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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당나귀 등에 올라타라! (경향신문090911)

by 마리산인1324 2009. 9. 12.

 

<경향신문> 2009-09-11 17:54: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111754365&code=990335

 

 

[낮은 목소리로]당나귀 등에 올라타라!

 

고진하 시인

 

“내 몸은 형제 당나귀다. 나는 그에게 먹이를 주고 씻겨준다. 그래도 나는 그를 탈 것이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형제 당나귀’로 여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으로 여긴 당나귀를 ‘참나’(Self)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당나귀인 내 몸은 나를 위해 숱한 시련을 겪고 나를 위해 고통을 함께 나누는 형제임이 분명하지만, 그래서 그 당나귀 형제의 충실한 봉사에 고마워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당나귀를 탈 것이다’란 말이 그것이다. 즉 내가 몸의 주인이므로 몸이 내 주인 노릇을 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것.

프란체스코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몸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 지위, 권력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재물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재물이 ‘참나’는 아니다. 세상의 지위나 권력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세상의 지위나 권력이 ‘참나’는 아니다. 그것들이 ‘참나’가 아닌 이유는 그것들은 무상(無常)하고 언젠가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멸의 신성 그 자체인 ‘참나’를 무상한 것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무지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몸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라’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기탄잘리’라는 시 속에서 권력과 재물의 수인(囚人)이 된 이를 등장시킨다. 화자가 그에게 묻는다.

“수인아, 말해다오. 누가 그대를 가두었는지?”

수인이 대답한다.

“나의 주인이었어요. 나는 권력과 재물에 있어 세상의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나는 내 보물창고에 왕에게나 걸맞을 재물을 모았지요. 졸음이 나를 엄습해 오자 나는 주인의 침대에 누웠어요. 그런데 깨어 보니 나는 보물창고에 갇힌 수인이 되어 있더군요.”

어쩌면 시인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들은 바로 보물창고에 갇힌 이 수인과 같지 않은가?’ 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듯싶다. 이 시는 결국 그 무상한 것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일깨워준다. 더 나아가 그런 무상한 것들보다 더 ‘큰 존재’에 소속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눈짓하고 있는 듯싶다.

더 큰 존재라니? 타고르에게는 그 큰 존재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불멸의 신성 ‘아트만’(참나)일 것이요, 성 프란체스코에게는 ‘그리스도’일 것이다. 불교도에게는 깨달은 자 ‘붓다’일 것이다.

하여간 자기보다 ‘큰 존재’에 소속되어 있다는 원숙한 존재감,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재물, 지위, 권력 같은 것을 티끌로 보는 시력을 제공한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지난 봄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섰던 이가 홀연 세상을 하직하며 남긴 이 말이 어떤 의미망을 품고 있는지 난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권력, 지위, 재물이 무상한 것이라는 각성이 묻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는 있었다. 대지에 흙 한 줌 보탤 뿐이라는 이런 각성은 인간을 겸허에 이르게 한다.

겸허, 그것은 인간의 본바탕이다. 빈 손, 빈 마음은 인간의 본바탕이다. 더 많은 재물, 더 높은 지위,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날뛰는 내 안의 당나귀는 나의 본바탕과 거리가 멀다. 내 안에서 날뛰는 당나귀와 영합하는 것은 나의 본질을 망각하는 일이다. 나의 본질을 망각하면 인간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나의 본질을 망각한 개인이나 사회에 삶의 진보는 없다.

나만을 위해 사는 어리석음

왜 우리의 정치문화는 답보 상태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왜 우리 삶에서 자신의 본바탕을 깊이 관조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까. 전체와 동떨어져 미세한 조각에 불과한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왜 사람들은 깨우치지 못할까.

성 프란체스코가 다시 살아서 우리 곁에 온다면 뭐라고 충고할까.

“네 안에 날뛰는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그 등에 올라타라!”

<고진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