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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국가의 의미를 묻다-김수행 인터뷰 (한겨레21 제781호)

by 마리산인1324 2009. 10. 22.

<한겨레21> 2009.10.16 제781호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5876.htm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월호]
[한국판 창간 1주년 특집] 국가의 의미를 묻다-김수행 인터뷰

케인스의 ‘국가만능주의’는 위기 해결 못해

 

 

공포는 간데없고 탐욕만 다시 무성해진 경제의 허장성세를 따지고자 한국 마르크스경제학의 대가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를 지난 9월 27일 경기도 산본 자택에서 만났다. 사진 촬영을 위해 서재를 청했지만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자는 김 교수와 거실 바닥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인터뷰 도중 공황 이론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오랜만에 보는 추억의 대학노트를 꺼내 볼펜으로 직접 써가며 열강했다.

 

 

-주류 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는 뭐라고 보나.

=주류 경제학은 개인의 본성과 행태를 연구해 그 개인의 합이 사회라고 본다. 반면 마르크스경제학은 특정 사회가 이미 주어져 있고 그 사회가 개인의 행태를 규정한다고 설명한다. 개인의 합이 사회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컨대 개인 모두가 저축하면 사회 전체의 저축도 늘어나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모두가 저축을 한다면 누가 물건을 살 건가. 공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노동자는 소득이 없어 저축할 수 없으므로 사회 전체의 저축은 0이 된다. 케인스는 이걸 ‘구성의 모순’이라고 했다. 또한 개인의 본성과 행태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은 인류 사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주의 사회라고 보는데 이것은 현실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엔 경제사가 없다.

 

-주류 경제학에 공황 이론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맞다. 개인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사회도 합리적 행태를 보일 것이므로 공황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회의 빈부 격차와 계급 문제가 사라진다.

 

-<자본론>의 부제는 ‘정치경제학 비판’인데 마르크스경제학을 왜 ‘정치경제학’이라 부르는지 궁금하다.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렀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분석틀은 사회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마르크스가 비판해서 완성한 게 <자본론>이다. 이후 1870년대에 한계효용학파가 등장하면서 ‘경제학’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부터 사회는 사상되고 에코노미쿠스(경제인) 중심의 경제학이 나온 것이다. 한국에선 마르크스경제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잡혀갈 상황이라 공안 당국이 헷갈리도록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렀다.

 

-초기의 고전학파(정치경제학)를 비판했다는 차원에서는 ‘정치경제학 비판’이지만 현재 주류 경제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론 ‘정치경제학’이란 용어가 적합하고, 한국에선 운동권이 은어로 사용하다가 굳어졌다고 이해하면 되나.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렇다.

 

-김 교수는 그런 점에서 애덤 스미스를 마르크스경제학의 원조로 본 것인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는데.

=애덤 스미스는 당시 중상주의자들이 금을 국부로 보는 논리를 반박했다. 금이 많이 있는 나라는 금으로 다른 나라에서 죄다 물건을 사오는 통에 그 나라의 산업은 죽어버리고 국민은 가난해졌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는 국부를 노동생산물이라고 봤고 그것을 만드는 노동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동가치설을 마르크스가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국부론>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도 증가한다’란 대목이 나온다. 이것을 후대에서 ‘시장’이라고 아전인수했을 뿐이다.

 

» 김수행 교수

-지난해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경제위기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각국 정부는 ‘출구 전략’을 앞다퉈 논의했다. 마르크시스트들이 말한 대공황은 대체 어찌된 건가.

=1850년대 금본위제도 당시엔 투기적 붐이 일어났다가 기업이 대출을 못 갚아 망하고 이어 은행도 망했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economic crisis’라고 불렀고 ‘공황’이라 번역했다. (대학노트를 펼쳐 경기 추이 그래프를 두 개로 나눠 그리면서)그런데 불태환지폐와 관리통화 제도로 바뀐 1945년부터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경기가 공황으로 빠지지 않고 회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땐 돈을 뿌렸어도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의 ‘economic crisis’ 국면을 회복이냐 공황이냐의 경제위기 국면과 공황 국면으로 나눈다. 따라서 미국의 경우 2007년초부터 2008년 3월까지는 경제위기 국면이었고 베어스턴스가 파산한 2008년 3월부터는 공황 국면에 빠졌다고 본다. 지금까지 각국 정부가 한 일이라곤 금융기관에 구제금융을 준 것밖에 없는데 V자니 U자니 W자니 하며 회복한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다. 문제의 원인인 제도와 정책을 고치지 않고는 경제 회복이 불가능하다. 실물을 보라. 나아진 게 전혀 없다. 경기회복의 지표는 고용이다. 생산활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회복이 안 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경제의 금융화로 금융 부문이 비대해졌다. 그러나 금융은 새로운 부나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주주자본주의는 단기 이윤만을 챙길 뿐이고 ‘카지노 자본주의’는 소득을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부자에게 이전시킨다. 금융시장이 반등했다고 하는데 투기의 결과일 뿐이다. 골드만삭스가 이익이 많이 난 건 경쟁업체의 파산으로 독점력이 커진 덕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생긴 부실 자산을 여전히 처분하지 못하고 있다.

 

공황을 격발하는 건 ‘투기’

 

-영국의 진보운동가 크리스 하먼도 지금의 위기를 금융이 아닌 실물경제의 위기로 규정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주기적으로 공황이 도래한다면 자본도 학습을 통해 주기적으로 자기 보정을 꾀할 수 있지 않나. 자본의 역사적 생명력과 확장성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붕괴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윤율이 제로까지 떨어져 자본가들이 투자를 못해 경제적 파탄이 올 것이라는 경제주의에 빠져 실패했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강력해야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주체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단결을 소홀히 하면서 임금 인상 투쟁에 함몰된 민주노총의 태도가 아쉽다.

 

-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말했는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철칙이 여전히 ‘암송’되고 있는 느낌이다. 마르크스경제학이 좀더 실증적으로 풍부해졌으면 한다.

=<자본론>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다시 대학노트에 공식(S/C+V)을 적어가면서) 신기술과 신기계를 도입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이뤄지면 이윤율이 떨어질 수 있다. 반면 신기술이 필요투자비용을 절감하거나 잉여가치율을 올리면 이윤율은 증가하는 경향도 있다. <자본론> 3권의 13장과 14장에 각각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면 15장에서 어느 요인이 더 크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는 어느 경향이 더 크다고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은 이윤율이 실제로 저하하리라고 예측한 것이 아니라 신기술을 도입하면서 진행되는 자본 축적 과정에서 공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신기술을 도입한 기업이 초과이윤을 얻고 다른 경쟁자들이 망한다면 공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공황론을 두고 마르크시스트들 사이에서도 이윤율 저하론뿐만 아니라 과잉생산론, 과소소비론 등으로 엇갈리고 있다.

=마르크스는 모두를 얘기했다. 공황의 폭발에서 결정적인 것은 투기다. 투기로 인한 생산 저하, 이게 아니면 공황을 설명할 수 없다. 1974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공황을 두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만 나쁘다고 할 게 아니다. 1972년 미국의 닉슨이 대통령 재선을 위해 확장적 재정금융 정책을 쓰면서 투기가 일어난다. 미국이 엔과 마르크의 평가절상을 요구하자 일본은 넘치는 외화로 원자재를 싹쓸이한다. 캐나다의 삼림까지 매점매석하는 바람에 당시 영국에 있던 나는 아이 기저귀를 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 일어나 유가가 3달러에서 12달러로 갑자기 인상되자 석유를 원료로 한 제품들이 팔리지 않게 됐다. 이때 사재기로 투기한 사람은 모두 망했다. 이것이 1974년의 세계 대공황이다.

 

케인스 사상의 뿌리는 ‘애국심’ 

 

-마르크시스트들은 국가 개입 강화라는 케인스주의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경제위기로 무덤에서 부활한 두 사람 중 마르크스의 공황론은 잦아들고 케인스를 찾는 ‘유효수요’는 급속도로 창출되고 있다. 죄송하지만 교수님 제자들 중에 케인시언으로 전향한 사람도 있다.

=케인스는 자유방임의 종언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케인스 사상의 뿌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조바심과 애국심에 있다. 그가 국가의 개입을 주장한 1920년대 영국 자본주의는 1930년대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경제의 중심이 이미 미국으로 넘어가 산업 경쟁력이 뒤지고 실업률이 치솟던 영국은 미국의 원조로 연명했다. 소련을 방문한 케인스는 단결된 소비에트 사회를 보고 경악한다. 물욕에 빠져 있는 자본주의의 실업과 소득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주의에 패배할 것이라고 우려해 시장에 맡기지 말고 국가가 개입해 소비와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일반이론’ 을 전개한 것이다. 그의 정책 제안은 많았지만 대부분 채택되지 못했다. 투자 촉진을 위해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안락사는 불가능하다. 이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대량으로 화폐를 발행하면 인플레로 가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재무부 장관 고문 때도 정부가 투자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정작 돈을 구해올 방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파운드화 가치가 흔들릴 수 있어서다. 기껏 도로·철도·항만을 건설하는 데 그쳤다. 되레 미국의 케인시언들이 케인스에게서 군비지출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어 실천에 옮겼다.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아버지와 케임브리지 시장인 어머니 사이에서 케인스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런 그에게 자본주의는 결코 무너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부자여서 주식투자를 했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 철학은 ‘굿 라이프’였다. 버나드 쇼가 <자본론>을 추천하자 ‘뭐 이렇게 재미없는 책이 있나. 비과학적이다’라며 내팽개쳤다고 한다.

 

-케인스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흐르는 것 같다.

=그럴까봐 케인스가 게이였다는 말은 차마 안 했는데. (웃음) 물론 성적 소수자의 인권은 존중한다. 어쨌든 남색에 빠진 탓에 42살에야 결혼했다. 상대는 영국에서 공연한 러시아 발레단의 프리마돈나였다. 그가 소련을 방문한 것도 처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있어서다. 그는 자본주의가 망할까 겁나고, 영국이 망할까 두려워 확장적인 재정금융정책을 추천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끝낸 건 뉴딜정책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었고, 따라서 일등공신은 케인스나 루스벨트가 아닌 히틀러라는 희화적 얘기가 있다.

=공황의 자본주의적 극복책으로 루스벨트의 뉴딜과 히틀러의 파시즘이 등장했다. 1차 대전에서 패해 배상금 부담을 지고 있던 독일 국민은 연합군에 대해 악감정을 갖게 됐다. 눈치 빠른 케인스는 베르사유에 가서 독일을 너무 짜내면 소련하고 붙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프랑스가 배상금을 삭감해주지 않자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입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정부가 군수산업을 일으키고 생산시설을 완전 가동하고 실업자를 군인으로 동원함으로써 실제로 1939년부터 경기가 회복됐다. 완전고용을 이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렸던 1950~70년 유럽의 복지국가 혹은 혼합경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전시통제 경제의 경험을 활용한 것이다.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말해주듯 달러가치가 다시 떨어지고 새 기축통화 논의가 끊이지 않는데 미국이 언제쯤 ‘영국’이 될 것인가.

=1960년대 이후 서독과 일본의 경제가 부흥하면서 미국은 무역적자를 내기 시작한다. 베트남전쟁으로 돈이 풀려 금값은 올라가고 달러가치가 하락하자 1960년대 말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미국에 달러를 주고 받아온 금을 금 시장에 팔아 차익을 얻는다. 다른 나라들도 미국에 금을 내놓으라고 우르르 달려오자 1971년 닉슨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는 것을 중단하면서 달러가 종이돈이 됐다. 지금 종이 달러 한 장 찍어내는 비용이 35센트인데 여기에 100달러라고 써서 윤전기를 돌리면 미국은 99달러 이상을 공짜로 얻는다. 달러가 세계화폐이기 때문에 얻는 시뇨리지(화폐발행수익) 효과다. 금융기관을 살리려 제로금리를 쓰는 바람에 달러가치가 떨어지면 달러로 표시된 미국의 주식과 국채를 아무도 가지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1929년처럼 미국 증시가 대폭락할 수 있다. 그러면 전세계가 타격을 입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협조해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니들 까불면 다 죽는다’며 군사력으로 전세계에 시위하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 강요, 이게 ‘조공’을 받아 살아가는 메커니즘 아닌가. 경쟁력 있는 산업도 없고 실질임금이 하락해도 미국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값싼 소비재 덕분이다. 중국처럼 싼 소비재를 만들 수 없고 자동차도 망했으니 수입 초과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적자 탈출을 위한 뾰족수가 없는 미국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전쟁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하지 않으면 세계가 우습게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마 전쟁의 대상이 북한은 아닐 것으로 보는데… 북-미 직접 대화도 추진되고 그래도 오바마이니까.

=건강보험 하나 못 밀어붙이는 오바마다. 부자 감세도 못 건드리고 있다. 미국은 시민이나 노동자 세력이 약한데다 애국주의가 강해 전쟁이 나면 결집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라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북한 대립 정책을 쓰고 있다. 북-미 대화에도 고춧가루를 뿌리고 있는데 제발 좀 가만히 있었으면 한다.

 

-미국의 ‘대체재’라는 중국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2조 달러의 미국 유가증권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딜레마는 미국이 자국의 가장 큰 시장이란 점이다. 이해가 상충해 미 국채를 투매하면 제2의 금융공황이 온다. 그래서 판을 깨진 못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있다. 중국은 분명한 자본주의 체제이면서 공산당 독재를 하고 있어 박정희 개발독재와 비슷하다. 경제는 불안정한 상태로, 연안의 공장들이 대거 문을 닫고 있지만 이미 농촌은 돌아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노동자의 불만이 비등하고 있다. 민주화 요구가 나올 것이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면 외국 투자는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

 

» 김수행 교수는 타고난 선생님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수시로 노트를 펼쳐 개인과외 하듯 설명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걸로 알고 있다.

=대중경제론을 주창한 DJ에게 기대가 컸는데 정작 집권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많이 썼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대로 대기업의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는 과정에서 헐값에 발행한 주식이 외국인 손에 넘어갔다. 벤처 육성도 ‘묻지마 투자’로 변질돼 서민을 울렸다.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잘했다. 아쉬운 건 이런 복지정책을 확대하려면 세출 면에서 군사비와 정보비를 많이 줄여야 하는데 남북 화해의 일념을 가진 DJ답게 군비 축소로 과감하게 나갔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군 근무 연한을 줄이긴 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아시아 금융 허브는 엉터리였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정치적 목적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농어촌이 4억 달러 손해를 보더라도 자동차 수출로 10억 달러 이익을 보니 국익은 6억 달러 늘어난다는 방식으로 홍보했다. 그런데 그 6억 달러가 정부 돈인가? 재벌 돈이지. 따라서 정부가 농어민의 손해를 보전해줄 수 없다. 이런 건 국익이 아니다. 권위주의 해체와 민주화 측면에선 훌륭했다.

 

-당시엔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쳤고 국가 부도 위기에서 불가피했다는 항변도 있다.

=1980년대 들어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은 노동자 세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경제 회복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긴축으로 돌아섰다. 정책의 목표가 완전고용에서 인플레 억제로 바뀐 것이다. 실업자가 많이 생기니 노동조합의 힘을 꺾기가 쉬워졌다. 자본가 독재의 강화다. 기업은 이윤을 못 보는 산업보다 금융 활동을 하려 한다. GM과 GE도 생산보다 해외 주식시장 투자에 주력했다. 감세로 사회보장제도가 줄어들어 국내 시장이 위축된 선진국 자본은 후진국에 개방을 요구한다. 자본의 세계화로 후진국의 유치산업은 망하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 시장은 IMF의 긴축정책으로 외국 자본에 다 먹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읽은 대통령이라면 외세에 쉽사리 굽혀선 곤란하다.

 

이명박 정부, 더 큰 거품 만들어

 

-외국에선 지금 한국이 가장 빨리 경제위기를 벗어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상승하고 있다.

=외국 자본은 국내 시장에서 이익만 보면 그만이다. 그외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우리 국민은 계급의식이 약하다. 가난한 사람도 종부세 폐지에 찬성한다. 반면 아파트나 주식 가격이 오르는 데는 민감하다. 이명박 정부는 건설족과 자산가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수출에 의존해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없는데도 양극화를 심화해 국내 시장도 커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자칫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국내 증시 반등은 환차익을 노린 투기적 해외자본이 들어온 탓이다. 기업의 수익성과 괴리된 주가의 거품은 터질 수밖에 없다. 외국 투기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주가 폭락과 환율 폭등의 악순환이 재현된다. 가계 부채로 쌓아올린 국내 부동산 투기는 더 큰 거품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인플레까지 덮치면 서민과 노동자는 파멸이다.

 

-국민소득 몇만 달러니 경제성장률 몇 %니 하는 ‘747’ 수치 놀음이 국민경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편의상 2천만 원이라고 하자. 4인 가족이면 8천만 원이다. 이 연간 8천만 원은 세금을 낸 뒤의 숫자다. 내가 지난해 서울대 교수 정년 퇴임할 때도 네트로 8천만 원이 안 됐다. 우리나라 가구 중 연간 8천만 원을 받는 비중이 몇 %나 되겠나.

 

-가구 기준은 아니지만 2007년 국세통계를 보면, 소득이 8천만 원을 넘는 노동자는 전체 납세 노동자의 2.2%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민계정이란 게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4인 가족에게 8천만 원을 줄 수 있다는 건데 독일의 기본소득제 개념으로 절반 정도를 현금으로 주면 어떻겠나. 얼마나 힘들면 맨홀 뚜껑을 훔쳐 팔아먹겠는가. 못살기 때문에 범죄나 자살이 느는 것인데 법과 질서 유지에 돈을 많이 쓰고 있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후퇴시켜 ‘촛불’을 진압하느라 시국 치안 비용이 늘고 있지 않은가. 빈곤을 없애는 데 돈을 쓰는 게 훨씬 낫다. 영국처럼 공공 장기 임대주택의 월세를 소득에 비례해 매기고, 실업을 당하면 공짜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친서민 행보의 진정성을 인정받는 길이다.

 

‘정운찬 총리’ 자기 길 간 것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정운찬 교수와 사이는 어땠나.

=정 교수는 경제학과 5년 후배다. 경제학 교수 선발 과정에서 정 교수는 다른 교수들을 설득하며 내가 임용되도록 도와줬다. (원로교수들의 친일 행적을 거론한 논문으로 인해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민수 서울대 미대 교수 사건 때는 내가 복직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시 정운찬 교수는 총장 후보에 나선 상황이었다. 그때 복직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총장이 되더니 생각이 많이 바뀌더라. 물론 총장 주변을 에워싼 보직 교수들이 보수적인 탓도 있었다. 그때 나는 김민수 교수가 총장실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것을 도왔다. 대법 판결까지 간 지난한 투쟁이었지만 일부 보직교수들의 반대에도 정 총장이 복직을 최종 수용해줄 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마르크스경제학 강의를 이어갈 후임 교수를 끝내 뽑지 못하고 퇴임했는데 그 문제는 정 총장이 도와주지 않았나.

=그때 정 총장은 대통령 출마 여부를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운찬 교수가 이명박 정부의 총리 지명을 수락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케인스주의자임을 자랑스러워한 정 교수는 평소 성장과 경제적 자유를 우선하는 ‘공급경제학’을 비판해왔고 감세를 ‘부자의 경제학’이라고 단정했다.

=케인스주의자들은 국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국가 물신주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총리로 들어갈 수 있다. 케인시언은 서민 정책을 정부가 시혜를 베푼다는 차원에서 생각한다. 못사는 사회 구성원의 정당한 권리라는 개념이 없다. 정 교수는 좌파가 아니다.

 

-정 교수는 ‘경제학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선을 그어왔는데 총리 내정 발표 직후엔 이명박 대통령과 경제 철학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김수행 교수는 어느 글에서 사상적 전향을 하는 뉴라이트는 분명한 근거를 대야 한다고 했다.

=정 교수가 총리가 된 뒤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아니요’라고 할지는 솔직히 확신을 못하겠다. 다만 케인스학파도 주류 경제학이므로 주류 사회의 총리가 되는 것이 이상할 게 없지 않나. 내가 청문회 받는 것 같다. (웃음) 이쯤 하자.

 

-안산 상록을 10월 재보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할 예정인 임종인 후보를 야권 단일 후보로 지지하는 선언에 참여했다. 그동안 시국선언은 많이 했지만 현실 제도 정치권에 대한 개입은 이례적으로 보이는데.

=전교조 안산지회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임종인씨가 가끔 들렀다.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선거가 중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줄여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처럼 입법으로 할 수 있는 게 많다. 집권 세력을 잘 뽑아 좋은 정책을 활용할 수 있으면 더 좋다. 정말 투표 좀 잘해보자.

 

-진보 진영의 선거 승리만큼 마르크스경제학이 대중성을 얻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재벌 연구소에 맞설 든든한 진보 경제연구소가 나왔으면 좋겠다.

=아픈 얘기다. 제자들과 함께 ‘김수행 콜로키움’을 만들어 성공회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발표 모임을 열고 있다. 연구단체를 운영하는 게 사실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현실경제를 분석하고 사회를 바꿔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경제이야기>란 책도 쓰셨는데 한국 사회의 대안은 뭐라고 보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 사민주의 모델인가. 계획적 자본주의, 참여계획경제 같은 용어도 많이 나오던데.

=특정한 모델은 없다. 모든 사람이 잘살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모델이 나올 것이다. 각 나라들의 모델은 그 사회의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다.

 

인터뷰가 3시간 30분이 넘어가도 김수행 교수는 끝장을 보자는 자세를 한 치도 흩트리지 않아 기자가 먼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는 웃으면서 이웃이 맥주 가게를 오픈했으니 같이 가자며 팔을 끌었다.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돌자 김 교수는 대학 때 신영복 선생이 불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고초부터 시작해 파노라마같은 인생 역정을 술술 이어갔다. 애석하게도 메모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다음날 확실히 기억에 남은 건 정통 마르크시스트의 두 아들이 세계적 투자은행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역설적 사실이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아버지의 주장을 뒤엎을 아들의 글을 본지에 기고받기로 약속받은 건 취중 성과다.

 

인터뷰·정리=한광덕 국내 편집장 kdhan@hani.co.kr