체적인 사회·경제관적 내용까지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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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소유와 민간 소유 구별
페르시아 등 ‘동양 국가’들을 ‘귀족들의 명예나 신분도 보장돼 있지 않은, 공포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전제왕국’으로 명명한 몽테스키외(1689∼1755)의 <법의 정신>(1748)이 출간된 이후로 유럽인들에게 동양은 무엇보다 ‘난폭한 전제국가’들로 보였다. ‘동양적 전제국가론’이 통설화된 19세기 후반에는 마르크스마저도 인도나 중국에 서구적 의미의 토지 사유권이 확립돼 있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동양 국가들을 ‘세계 보편’의 유럽식 봉건제적·자본주의제적 모델과 별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처리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상상했던 동양은 공포스러운 전제군주와 그 관료들이 토지국유제를 통해서 통제했던, 그리고 이렇다 할 만한 발전이 없는 무수한 농민공동체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왕조들이 교체될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의 ‘맹아’를 배태할 수 있는 토지사유제가 없었기에 동양은 정체돼 있었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통설화된 ‘동양적 전제왕권’ ‘동양적 토지국유제’ ‘동양적 정체성’ 이야기는,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 지배자들에게 하늘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조선도 ‘구조상 발전이 불가능한 토지국유의 전제사회’라면 이미 서구화돼가는 일본과의 ‘합방’은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았겠는가? 재미있게도 20세기 초반에 조선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최초로 ‘과학화’한 일본인은 독일 유학 시절에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수업을 받았던 ‘온건 사회 개량주의자’ 후쿠다 도쿠조(1874∼1930)였다. 1902년에 20여 일간 조선을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그의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1903∼04)은, 조선을 ‘토지 소유의 관념조차도 없는’, ‘봉건제를 결여하고 지금도 12세기 이전의 일본과 같은 고대 국가 수준에 있는’, 하등의 발전이 불가능한 대책 없는 사회로 묘사했다.
일본 학계 최대의 경제사 학파를 양성한 후쿠다의 제자 백남운(1894∼1979) 등 조선 좌파 학자들은 ‘합방’ 이전까지 조선에 토지 소유의 관념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비웃음거리로 삼았지만, 그들마저도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녔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어느 정도 구속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백남운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실제로 촌락 공동체에 의해서 이용됐던 토지는 법적으로 ‘국유’였으며,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국가가 하나의 커다란 지주가 되어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아시아적 봉건제 사회’가 성립됐다는 것이다(<조선 봉건사회 경제사>, 1937). 백남운과 견해를 달리했던 이청원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삼국시대 사회를 ‘국가가 직접 부리는 노예’들과 국유 토지를 경작하는 농노적 신분의 농민 공동체들로 구성된 것이라 했다(<조선사회사 독본>, 1936). 몽테스키외 등이 조작해놓은 ‘소유의 권리조차도 없는 무서운 전제사회’의 망령은 유럽중심주의에 감염된 식민지 지식인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가 지나고, 815년께 작성됐으리라고 믿는 신라의 장적(촌락 문서)이나 그 당시 금석문에 대한 연구 성과가 꽤 쌓인 오늘날에는 ‘아시아적 사회 성격’과 같은 이야기가 이미 그 자체로 ‘역사’가 되고 말았다. 사실, 관(官)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관전(官田)인 관모전(官謨田)과 일반 백성의 호구(연·烟)들이 나누어 가지는 땅인 연수유전(烟受有田)이 정확히 구분해서 적히는 신라 장적의 기입 방식만 놓고 봐도, 관의 소유와 민간의 소유가 얼마나 확연히 구별됐는지 당장 알아차릴 수 있다. 비록 유교적 국가 통치 원칙 차원에서 연수유전을 포함한 나라의 일체 토지는 ‘왕토’(王土)라고 추상적으로 개념화됐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연(烟)마다 그 땅을 세습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연구자 다수의 의견이다. 아주 조심스러운 일본 연구자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성균관대)만 하더라도, 비록 소유의 명목상 주체가 마을 전체였다 해도 개별 호구가 그 땅을 스스로 점유·이용하고 있었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이미 통념화된 통일신라 시대 토지사유제론에 최근 의문을 제기한 전문가는 ‘뉴라이트’ 사학자로 알려진 이영훈 교수(서울대)였다. 그의 한 논문을 보면, 국가가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는 722년의 <삼국사기> 기록이 바로 일체의 토지가 국가 소유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라 때만 해도 완전히 공고화되지 못한 토지국유제가 나중에 ‘<고려사> 형지(刑志)의 금령조(禁令條)에서 보이듯이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를 금지한 고려왕조’에 접어들어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15세기 이후부터 농민의 실질적인 토지 사유가 가능해졌음에도 고종 황제까지도 과거의 ‘토지 국유’의 이념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결국 일제에 의해서야 근대적인 토지 사유 관계가 최종적으로 정착된 것이니, 국가나 촌락 공동체로부터 시장경제의 영역을 ‘해방’시킨 일제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논리다(‘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2004).
사료를 잘못 이해한 이영훈 교수
통일신라가 정말로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국가적 소유권을 행사했던가? 고려왕조가 과연 토지 매매를 금지했던가? 끝내 ‘토지 국유’의 전제주의적 꿈을 버리지 못했던 조선왕조 통치자들의 ‘전제권력’을 제거해 ‘시장 영역 해방’을 이뤄내기 위해 일제의 강점은 꼭 필요했던가? 이영훈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시장도 개인의 권리도 확고한 사유제도 존재하지 않는 동양적 전제왕국’들을 개명한 서구인들이 멸시적으로 논했던 한 세기 전의 시간으로 ‘타임머신‘ 여행을 간 듯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사료에 대한 너무나 ‘자유로운’(?) 접근이었다.
예컨대 <고려사> 금령조의 내용은 정확히 다음과 같다. “속이거나 훔쳐서 국유지나 민간의 땅을 판 자에게는 한 무(畝)에 태(笞·곤장) 50을 친다….”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당나라의 법률을 표준 삼아 만든 이 법은, 누가 봐도 ‘토지 사유·매매를 금지’한다기보다는 개별 호구의 사유권을 오히려 보호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백성의 토지 소유권을 보호해주려는 목적도 분명했다. 그래야 납세 기반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188년 귀족과 토호들이 일반 백성들에게서 힘으로 빼앗은 토지를 ‘본주’(本主), 즉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라는 국가의 명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고려사> 권79, 식화지 2). ‘본주’가 의미하는 게 ‘땅의 주인’이 아니면 과연 누구인가? 남의 땅을 빼앗는 것은 물론, 남의 땅에서 자라는 과일을 훔치는 일까지도 매우 엄하게 처벌하도록 돼 있었던 고려의 법률을 보노라면, 이영훈 교수의 생각과 정반대로 고려왕조가 재산을 가진 계층의 이해관계를 철저히 지켜주었던 국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전근대사회치고 토지 사유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는 없다. 예컨대 영국의 유명한 ‘대헌장’(1215)은 국가 등에 의한 재산 몰수의 가능성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다만 몰수의 경우에는 그 대가를 주인에게 지급하는 것을 요구할 뿐이다(26조). 요즘 세상에도 대추리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에 쓸데없는 미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보상을 전제로 한 강제 몰수를 당했다. 한반도에 ‘근대적 사유관계를 정착시켰다’는 일제 시절만 해도, 철도 부설 등으로 인한 몰수 때문에 땅을 잃어 보상액 규모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억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통일신라 시대만 해도 많은 경우 개별 호구가 아닌, 행정적으로 몇 개 호구로 편성된 공연(孔烟)이 토지 소유 주체가 되는 등 우리에게 익숙한 ‘개인의 소유권’을 피지배 계층 사이에서 찾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정적 세수(稅收) 기반을 확보하려 했던 신라는 민간인의 토지 소유를 규제·제한하는 동시에 그 소유권을 철저히 인정·보호해주었다. 이영훈 교수가 ‘토지 국유제’ 존재의 증거로 드는 722년의 토지 지급 기록은, 사실 국가에 의한 기존 민간인 토지 소유관계의 인정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다른 기록들이 신라에서 적어도 7세기 이후로는 토지 소유가 잘 보호받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대 국가는 합리적 조절자에 가까워
<삼국유사>에 따르면, 6∼7세기의 유명한 고승 원광이 오늘날 경북 청도군의 가서사(嘉西寺)에서 머물 때 재산이 있는 한 비구니가 밭 100결을 시주해 점찰보(占察寶), 즉 승려와 신도들이 과거의 악업에 대한 점을 쳐서 참회를 하기 위한 일종의 사설 재단을 설립한 일이 있었다. 후삼국의 전란으로 가서사가 폐사가 되고 말았고 고려의 태조 왕건에 의해서 가서사 소유의 밭이 후계 사찰이라고 할 운문사의 소유가 됐지만(937), 토지 기증에 대한 문서는 일연이 살았던 당대까지 남아 있어 일연 자신이 직접 읽었다고 한다(권4, ‘원광서학’ ‘보양이목’). 물론 밭 100결을 시납할 만큼 부유했던 상류층 여성의 토지 소유 관계가 다수 농민들보다는 분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간헐적으로 가난뱅이들이 소유했던 토지 이야기도 나온다. 예컨대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설케 한 8세기의 유명한 재상 김대성(金大城)은 그 전생에 경조(慶祖)라는 가난한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부잣집에서 종살이를 했던 그 여성은 주인에게서 개인적으로 경작할 밭 몇 무(畝)를 받아 그 소출로 입에 풀칠을 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다음 생애에서 복을 받게끔 그 밭을 흥륜사에 기증한 것으로 보아 그 소유권이 경조에게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권5, ‘대성효이세부모 신문왕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가난뱅이와 부자들이 곳곳에서 언급되고, 신라의 장적에도 비교적 잘 사는 농민의 토지 보유가 가난한 농민보다 평균 2배 이상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보면, 신라의 피지배 계층 사회는 이미 상당히 계급적으로 분화되고 불평등한 사회였다. 토지 소유권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불평등의 고착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뉴라이트’의 주장과 달리, 비록 근대적 형태는 아니지만 이미 삼국시대의 한반도 사회도 토지를 포함한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의 관념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사유재산 보호 장치들을 꽤나 갖고 있었다. 동시대의 일본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8세기의 통일신라에서 개별적 집안 소유의 토지를 사찰에 시납하거나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가 토지 소유 형태를 근대적으로 정형화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반도의 재산 관련 법률 전통으로 봐서는 일제 강점이 없었다 해도 한국인 스스로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농민들의 토지가 ‘연수유전’, 즉 호구들이 (국가로부터) 받아 가지는 땅’이라고 부를 만큼 국가가 재산관계에 개입해 피지배민들의 토지 매매 등을 어느 정도 억제했던 것은 사실인데, 그 목적은 기본적으로 무산자·유랑민 발생의 억제와 세수 기반의 유지였다. 고대 한반도의 귀족 국가들은 ‘무소불위의 동양적 전제왕권’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사회였고, 국가는 여러 경제적 관계 속에서 나름의 합리적 조절자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참고 문헌
<삼국유사> 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한길사, 2006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이인철, 일지사, 2003
<통일신라토지제도연구> 이희관, 일조각, 1999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임지현·이성시 엮음, 휴머니스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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